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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빛바랜 사진 한장 이 건 형 한 장의 흑백 사진과 함께 이메일을 받았다. 보낸 이는 첫 교단생활이던 섬마을의 제자로서 끊임 없이 아름다운 옛 추억을 일깨워 주어왔다. 그런 인연은 두 아들의 혼사에 주례까지 맡겨온 각별한 사제간이 되었다. 그의 형은 청년학교를 함께 이끈 반장이기도 했다. 형님이 향우회 카페에 올리면 좋겠다고 주신 몇 장에 사진을 받아보니, 그중에 선생님 모습인 사진이 반가워 알려 드리고 싶다고 한다. 사진은 ‘소청도 예동 청년학교 졸업기념. 1963, 3. 10.’라 는 글자가 함께 현상 되었다. 뜻밖에 잊혔던 해묵은 열다섯 명의 인물기념사진이다. 불현듯 먼지 쌓인 묵은 앨범을 들춰내니 그때 몇 장 되지 않는 모습들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사진사가 없는 좁은 섬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만 대청도에서 출장시켰으니 사진이 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만나보고 싶다. 모두가 아니어도 좋다. 몇 명씩이라도 한자리에서 만나서 옛 이야기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다. 아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행복했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그중에서 위 사진에 찍힌 십여 명을 자세히 뜯어본다. 낯익은 모습이지만 아물거리는 이름이 적지 않다. 다시 연락하여 각각의 이름과 근황을 다시 부탁 하여 알아내고 몇 번이고 그 모습에 이름을 올려본다. 저세상에 먼저 간 세 사람에게 명복을 빌어 준다. 고향을 지키는 이가 네 사람이며 대부분 인천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내 모습도 그렇게 앳돼 보이는지 낯설다. 사진 중앙 위에 유리 호야 등불에서 눈길이 멈춰 선다. 앞줄에 조순철군은 등불 준비에 열성껏 봉사했었지. 끄름에 찌든 호야를 말끔히 닦고 손질을 정성껏 했었지. 땔감이 귀하여 한겨울에도 불 피울 엄두도 못 냈지만, 추위도 잊었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정이 넘어도 수업은 이어졌지. 날마 다 모두가 신들린 사람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빛이 났던가 봐. 교육과정을 처음 짤 때에 청년들의 요구는 의욕에 차있었다. 많은 요구에 주어진 여건에서 압축 되었다. 세상 살려면 신문은 읽고 싶은데 신문에 섞인 한자 정도를 익히면서 한다. 그리고 그 내용 에 상식용어도 알았으면 하는 방향이다. 영문자의 기본이라도 알았으면 한다. 생활에 필요한 계산 을 만큼의 수판도 익히고 싶다. 등의 요구 사항으로 정리되었다. 옥편 이용법과 글자의 합성을 익힘으로써 혼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주 교재로 실용한자 1,300자 교본을 정했는데 각 글자에 예문 단어가 3개~4개가 있어 이해가 쉬웠다. 그 단어와 사자성 어에서 교훈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사회경제 등 시사성을 알릴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하여 좋았다. 내가 배운 것이 더 훨씬 더 많았다. 주판도 그렇다, 실은 나도 많이 미숙했다. 교본을 사들여 합리적인 운지법을 연구하며 가감승제에 이르기까지 남몰래 익혔다. 시작은 가르친다고 했지만, 기능은 곧 앞서갔다. 이 또한 훗날 학생지도 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영어의 자모를 익힌 것이 훗날 이메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뒷이야기를 들으며 기뻤다. 이 고장은 8·15 광복도 2개월 후에 알았다는 조용하기만 한 섬이다. 서슬이 시퍼렇다는 5·16 혁명 후 첫 여름방학이다. 상부 관(官)의 지시로 청년들을 모아 ‘농촌청년학교’를 개설 운영하라면서 두툼 한 교재를 보내왔다. 농어촌계몽과 농업기술을 보급하는 목적이라고 했다. 우선 방학 동안의 한시적 강습이다. 이 업무는 농업학교를 졸업했고 갓 제대한 젊은 나에게 맡겨 원만히 마치게 되었다. 처음 부임 하면서 생각하던 환경개선으로 온상재배법의 보급이다. 하숙방을 구하기 어려운데 전통 농사법이라고 안방 아랫목에서 고구마 싹을 길러내고 있었다. 안방은 사람의 주거가 아니고 비위생적 환경으로 습도가 높은 고구마의 주인이다. 퇴비 썩히는 열을 이용한 온상 재배법의 원리를 교재에서 찾아 설명하고 이듬해 봄에 시범 재배하여 완벽은 아니지만 성공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점차 완전히 안방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교육기회를 놓친 대부분이 청년들이 소정의 강습이 끝났음을 아쉬워하며 계속하기를 원했다. 몇 차 례회의를 거듭한 결과 20여 명이 넘는 희망자가 주경야독을 결의하였다. 과목은 가능한 범위에서 매 일 2시간씩 한다. 강사는 완전봉사를 전제로 비용을 최소화하여 주간하던 수업을 야간수업으로 이어 갔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청년회에서 대단한 것을 보았다. 지혜롭고 성실한 참모습과 단결된 힘도 보았다 음주운전(飮酒運轉)보다 무서운 음주운항(飮酒運航)의 피해가 컸던 섬이다. 술(酒)이 생업에 미치는 영향을 알리고 금주사회(禁酒社會)를 자율로 이행하였다. 상가(喪家) 등에는 배를 띄워 사들이는 특별 배려도 하면서, 허락하지 않는 술은 배에서 내리면서 술병을 깨고 밀주 항아리를 뒤엎은 청년들이다. 문화,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신문도 한 달을 넘긴 구문일 뿐이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2~3개밖에 없 는 무료한 작은 섬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 연극을 포함한 장기자랑의 예술제가 매년 겨울 어한기(魚閑 期)에 열린다. 연출부터 감독 배역 등 어느 한구석 허술함이 없다. 이 행사를 청년들의 힘만으로 이루 어 낸다. 아쉬움이 있다면 아직도 여자 배역을 남자가 분장하고 맡아야하는 남녀유별이 남아 있다고할 까? 아니 우리 청년하교에도 여성들이 함께 참여하였더라면 섬마을 총각 선생님이 더 신이 나서 열성 을 부리지는 않았을까? 전출 명을 받고 청년학교가 중단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어 갈 수 없음이 안타깝고 아쉬웠다. 상록 수의 흉내를 내며 평생을 살았더라면 하면서, 진정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이 짧은 봉사의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 * )
글을 쓰신분께서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리나 봅니다. 글을 보신 분들중에 보충할수 있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댓글란에 꼭 글을 올려주시면. 수필을 쓰시는데 큰 도움이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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