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산
영천 채약산(498.6m)
신라 왕실의 약초를 캐던 산
낮지만 예닐곱개의 연봉 오르내리는 재미 쏠쏠해
지난 겨울의 매서웠던 추위에 다소 움츠러들었던 산꾼들의 활동은 입춘을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등산 인구에 비해 산행에 따른 제약은 더해지는 실정이다. 영남지방은 계속되는 건조주의보로 산불방지를 위해 곳곳에서 입산을 통제하고 있다. 더구나 올해는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 아직도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지역이 많다 보니 예년에 비해 산행지를 고르는 데 쉽지 않다.
영천시의 정남쪽에 자리한 채약산(498.6m)은 널리 알려진 산이 아니기애 한적해서 좋다. 해발고도가 채 500m가 되지 않는 산이지만 예닐곱 개의 연봉을 오르내리는 재미가 쏠쏠해 하루 해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인 산이다. 경부고속국도를 달리다가 영천IC 주변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볼 수 있는 이 산은 예로부터 자생약초가 많았던 것 같다. '약(藥)을 캔다(採)'는 의미의 산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천은 전국 최대의 한약재 유통시장을 갖춘 도시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특히 채약산의 약초는 신라 왕실에 올려졌다고 전해질 정도다. 이같은 유래로 '아무리 구하기 힘든 한약재도 영천에 오면 구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
영천역에서 완산동 신시장 삼거리에 이르는 300여m 거리 곳곳에는 안약도매상과 탕제원, 약초상회 등이 즐비하다. 최근에는 중풍치료로 명성이 높아 '한방도시' 영천임을 실감하게 한다. 실제로 영천에서는 연간 7,000통릐 한약재가 거래돼 국내 유통의 30%를 공급하는 한약재 유통의 중심이다. 이는 영천이 예로부터 영남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인데다 소백산과 태백산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비롯해 경주와 군위, 의성의 약초가 집결되고 안동, 봉화, 영주의 약초도 영천으로 모이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매년 10월이면 열리는 영천한약축제는 건강과 전통 한의학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연인원 2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행사로 자리잡았다.
채약산은 한국전쟁 초기 아군에게 불리한 전새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을 위기에서 구한 영천천투가 치열했던곳이다. 1950년 9월8일 임포동 방면에서 아군 제5연대에게 저지당한 적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채약산으로 침투해 대구시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던 적과 치열하게 배치한 다음 이 고지를 향해 진격하고 있던 적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승리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국군은 대구와 경주의 방어에 크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일대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히게 된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대창면소재지를 지나쳐 조곡리 대창초등학교다. 학교에서 290.7m봉에 올라 주능선을 따라 해맞이광장~임도~461m봉~채약산 정상~보국사를 거쳐 괴연동 버스정류장으로 잇는 등로다. 낮은 산이라고 얕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친 구간도 있지만, 능선길 곳곳에서 즐길 수 있는 주변 조망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버스정류장에 내려 조곡리 복지관 옆의 대창초등학교 정문으로 들어선다. 쳐다보는 학생들은 없지만 왠지 배낭을 메고 학교 안으로 들어서기가 다소 겸연쩍다. 그렇지만 학교 뒤편으로 돌아도 결국 학교 안으로 들어서야 산길을 만나게 된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의 채소밭가로 올라서서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오른편에 영천 이씨 묘지가 있다. 묘지 왼편 숲속으로 접어들면서 산길은 시작된다. 산 사면을 비스듬히 오르는 경사진 소나무 숲길에는 로프가 설치돼 있다. 20분이면 올라서는 주능선의 290.7m봉은 삼각점(영천 448, 1995 재설)과 소나무에 그네가 매달린 숲속이다. 이제부터 주능선을 잇는 왼편 등로를 따라 오르내리게 된다.
짧은 안부로 내려섰다가 오르면 394m봉. 억새와 가시덩굴로 뒤엉킨 봉우리에 서면 주변 조망이 열린다. 왼편 구릉지대의 대창면 일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고, 금호읍을 비롯해 경산 쪽의 시가지 일부도 눈에 들어온다. 394m봉을 벗어나 정면 주능선 너머의 채약산을 바라보며 진행한다.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안부로 잠시 내려섰다가 오르는 등로 주변은 아카시아 나무숲이다. 어지간한 곳에는 이미 수종갱신을 위해 베어진 아카시아 나무가 이곳에는 숲을 이룬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전국의 임야에 사방사업을 하면서 심은 나무다.
아무튼 오래된 나무는 비람에 쓰러져 가시덩굴과 뒤엉켜 장애물로 다가온다. 특히 녹음이 우거진 여름 산행에는 헤쳐 나가기가 힘들 것 같다. 한굽이 올라서면 경사는 심하지 않지만 계속되는 장애물로 길 찾기가 힘들다. 394m봉에서 410m봉까지 30분 정도는 길 찾기가 조금 까다로운 곳이다. 다소 애매한 산길은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장애물이 심해 때때로 끊어지는 곳도 있다. 그렇지만 주능선만 놓치지 않고 잘 찾아간다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삼각점(영천 445, 1995 재설)이 있는 410m봉에 이른다.
410m봉은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 대창면민들이 산정에 모여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해맞이광장이다. 패러글라이더 활공장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시설물이 설치돼 있지는 않다. 그저 평범한 이 봉우리에 서면 주변 조망은 좋은 편이다. 동남쪽으로 사룡산, 구룡산, 반용산 등이 용의 꼬리를 물고 뻗어가며 청도군과 경계를 이룬다. 그 너머로는 경주의 오봉산도 머리를 삐죽 내밀고 있다. 서북쪽 경부고속국도 너머로는 금호읍 하양읍이 조망되고, 유별나게도 많은 저수지가 눈길을 끈다. 영천은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했지만 강수량이 적다 보니 이런 관개시설이 발달했다. 멀리 대구의 팔공산이 희뿌옇게 다가오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사각거리는 잔설을 밟으며 건너편 채약산을 향해 길을 잇는다. 목재 계단으로 정비된 산길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보행자의 보폭을 고려하지 않은 시설물은 오히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피로감만 안겨준다. 410m봉에서 내려오면 오길리와 대곡리를 잇는 임도가 가로지르는 넓은 쉼터다. 이정표와 등산로 노선도가 보이고, 벤치와 용도를 알 수 없는 폐건물 한 동도 있다. 땀도 식힐 겸해서 배낭을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수통을 꺼내 한 모금의 물로 갈증을 달래본다. 해맞이광장서부터 채약산 쪽으로는 등산로가 깔끔하게 정비돼 있는 것으로 봐서 찾는 사람이 많은 듯싶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461m봉으로 향한다. 짙은 소나무 숲속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는 순하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번잡스럽지 않아 좋다. 낮은 봉우리를 넘어 목재 계단길로 오르면 갈림길 이정표(약남마을 2.2km, 채약산 정상 0.4km)를 만나고 왼편 461m봉에 선다. 이 봉우리는 간이운동기구와 벤치가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조망도 좋다. 건너편의 채약산이 지척에 보이고 발아래로 경부고속국도와 금호흡, 대창면 일대의 시가지와 전답들이 훤하다. 남쪽으로는 지나온 산등성이와 그 너머로 멀리 금박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 봉우리 서편 약남마을 쪽으로 내려서면 쉰질바위가 있다. 바위의 높이가 쉰길이나 된다 하여 쉰길바위로도 불리며, 구암리의 신라시대에 축조된 청제저수지와 관련된 전설을 안고 있다.
이정표가 서있는 갈림길로 되돌아 내려와 5분이면 채약산 정상에 이른다. 최근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정상석과 삼각점(영천 317, 2007 재설)이 있지만 주변 조망은 좋은 편이 아니다. 하산은 정상에서 북쪽의 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된 능선으로 잇는다. 잠시 후 보국사 갈림길(채신동 1.2km, 보국사~괴연마을1.8km)이다. 조망은 오히려 이곳이 좋다. 발아래 채신공단과 그 너머로 영천시가지가 보이고 멀리 영천의 조산인 보현산도 아슴푸레하게 다가온다. 보국사쪽으로 꺾어들면 건너편에 금오산, 예향산 등 고만고만한 낮은 산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이어가고 산자락에는 마을들이 도란도란하다. 보국사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지만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에다가 잔설로 인해 엉덩방아를 서너번 찧어야 했다.
보국사는 그렇게 오래된 사찰은 아닌 것 같다. 고즈넉한 절집은 겨울잠에 빠졌는지 인적이라고는 느낄 수 없다. 아직도 하얗게 쌓인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인 절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무척 서정적이다. 절집을 뒤로하고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여유롭게 30분이면 괴연 노인정 옆의 괴연동 버스정류장에 닿는다.
*산행길잡이
◎조곡리 버스정류장(대창초등학교)~290.7m봉~해맞이광장(410m봉)~오길리, 대곡리 임도~461m봉~채약산~채신동, 보국사 갈림길~보국사~괴연동 버스정류장<4시간 소요>
◎괴연동 버스정류장~보국사~채약산~461m봉~임도~임도 따라 오길리<3시간 소요>
◎괴연동 버스정류장~보국사~채약산~461m봉~약남마을<2시간30분 소요>
*교통(지역번호 054)
채약산 산행의 들머리인 대창초등학교가 있는 조곡리행 대중교통편은 불편하다. 완산동의 수덕예식장 앞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하는 시내버스(영천교통 333-3552)가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영천시외버스터미널(334-2556)에서 55번, 555번 시내버스를 이용, 금호읍으로 가서 자주 운행하는 대창행 시내버스로 갈아타는 것이 좋다. 영천시내에서 택시(영천개인택시 337-1818)를 이용할 경우 15,000원 정도. 산행 날머리인 괴연동에서 영천시내행 버스는 오후 13:50, 15:50, 17:50, 20:00에 있다.
서울-영천 강남고속버스터미널(ARS 1688-4700)에서 1일 3회(08:30~18:30) 운행.
부산-영천 노포동종합터미널(051-508-9400)에서 1일 9회(07:40~18:00) 운행.
대구-영천 동부시외버스터미널(ARS 1688-0017)에서 10~20분 간격(05:50~22:00) 운행.
*숙식(지역번호 054)
숙박시설은 영천시내 완산동 영천역 주변과 창구동 일대에 많다. 늘푸른장(333-4801), 라벤더모텔(338-0333)을 비롯해 창구동의 모텔강변(333-8004), 미도장모텔(331-3286) 등이 있다.
먹을거리로는 채약산 기슭의 약남2리 습지에서 재배한 미나리가 유명하다. 향이 뛰어나고 줄기가 연하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뛰어나다는 가야미나리는 지금 제철을 맞아 인기다. 영천은 예로부터 한우가 유명해 쇠고기 맛이 일품이라 한다. 영천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의 편대장영화식당(334-2655)은 육회로 소문난 집이다. 주물럭과 찌개에 식사도 가능하다. 창구동의 삼송꾼만두(333-8806)의 만두는 별미다. 금호읍의 구도로 농산물직판장 옆의 어탕국수(053-818-0827)에서는 어탕국밥과 민물고기 조림 및 매운탕도 구미를 당긴다. 완산동의 영천재래시장에는 국밥을 비롯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많다.
글쓴이:황계복 전 부산산악연맹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