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킹도 끝까지 올려야 해요? 아, 혼자 입으려니 민망하네."
12일 오후 연세대 에서 만난 김민우 (19·연세대)는 캠퍼스에서 사진찍는 게 쑥스러운 듯했다. 김민우는 자기를 알아보고 학생들이 달려와 사인 요청을 하자 환하게 웃었다. 팬의 등에 종이를 받쳐 쓱쓱 자기 이름을 써 내려가던 그는 " 이집트 에서 보낸 지난 보름간 일이 꿈만 같다"고 했다. U―20 월드컵(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3골을 터뜨리며 대회 최고 스타로 떠오른 김민우는 이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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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외친 '네버 스톱(Never stop)'이틀 전 김민우는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울지는 않았다고 했다. 한국이 10일(한국 시각) 끝난 가나와의 8강전에서 2대3으로 분패했을 때였다. "스스로 대견해 할 만큼 열심히 뛰었거든요. 아쉬움은 컸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기 직후 도핑 테스트를 받느라 라커룸에 들르지 못한 김민우는 테스트 후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아깝게 4강행이 좌절되고 우느라 눈이 빨개진 친구도 많았지만 이내 기운을 차렸더라고요. 선생님이 애들을 잘 다독거려 주신 것 같았어요." 김민우는 홍명보 감독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청소년팀 8강의 비결을 묻자 김민우는 "즐겁게 하나가 된 것"이라고 했다. 이집트에서 한국 대표팀은 패배와 승리의 순간을 수시로 넘나들었지만 늘 팀 분위기는 활기에 넘쳤다고 그는 말했다. "첫날 카메룬전에서 지고 난 뒤 다들 꾸중 들을 생각에 긴장했어요. 근데 선생님은 지고 나선 카메룬의 '카'자도 꺼내지 않으셨어요. 다음 경기인 독일 전에 대한 얘기뿐이었죠."
따뜻한 격려를 받은 어린 태극전사들은 독일전 무승부(1대1)를 통해 자신감을 되찾았고, 이는 미국과 파라과이전 3대0 대승으로 이어졌다. "파라과이전이 끝나고 선생님이 '키가 작아도 네가 언젠간 헤딩으로 한 골 넣을 줄 알았다'며 웃으시더라고요." 서정원, 김태영 코치는 선수들의 슬리퍼를 감추거나 작은 돌을 던지는 장난으로 선수들의 긴장을 덜어줬다.
그렇다고 선수들이 마냥 풀어지지는 않았다는 게 김민우의 얘기였다. "경기 전날 밤엔 선수들끼리 늘 숙소 근처 공원으로 가서 선생님이 일러준 구호인 '네버 스톱(Never stop)'을 외쳤어요. 벤치를 지키는 선수나 그라운드에 서는 선수나 모두 한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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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도, 작은 키도 이겨낸 열아홉살김민우는 1m71로 청소년 대표팀 최단신이다. 삼전초·배재중·언남고를 거치는 동안도 늘 최단신이었다. 공 다루는 기술은 아버지 김성대(55)씨에게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진주 봉래초등학교에서 조광래 경남 FC 감독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빈 유망주였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고교 졸업 후 축구를 접었다.
김민우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뻔했다. 당뇨병에 시달린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허득(52)씨가 음식점 일로 힘들게 생계를 꾸려갔다. 다행히 김민우의 재능을 아끼는 이들이 많았다. 고향인 진주에서 어린 김민우를 지도했던 장연환 대한축구협회 심판부장 등이 중심이 돼 후원회를 꾸렸고, 이 도움 속에 김민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갔다. "합숙소에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는 김민우였다.
김민우의 가능성은 정종선 언남고 감독을 만나 꽃을 피웠다. 정 감독은 김민우를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로 키웠고, 김민우는 2학년이던 2007년 17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의 주축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하지만 김민우는 그해 8월 U―17 월드컵 본선을 사흘 앞둔 연습 경기 도중 오른쪽 복사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축구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진단에 펑펑 울었지만 김민우는 마음을 다잡고 대표팀 주치의 김현철 박사가 있는 김앤송 유나이티드 정형외과를 찾아 재활에 매달렸다. 정종선 감독은 "힘든 재활 과정을 8개월 만에 이겨내고 복귀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2년 후 김민우는 '홍명보호(號)의 황태자'가 됐다. 김민우는 인터뷰가 끝났다고 하자 "지금까지 도와주신 분들에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