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이 늘 그렇듯 굼벵이맹키로 시간이 더디게만 흘러가니 출출한 차에 주방에 내려가니 아까까지도 없었던 고등어, 무, 숙주나물 등속이 스텐 양재기에 담겨져 있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주인님은 다음 날 아침 반찬거리를 미리 전날 저녁에 항상 준비해 둔다고 한 말이 생각나는구만. 수십 년간 주인님이 식사 때면 어김없이 내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왔던 기억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아내가 없으면 누가 끼니를 거르지 않게 밥상을 차려 줄까 생각하면 눈시울이 더워진다.
조선시대 후반 사대부 집안 출신의 심노숭(沈魯崇)의 가정사와 벼슬살이 등에 대해선『조선 사람들, 자기 삶을 고백하다』(정우봉, 세창출판사, 2021.)란 책에 비교적 많이 나와 있는데, 장의 제목부터가 '미치광이 같았다: 심노숭'이라 하여 그의 행적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으니...하지만 당시 글줄이나 쓴다는 선비들이 가식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중시한 반면, 심노숭의 글은 술직하고 거침이 없는 데다, 본성이 여색(女色)을 밝히길 좋아한다는 등 자신의 내면의 단점까지도 스스럼없이 까발겨 버리는 풍운아였다고나 할까.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비판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정없이 하는 그의 성격은 제주도에 있는 '김만덕기념관'의 자료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기녀(妓女) 출신의 갑부인 김만덕이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기아(饑餓)에 허덕이자 엄청난 재산을 풀어 이들을 구제해줘서리 왕이 이를 기특히 여겨 많은 유학자들에게 김만덕을 칭송하는 글을 쓰라고 명했다네. 해서리 남인(南人)의 영수(領袖) 채제공을 비롯한 내로라 하는 문인, 정치인들이 김만덕을 찬양하는 글을 경쟁하듯 썼는데, 유독 심노숭만은 그녀를 천하의 몹쓸 인간으로 깎아내리는 글을 썼다는 거다.
해서리 그의 삶은 진사과 차석(차席)에 오를 정도의 능력이 있었지만 벼슬은 한직에 머물렀던 데다, 본인의 거침없는 성격과 당파간 갈등으로 몇 번이나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더만. 덕분에 심노숭은 부산의 기장에 유배되었을 때 쓴『남천일록(南遷日錄)』(1801~1806)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적은 일기 형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대체로 나같은 범인들이야 할 짓 없으면 여색(女色)이나 탐하고 노름에나 빠지지만, 정약용이나 심노숭의 경우를 보면 귀양살이 덕분에 엄청난 저술활동을 한 훌륭한 사람들이었다는 거다. 사실 위인(偉人)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지, 쩝!
성격이 모가 나면 정을 맞는다고 하듯 순탄치 못한 심노숭의 삶에 결정적인 아픔을 준 건 사랑했던 부인 이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라 봐야 할 듯한데...가난한 살림에 아랑곳없이 거칠 것 없는 한량으로 살아가는 남편을 대신하여 네 명의 자식(그 중 세 명은 일찍 죽고 맏딸 하나만 달랑 남았다네. 물론 그 딸도 결혼하고 곧 죽고 말았으니...) 을 낳아 기르며 힘겹게 살아가는 아내가 어느날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리니, 남은 자에게 주어진 건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는 슬픔 뿐이라...
『눈물이란 무엇인가』(심노숭, 김영진 역, 태학사, 2006.)란 책에 실려 있는 심노숭의 시 '동원(東園)'을 감상해 보자.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있음에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歸來君病艾亦老(귀래군병애역노)
돌아와 보니 그대는 병들었고 쑥 또한 시들어
泣道行期何遲留(읍도행기하지류)
그대 울면서 말하길 '유람이 왜 이리 길어졌나요"
時物如流不待人(시물여류부대인)
계절 움식은 흐르는 물과 같아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니
人生其間如蜉蝣(인생기간여부유)
우리네 인생은 그 사이에 하루살이 같아요
我死明年艾復生(아사명년애부생)
제가 죽고 난 이듬해에도 쑥은 다시 나올 테니
見艾子能念我不(견애자능염아부)
그 쑥 보면서 제 생각 나실까요?
今日偶從弟婦食(금일우종제부식)
오늘 우연히 제수씨가 차려준 음식 먹다가
盤中柔芽忽梗喉(반중유아홀경후)
상 위의 여린 쑥에 갑자기 목이 메네
當時爲我採艾人(당시위아채애인)
그때 나를 위해 쑥 캐던 사람
面上艾生土一坏(면상애생토일배)
흙 덮힌 무덤위에도 쑥이 돋았겠지.
유튜브 '문역뜰'에서 심노숭과 아내의 각별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제목으로 '...미치도록 그리워한~'이라고 할 걸 보면, 위에서 정우봉의 책에서 '미치광이같았다'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고나 할까. 하튼 보통과 다르면 통칭하여 비정상이라 하고, 많이 다르면 미쳤다고 보는 모양이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