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손씨 할매 친정마을
가. 일직손씨 시복(諟復) 묘비문
성균진사(成均進士)휘 이당(怡堂) 일직손공(一直孫公) 휘 시복(諟復) 묘비문(墓碑文)
밀양다원 후록 소재
공의 휘는 시복(諟復) 성균 진사, 호는 이당(怡堂)이시다. 우리 손씨의 본성은 순(荀)씨였으나 비조 휘 응(凝) 벼슬이 상장군 이분에서 몇 대를 내려와 휘 간(幹) 에 이르러 고려 현종의 휘와 음이 같다하여 손(孫)씨로 바꾸어 사성하여 이후로 안동 일직으로 본관을 삼았다.
이분에서 몇 대를 내려와서 휘 세경(世卿) 벼슬이 상의직장동정이요. 이분의 증손에 이르러 휘 홍양(洪亮) 벼슬이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직성균 시호는 정평(靖平) 안동 타양서원과 밀양 혜산서원에서 선생의 고풍 학덕을 기리는 향사를 받들고 있다. 이분의 장남 득수(得壽) 벼슬이 좌대이요. 이분의 장남 휘 영유(永裕) 벼슬이 한성판윤이요. 이분의 장남 휘 관(寬)벼슬이 부사요. 이분이 안동에서 밀양으로 처음으로 옮겨 사셨다.
이분의 장남 휘 조서(肇瑞)호 격재(格齋) 세종조에 문과에 오르시어 집현전 한림학사와 지봉산군사를 역임하시고 김 점필재와 박 취금헌 등과 도의로 사귀고, 김 한훤당, 정 일 두 양 대현이 스승으로 모셨다. 밀양 혜산서원과 대구 청호서원에서 선생의 고풍 학덕을 기리어 향사를 받들고 있으니 공의 육대조가 되신다.
오대조의 휘는 윤하(胤河) 벼슬이 무공랑 광흥창 주부요 고조의 휘 순무(荀茂) 벼슬이 광흥창 주부 요증조의 휘 세기(世紀) 성균 생원이요. 조의 휘 상윤(祥雲) 성균 생원이요 고 의 휘 호(顥) 성균 진사 호는 영모재(永慕齋)효성과 우애가 출중하셨고 학덕이 높아 윤해유선을 찬하시어 유림의 보배로 여겼고 용성 마을에서 처음으로 다원 마을 로 옮겨 사셨다. 공의 어머님은 여주 이씨 교위 휘 원회(元晦)의 따님이시고 한림 휘 태(胎) 손녀시다.
선조 경오 二월 十三일에 다원마을 집에서 탄생하시니 어릴 때부터 기우가 헌활하시고 재가 민수하시니 진사공께서 매우 사랑하셨고 종족이 모두 의지하리라 희망했다. 十二세에 아버님 상을 당하시어 두 형님과 함께 초종 집례를 성인과 같이 행하셨고 어머님 섬기는 것을 극탄성경하셨고 두 형님 섬기기를 엄부와 같이 섬기셨고 임진왜란을 당하여는 두 형님을 따라서 병환 중에 계시는 어머님을 업고 피난 생활에 백가지 어려움을 다 겪으셨고 두 형님 받들어 모시는 것을 일체공사를 극근간고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어기는 일이 없었다. 비록 교교지행(皎較之行)과 혁혁지사(赫赫之事)와 가모미덕지사(嘉漠美德之事)가 소상히 전함은 없으나 두 형님에 견주어 생각해 보아도 가히 알 것이다.
인조 병인년 10월 20일에 돌아가시니 수는 57세요 다원 마을 후록 계좌에 산소를 드렸고 배우는 이인 벽진 이씨는 가선(욱) 따님이시니 공께서 돌아가신 후 18년 후에 돌아가시어 묘는 합장으로 모셨다.
자녀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진원(振元) 증 통정대부요. 차자 맹생(孟生) 무후하다. 장녀는 학성이씨 겸익(謙益)에 출가하고 차여는 초계전씨 렴(廉)에 출가했다.
진원(振元)의 장남 취겸(就謙)은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장남은 필신(必信) 차남은 필화(必華)다. 필신(必信)은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장남은 이대(爾大) 차남은 경대(景大)다. 필화(必華)는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니 장남은 유대(維大) 차남은 섭대(攝大) 三남은 흥대(興大)다. 현손 이하는 번성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호라 공께서 돌아가신 지가 364년이나 되었으나 묘의를 갖추지를 못하다가 이제야 그 십대손 세헌 정헌 형제와 그 사손 관헌 및 여러 종방 간에 의논하여 수백년간 미황지사인 묘비를 세우고자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니 무문으로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그 뜻에 감동하여 세대가 침원하고 화재로 증거할 문헌이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우리 가문에 전해오는 문으로 공의 순행 의덕 지사를 삼가 기록할 뿐이다.
단기 4323(서기1990)년 2월 일
종 十二대손 특수 삼가 짓고
+대손 정헌 삼가 글을 쓰다
나. 시복 비석건립 고유문
成均 進士 號 怡堂 一直孫氏 諱(諟復) 竪碑 告由由文
維 歲次 壬申 三月 己酉 朔 初 三日 辛亥 十代孫 觀憲
敢昭告于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顯 十代祖考 成均進士 俯君之墓
현 열대조 성균 진사 부군의 묘 앞에서
恭惟府君 早得文名 薦以國子 一世被榮
공유부군 조득문명 천이국자 일세피영
공손히 생각하니 할아버님께서는 일찍이 문명을 얻어시어 국자진사에 천거되어 한 세상 영화를 입으셨네.
八年兵亂 天佑弟兄 奉母至誠 感天孝成
팔년병란 천우제형 봉모지성 감천효성
八년 병란에 하늘이 형제를 도우심은 어머님을 지성으로 받들어 모시니 하늘이 감동하는 효성을 이루셨네.
嗚呼公歿 四百餘年 儀物多闕 財力未延
오호공몰 사백여년 의물다궐 재력미연
아! 할아버님 돌아신 지가 사백년이 넘었으나 의물을 갖추지 못한 것은 재력이 치지 못함입니다.
瞻彼惠山 衣履遺傳 今具石物 有碣有誌
천피혜산 의리유전 금구석물 유갈유지
저 혜산을 쳐다보니 의관과 신발을 갈무리하여 보전하고 이제는 석물을 갖추어 묘지와 묘비를 세웠나이다
敬慕同誠 用衛神道 溪山增彩 草木含喜
경모동성 용위신도 계산증채 초목함희
한결같은 정성으로 신도를 용위하니 산천도 더욱더 빛이 나고 초목도 기쁨을 머금은 듯 하옵니다.
伏願尊靈 勿驚勿震 謹以酒果 恭伸度告
복원존령 물경물진 근이주과 공신건모
엎드려 바라건대 존령께옵서는 놀라거나 진동하지 마시고 삼가 술과 과일로써 공손히 공유를 드리옵니다.
從十三代孫 泰奎 謹撰
종십삼대손 태규 근찬
다. 무원록발(無冤錄跋)
夫刑者輔治之具豈聖人之得已哉苟或檢之間 頃刻不謹毫釐有差則濫及無辜而死者不復生斷 者不復續民之寃抑可勝哉安能辟以止辟以致 中和於天地乎恭惟主上殿下深念于玆惟王氏 無冤錄屍形檢格暸然明白誠法官之規矩 命 儒臣吏曹參議崔致雲等詳加音釋以觧艱深又 命江原道監司兪孝通鋟梓原州以廣頒布其軫念 蒼生如保赤子之慮何其至矣然刊板邈在遐方肆 以嶺南諸郡未易得見使檢官而不得領其要訟民 而不得蒙其澤是可恨已今府尹鄭相國發通判朴 君延世俱悶斯弊募工鳩材刊諸本府不用功訖無 官不依其例無人不承其惠吁上副 聖心下惠民 生豈曰小補哉正統十二年丁卯月哉生明敎授 官承訓郞城孫肇瑞敬跋
무원록발
대저, 형벌은 다스리는 사람의 도구이니, 어찌 성인이 가질 것이요
그러나 혹 법이 경각간에 조심하지 아니하여, 작은 분량의 차로 넘치면,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처단한 자는 다시 부속할 수 없으니, 백성들의 원망을 가히 어떻게 억제하며, 어찌 능히 법을 그치며, 법을 이루어 중화를 기도하리이까.
공정히 생각하건데, 전하께서는 왕씨(王氏)의 무언록을 깊이 염려하셔서 시형(屍刑)의 형벌의 검증이 명백함은 진실로 법관이 가져야 할 규거(規矩)이므로 이에 유신(儒臣) 이조참의 최치원(崔致雲) 등에게 명하여 “상세하게 주해하여 백성들의 깊은 한탄을 풀라.” 또 강원도감사 유효통(兪孝通)에게 명하여 원주에서 간행하여 반포하시니, 창생을 생각하심이 적자(赤子)을 보존하심과 같은 덕이 어찌 이다지도 지극하십니까.
그러나 간판(刊板)이 먼 지방에 있으므로 영남에 있는 군현(郡縣)은 얻어 보기가 어려워 검관(檢官)이 요령을 얻지 못하여 한이 되어 오던바, 이제 부윤 정상국(鄭相國)이 통판 박연세(朴延世)와 함께, 이 폐단을 민망하게 여기어, 사람을 모집하고 재목을 모아 본군에서 판을 간행하여 한달이 채 못되어 일을 마치니, 관이 그 예를 의거하지 아니함이 없고, 백성이 그 혜택을 입지 아니함이 없었읍니다. 오! 위로는 임금님의 성심을 맞추고, 아래로는 민생에 은혜를 내려 주시니 어찌 도움이 되지 않으리이까.
정통 12년정묘(세종 29. 1447)
갈월재생명 교수관승 훈랑직성 손조서 근발
라. 손씨 할매 친정 마을 위치
경남 밀양시 산외면 다원1리길 17-18
(지번) 산외면 다죽리 607
마. 일직손씨 할매 친정 아버지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