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내린 비로 목마른 대지는 완전 해갈이 되었고
정화된 대기가 싱그러워 좋은 주말입니다.
며칠 전 옛 직장 후배들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두 번째 근무했던 회사에서 만나 호형호제 하게 된 친구들인데
함께 근무하면서, 이만큼의 일을 이리도 잘 하는데
이런 처우를 받으며 여기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아까운 친구들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퇴사하여 조그만 사업을 경영하고 있고
한 친구는 현재도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만큼, 전 직장 이야기, 현재의 일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아직 현직에 있는 막내가 향후의 사회생활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 친구는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이 뛰어나고 원하는 성과를 내기에
다른 동료들에 비해 2배 이상의 일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조직의 생리란게 묘해서 성과를 잘 못내는 사람에게는 일이 적게 돌아가고
일 잘하는 친구에게는 일이 쌓입니다.
월급이나 성과급 보상도 별로 차이가 없이 말입니다.
상당수의 중소기업이 그러한 현실에 처해 있지요.
이 친구가 이제 직급이 올라가고 나이가 들어가니
향후가 걱정이 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남아 계속 일을 하고 싶지만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이니
대비를 하여야한다는 강박관념도 당연히 있겠지요.
저를 포함해 먼저 퇴직한 두 명의 한결같은 반응이 재미있었습니다.
회사에서 버틸 수 있는한 버티라고,
등 떠밀어도 모르는체 눌러붙어있으라고.
회사 밖이 얼마나 추운지 아냐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친구는
작더라도 내 회사를 경영하면 마음 편하고 좋을 것 같았지만
매월 월급 때가 되면 직원들 월급 줄 돈 만들 일에,
경기 따라 영업 편차가 커서 적자가 우려될 때가 많고
낙관적인 상황보다는 어려운 사건들이 더 많이 발생하는 현실에
몇 사람의 생계와 사업의 성과를 책임진 입장에서
얼마나 가슴 졸이며 회사일을 하고 있는지 아냐고 하더군요.
매월 고정수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하고 행복한 일인지 아냐고 하더군요.
프리렌서로 중소기업 지원을 하고 있는 제 경우,
일과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이보다 좋은 직업이 없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 공부, 답사, 봉사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사니 좋고
할 일도 어느 정도는 제가 날짜와 시간을 조정가능하니 좋습니다.
하지만 일과 수입이 들쭉날쭉하고 예상이 안되니
불안한 마음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당연히 크겠지요.
2~3년만 더 일찍 회사를 나와 이 일을 시작했으면
일도 수입도 안정적으로 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쓸모없는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긴 하지만
회사에서 눈치 줘도 눈 딱 감고 눌러붙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 되었다면 안정적인 일과 수입을 지속하는 대신
현재 느끼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없었겠지요.
가지않은 길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겠지만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후회이기도 합니다.
우연히 대기업 간부 출신의 시인 김기택이 쓴 '사무원'이란 시를 읽으며
직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상당수는, 상당 시간을 '고행업무 속에 은둔'해온게 아니었나 생각도 듭니다.
일에 몰입하여 성과를 낸 후의 성취감, 그에 따른 보상이
큰 즐거움이요 기쁨임은 사실입니다만
그 '몰입'이 지나쳐서 나를 잊고 가족과 주변을 잊어서는,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조건 '수그리' 하는 것이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만
새로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제때 시작할 수 있도록
주변을 돌아보고 준비를 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다리와 의자다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지 않도록
성찰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원(모셔온 글)==========================================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金收支心經(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장좌불립)’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김기택의 '사무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