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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기계화 역사와 문제점
개요
옛날에는 붓이나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쓰고 읽었고 우체국을 통한 종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요즘 정보통신 시대엔 타자기나 셈틀(컴퓨터)이란 기계로 글을 쓰고 전자우편으로 소식과 지식과 정보를 주고받는다. 또한 옛날에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자라고 했는데 요즘엔 기계로 글을 쓰고 주고받지 못하는 사람을 기계문맹(컴맹)이라고 말한다.
붓이나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쓸 때엔 사람에 따라서 글씨 모양이 다르고 예쁘게 쓰는 이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또한 느렸다. 그러나 오늘날 기계로 글을 쓰는 시대가 되니 글꼴을 선택하는 데 따라서 누구나 글씨 모양이 같으며 글을 쓰는 속도가 빠르다. 또한 한글 사용 범위와 환경도 바뀌었다. 이렇게 손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방식이 아닌 기계를 이용해서 한글을 쓰고 전송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 가는 길을 한글 기계화라고 했다.
한글기계화는 먼저 타자기 시대가 있고 이어서 셈틀 누리통신( 컴퓨터 인터넷)시대로 이어진다. 타자기로 한글을 쓰는 시대는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셈틀 누리통신 시대는 1990년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한글기계화 역사는 100년 정도 되었다. 내가 한글기계화 개척자요 선구자인 공병우 박사님을 모시고 한글기계화운동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한글기계화 개척기인 타자기시대에서 셈틀시대로 가는 변화 과정을 살펴본다.
1. 한글 타자기 발전사
가장 처음 나온 한글타자기는 1913년에 이원익씨가 만든 타자기다. 이 타자기는 5벌식으로 가로 찍어 세로로 읽는 것이었다. 두 번째 한글타자기는 1933년에 송기주씨가 만든 타자기인데 네벌식으로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었다. 재미교포인 이 두 분이 영문 타자기를 보고 만든 타자기는 글자는 예쁘지만 영문타자기보다 속도가 두 배나 느리고 덩치도 크고 가격이 비싸서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1945년에 김준성씨가 영문처럼 두벌식으로 풀어쓰기 타자기를 만들었으나 한글은 초, 중, 종성 모아쓰기로 음절을 만드는 글이라 마찬가지 쓰이지 않았다.
1934년 재미교포 송기주씨가 한글타자기를 ‘완성’하여 귀국한다는 보도를 한 동아일보.
그리고 1949년에 속도도 영문 타자기보다 빠르고 쓰기 편리한 세벌식 타자기가 안과 의사인 공병우님이 만들어 타자기 대중화 시대가 열린다. 이 타자기가 일반인들도 널리 쓰이게 되니 사람들은 공병우가 최초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안과 의사인 공병우가 이 실용 한글타자기를 만든 것은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일본인들이 물러가니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도 의학 강의를 한국인들이 맡게 되면서 안과의사인 공병우도 안과 교육을 맡았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한글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는 한글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해서 한글을 잘 몰랐다. 그래서 그는 한글학회 회원인 권승욱님을 집으로 초대해 개인 교사로 모시고 한글을 배운다. 그런데 일본어로 자신이 쓴 ‘소안과학’이란 책을 우리 말글로 번역해서 교재로 쓰려고 하니 문제가 생겼다. 그 책을 번역해 두 사람의 조수에게 손으로 예쁘게 다시 쓰게 해보니 너무 느렸다.
그 때 공병우님은 영문 타자기를 쓴 기억이 떠올라 한글도 영문처럼 타자기로 쓰면 빠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원익, 송기주씨가 만든 타자기를 구해서 써봤다. 그러나 그 타자기는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는 것이고 속도도 영문 타자기보다 두 배 느려서 쓸모가 적다고 보아 스스로 타자기를 만들 생각을 한다. 그리고 영문 타자기를 사다가 분해해 조립하고 네벌식으로 만들어 써보고 문제가 있으면 다시 두벌식으로도 만들었다. 그러나 마찬가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공병우가 한글타자기를 만들고 있다고 하니 미국 군정청에서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주어서 힘이 났다고 한다.
그렇게 연구 끝에 한글 창제 원리에 따라 초성, 중성, 종성을 조합하는 세벌식 자판으로 견본을 만들어보니 이 타자기는 속도도 영문타자기보다 빠르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 일반인들도 쓰기 편리했다. 그 때 미국 군정에 견본제품을 보여주니 놀라면서 칭찬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니 그들은 물러갔다. 그래서 미국에 가 있는 친지를 통해 미국 언더우드 타자기회사에 시제품을 의뢰하고 특허도 냈다. 그 때 언더우드 회사는 1949년에 새 타자기 견본품 세 개를 만들어 발명가 공병우, 미국주재 한국 대사관, 연세대 언어우드 재단에 하나씩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대량 생산해 6.25 전쟁 때 미국 영문 타자기와 함께 공병우 한글타자기가 쓰였다. 그리고 정전협정문 작성 때에도 이 타자기가 쓰인 것이다. 1953년 정전협정 때에 협정문을 영문과 한국문, 중국문으로 작성하는데 한국문도 영문처럼 공병우식 세벌식 타자기로 협정문을 작성함으로써 미군과 중국군이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한글타자기가 호평을 받으면서 전쟁 후에는 한국 정부기관에서 널리 쓰이고 기업과 일반인들도 많이 한글타자기를 이용하게 된다. 이렇게 널리 쓰이니 타자학원도 생기고 타자기 생산이 돈벌이도 되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타자기 회사와 자판이 늘어난다.
그런데 공병우식 세벌식 타자기로 쓴 글 모습이 인쇄체처럼 예쁘지 않다는 불평이 있으니 1959년에 글씨가 예쁜 김동훈의 5벌식 타자기도 나왔지만 속도가 느려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1969년에 속도가 빠른 공병우식 세벌식 자판과 글씨가 예쁘다는 김동훈식 5벌식 자판에서 장점을 따서 4벌식을 만들어 국가 표준 자판으로 정했지만 더 문제가 많아 비판이 드세게 일어난다. 그러니 1980년에 최동식의 2벌식 타자기도 나온다.
그리고 1982년 컴퓨터 자판을 영문 타자기처럼 2벌식으로 표준을 정하면서 1983년에 4벌식 타자기 자판을 표준에서 폐지하고 1985년에 타자기도 2벌식으로 표준을 정하게 된다. 그러나 2벌식은 한글창제원리와 맞지 않고 문제가 많아 3벌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반발하고 2벌식 반대운동을 지금까지 하게 된다.
1953년 정전협정 때 타자기로 작성된 한국문 정정협정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글타자기는 아래와 같은 발명 역사를 거치면서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중심으로 1980년대 셈틀시대가 열리기까지 공문서와 회사 문서에 널리 쓰인다. 그리고 정부가 1969년에 표준 자판을 네벌식으로 정하면서 세벌식 자판과 마찰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1913년 이원익 5벌식 한글타자기 발명
1933년 송기주 네벌식 한글타자기 발명
1945년 김준성 두벌식 풀어쓰기 타자기 발명
1949년 공병우 세벌식 속도타자기 발명
1959년 김동훈 5벌식 타자기 발명
1980년 최동식 2벌식 한글타자기 발명
왼쪽은 1979년 대통령 공고문, 오른쪽은 1967년 무주군 공문: 타자기로 쓴 공문들
2. 타자기 표준 자판과 셈틀 표준 코드 문제
타자기나 셈틀로 한글을 쓸 때에 글자를 만드는 자판 표준 문제만 있는데 셈틀로 한글을 쓸 때엔 입력하는 방식인 자판 문제에다가 셈틀 내부에서 글자를 생성 출력하는 방식인 코드 표준 문제가 있다. 이제 타자기와 셈틀 자판 표준과 코드 표준 문제를 살펴보자.
2.1. 타자기 표준 자판 흐름
셈틀이 나오기 전에는 한글 기계사용은 금속활자를 쓰는 활판인쇄와 타자기뿐이었다. 활판인쇄는 표준이 필요 없었지만 개인이 쓰는 타자기 자판은 표준이 필요했다. 영문 타자기는 서양에서 오래 전부터 만들어 썼기에 그를 따르면 되지만 한글 타자기는 한글과 영문이 다르고 영어와 우리말이 다르기에 우리가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편리한 방식으로 표준을 정해야 했다.
그런데 영문은 자음과 모음 두 자소가 결합해서 한 낱말이 되는데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초성, 중성, 종성으로 결합해서 한 음절이 되고 그 음절이 모여서 한 낱말을 만든다. 영문과 한글은 같은 소리글자라도 낱말을 만드는 원리와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타자기 이용 시에도 자판이 영문과 다르고 복잡했다. 그래서 만드는 사람마다 자판이 다섯벌식, 네벌식, 두벌식, 세벌식으로 달라서 이용자들이 매우 불편했다. 처음이라 완전하지 못했고 그래서 새로운 방식의 자판이 나오고 바뀐 것이다. 그래서 표준 자판를 정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정부가 한글 창제 원리에 맞고 속도가 빠르며 널리 쓰이는 공병우 세벌식을 빼고 1969년에 네벌식을 표준으로 정하니 그 잘못을 지적하는 여론이 일어나고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1983년에 네벌식이 해지되었다가 1982년에 컴퓨터 자판이 두벌식으로 표준을 정하니 1985년에 타자기 표준도 두벌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셈틀(컴퓨터)시대가 되면서 타자기 쓰는 사람이 줄어든다. 그래서 타자기 표준 문제는 조용해지고 셈틀 문제가 떠오른다.
1969년 네벌식 타자기 표준 자판 지정
1983년 네벌식 타자기 표준 자판 해지
1985년 두벌식 타자기 표준 자판 지정
2.2. 셈틀(컴퓨터) 자판과 코드 표준 문제.
1969년 타자기 자판 표준을 네벌식으로 정하면서 계속 타자기 자판 표준이 문제가 되었다. 네벌식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1980년대에 셈틀 시대가 되었고, 1982년 셈틀 표준 자판은 두벌식으로 정한다. 세벌식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박사가 정부에 그 잘못을 따지고 맞서다가 정부의 탄압을 받고 1980년에 미국으로 망명하니 반대자가 없는 상태에서 1982년에 셈틀 자판 표준을 두벌식으로 정한 것에 이어 1985년에 타자기 자판 표준도 두벌식으로 정한다.
영문 타자기가 두벌식이고, 영문 셈틀도 두벌식이니 한글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두벌식으로 정했다. 그리고 1987년 정부 전산망에서 많이 쓰는 빈도가 높은 2350 글자를 기억하게 했다가 빼 쓰는 완성형 코드를 국가 전산 표준으로 정했다가 1989년에 국가 표준으로 정하니 두벌식 자판에 완성형 코드가 표준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표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들어난다. 현대 한글 24글자가 만들어 내는 글자는 초, 중, 종성으로 조합해서 11172자가 만들어지는데 데 2350자만 한자처럼 그림으로 입력해 출력하니 나머지 8000여 자는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똠, 홥”같은 글자는 만들 수 없으니 잘못이 들어나 말썽이 되었다. 한자를 좋아하는 국어학자와 한글을 모르는 전산 전문가들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한글기계화 선구자인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자판에 조합형 코드를 국가 표준으로 정해야 한글이 빛나고 나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정부와 맞섰으나 무식한 정부 관리는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공병우 박사를 탄압하니 1980년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런데 1989년에 정부가 완성형 코드를 표준으로 정하니 1990년 민간인들이 “한글코드 개정 추진 협의회”를 만들고 개정운동을 해 1992년에 조합형 코드까지 공동 표준으로 인정한다. 공병우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활동할 때여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한글은 우리만 쓰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인이 사용하는 것이기에 국제 표준으로 되어야 했다. 그래서 한글과컴퓨터가 앞장을 서고 국제표준화기구(ISO)에 참여해서 1995년도에 현대 한글 11172자를 쓸 수 있도록 완성형으로 유니코드에 반영한다. 그리고 옛글자도 일부 쓸 수 있게 되어 현대 한글은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큰 업적이라고 자랑하지만 완성형이기에 4만3천여 개의 기본판 유니코드 글자 영역 중 무려 4분의 1을 한글코드가 차지하게 되어서 훈민정음 28자와 옛 한글을 사용하게 된다면 수십만 자가 되니 더는 완성형으로 유니코드에 들어갈 틈이 없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2.2. 세벌식 자판과 조합형 코드가 표준이 안 된 까닭
나는 한글이 빛나려면 세벌식 자판에 조합형 코드를 표준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많은 전문가들도 그게 옳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세벌식 자판은 국가 표준이 되지 못했다. 그 까닭은 아래와 같다고 본다.
첫째, 공병우 세벌식 글꼴이 예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세벌식은 받침이 있는 글자는 길에 늘어지고 받침이 없는 글자는 짧아서 마치 빨래 줄에 빨래를 널어 논 것처럼 들쑥날쑥하다고 빨래줄 꼴이라고 했다. 그 당시 활판 인쇄 글꼴은 네모꼴이고 그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이 세벌식 빨래줄 꼴을 밉다고 생각했다.
둘째, 한글을 기계로 글을 쓰는 초기라 한글학자는 전산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기계 전문가는 한글 창제 원리를 모르니 저마다 생각이 달랐을 뿐 만 아니라 정부도 이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니 엉터리를 표준으로 정했다.
셋째, 영문 타자기가 먼저 생겼고 영문이 두벌식이니 한글도 두벌식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문은 자음과 모음 자소가 결합해 한 낱말을 이루지만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초성, 중성, 종성으로 조합해 한 음절을 이루고 그 음절이 결합해 한 낱말을 이룬다. 그 차이를 아는 전문가들이 없었다.
넷째, 한글기계화 개척자요 선구자인 공병우 박사는 네벌식 자판도 만들어 써보고 불편해서 두벌식 자판도 만들어 써봤으나 초성, 중성, 종성이 모여서 한 음절을 이루는 한글 특징을 살리는 세벌식 자판에 조합형 코드를 당연히 표준으로 정해줄 거로 생각하고 정책 담당자가 만나자고 해도 만나 타협하지 않고 원칙만 내세우고 맞선 것이 큰 실수였다.
한자를 좋아하는 국어학자가 한자를 쓰게 하려고 완성형 한자 코드를 표준으로 정하면서 한글도 완성형 코드를 표준으로 정하고 세벌식 조합형을 짓밟았다고 본다. 무식해서 나온 일이다.
3. 한글 기계화 문제와 과제
한글기계화 초기 한글 창제 원리와 특징을 무시하고 두벌식 자판에 완성형 코드를 표준으로 정해서 11172자를 다 쓸 수 있게 안 하고, 2350자만 쓰게 한 것은 한글 발전과 민족문화 창조를 가로막은 죄악으로서 그런 주장을 한 학자와 공무원은 벌을 받아야 할 일이다. 2350자만 쓸 수 있게 완성형 코드를 표준으로 정한 한 것은 정부가 한글 능력이 100이라면 30만 나타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공병우박사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한글기계화 개척자 공병우박사는 겨레와 나라를 위해 정보통신 발전이 중요하고 바르게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재산과 힘을 바쳐서 타자기 시대를 열었고, 셈틀도 바른 길로 가도록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자판과 코드가 업체마다 다르고 저마다 이익을 챙기려다가 엉터리를 국가 표준으로 정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제 외국의 힘, 유니코드에 의지해서 11172자를 모두 쓸 수 있게 했지만 우리 문자 자주권을 포기한 꼴이 되었다. 그래서 또 다른 한글 사용성과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라도 공병우 정신과 주장을 받들어 한글 사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최대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외국어를 배우고 써야 할 일이 늘어나면서 한글 자모 28자와 옛글자를 모두 쓰서 모든 외국어를 표기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 많다. 완성형 코드로 한다면 28자로 만들 수 있는 수십만 자를 만들어 유니코드에 등록해야 하는 데 이제 공간이 없어 불가능하다. 이제라도 세벌식 자판에 조합형 코드를 국가 표준으로 정해 한글 사용 환경을 개선하고 능률을 높여야 할 것이다.
왼쪽은 김용묵이 세벌식 조합형으로 만든 날개셋 편집기로 쓴 글. 오른쪽은 옛 글 자모.
필요할 때엔 옛글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한글 주권을 되찾아 한글 주인 행세를 하자.
3.1. 한글기계화 개척자요 선구자 공병우 박사
공병우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안과 개인병원을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돈도 많이 번 이름난 안과 의사였다. 그런데 광복 뒤에 일본인들이 물러간 경성의학전문학교 안과 교수로서 교육을 하게 되면서 자신이 일본어로 지은 ‘소안과학’이란 책을 국역해 교재로 쓰려고 하면서 한글공부를 하게 되었고, 타자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식민지 때에 영문 타자기를 써본 경험이 있기에 한글도 타자기를 이용해서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그 때 나와 있던 이원익 타자기와 송기주 타자기를 구입해 사용을 해봤으나 영문타자기처럼 편리하지 않아서 스스로 안과 병원 일은 제쳐두고 영문타자기를 사다가 분해하고 맞추어보면서 한글타자기를 만들었다. 1949년에 완성한 세벌식 공병우 속도타자기다. 그리고 6.25전쟁 때에 영문 타자기와 함께 군에서 사용해 미국으로부터 그 편리함을 인정받았고 전쟁 뒤 정부기관 공문서 작성부터 시작해 널리 쓰인다. 타자기 대중화시대를 연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가 널리 쓰이고 돈벌이가 되니 너도 나도 타자기를 만든다고 나서고 경쟁이 붙었고, 경쟁자들이 공병우타자기 글꼴이 예쁘지 않다고 비판하니 정부는 공병우의 세벌식과 김동훈의 다섯벌식의 장점을 모아 네벌식을 만들어 국가표준으로 정한다. 그러나 그 네벌식이 문제가 많아서 불만과 비판이 일어난다.
그런데 공병우 박사는 그 표준이 정해지기 전에 과학기술부장관이나 관리들이 만나자고 해도 만나지 않고 제 주장만 했다고 한다. 세벌식 타자기가 초성, 중성, 종성이 결합해서 한 음절을 만드는 한글창제 원리와 특징을 살린 자판이고 가장 많이 사람들이 쓰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표준으로 정해줄 줄 믿고 그렇게 한 것이다. 원칙만 내세우고 반칙은 생각하지 않으니 표준을 정할 때에 소외된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가 정의는 인정받고 승리할 것이라고 두벌식 자판 표준 반대운동을 하다가 정부의 모진 탄압을 받고 재산까지 모두 빼앗기고 1980년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미국은 벌써 셈틀(컴퓨터)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을 보고 셈틀 문서편집기를 연구하고 1988년에 귀국해 세벌식 문서편집기 알리기에 힘쓰고 세벌식 자판에 조합형 코드를 표준으로 정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종로구 비원 앞 옛 공안과 병원자리에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셈틀에 관심이 있는 이찬진, 정래권 들 젊은이들을 모아 연구실을 주고 우리식 문서편집기를 만들게 한다. 또한 한글문화원 안에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회장 이대로)에 모임방을 주고 대학생들과 함께 한글전용운동을 하도록 도와주고, 한국글쓰기연구회(회장 이오덕)에도 방을 주고 함께 국어운동을 하도록 한다.
나는 그 때 공병우 박사님으로부터 타자치는 것과 하이텔, 천리안들 누리통신 교육을 받고 공병우 박사님과 함께 누리통신을 한 1세대에 속한다. 그 때 공병우박사님은 “두벌식 완성형을 표준으로 한 것은 사람의 열 손가락을 세 개만 쓰게 하는 것과 같다. 세벌식 조합형으로 표준을 정해야 한글이 빛나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다.”라고 말하면서 나보고 그 일에 앞장서라고 하셨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한 1993년 어느 날 박사님으로부터 나를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찾아가 뵈니 “이 선생, 이제 나는 언제 죽을 주 모르오. 내가 가진 것이라고 내 사진 작품집뿐이오. 그걸 줄 터이니 국어운동비로 쓰시오. 그리고 부탁이 있소, 변호사 잘 아는 이가 있으면 소개해주오. 한글과컴퓨터 회사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 재산이 조금 있는 거 모두 아들에게 넘어갔으니 그거라도 되찾아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으오.”라고 말씀하셨다. 박사님이 한글과 한글문서편집기 발전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남은 재산을 되찾아서까지 그 일을 하시라고 도와 줄 수도 없었다.
왼쪽은 공 박사가 마지막 유산이라며 내게 준 사진 작품집이고, 오른쪽은 1993년 한글날에 공병우박사와 함께 한국일보 기자를 만나 인터뷰한 사진이 담긴 신문기사다. 공병우 박사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힘차게 활동하시다가 1994년 겨울에 입원하고 1995년 봄에 돌아가셨다.
왼쪽은 공박사가 한글명함 쓰자고 만든 유인물, 오른쪽은 내가 감사패를 드릴 때 사진.
* 나는 세벌식 옛 한글 자판을 쓴다. 아래 글은 이 글을 쓸 때에 오타로 나타난 글자들이다. 외국어를 표기한다거나 필요할 때에 이런 글자도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ᄍᆞᆫ ᄀힹᆯ 이ᇍ 피ᇍ 가ퟋ ᄋᆞᆼ 좂 ᄁᆞ ᅇᅮᆾ 쁪 ᄌퟄᆫ 긂 ᅘᅮᆯ ᄌᆚᆫ ᄀᆞᇀ ᄐᆞ 첾 쁯 ꥰᅮᆹ 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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