♣복음말씀의 향기♣ No4459
1월5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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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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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FWa8n2ZdI0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장우호 야고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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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시대 또 다른 나자렛 사람, 카파르나움 사람!>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예수님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의 서막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베들레헴 마구간 탄생과 유사합니다. 공생활의 출발을 알리는 화려한 이벤트도 공식적인 행사도 없습니다. 지극히 작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최초 활동 무대로 선택하신 장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유다 땅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소박하고 거친 어부들, 농부들이 이교인들과 어울려 살아 가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래아라는 말만 들어도 히브리인들은 마음이 껄그러워졌습니다. 낙후된 지역, 유다 전통과 본산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지역, 그래서 종종 반기를 들고 일어서던 골치아픈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묘하신 분, 우리 인간의 통상적인 사고방식이나 논리를 항상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거드름 피우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작고 허름한 지역,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선택하십니다. 나자렛의 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
카파르나움에 자리를 잡으신 예수님의 첫 선포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라는 단어를 화두로 묵상하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이며,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나자렛 사람들,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희년을 선포하시자, 사람들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말씀을 고깝게 여기며 귀를 막았고, 그분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의 베이스 캠프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카파르나움입니다. 얼마나 자주 예수님께서 들르셨고, 활동하셨고, 애지중지하셨던지 ‘예수의 고장’ ‘예수의 집이 있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생활과 밀접한 곳이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가 이곳 카파르나움에서 사도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한 복음 선포 활동, 치유과 구마 활동이 이루어지던 장소가 카파르나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선택된 도시 카파르나움 사람들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습니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 23-24)
위 말씀을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섬뜩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나자렛 사람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 나름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나 깨나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속에 살고, 거룩한 미사와 전례 안에 생활하고 있지만, 그저 타성과 습관에 따라, 아무런 감동과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연륜이 쌓여도 진정성 있는 회개나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 퍼센트 또 다른 나자렛 사람이요 카파르나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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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LS-tK2oF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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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사람이 물불을 안 가리고 움켜쥐는 것은?>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전례력은 다시 일상의 시간으로 흘러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본격적으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십니다. 그 첫 일성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가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씻고 깨끗해지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처참한 어둠을 직시하는 자리로 내려앉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음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그 절박한 상태,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제가 영적으로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지조차 희미하고, 제 영혼은 갈길 몰라 방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제 손에 잡힌 지푸라기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책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어떤 이들은 사적 계시라며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져 숨이 넘어가는 저에게 그런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빛에 이끌려 신학교라는, 세상이 보기엔 또 다른 어둠의 골짜기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진짜 빛'이신 주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책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본당의 풍경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성당에 오시지만, 정작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왜일까요? 그분들이 '물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육지에 서 있는 심판관'의 자세로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끊임없이 '우편배달부'를 평가합니다.
"저 신부님 강론은 너무 길어."
"저 수녀님은 인상이 왜 저래?"
"성경 공부는 지루해."
"이 책은 저자가 별로야."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우편배달부의 손때를 보지 않습니다. 배달부의 손톱에 때가 끼었든, 옷이 좀 남루하든, 인상이 험악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그가 전해주는 '편지', 그 안에 담긴 기쁜 소식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당원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성인군자가 아니었습니다. 술주정뱅이에,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였고, 뇌물을 일삼는 속물 사업가였습니다. 겉만 보면 영락없이 '더러운 우편 배달부'였습니다.
하지만 가스실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사생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쉰들러를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쉰들러의 인격이 아니라, 그가 작성한 '리스트(생명의 편지)'에 내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뿐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조자의 손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시베리아 유형소라는 지옥 같은 어둠 속에
던져졌을 때, 그곳은 살인자와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12월 당원(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그에게 쥐여준 것은 낡고 때 묻은『신약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책이 너무 더럽군. 종이 질이 나쁘군." 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더러운 책을 닳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고백합니다. "그 지옥 같은 감옥, 그 더러운 책 속에서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당에 와서도 말씀과 성체를 붙들지 못하고, 사제와 이웃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죄의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육지에 안전하게 서 있다고 착각하기에, 우편 배달부의 손때나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사람은, 타인을 판단할 겨를이 없습니다. 대신 오직 나를 살리는 '말씀'과 '성체'에만 시선을 고정합니다. 여기, 자신이 처한 어둠 속에서 오직 빛만을 바라본 한 사형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957년 프랑스, 자크 페슈(Jacques Fesch)라는 27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경찰관을 살해한 흉악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살인마'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 역시 감옥이라는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끝에서 지푸라기처럼 십자가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감옥을 수도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다가올수록 그는 공포에 떠는 대신, 주님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전율했습니다. 처형 5시간 전, 그는 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5시간 후면 나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 마지막 날, 나는 춤을 추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내 눈은 오직 십자가에!"
단두대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그는 사형 집행인의 손(우편 배달부)을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처지'를 뼛속 깊이 알았기에, 오직 자신을 구원할 '십자가(편지)'만을 뚫어지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교회는 지금 그를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 시복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물에 빠진 사람입니까, 아니면 뒷짐 지고 배달부의 손때를 지적하는 구경꾼입니까? 나의 처지를 아는 것, 나의 절박함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빛을 만나는 첫걸음입니다.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우선입니다. 멜 깁슨이 결국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영화에 예수님의 못을 박는 군사의 손으로만 등장한 것이 회개의 예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절대 말씀과 성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읽고 묵상하고 조배합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분이 바로 '거지 성인'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입니다. 그는 평생을 씻지 않고 넝마를 걸친 채 로마의 콜로세움 폐허에서 노숙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냄새나고 더러운, 영락없는 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때로는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하지만 라브르는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단 한 번도 판단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한 곳, 성당의 '감실'에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성당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행복해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인정도, 자신의 명예도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성체'라는 생명의 빵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가 로마의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로마의 아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외쳤습니다. "성자가 돌아가셨다! 거룩한 거지가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고 외치십니다. 회개란 표를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제의 강론이든, 우연히 집어 든 신심 서적이든,
혹은 밉상인 이웃의 한마디든, 그 '배달부의 손때' 너머에 있는 주님의 붉은 '편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해 봅시다. 그 지푸라기가 여러분을 빛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ㅠ그리고 성체가 생명이 될 때 생명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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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가 공기가 있어 숨을 쉬듯이, 우리가 물이 있어 마시듯이 공기와 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입니다. 다만 공기와 물이 가까이 있고, 충분하기에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공기처럼, 물처럼 우리와 친근한 것이 또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손만 대면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와 가까이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고속도로를 통해서 우리는 원하는 것을 검색하고, 이웃과 소통합니다. 이 인터넷이라는 고속도로 위에 마치 물처럼 우리의 갈증을 채워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입니다. 우리말로는 응용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제 컴퓨터와 스마트폰에도 삶에 도움이 되는 많은 ‘웹’이 있습니다. 항공권을 예약하는 항공사 웹이 있습니다. 은행 업무를 보는 은행 웹이 있습니다. 정보를 검색하는 구글 웹과 다음 웹도 있습니다. 교통수단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는 우버 웹도 있습니다.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은 공기와 물처럼 제 삶에 소중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공기와 물처럼 우리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처럼 우리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전해 줍니다.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나에게 되돌아올 사랑도 아닙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도망갔어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어도 ‘평화’를 빌어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3번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피와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실천’입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깃대가 없는 깃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이 없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배우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잘하였다. 율법을 지켰으니 잘하였다.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십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레위와 사제는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이 필요하면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실천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나가야 할 방향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026년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큰 빛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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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큰 빛이 떠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리시며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에 ‘회개’가 앞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모두 치유되려면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온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하늘 나라가 아직 멀리 있다고 착각하면, 이미 와 있는 하늘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바로 곁에 있는 하늘 나라를 모르고 지나치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많은 군중이 복음 선포 소식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늘 나라에 이르는 길은 빛을 따르는 길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리고 그 시작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마음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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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4,12-17.23-25: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물러가신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피신하신 것은 단순히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정해진 때에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은 아버지의 구원 계획 속에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는 제자들에게 유혹의 위험 앞에서 무턱대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을 때 피하라는 지혜를 가르치신 행동이기도 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주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유혹을 두려워하셔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 피하셨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당신이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보여주신 것이다.”(In Matthaeum Homiliae 14,2) 즉, 예수님은 인간이 유혹을 이겨내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스승이시다.
예수님께서 정착하신 곳은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곧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큰 빛을 본 백성”(이사 9,1-2)이 사는 땅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북 왕국의 멸망과 함께 가장 먼저 이방인에 넘어간 지역이자, 어둠과 수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가장 먼저 구원의 빛이 비추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큰 빛”을 이렇게 해석한다. “큰 빛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신다.”(Enarrationes in Psalmos 36,1) 빛이신 그리스도는 단순히 지식의 빛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는 구원의 빛이다.
예수님의 첫 설교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동일하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 이는 요한의 사명이 예수 안에서 이어지고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하늘 나라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늘 나라는 지금도 우리 안에 시작되었으니, 우리가 사랑할 때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세워진다.”(Homiliae in Evangelia 1,17)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서 현존하는 하느님의 통치이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모든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23절) 이는 그분의 공생활이 세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의 선포: 무지와 오류에서 해방; 치유의 표징: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영혼의 상처 치유; 하늘 나라의 선포: 하느님의 새로운 통치 시작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곧, 주님의 치유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구원의 사건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도 세 가지를 초대한다. 빛으로 나오기: 무지와 죄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고, 말씀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 회개하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 앞에 마음을 돌이키는 것; 주님을 따르기: 예수님을 따라 고통 속에서도 그분께 나아가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교회 헌장 9항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당신의 빛으로 모으시어, 세상의 희망이 되게 하셨다.” 우리 또한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세상 속에서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 말씀하신다. 빛이신 그분께 나아가 죄의 용서를 청하자. 그분 안에서 치유와 평화를 얻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자. 그리고 우리 삶이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 되게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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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걸음>
마태오 4,12-17.23-25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예수님과 군중)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한 걸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당신께서
저에게
오시는
한 걸음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가
당신께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이나마
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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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2-17)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4,23-25)
1) 이 이야기는,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서 오셨다.” 라는 선포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 근처 어딘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루카 17,21)
그래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회개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어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1-13)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란다면, 혼인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묵시록에는 겉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3-14)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묵시 22,14) 혼인 예복으로 갈아입는다는 말과 겉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옷’은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혼인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또는 겉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는 것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삶’, 또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게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바오로 사도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생활만 바꾸지 말고, 완전히 변화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회개’는, 또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은,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새 인간’이 되려면, 또는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을 잘 받으려면, 자기 안에 있는 ‘낡은 것’과 ‘어둠’을 잘 찾아내야 하고, 그것을 잘 버려야 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ㄴ)
이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빛’이라고 착각하면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또 너무 자주 ‘회개’를 말하면서, 형식적인 회개나 ‘거짓 회개’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어둠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것은 어둠이 아니다.”라고 우기면, ‘새 인간’이 될 수 없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 안에 있는 부끄러운 것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끄럽다고 덮어버리면, 참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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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관심>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이다.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 지방이다. 대부분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당해야 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다. 예수님께서 이 지역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이들이 몰려왔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이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허약한 이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다.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 학교와 병원, 복지시설은 이미 우리 마음에 설립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린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삶을 바꾸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시며, 우리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바라신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마음이 힘든 사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힘든 사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알아봐야 한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든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과 자비가 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란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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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 시대, 갈릴래아는 외롭고 슬픈 곳이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하여 무시당하였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업신여김을 감내해야 하였던 곳이지요. 이뿐인가요? 살다 살다 힘들면 동네 밖 도적 떼라도 되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이들이 넘쳐 났고, 급기야 로마의 권력에 저항하는 목숨 건 무장 항쟁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소리나 한번 지르고 죽자.’라는 심정과 태도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더불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갈릴래아 곧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에서 선포되고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곳은 모두 가난한 지역이었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자리는 성공한 이들이 넘쳐 나는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성공한 이들을 탓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지만,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세상의 성공에만 혈안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바라볼 때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모두가 축구 경기를 응원할 때도, 축구를 싫어하는 이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이웃 나라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극우주의자들과 선량한 국민들을 구별하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집단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 ……. ‘○○주의’라는 것들, 이것만이어야 한다는 사상들, 그것이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너무 다릅니다. 너무 달라서 틀렸다 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고 외면합니다. 올바로 식별하고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여유, 조금씩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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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족보에서부터 이방인 선조 어머니들의 피가 섞인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메시아인 예수님이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받았다고 전하면서, 이미 하늘 나라는 선민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특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마태 4,16)들에게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내비칩니다.
이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대피정을 마친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늘 나라 선포의 행업을 전해주면서, 첫 일성(一聲)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였다고 말합니다. 하늘 나라가 더 이상 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그 어려운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와 사랑의 삶을 통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복음 선포의 장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인의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당시 선민의식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물론 이미 신자가 되어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활동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전해 줍니다. 그분은
-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셨다고. (마태 4,23)
그분은 이 기쁜 소식을 당시의 랍비들처럼 그냥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시지 않고, 직접 찾아다니시면서 전하는데 주력하셨습니다. 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냉담자들이나 삶의 희망을 잃고 있는 이들이 기쁜 소식을 받아야 할 첫 번째 대상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물론 가는 곳곳마다 회당에서 기존의 유대인들을 위한 설교와 가르침도 계속합니다. 그릇된 선민의식을 바로 잡아주고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참 하느님의 자녀들로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福音(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를 구속하고 힘들게 만드는 슬픈 소식이 아닙니다. 율법을 잘 못지키고 보속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나라, 이 세상이 지옥과 연옥이고 저 세상이 천국이니 참고 살아야만 하는 그런 고통스런 나라가 아니라, '여기서 지금'(hic et nunc) 누구나가 회개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리고 체험하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과연 우리와 교회는 이런 기쁜 소식을 이웃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여전히 슬프고 고통스런 하늘 나라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 걸까요?
마지막으로 그분은 병자들과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십니다. 이들은 육신의 병고와 허약함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천형(天刑)을 받은 공적 죄인으로 여겨져 하늘 나라에는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병을 치유해 주고 죄사함의 은총까지 베풀어주시면서, 이들도 당당히 하느님의 자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가난과 질병, 소외의 고통에 시달리던 이들이 그분의 활발한 가르침과 치유를 통해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됩니다.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 그분께 데려왔다."(마태 4,24)는 말씀처럼 관계의 사슬을 통해 확장되고 연장됩니다. 예수님만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가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들과 이를 보고 들은 이들이 또 자기네 주변에 있는 고통받는 이들을 주님 앞에 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연장, 확장의 현장이 곧 '지금 여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서 이 세상에 공적으로 그분을 드러내는 이들, 곧 '공현을 실현하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된 우리를 위해,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과 거짓 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식별기준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1요한 4,2) 예수님이 육화된 하느님임을 믿지 않고 그걸 고백하지 않는 영은 거짓 영입니다.(1요한 4,3)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 신비는 이제 하느님은 뜬구름 속에 머무르시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영육간의 치유가 필요한 영혼들 가운데 머무르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강력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두 주간에 걸쳐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내셨음을 크게 기리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은 바로 벗님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벗님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3-24 참조)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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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태오. 4,17,23)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자신의 더 큰 행복만을 추구하거나, 이미 가진 자신의 권력이나 명예나 부를 나누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소식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려면 사람들의 ‘회개’가 필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가난하지만 ‘콩 한 개도 나누어 먹는 삶’입니다. 자신도 모자라지만 더 모자라는 사람과 나누는 삶으로 변화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나의 행복’을 넘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회개는 혈연이나 학연, 혹은 지연을 넘어서 우리가 전혀 모르고 무관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의 행복을 ‘나의 행복’에 포함시키는 삶입니다.
‘회개’는 단지 착하게 살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넘어 이웃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회개’는 우리보다 더 불행한 이웃과 세상에게 가해지는 불평등과 부정과 허위를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변화된 삶입니다. 불행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다방면으로 연대하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과 나자렛을 떠나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가셨습니다. 불행하고 배척받으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과 공감하며 연민으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셨습니다.
‘회개’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는 삶입니다. 모두가 싫어하고 배척하는 사람일지라도 따뜻하게 안아주며 희망을 심어주는 삶입니다.
'회개'하는 만큼 우리는 가난과 부정과 불의로 희생된 사람과 세상에게 희망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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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살인적인 공부량에 짓눌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뒤에는 학원으로, 그리고 집에 와서도 공부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곤 합니다. 많은 학생이 책만 펼쳐놓은 상태로 딴짓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요즘 고등학생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 때를 떠올려 봅니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과 다를 것 같지만 그때도 밤 10시 넘어서까지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모두가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이나 3~40년 전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의 자기 삶과 미래의 자기 삶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그냥 살면 별 차이가 없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미래의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느님 뜻과 정반대로 살아간다면 미래에는 어떨까요? 저절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으로 거처를 옮기시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복음은 강조합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갈릴래아 북부 지역인 즈불론 땅과 납탈리 땅은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 의해 점령당하고 파괴된 곳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불행을 맛본 땅이고, 이방인들이 섞여 살아 정통 유다인들에게 멸시받던 변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 아닌, 가장 소외되고 어두운 곳에서부터 빛을 비추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빛은 어둠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 희망은 과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또 삶의 영역 안에서 ‘즈불룬과 납탈리’처럼 황폐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순간에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가장 먼저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선포를 따라야 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도덕적 반성을 넘어, 삶의 방향을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희망의 주님과 함께하면서 우리의 미래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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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입니다. 오늘도 어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빛의 공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받으며, 빛 속에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빛을 증언하러 왔던 요한은 물러가고,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장 6절-9절)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오 4장 16절)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비추어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먼저 이방인의 압박, 곧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먼저 선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걸어야 하는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 4장 1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슈브,שב)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에 살던 집’이란 우리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이전에 행하던 행위나 지식까지도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행위와 앎으로부터 벗어나 새집으로 돌아와 하늘의 양식을 먹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옛사람의 행위와 지식(옛집)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콜로새서 3장 9절-10절)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상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양식인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죄악을 버리는 것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만든 하느님의 처소(집)임과 동시에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새 예루살렘’(요한 묵시록 21장 2절)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호세아 예언서 14장 2절-3절)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유배에서 당신 백성을 돌이키실 때도 율법학자 겸 제사장인 에즈라를 보내시어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게 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요한 14장 23절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시면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건설되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일, 곧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거처가 되는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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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둠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 저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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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
어제 공현 대축일에 아기로서 당신을 공현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어른이 되시어 당신을 공현하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고,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예언의 실현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복음을 보면 두 부류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오늘 주님께서 치유해주신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도 어둠 속에 있는 것 맞습니다. 병과 가난에 짓눌려 암울하게 살아가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둠은 주님께서 거기서 꺼내주시고자 하신 어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정작 거기서 꺼내주시고자 하는 어둠은 죄의 어둠입니다.
죄로부터 회개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영접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일성으로 이런 선언을 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지점에서 죄가 뭔지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 말입니다.
공현 시기의 죄는 주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빛을 비춰주시는데도 요한복음 1장의 말씀대로 그 빛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맞아들이지도 않는 것으로서의 어둠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짱짱히 비춰주시는데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한 사람의 어둠입니다.
그러니까 빛을 받아들이면 선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죄이고 그러다가 받아들이면 회개한 거고요.
이제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를 오늘 독서와 연결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주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죄이고 그러다가 머물게 되면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 안에 머물게 되기에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이고 그러다가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회개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 하느님께 머무는 사랑,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요 회개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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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마태4,12-17.23-25)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예수님과 군중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과 그 내용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공생활은 '예수님의 신성(하느님)이 드러나는 예수님의 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와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렇게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선물(결과)'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이며,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나라'(루카 4,18 참조)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우리는 종종 종속되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인생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것에 종속된, 돈과 권력과 명예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이제와 영원한 부활(생명.평화.기쁨.하느님의 나라)을 믿고 희망하면서 이를 이루겠다고 약속한 이들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처럼 살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노력 안에서 찾아오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 것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갇혀 있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회개'는 이것으로부터의 '탈피'입니다. '세상 것에 종속된 삶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 그래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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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1.05.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만큼
이미 우리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는
예수님의
첫 선포이자
그분 삶 전체를
꿰뚫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늘 나라 역시
믿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생활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우리의 길입니다.
하늘 나라의 방식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응답할 때,
하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열립니다.
지금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용서, 화해, 나눔은
이상이 아니라
가능한 현실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는
과거에 묶이지 않습니다.
회개는 처벌이 아니라
새 출발의 특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 현존하시며,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방식 그 자체가
가까이 온
하늘 나라의
본질입니다.
사랑이 회복되는
곳에서
하늘 나라는
이미 존재합니다.
하늘 나라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하늘 나라는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 자체가
이미 하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삶 가까이
오셔서 사랑으로
머무시는
하늘 나라의
현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미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관계이며
현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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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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