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안 이종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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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중스님 ⓒ 데일리안 |
박삼중 스님를 모르는 사람 별로 없다. 사형수들의 아버지라는 불리워질만큼 전국의 구치소와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교화에 힘써 왔으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언도를 받거나 사형언도 후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재소자들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억울한 누명을 벗어 주고 사형만을 면하게 감형을 해달라고 법무부 등에 진정을 하기도 한다.
박삼중 스님은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부산 자비사 주지로 전국교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고, 일본에서 정유재란때 목숨을 잃은 수많은 전사자들의 귀무덤인 이총(耳塚)을 모셔온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신 이등박문 저격의 영웅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모셔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삼중 스님은 10·26과 인연이 깊은 두 영웅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풀어놓았다. 첫 얘기는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의 옥중최후와 관련한 얘기고, 또 한분은 박치기 한방으로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대한민국의 프로레슬러의 아버지인 국민영웅 김일 선수가 2006년 10월 26일 사망 직전 남긴 마지막 소원에 관한 이야기다.
민족영웅 안중근과 국민영웅 김일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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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사 순국지인 여순감옥을 찾은 삼중스님 ⓒ 데일리안 |
지난 88년 일본 교회사(敎悔師)모임에 참석차 도일한 삼중 스님은 우연하게 대림사(大林寺)라는 절을 방문했는데, 조그마한 절 대웅전 앞에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란 안중근 의사의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삼중 스님은 안 의사의 비석이 그곳에 세우게 된 연유를 묻기 위해 그 절의 주지스님과 만났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역사적인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는 여순감옥에 갇혀 있을 때 현지 일본군들이 일본의 영웅을 살해한 암살자 운운하며 안의사를 살해하려고 하자 안의사는 “나를 비겁한 암살자로 몰지말라. 나는 동양평화를 교란시킨 침략의 수괴를 교전 중에 사살한 것뿐이다. 너희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내가 지켜줬다”며 당당하게 그들에 맞서 항거했다.
이런 안 의사의 당당한 자세에 감복한 옥중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는 안 의사가 수형자로서 의연한 수감생활과 남다른 인격, 조국을 향한 애국충정에 감동해 몇 개월 동안 안 의사와 뜨거운 우정을 나눴다.
사형집행일이 1910년 3월 26일로 결정되고 난 후 지바 도시치는 안의사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너무나도 슬퍼하며 벽에 머리를 들이박아 이마에 많은 피를 흘렸다. 안 의사는 그의 이마를 닦아주면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글을 써 주었다.
사형 집행 이틀 전 가족면회때 안 의사는 “어머니가 지어주신 조선 한복을 입고 마지막 길을 가고 싶다”고 했지만 전날까지 한복이 도착되는 것이 불가능하자 지바는 딸에게 은밀하게 한복을 만들어 오라고 해 안의사에게 건네주며, "어머니가 만들어 보내주신 한복"이라며 안의사를 안심시키고는 그 옷을 입혔다.
안중근...어머니가 지은 조선한복 입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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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의사를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가진 삼중스님 ⓒ 데일리안 |
지바는 사형이 집행된 지 얼마 후 안 의사의 영정을 가지고 영구 귀국해 대림사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일 예의를 갖춰 추모했다. 20년동안 계속하고 난후 그가 죽자 그의 부인이 20여년간 남편의 뜻에 따라 안의사를 추모했고, 양녀로 들인 조카딸 미우라도 안 의사를 계속 추모했다.
역시 안 의사 사형 집행 당시 참여한 포교승 쓰다 가이준 스님은 56여점의 안의사 유품을 가지고 귀국후 보관해 온 것을 그 조카가 안 의사의 유품임을 확인하고, 광복50주년을 기념해 한국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결국 이 유품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유품 속에는 당시 가이준 스님이 쓴 귀중한 사형과정을 수록한 일기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일기에 안의사의 유해가 안치된 곳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을까? 삼중스님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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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김일선수와 삼중스님 ⓒ 데일리안 |
삼중스님은 일본방문중에 한 재미교포로부터 국민영웅이었던 김일선수가 일본의 한 병원에서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 60∼70년대 프로레슬링 세계를 제패한 김일선수, 시원한 박치기 한방으로 일본선수를 링 위에서 쓰러뜨릴 때마다 흑백 TV 앞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와∼‘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를 치며 열광케했던 그였다
프로레슬링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김일 선수였지만 말년은 사업 실패와 투병으로 얼룩졌다. 80년대 중반 손을 댔던 활어수출사업 등이 실패하면서 큰 병을 얻었고, 박치기 후유증과 노환, 고혈압, 경추변형, 만성두통, 당뇨병 등에 시달리며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일본 참의원을 지낸 안토니오 이노키 세계종합격투기연맹 명예총재 후원 아래 후쿠오카 나카무라병원에서 93년 5월부터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이노키가 정치적으로 어려워지자 다른 몇몇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김일...고향땅에 진도개 동상 세워 주세요
"어릴 때 큰 희망이었던 그가 말년에 일본에서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비행기표를 구해주자는 생각이 들어 후쿠오카병원으로 찾아갔다."
삼중 스님이 만난 김일 선수는 과거의 국민을 열광시킨 영웅 김일 선수가 아니었다. 체중은 많이 줄었고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더 가슴 아픈 사실은 일본 사람들의 체구에 맞는 작은 병상 침대가 그에게는 맞지 않아 몸을 제대로 뉘일 수도 없었다. 또 옛날부터 고기를 거의 매일 30인분 이상 섭취해 온 그인지라 배가 늘 고프다고 했다. 그렇지만 표정이 너무 밝고 웃는 모습은 너무나 천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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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개종상을 세워준 삼중스님 ⓒ 데일리안 |
"김일 선수와 얘기를 나누던 중 한국행 비행기표만 건네주고 오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국민의 영웅이었던 사람의 화려한 모습은 간데없고 지금 그의 처지가 너무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삼중 스님은 김일 선수에게 뭔가 도움이 될 일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계획에 없던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한다.
“선생님,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가능하다면 제가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운을 떼자, 김일 선수는"스님, 좁은 병상 천장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를 제패하며 화려했던 지난 일들이 떠오르면서 내 조국이 아닌 일본 땅에서 떠나려니 슬프기만 합니다. 더 슬픈 것은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걸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하고 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면서 가슴 속에 묻어둔 얘기를 꺼냈다.
‘스님, 고향땅에 진도개 동상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전라남도 고흥이 고향인 김일선수는 초등학교때 진도개 한 마리를 키우는 동안 정이 들어 가족처럼 함께 지냈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군이 방한복을 만들기 위해 국내 진도개를 대량으로 공출해간 일이 벌어졌다. 김일선수가 키우던 그 진도개도 끌려갔다.
개를 강제로 빼앗긴 그는 너무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잡혀간 지 3일 만에 진도개가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반가움도 잠시, 또다시 일본군에 추적해와 그 진도개가 또다시 일본군에 끌려가자 진도개는 눈물을 흘렸다.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고 배신하지만 개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세월이 수없이 흐른 지금도 눈물 흘리며 끌려간 그 진도개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며 그 진도개를 추모하는 동상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김일 선수의 소원대로 전남 고흥에 진도개 동상을 만들어 주었다.
김일 선수는 삼중 스님의 주선으로 귀국해 서울 을지병원장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장기간 요양하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김일 선수가 임종을 불과 이틀을 앞두고 삼중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행사에 참석케 되었다.
김일 선수가 그날은 평소와는 달리 비빔밥 한그릇을 거뜬하게 해치우곤 삼중 스님에게 “스님, 그날 비빔밥 한그릇 잘 먹었습니다”하고 굳이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삼중 스님과 김일 선수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2006년 10월 26일 김일선수가 세상을 떠난 후 김일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을 때 삼중 스님은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 저기 국민영웅 김일선수가 휠체어를 타고 당당하게 입장하고 계십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그의 영혼이 돌아온다는 49재날이었다.
/ 이종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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