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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제(2011.3.6) <나는 가수다>를 보았다.
보면서, 아내와 내가 끊임없이 변주한 하나의 표현이 있었는데, 그건 '말도 안돼'라는 문장이었다.
'말도 안돼...'
'세상에, 어떻게...'
도대체 무엇이 말이 안된다고 느꼈던 것일까?
나는 쉽게 ‘무엇’의 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물론 방송 후 인터넷 여기저기서 많은 이들이 표명했듯, 방안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개그맨들의 ‘리액션’을 ‘경박한 것’으로 깎아 내리면서 이 ‘가수’들의 공연은 엄격하게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하는 ‘예술’이라고 역정을 내고, 그 연장 선상에서 공연 전체를 들려주고 보여주지 않았던 가위질 편집을 성토하며, 자기가 뭐라고 ‘반말’까지 섞어가며 겨우 ‘종이 한 장’ 들고 순위를 발표하는 PD의 ‘권위주의’를 질타하는 식의 반응들. 일리가 없진 않으나- 김영민의 책 제목을 빌자면- 그것이 ‘진리’도 ‘무리’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 그대로 ‘일리’ 있는 반응들. 결국 ‘논란’의 범주에 포섭되어 ‘시청률’로 전환되고 말 반응들. 일리들. ‘일리’있는 반응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말이 안 된다고 느꼈던 걸까?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가수다>는 동시에 대단히, 아주 많이, 누가 울거나 감동적인 노래를 부르는 걸 보기 전에 이미, 그 형식만으로 너무나 슬픈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또한, 아니 무엇보다 불편한 방송이었다. 그 두 정조는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방식으로 뒤엉켜 있었고 내게,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국외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내게 어떤 응답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답 없이, 나를 끌어당기는 이 의문에 띄엄띄엄 하루를 고민하다가 문득, 나는 이 세 가지의 반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말이 안되고, 슬프며, 무엇보다 불편한 방송이 주는, 혹은 줄 것이라 예상되는 어떤 감동. 다시 말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절대 '편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 때문에 그것을 (다시) 보(고 듣)게 만들고, 무엇인가 말을 덧붙이게 만들고, 논쟁하게 만든다는 데에 <나는 가수다>의 어떤 독특함-그리고 어느 정도 보장된 시청률-이 놓인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불편함(의 매력)은?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면, 그 불편함은 '권위 없는 판단', 혹은 판단과 권위 사이의 불균형/비대칭성에서 온다. 보다 정확하게 미리 결론을 당겨 말하면 <나는 가수다>는 ‘권위 없는 판단’이 초래하는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결과/피해가 그 비극성’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정확하게 그 비극성을 통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 그리고 그 비극성은 추첨에 의해 선택되고 매회 교체되는 방청객으로서의 ‘우리’가 ‘지속’시키게 될 것이라는 것, 나아가 우리는 그 상황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겨야 한다는, 아니 분명히 즐기게 될 것이라는 세 겹의 구조적 정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는 이러한 구조의 전례를 우리나라에서나 밖에서나 찾을 수 없다. 칸트의 개념을 잠시 빌자면, 이 프로그램은 내게 기존의 일반적 법칙(a general rule)에 포함시킬 수 있는 하나의 예로 대상을 규정하는 '규정적 판단(determinant judgment)'의 일부가 아니라,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어떤 잠재성, 즉 보편성(universality)의 도래, 혹은 이미 우리와 일정기간 함께 하고 있었으나 아직 개념적/인지적으로 포착되지 않았던 존재를 미리, 혹은 뒤늦게 선언하고 알리는 '반성적 판단(reflective judgment)'의 독특한(singular) 예이다. [뒤에서 보다 명확해지겠지만, 이 글을 '권위의 부재' 혹은 '위기'라는 일반적 키워드의 예로 포함시켜 편안하게읽 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이 방송이 한 편밖에 방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쓰며, 그런 의미에서 나름의 흥분을 가지고 쓴다. 이 글은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그런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극한, 한 TV 프로그램에 대한 나의 사유의 기록이다. [해서, 짧지 않다]
1.
먼저 어떤 ‘오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는 가수다>를 오디션 프로그램의 하나로 인지한다. 이 ‘오인’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7명의 참가자가 공연을 하고, 그에 대한 판정이 내려지며, 그에 따라 한 명은 반드시 떨어진다. 거기서 <나는 가수다>를 <슈퍼스타K>나 <위대한 탄생>과 묶는 반응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분류는 <나는 가수다>의 중심에 ‘내재’하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어떤 불편함과 슬픔, 혹은 비극적 정조를 꿰뚫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정조는 권위와 판단 사이의 불균형, 혹은 비대칭성에 기댄다. 물론 <슈스K>나 <위탄>에도 불균형은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선행 프로그램에 내재하는 불균형은 궁극적으로 심사위원단/멘토들의 권위(authority)에서 오는 불균형이다. 참가자와 그 참가자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은 결코 동등하지 않고, 동등할 수 없으며, 동등해선 안 된다. 둘 사이의 ‘수직적’ 낙차에 붙는 이름이 바로 ‘권위’이다. 그 불균형과 비대칭성은 그러나 우리를 안심하게 만드는 불균형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전통적인 것이다.
아무리 내가 김지수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고, 당신이 존 박의 대중성을 낮게 '평가'했다 해도, 궁극적으로 그러한 '평가'는 세 명의 심사위원이 내리는 '판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 전자는 결코 '취향'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는 박진영의 음악적/미학적 취향과 이승철의 취향을 추적할 수 있을지 모르고, 엄정화와 윤종신의 '취향'이 다를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그들의 취향이 그들이 내린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들의 판단은 그러한 취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예측, 즉 그들의 취향은 그들이 내리는 판단의 권위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는 그들의 권위가 그들의 취향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물론 <슈스K>는 후반부, 특히 최종 결승전에서 판정단보다 대중들의 문자투표 참여비율을 높였다. 하지만, 그러한 최종판단의 지위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의 그것과 같은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최종회까지 지속적으로 탈락시킨 경쟁자들에 대한 판단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공정성', 즉 ‘권위’를 결여한 것이었다면, 아니 그렇게 인지되었다면, 결승전에서처럼 대중들에게 최종판정의 기회가 주어졌을 리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재인의 탈락이 심사위원들의 취향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이었다고, 그렇게 ‘밝혀졌다’고 생각해보라. (‘걔 목소리 너무 짜증나!’라는 한 심사위원 목소리 파일의 유출…) 이는 프로그램 중반 사람들이 표명했던, 강승윤에 대한 10대들의 절대적 지지가 김지수의 ‘음악성’을 ‘부당하게’ 밀어낼 것이라는 우려를 통해서도 드러난 바 있다. 한 마디로, 이 프로그램들의 포맷에서 대중들의 판단은 우리가 판단이라는 행위에 기대하는 공정성과 권위를 부여 받지 못했던 것이다.
‘점수’라는 형식은 이런 맥락에서 주어졌다. 허각과 존 박의 공연에 윤종신과 이승철과 엄정화가 "제 점수는요!"라는 말과 더불어 붙였던 그 점수는 계량화된, 측정 가능한,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외피를 띤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과정과 기준에 의해 그 점수가 나온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깔끔한 고음처리’보다 ‘호소력 있는 가사전달’이, ‘피치의 불안정함’이 ‘관객을 압도하는 장악력의 부재’보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더/덜 중요한지, 어떻게 ‘객관적으로’ 수치화되는 것인지 우리는- 그리고 그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칠흑 같은 바다 위에서 자신이 탄 배를 덮치는 집채만한 파도를 보고 누군가가 내뱉는 ‘무서운 바다’란 표현이, 부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표현의 대상 앞에서 드러내는 다리 풀린 무기력함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즉 그들이 내놓는 ‘점수’의 중심에는 어떤 근본적인 불안함이, 혹은 어떤 불투명함이라 부를만한 지점이 있다. 그러나 그 불투명함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 불투명한 점수를 자신의 판단으로 제시하는 심사위원들과 참가자들 사이의 불균형은- 웬만해서는- 우리를 도발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판단이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보편적으로 설득력 있었다고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흔들림은 초반 오디션부터 끝까지 꾸준히 존재했을 뿐 아니라, 후반부에 갈수록 점차 약화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지속되었다.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아메리칸 아이돌>의 사이먼 코웰 역할을 담당한 건 ‘이승철’로 간주되지만, 실상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이승철에게 모델을 제공한 건 중간에 하차한 박진영이었다. 나는 그의-거의 ‘유물론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현실적이면서도 결코 핵심을 놓치지 않는- 코멘트를 들으면서 그를 완전히 달리 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우리를 안정시키는 불균형이다. 양적인 수치로 계량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rational), 즉 계산(ratio)적인 지평 너머, 아무리 적분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점근선처럼, 어떤 넘을 수 없는 실과 같은 얇은 벽, 마지막의 어떤 도약(leap), 권위는 철저하게 그 지점에 기댄다.
2.
이 권위가 <나는 가수다>에는 없다. 정엽보다 이소라가, 이소라보다 윤도현이, 김건모보다 김범수가, 박정현이 노래를 더 잘한다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없다.
물론 판정단은 여기에도 있다. 아니, 더 많다. <슈스K>처럼 3명이, <위탄>처럼 5명이 아니라 아예 500명이다. 그러나 그러한 양적인 차이는 그것이 가리는 이 거대한 공동을 가슴 밑바닥을 긁는 저음을 통해 더욱 또렷하게 웅변한다.
나는 귄위의 부재를 얘기했지만, 사실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7명의 참가자들 하나하나는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심사위원을 맡을 수 있는, 권위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90년대 가요계를 양분했다고까지 얘기되는 신승훈이 <위탄>에서 멘토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김건모의 처량한 위치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종종 언급된다) 다시 말해, <나는 가수다>는 해당분야의 권위자들이 아무런 권위 없는 문외한들에게 평가를 받고, 그 평가의 혹독한 결과를 감수해야만 하는 불합리한, ‘말도 안되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슈스K>나 <위탄>과 같은 선행 프로그램들의 판단 구조는 여기서 정확하게 물구나무 세워지는데 <나는 가수다>가 시청자와 방청객, 혹은 당사자들에게 선사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은 여기에 근거한다. 해서 반복한다. <나는 가수다>는 <슈스K>와 <위탄>의 동의어가 아니라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반대말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남격>이 확대재생산한 <무한도전>의 세팅을 갈아치운다. 20년 관록의 부활리더 김태원이 어정쩡한 자세로 춤을 배우며 웃음을 사고, 정준하가 되지도 않는 표정으로 정극을 연기함으로서 바보가 되는 바보같은 상황이 성악 학사를 딴 뒤 야식을 배달하고, 철학 전공자로 가스배달 오토바이를 몰아야하는 이 시대의 주체가 처하는, 즉 한 마디로 언제건 바보가 될 준비가 되 있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유연성'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다면, <나는 가수다>는 영화감독이 예를 들어 건설업으로 떼돈을 번 투자자에게 '영화도 모르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잘리고, 모바일 엡으로 벼락부자가 된 20대 물주에게 음악전공자가 '아직도 음악이 뭔지 모르냐'는 소리를 듣고 해고되며, 스피노자 전공자가 대학원 행정직원에게 '철학은 그런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임용에서 탈락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전송'한다. 즉 우리는 비전공/전문 영역에서 바보가 되는게 아니라, 우리의 전공/전문영역 속에서, 그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평가받고 잘리며 고용될 것이다.
<슈스K>와 <위탄>이 이미 해체되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권위'를 어떻게든 재구축하려고 애쓰는 지점의 정반대방향으로 <나는 가수다>는 내달린다. 반드시 그런가?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다 세심한 귀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개별 가수가 매회 공연(performance)에서 드러낸 흔들림을 짚어내고, 그에 근거해 가수 자체가 아닌 해당 공연의 상대적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판결/판정의 정당성, 혹은 권위를 얻어내려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하의 코멘트들은 자신의 노래로 자신을 소개하는 성격이 컸던 첫 회의 특성상, 그 어느 가수의 노래도 전곡을 들을 수 없었던 정황에 의해 그 타당성이 제한되어야만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보고 싶다>를 부른 김범수는 ‘죽을 만큼 보고 싶다’는 가사의 마지막 엔딩에서 ‘죽을 만큼 보고-‘ 부분을 가성으로 늘어뜨리려다가 말 그대로 미세하게 순간적으로 머뭇대고-이런 상황의 요인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으나 지면 제한 상 제외한다-, 그 결과 안정적인 호흡의 균형을 잃는다. 하지만 이미 소리는 공기 중에 던져진 상황이므로 지속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되고, 재채기를 간신히 참아 움찔댄 결과 생겨난, 자를 대고 그린 직선에서 발견되는 작고 미세한 돌출부들처럼, 분명히 ‘떨어졌다’고 단언 할 수는 없지만 피치는 흔들린다. 수백 번을 불렀을 그의 대표곡이고, 기본적으로 여러가지 상황을 겪었을 베테랑인 이상, 이 정도의 돌발상황은 누구나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수로 이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 일종의 ‘화룡점정’이 되었어야 할 회심의 일격은 단순히 양적으로 길이를 늘어뜨린, 사족 이상의 효과를 얻지 못했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제한적으로 들어본 제대 이후 그의 보컬은 이전과 비교해 힘과 밀도가 많이 떨어지는데- 특히 ‘보고 싶다’의 클라이막스에서, 내 기억이 맞다면 Bb/B음을 ‘아’도 아닌 ‘이’ 모음으로 (“기”억이-), 그러나 샤우트도 가성도 아닌, 마치 당구공 같은 밀도와 집중력으로, 목을 잡는 듯하면서도(이 정도의 음이면 목을 잡아 부르기 때문에, 성대가 긴장하고 좁아져 소리가 얇고 드라이해지게 마련인데) 답답하지 않게 내지르던 지점은 정말 압권이었다- 나는 그것이, 타고난 보컬만으로도 웬만한 가수들은 제칠 수 있었던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즉 자신의 이름으로 곡해석을 해내는 ‘가수’로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스탠다드 곡들을 재해석해 불렀던, 2장짜리로 기억되는 그의 리메이크 앨범은 얼굴만 믿고 연기에 소홀한 ‘스타’들의 출연작들이 보여주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이 그의 것보다 다른 가수의 퍼포먼스를 더 우월한 것으로 평가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지나친 긴장으로 목에 수분이 말라 초반 두 소절 이상의 마지막 부분의 비브라토가 불균질했고, 더불어 불안정해진 호흡으로 역시 초반 매 소절 끝을 충분히 지속시키지 못했던, 나아가 이 초반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클라이맥스에서 평소와 달리 ‘오버’했던, 그래서 기존 퍼포먼스에서 보여주었던, 고음으로 유지되는 긴장을 결코 풀지 않은 채 키를 바꿔 곧바로 상승함으로서 청중의 마음을 말 그대로 졸이게 만들었던 효과의 전달에-물론 겉으로는 표나지 않게- 실패했던 백지영은 어떤가?
혹은 백지영 못지 않게 긴장해 초반의 몇 소절을 역시 비틀거렸던,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의 특장이라 할, 경구개와 입술/발음의 독특한 조합으로 돋을새김된, 비브라토의 폭이 좁고 맑은 가성과 3-4집 이후 전면에 부각시키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는 보다 두텁고 비브라토의 폭이 넓은 두성 사이의 가파른 도약/추락을 지나치게 강조해, 말 그대로 바로크적인 보컬 초식의 과잉을 보여준 박정현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게 되겠지만, 박정현이 1등을 했다는 건 이 프로그램에서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가수가 빠질 어떤 유혹, 혹은 위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시사적이다. 콘서트홀 3층 꼭대기 끝자리에 앉아있는 관객까지 ‘유혹’하기 위해 피아노 시시시모(ppp)로 섬세하게 표현되어야 할 부분을 근육질로 연주하는 자신을 발견한 뒤 콘서트홀 연주를 완전히 폐기하고 스튜디오 음반녹음에만 전력했던 글렌 굴드를 기억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글렌굴드는 클래식 연주가이고 박정현은 대중가수니 다르다고?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든 클래식 연주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상업연주자이고-전세계에서 벌어지는 클래식 음악연주회 레퍼토리의 태반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 사이의 2-3백년을 넘지 않고, 그 선을 넘으려면, 한 줌의 스타 연주자/연주단이 아닌 이상 연주할 기회는 실질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한 극소수는 대중음악에도 존재한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 정도 가수들 사이의 우열, 아니 서열은 가리기 힘들다. 그건 무엇보다 곡들이 다르기 때문인데, 최악의 경우 설사 같은 곡을 같은 성별의 둘, 혹은 그 이상의 가수가, 똑 같은 편곡과 템포로 부르게 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첫 회에 출연한 정도의 가수들의 경우, 누구의 곡이 더 우월한가에 대해 논란의 여지 없는 판단을 내린다는 건 일반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서 우리가 인터넷에서 보는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듯, 웬만한 사람들이 아니면 모두 ‘취향’의 능선으로 퇴각한다. 누가 ‘감히’ 이들의 ‘기량’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추궁하는 질문이다. <나는 가수다>는 이 질문 앞에서 퇴각하지 않는다. 않고, 대신 방청객을 내민다. 즉 이 추궁에 호명되어 나올만한 유일한 용의자는 방청객이다. 문제는 그들이 실지로, 그리고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다수(multitude)라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500명. 게다가 그들의 판단은 그 날 그 날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공연의 질과 공연 당시의 상황, 가수와 밴드의 호흡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공명에 좌우된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이들조차 한 명의 가수를 탈락시키게 될 가혹한 판단의, 책임의 주체는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좋다’고 판단한 공연의 당사자 한 명의 이름을 적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특정 가수 하나를 지목해 탈락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 아니 설사 그런 의도가 있다고 해도, 현재의 득표 방식상 그것을 득표로 표면화시킬 수는 없다. 이들이 내리는 판단은 '선호도'라고 평이하게 불리지만 그것은 일종의 외국어이고 궁극적으로 해독될 수 없는 블랙박스다. ‘나는 박정현이 이소라보다 더 ‘잘했다’고 ‘판단’한 게 아니라 더 ‘좋았다’고 얘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표명된 그/녀의 ‘취향’은 무색무취하게 취합되어, 일주일에 한 명씩의 희생자를 ‘반드시’ 만들어내며, 누군가는 울고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게 된다.
다시 얘기하지만 그것이 당사자에게 참담한 것은, 그러한 판정의 결과가 정당하다는 것, 혹은 권위있다는 것을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고, 따라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100m 달리기가 아니나, 100m 달리기이다. 물론 정엽과 백지영의 말처럼, 서로 얼굴을 알게 된 이상, 즉 서로가 서로의 기량을 아는 이상, 이들 중 누가 떨어진다 해도 억울하지 않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탈락의 당사자에겐 ‘왜 하필 나인가?’라는 질문이 반드시 제기되게 되어 있다. ‘왜 다 (기량은) 비슷한데, 즉 우리는 서로 (철저하게) 다른 데, 왜 하필 나란 말인가?’
별 것 아닌 척, 무덤덤하게 여기면 되지 않느냐고? 미안하지만 이 게임엔 자진사퇴란 옵션이 없다. 당신은 ‘꼴지는 탈락’이란 게임의 룰을 이미 받아들였고, 그런 이상 끝까지 가야한다. 결국 우연이라고? 근본적으로 이 반문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제비뽑기가 아니라 투표와 합산의 과정을 거쳐, 순위로 가시화되어 판결로 떨어진다. <나는 가수다>의 문제, 즉 본질은 바로 이것, 즉 우연적인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후자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형식 자체에 있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 그 형식은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바꿀 수 없다. 본질로서의 형식. 말 그대로 ‘폼생폼사.’ 그 형식이 사라질 때, 이 프로그램은 7080의 아류로 전락한다. 부르는 노래와 출연한 가수가 같다고 하더라도, 같은 노래를 부르고 듣는 가수와 청중의 입장은 두 경우 천지차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해야 하고-예고편이 온 몸으로 웅변하듯- 울어야 한다. 오직 그 때에만, 그들 모두에게 합당했을지 모를, 그러나 이제와서야, 다시 말해 그들 중 하나를 매주 반드시-상징적으로라 하더라도- 죽이게 된 상황에서야 그들을 ‘예술인’이라고 떠받들며 뒤늦게 분노하는 우리는, 겨우 5분을 넘지 않을 매 곡의 음표 음표에 대한 집중력과 존중을 가지고 그들을 대접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의,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우리의 분노, 슬픔은 그러나 과녁을 찾지 못한다. 표적은 500갈래로, 그것도 매주 분산된다. 피해자는 속출하나 가해자는 없는, 궁극의 원인 없이 결과 만이 주어지는 상황. 그러나 이 답답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어떻게? 최고의 공연을 통해. 무엇을 위한? 출연 가수 개개인의 구원(생존)을 위한. 그러나 그렇게 공연에 투입된 노력과 결과물이 제대로, 공정하게 평가되어 자신의 구원/생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없는. 최선. 혹은 최악.
[비약처럼 보이겠지만, 이 상황은 기독교 신학, 특히 로마서가 제시하는 기독교의 핵심적 이율배반과 구조적으로 같은 틀을 공유한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Grace)의 결과이나 동시에 율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 네가 착한 일을 행하는 건, 그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지름길이 아니라, 네가 이미 구원받아서, 착한 일을 행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칼뱅의 예정설과 자기 입술로 주를 구세주로 시인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성경의 정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팽팽하게 대치한다]
3.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보자.
그렇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는 어떤 단순한 의문을, 너무 단순하다 못해 어이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노력한 만큼 평가 받고 보상 받을 수 없다는 건 참 안됐지만, 그건 어차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이 말은, 그 지적의 단순함과 무관하게 분명,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곧바로, 세상을 다 알아버린 어른의 표정으로 그게 바로 ‘시장의 냉혹한 논리’라고 훈계하는 ‘이 시대의 아이들’과 뒤섞여 뛰놀 필요는 없다. ‘백지영이나 정엽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 다들 전성기 지난, ‘한 물간’ 가수들 아닌가?’ ‘‘아이돌’/아이유와 ‘쎼시봉’-아, 진정 ‘송창식 선생’은 지금 당장 전 세계에 내놔도 열, 아니 다섯 손가락에 낄 수 있는, 카에타노 베로소 정도는 그 짱짱한 목소리만으로도 단번에 자빠뜨릴 수 있을,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아티스트’라는 걸 <놀러와 쎄시봉 특집>은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다- 사이의 끼인 세대 입장에서 안되긴 했다만 이렇게 해서라도 관심을 회복하고 그렇게 바라마지 않는 ‘예우’가 잠시라도 활성화될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등등.
물론 이런 유아적 논리에도 착하고 성실하게 응대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아이돌’과 ‘트로트,’ 그리고- 하나의 계급적 기호에 가까운- ‘클래식’이라는 세가지 옵션을 제외하면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라는 시장과 장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단순히 창작자/가수의 문제가 아니며, 컬러링과 다운로드 수익권의 태반을 통신사에 내준 기형적 산업/유통/배급체계와 연동된 구조적 문제라는 것, 그 결과 이 셋이 아닌 모든 건 ‘미사리’라는 변두리 공간과 ‘7080’이라는 변두리 채널로, 마치 ‘민속촌’을 가로지르는 전통혼례 행렬처럼 생존을 담보로 전시/격리/보호되거나, 그나마 음반과 매체 수익이 보장되는 ‘한류’에 휩쓸리다 전속계약 분쟁에 빠져들거나, 라디오나 TV의 DJ, 패널을 통해 ‘방송인’이라는 이름의 ‘전직가수’가 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달빛요정 만루홈런’처럼 쓸쓸히 담장 밖으로 내던져진다는 것. 몇몇의 기적과도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우리의 장기호와 조동익과 김현철과 노이즈 가든과 이규호와 고찬용과 나미와 방미와 윤수일과…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마돈나와 스팅과 Rush와 REM과 U2와 Eagles와 데이비드 보위와 랜디 뉴먼과 펫셥 보이즈와 샤데이와 브라이언 맥나잇과 맥스웰의, 물론 결코 보장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뮤지션으로서 살아남는 길이 아니라, 아예 사라지거나 교수가 되어 현역에서 은퇴하는 길을 택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는 가수다>로, 다시 말해 그것의 다소 냉혹하고 불합리한 포맷은 기존 현실에서 가수들이 처한, 혹은 당하고 있는 현실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반문으로 돌아와보자. 그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단, 현실과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 사이에 놓인, 아주 미묘한,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실과 같은 금(crack)을 지워버리지 않는 한. 왜냐하면 현실을 놀라울, 혹은 놀랍지 않을 만큼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얘기되는 <나는 가수다>는 그 말의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방송 프로그램이다.
나는 ‘그것은 방송 프로그램에 불과하다’고,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정치적으로 옳은’ 말과 고발은 때론 오히려 현실을 가린다. 어떤 의미에서 종종 현실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개입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우회로를 거쳐야만 개입할 수 있는 기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가 흥미로운 건 그것이 현실에서 산발적으로, 하나의 패턴으로 엮어낼 수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는 가수들의 상징적, 실제적 도태와 죽음을 제한된 시공간과 일반인 심사위원단의 판정을 통해 일종의 잠재적(virtual) ‘미니어처’로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현실로 돌려져야 할 화살을 대신 맞는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칸 아이돌>을 통해 리얼리티 TV 포맷을 세계적으로 정착시킨 미국에서는 2000년대 초 이미 <아메리칸 프레지던트>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적이 있었다. 이 TV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실제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구체적인 안까지 추진을 했지만, 내부에서조차 지나치고 논쟁적이라는 반론에 부딪혀 폐기되었다. 그러나 채 10년도 안 된 작년 11월, 그러니까 넉 달 전인 11월 14일 미국의 방송 채널 TLC는 2008년 오바마와 맞붙었고, 2012년 차기 미국 대권을 노리는 사라 페일린 전 알라스카 주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사라 페일린의 알라스카’를 방영했다. 1월 초로 시즌이 끝나긴 했지만, 첫 회 방송은 5백만명의 시청자를 끌어 모아 TLC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페일린이 자연을 관찰을 하는 것을 관찰한다”는 뉴욕타임즈의 리뷰처럼(http://www.nytimes.com/2010/11/12/arts/television/12palin.html?_r=1) 비정치적인 알래스카의 자연에 초점에 가있었고, 시즌2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아직은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감독 베리 레빈슨이 지적한 것처럼 언제 그 일이 성사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http://www.huffingtonpost.com/barry-levinson/a-reality-tv-president-on_b_456844.html) (언젠가 우리는, 예를 들어 대권주자 '홍정욱'이 한국판 '페일린의 알라스카'에 출연해 대선 지지율 1위를 기록하는 상황을 보게될지 모른다)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그러한 기획이나 예측에 대한 염려와 비판이 잘못되었다거나 적절하다는 것이 아니라-그 때 우리는 '논란'의 바다에 휩쓸려 들어가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질 때 그에 대한 논의와 성찰이 후자, 즉 재현물에 대한 도덕적 교정과 질타의 형태로 축소되고 만다는 것이다. 대중의 판단과 판매량에 의해 실지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가수들의 도태라는 현실은 <나는 가수다>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될 때 비난받는다. 그 비난을 비난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 비난만이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저항만이 무의식을, 실제를 불러오고, 우리를 환자로 올바르게 호출한다. 그렇지 못하고 비난이 겨우 프로그램의 '교정'(correction)에 기여할 때, 실재는 사라지고, 우리는 건강한 상식인이 되며, 견딜만하기에 지속되고 강화되는, '현실이란 지옥'으로 우리는 '탕자'로서 되돌아온다. 즉 기존의 재현/표상 체계로는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되는 현실/실재 간의 위계를 여기서 뒤집어야 한다. 실재는 재현을 통해, 그것이 만들어내는 잡음과 불쾌함을 통해서만, 아니 잡음과 불쾌함 그자체로서만 돌아오고, 발견되며, 경험된다.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것처럼, <나는 가수다>를 통해 갑자기 대거 등장한 수많은 ‘양식 있는 음악팬들’은 ‘태블릿’을 두드리고 ‘호들갑’을 떨며 거의 ‘신성’한 것으로까지 여겨지는 가수들의 공연 흐름을 끊어먹는 개그맨들의 경박함에 분노를 표시하고, 그 연장 선상에서 공연 전체를 들려주고 보여주지 않았던 김영희 PD의 가위질 편집과 판정 결과를 ‘통보’하듯 전했던 그의 권위주의를 ‘성토’하고 ’질타’한다. 나는 그 음악팬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문제는, 아니 가장 '반동적'인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교정하길 원하는 방송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옳은’ 그들의 분노와 역정 그 자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비판을 통해 제거하고, 교정하길 원하는 개그맨들과 검열에 가까운 시청자 친화적 편집은 그 자체로 이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가수들이 얼마 전까지, 아니 지금도 처해있는 그들의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인, 그러나 가장 현실적이고 실재적(Real)인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가수들은 잘 웃어야 하고, 웃겨야 한다. 물론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은 없다. 어차피 그들의 노래는 백뮤직이 되거나, 자막이 달리며, 끊임없이 끊기고, 잘릴 위협과 압력에 항상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실재로서의 얼룩, 아니 <나는 가수다>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실재로 만드는 가상의, 즉 설정된 얼룩들이 깨끗하게 지워지고, 개그맨들이 올바른 음악팬들로 ‘정화’되며, 그 결과 가수들의 공연이 다음회부터 온전하고 완벽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일종의 ‘민속촌’이나 또 다른 ‘동물원’을 얻는 데 그치는 게 아닐까? 학살(Holocaust)을 넘어 말 그대로 거의 ‘멸종’된 ‘인디언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을 보면서 그들은 아직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보다 크고 안정적인, 그러나 절대적으로 한시적인- 김PD는 9개월을 예상하고 있다- 또 다른 ‘스케치북’에, 부활한 '라라라'에 우리는 만족하고 안심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치적 건전함'(political correctness)'이 이 땅의 '건전한' 보수블럭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첩경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불편해하는 건, 우리가 정치적으로 깨어있거나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짊어져야할 어떤 책임, 즉 어떤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닐 수치, 혹은 죄의식을 우리가 떠맡을 수 있는가를 그것이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쓰는데 채 3분도 걸리지 않는 몇 줄짜리 분노의 댓글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책임, 즉 우리의 것이 아닌 호출에도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ability)에 의해서만 검증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니 그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기에, 3일은 커녕, 3분도 지속되지 않는 분노의 지속시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매주 눈물을 흘리며 9개월 동안이나 가수를 도살하는 포맷이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그러므로 이것이말로 우리가, 아니 옛날 말로, '진정 이 시대가' 원하는, 원해야만 하는, 그것이 가장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자신이 들어가게 될지도 모를 구덩이를 땀을 뻘뻘 흘리며 파고나서, 그 구덩이 앞에서 더 큰 구덩이를 파는 자신의 동료들을 소개하며 넉넉한 웃음과 함께 차분한 진행까지 보여줬던, 그런데도 위로는 커녕, 다른 가수들보다 계속 노출되니 상대적으로 유리할지 모른다는- 자신이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공정한' 네티즌들의 성토까지 받았던, 주인(host)이라는 외피를 쓴 채 볼모(host-age)로 붙잡힌, 이 상황에서 웃기까지 해야하는 '가수' 이소라의 목을 조르며 언제까지 울 수 있을지 우리를 테스트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까지 읽고서도, 이소라를 붙잡고 있는 이병진과 김영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나, 우리는 '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다행히도, 우리에겐 예정된 희생자들이 있다. 물론 이건 거의 절망적이라 할 만한 파국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난 "다행히도"라고 쓴다. 오로지 그런 절망, 그런 파국,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논란과, 이 프로그램의 포맷이 불러일으키는 과녁을 찾지 못하는 분노와 슬픔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것이 정기적으로 주지시켜줄 희생을 통해서만, 499명의 손을 거친 후 이제 내 손에 쥐어진 '취향'이란 이름의 칼자루를 통해서만, 엄혹한 가요계의 현실이, 아니 가요계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된 실재 그 자체가 비로소 귀환하기/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실재는 때로 그러한 대체(substitution)에 의해서만 끊임없이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이 ‘환기(evoke)’된다고 쓰지 않고 ‘경험(experience)’된다고 썼다. 이는 비유가 아니다. 그 표현을 통해, 즉 이 프로그램에서 눈을 돌려 우리가 현실을 그대로 바라볼 때, 이미 존재했다고 여겼던 현실은 변화와 주목의 대상의 지위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몇몇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면, ‘고발’프로그램만큼 현실의 문제, 아니 문제로서의 현실을 지속시켜주는 것도 없다. 우리는 문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따라서 버텨야 한다. 그들을 끊임없이, 매주 죽이면서, 그들이 죽음 앞에서 부르게 될 절창에 때로 눈물 흘리면서 사실 그들을 죽음으로 내 몬 건 우리가 아니라고, 아니 우리만은 아니라고, 그러나 그 자리를 억울하다며, 혹은 이렇게까지 하면서 노래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떠나지 않으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니 안다고 생각해서, 알고만 있어서 바꾸지 못했던, 지난하고 전망 없는 어떤 변화에 이르는 깨알 같은 세부명세표와 잊혀진 파일들을 여기저기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 때까지,
요절한 김광석의 목소리를 빌어 빈다.
“그대, 잘 가라...”
*이 글을 거의 다 썼을 즈음 발견한 강명석의 글은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voice1&a_id=2011030813391983335) 다분히 반어적으로 쓰여진 그 글의 제목("우리는 가수의 목숨을 원한다")을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대로, 아이러니 없이 받아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진정 "우리는 가수의 목숨을 원한다."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그들과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비로소 '관계'맺고 '주체'로 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결과론적인 태도가 아닐까? 결국 미디어, 아니 '한낱'-이 경멸적 부사!- 방송사 PD가 제공한 제안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따라가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이 갖는 반동성은 자위대 구성을 금지한 평화헌법을 '자주'와 '주권'의 이름으로 비판하면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불을 당긴 가토 노리히로가 탁월하게 체화해 보여준 바 있다.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창작과 비평, 1997)) 나는 오히려 승전국인 미국의 주도로 일본에 억지로 '강제'된 평화헌법의 수동성을 그 뿌리에까지 밀어붙여 일본만이 아닌 전 세계 '모든 군대의 해체'를, 이상적이고 관념론적인 평화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아마겟돈(에 대한 상상)을 통해-'전 세계가 쑥대밭이 되고 나면 군대를 해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장하는 가라타니의 낭만주의저 종말론에, 적어도 이 시점에서만큼은 동의한다.(cf.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 b, 2007))
ahjabie (3.9.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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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 봤습니다.
글인데 보셨다니요? (농담입니다. 제가 오늘 좀 우울해서요..--;;) 처음 뵙는(게 아닐 수도 있는)데,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글을 읽고 느끼는, 카타르시스. 감사드립니다.
정말 오랜만에 글을 읽으셔서 그런 것일수도...(역시 농담입니다. 이유는 상동..--;;) 저도 감사합니다.
엠비시가 그나마 궁리해서 낸 프로그램인데 또 망할지 안망할지 두고 볼입니다만(망할 확률이 높지만..)...아자비님의 문체는 랩하면서하는 100미터 달리기군요..
저는 점은 못치구요..(상동..)...한글로- 뿐만이 아니라- 글을 쓴다는 것- 자체-에 대해 진심으로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에 말 그대로- 수동태로- '쓰여진' 글입니다. 당연히 '문체'는 모르겠고, '랩'도 거리가 있지만, 노래/음악의 호흡으로 쓰여진 글이란건, 의도한 건 아니므로 '그러고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스타카토에서 광폭하게 몰아치는 루바토까지 잡았다 풀고 풀었다 잡는 생각과 감정의 호흡, 요동, 수축과 이완의 리듬을 구획하기 보다는 거기에 몸을 맡겨보려 했죠,라고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거의 준비운동 없이 달린 거라 그런지, 제겐 거의 200미터로 느껴지더군요. --;; (지적하셔서 사실 헉, 좀 놀랐습니다)
정말 멈추지 않고 멀리까지 나아간 글이군요. 이 글과 비슷한 맥락에서 첫 방송에서 받은 인상은 거기에 출현했던 개그맨과 가수와 청중과 PD의 편집 방식 모두가 일종의 '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수동적이든 능동적 형태이든.그래서, '나는 가수다'라는 선언에 괄호쳐진 여러 부정판단들에 오히려 관심을 기울여여 하지 않나 생각했었죠. 이를테면, '아이돌이 아니라' '트로트 가수가 아니라' 등등.
감사합니다 (그래도 되는...거겠죠?) 그런데 suture님, 설명을 좀 더 덧붙여 주시면 더 또렷하게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답글 자체에 괄호가 적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저들 모두가, 의도와 무관하게,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종의 '연합'을 구성한 것이라는 말씀은 분명히 어떤 주장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또 '나는 가수다'라는 선언에서 부정판단들을 읽으셨다는 얘기는, 아이돌과 트로트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suture님의 위계적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나는 가수다>에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텍스트로서의 곡에서 분리될 수 없는 '가수'란 존재를 거기서 떼어내고, 대신 performance를 인지적 기호의 연쇄로, 요즘말로 '움짤'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물신화하려는 경향/유혹이 전면화되어 있으니까요. (정엽 노래 싸비인 'nothing better'를 숨죽여 기다리던 김신영과 벌떼들은 여기에 괴성을 지르고, 그 화면은 몇 번 반복됩니다) 여기에 가장 '성공적으로 걸려든' 이가 박정현이나,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죠. 정엽처럼 차분한 척 걸려드느냐, 백지영, 김범수처럼 실패하느냐, 윤도현처럼 밴드의 staging으로 시각화하느냐, 김건모처럼 (지나치게) 초연한 척 하느냐
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이를 통해 제가, 당일 공연에 대해 저의 '취향'이 아닌, 칸트가 3비판서에서 정의한 의미에서의 '판단'을 '암시'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만, 이러한 판단 자체는 예를 들어 싱어송라이터와 virtuoso performer의 차이를 파고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심수봉씨가 '트로트'라는 장르 안에 가져온 어떤 균열과 기여를 김범수의 (해석력 없이, 좋은 곡을 만나야만 빛나는) 보컬에 비교하는 건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전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트위터 식 답글이 되었던 거 같네요. '140자 내로 쓰시오' 우선 전 '나는 가수다'에선 취미판단이 괄호쳐져 있고, 물론 기능적으로는 청중들의 각자의 취향이 반영된다 할지라도, 그것도 무의미한 방식으로 말이지요, 그 괄호침이 또한 강요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수다'를 그 무엇이 아닌 부정판단으로 봐야하는 이유도 '위계적 가치 판단'이라기 보다는 지난 주 프로그램에서 '가수가 무엇인가'라고 출연자에게 질문되었듯이 저 선언이 질문으로 바뀌게 되는 지점에 있는 거 같아요 여타 음악 프로그램과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부정적으로만 가수를 정의내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표면적으로는 그게 장르적
인 형태일 수도 있고, 생산과 소비의 형식에 따른 형태일 수도 있고, 그래서 윤도현이 '홍대 인디 밴드' 후배를 몇 번이나 소환했던 것도 이 맥락에서 흥미롭게 읽힙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장르와 취향을 위계적으로 구별짓는 부정판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는 가수다'를 무한판단으로 만드는 저 질문에 답하는 데 이 프로그램의 무의식적 목적이 있지 않나 싶어요. 이 지점에서 '연합'과 관련한 정치적인 알레고리가 발견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형식적인 측면에서 말이지요. 처음에는 상대 가수가 블라인드 된 채로 그리고 앞으로 계속 누가 일곱 번째의 빈 자리를 채울 것인가가 블라인드 된 채로, 아무리 참여의 개인적인 동
기를 강조한다 해도, 이성의 간지를 통해서 하나의 공통된 목적에 기여하도록 모두에게 강요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공통의 목적이 무엇일까는 지금으로는 확실치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진보 대연합에 대한 알레고리를 읽을 수도 있겠지요. 다만 분명한 건, 그 형식이, (음악적) 권위를 일시적으로 취향과 양적 임의성의 결합에 의해서 무력하게 만드는 그러한 비극의 무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이나 거기에 장단을 맞추고 열광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이나 모두들 긴밀하게 엮여 있다는 사실이지요. 서로 좀 더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돕지 않으면, 마치 미드의 '로스트'의 주인공들처럼, 그 무대 자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leereel님의 흥미로운 지적 덕분에, 나중에 발전시키려고 했던 생각들 몇을, 시간 날때마다 틈틈이 엮어보려 하고 있습니다만 먼저 끝내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자꾸 밀리네요. 아쉬운대로 내일 오전 중에는 꼭 올리도록 하죠. 안팎으로 세상이 말 그대로 하수상한데, 어디서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어휴 어렵게 읽었네요...하나의 프로그램을 갖고 이렇게도 열심히 분석을 해주신 노고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요
글이란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던지면 턱, 하니 받는 공처럼 쉬운 글은 쓰기 싫고-차리리 공놀이를 하죠-, 그렇다고 끈풀린 연마냥 위로만 치솟는 글도 싫고. (그럴게 실종된 수많은 연들이 타거나 찢어지지 않고 모두 '습득'되어 어딘가에 모여있다면, 외롭진 않겠죠?) 그런 욕심을 내려놓고 포기하기가 참, 아직도 쉽지 않네요. 제가 밟고 선 땅의 흙 알갱이를 300배로 확대해 보여주다가도, 한 숨에 훌, 쩍 뛰어'사방조그스크롤이가능한위성사진과같은조망'을 제공하곤 싶은데- 머리 속에선 그게 가끔, 아주 가끔 되거든요-그런데 거기서 자판까지가 때론, 카프카의 성처럼 멀고,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GPS는 벌써 고장...저도 감사합니다.
감히 댓글은 못달겠는데 아자비님의 요 댓글에서 가슴이 뭉클하였다는 말은 전하고 싶어서 자판을 두드립니다.
관객님의 답글을 읽고 제 '요 댓글'을 다시 읽어보았지만, 어디서 '가슴이 뭉클하였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지, 도통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관객님께서 올려주신, 따님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을 읽고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감동의 비밀은 제 글이 아니라 관객님에게 있었다는 걸. 거기서 님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관객이 아니었다는 걸. 그러나 동시에,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는 걸. 그럴수만 있다면, 그 편지의 수신인이었던 소녀의 미래를 만나 확인해보고 싶다는 저의 호기심조차, 농익은 '관객'(님)의 그것과는 거리가 먼, 부산스런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돌아서면 식어버릴 플래쉬 세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바라는 것은, 비록 걷는 길은 다를 지 모르나, 때로 하품과 숙취와 분노와 얼룩과 땀에 뒤범벅되어 쓰여지는 글일지라도, 제가 쓰게 될 글중 몇몇은 언젠가, 님께서 그 소녀에게 건내주신 편지처럼, 도착해야할 이의 마음에 다달아, 그저 한 때의 '위로'가 아니라,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를 일으켜세우고 나아가 숨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라는 말은 거두시기를. -물론 그러시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더욱 '가감'없이 '과감'하게 다시기를 바래보는 것이지요...
오랜만에 접하는 아자비 님의 글이 많이 반갑지만, 지금은 이 가파른 호흡의 글을 읽을 만한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해당 프로그램도 한번 챙겨보고 눈도 좀 쉬게 해서 찬찬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모님! 잘 지내셨어요?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제 다음이셨던 것도 몰랐어요. 예. 글은 편해지시는대로 읽으셔도 (물론 그냥 TV만 보셔도) 되구요. 이래저래 저도 마음이 일렁이는 중인데, 이 감정적 멀미가 잦아드는대로 모모님글도 읽어볼께요. (그래도 덕분에 지난 며칠 간, 시도때도 없이 미역줄기처럼 떠오른 멜로디를 건져서 세 곡의 주제부를 건반으로만 녹음을 해놨는데 그 중 하나, 특히 어제 새벽에 만든 서주 진행은 그리 나쁘지 않아요, 라고 쓰고, 우연히 유튜브에서 NHK의 일본 쓰나미 비편집본을 처음으로 봤습니다...눈 앞에서 벌어지는 재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계'적'이지 않은 '기계'의 눈...
'언젠가 들려드릴 기회가 있겠죠 :)'라고 끝맺는 답글이었는데...이걸 보니 문득,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란 땅 속에 '타임캡슐'을 묻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마저 언젠간 이렇게 파헤쳐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 모르지 않으나, 그 광경을 사진찍고 남겨두는, 그 바보같은 '치~즈!'에 늘러붙은 눈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의 흔적으로서의, 미소. 자, 그러니까 우리 다시, 여기 보고, 눈감지 말고, 고개 좀 더 왼쪽으로, 그치그치그치 그래 자 간다, 치~즈...
비평고원 게시판에 이 글을 좀 더 밀고 나아간 글 둘('애타게, 사라지려는 매개를 찾아서'I, II)을 올렸습니다. 특히 leereel님께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애타게' 매일 한 번씩 들르며 기다리던 글이 올라왔군요.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그 두 글은 아껴뒀다 집에 가서 읽어야겠습니다 (임의로 아이디를 바꾸면 안 될 거 같아서, 기존의 아이디 suture를 다시 사용합니다)
어제 김건모가 마지막 립스틱을 칠하고 피에로처럼 반은 웃으면서 쿨한듯하지만 결코 쿨하지는 않은 표정으로 무대를 내려가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광대가 슬플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알았던 것 같은데, 평가를 받기도 전에 김건모는 피에로의 슬픈 모든 것을 보여주고 무대를 내려가더군요. 그 가슴속 서늘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건반을 끼고 그렇게 노래를 연습했다고 했고, 자신의 목소리의 톤과 노래가사와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넘어 노래하려 했던 가수가 있었고, 사람들은 판단을 했고, 그는 꼴찌를 차지했고, 가수들은 펑펑 울었고, 제작자들은 그를 구제하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모를 행동으로 그
를 다시 무대에 세웠습니다. 그 모든 슬픔은 지나간 것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지나가서 사라지려는 것을 고통스럽게라도 호명하고 싶은 시간이라는 무서움이 있지 않았을까요. 시간 안에서 우리는 분열되어 있다던 들뢰즈의 말이 자꾸만 생각나게 하는 방송입니다. 편하게 듣고 즐겨야 하는데 보면서 자꾸 눈물이 나는 걸 보면 분열된 제 모든 자아들이 서로 반목하면 아우성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자님의 파토스에 동의합니다. 거의. 왜냐하면 저는, 아마 지금쯤은 이해하시리라 믿지만 저는, 이 무대를 "편하게 듣고 즐겨야" 한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분열의 아우성을 틀어막지 않기를, 그 아우성에 귀를 막지 않기를, 그럴 수 있기를, 그래서 그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상황조차 버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때에야 진정 무언가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므로. '득음'은 그들만의 목표가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