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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연재 마지막 무관생도들
이 원 규
6 탈출
홍사익을 찾아온 두 동기생
1919년 4월 하순의 토요일 오후, 홍사익 중위가 육군대학 입시를 위해 숙소에서 책과 씨름하는데 반가운 동기생들이 찾아왔다. 박승훈과 안병범(安秉範)이었다. 안병범은 안종인이 최근에 바꾼 이름이었다. 육사를 졸업하며 박승훈은 센다이(仙台) 주둔 연대로, 안병범은 구마모토(熊本) 연대로 갔는데 주말을 낀 짧은 휴가를 같은 기간에 얻어 도쿄에 온 것이었다.
“잘 왔다. 술 한 잔 하며 회포를 풀자.”
홍사익은 두 친구를 보름 전 이응준과 사케를 마셨던 주점으로 데려 갔다.
덩치가 크고 완력이 좋으며 성격이 대범한 박승훈과, 동기생들 중 가장 키가 작지만 표범처럼 몸이 빠른 안병범은 체구는 차이가 크나 성격이 비슷해서인지 졸업한 후에도 자주 소식을 주고받고 만나는 모양이었다. 둘은 홍사익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박승훈은 대한제국유년학교부터 동기생이요, 안병범은 도쿄유년학교 시절 강제합병으로 한국학생반이 해체되고 일본인 생도대에 분산 배치될 때 같은 구대로 가서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었다.
“조선 땅에서는 독립만세 함성이 가득한 모양인데 우린 어떡해야 하나 의논할 겸 둘이 만났지. 그리고 자네를 보고 싶었지.”
박승훈에 이어 안병범도 입을 열었다.
“김광서 선배가 경성으로 갔고 지석규와 이응준이 따라가듯이 들어갔어. 자네 생각을 듣고 싶었네.”
마지막 무관생도 동기생들은 홍사익을 자신들의 정점(頂点)으로 여겼다. 그리고 김광서 선배와 홍사익 · 지석규 · 이응준이 아오야마 묘지의 맹세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맹세를 한 것을 묵시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 잘 왔어. 이응준은 경성 가는 길에 들렀었어.”
홍사익은 두 친구에게 술잔을 안겼다. 셋이 잔을 부딪어 건배하고 나서 차분하게 두 친구의 근황부터 물었다. 육사 졸업 직후 결혼할 때 축하하러 가진 못했지만 축하전보와 부조금을 보낸 터였다. 그 새 둘 다 아들을 낳아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다고 했다.
박승훈이 수첩에서 아들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씩 웃었다.
“아내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들 낳아 가문의 대를 잇게 해놨으니 이제 독립운동 전선으로 가서 싸우다가 죽어도 되지.”
“박 중위도 아들, 안 중위도 아들, 나도 아들 낳았으니 우리가 모두 같네.”
홍사익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병범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만세운동은 그냥 실패로 끝난 것 같아. 독립투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그런데도 나를 던져야 하나? 눈을 감으면 어린 아들이 눈에 선한데 다 버리고 나를 던질까? 밤마다 잠이 안 와.”
박승훈도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몇 번 짐을 꾸렸었어. 하지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어. 당장은 못가지만 나는 언제고 갈 거야. 조국이 목마르게 우리를 부르는 결정적인 때, 운명처럼 나서야 할 때가 올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때는 가야지.”
홍사익은 고민을 털어놓은 두 친구의 술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나도 자네들하고 똑 같아. 마지막 무관생도 친구들 대부분이 그러고 있을 거야. 나를 던지느냐 참느냐 선택은 자기 운명을 바꾸게 되지. 자식의 운명, 아내의 운명, 부모의 운명까지 바꾸게 되지. 그래서 마지막 결단을 내리지 못하지. 자기를 버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냐. 나도 언젠가는 갈 거야. 지금은 결정을 뒤로 미룰 이유가 생겼어. 내년 육군대학 입시 후보자로 내정됐어. 그걸 포기할 수 없어.”
두 친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곁에 앉았던 안병범은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렇지. 그걸 포기할 순 없지.”
박승훈은 술상 위로 팔을 뻗어 그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홍사익, 넌 그래서 탈출 못하는구나. 나도 이해한다. 육군대학은 가야지.”
홍사익은 한동안 잠자코 앉아 있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응준이 러시아 연해주에 파병 가서 동포들을 사찰하는 임무 때문에 위장병이 나서 후송된 일, 연해주와 북간도의 독립운동 조직과 홍범도 · 최재형 등 독립투사들 이야기, 현지에서 탈출을 계획하다가 포기한 경위를 응준에게서 들은 대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육대 입시준비를 겸해서 파고들었던 국제정세와 힘의 균형, 3·1 만세 운동 경과와 일본 및 미국·영국 등 세계열강의 대응에 대해서도 냉철히 분석해 말했다.
다 듣고 나서 안병범이 입을 열었다.
“자네 설명을 들으니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장차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겠어. 우리는 끝내 탈출 못할지도 몰라. 당장 실천하지 않고 이렇게 의논하는 것부터가 그래.”
박승훈이 뚜릿뚜릿해진 눈을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슬프고 괴롭다. 우리에게 조국이 뭐야! 조국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내 맘을 괴롭게 하는 거야?”
박승훈은 그렇게 소리치더니 울먹거렸다.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자격지심 안 갖고 앞만 보고 달려갈 거 아냐!”
세 사람은 마치 그러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말없이 술을 권하고 받아 마셨다. 박승훈은 종업원이 새 술병을 가져 오자, 하나 더 가져오라고 하고는 병 채로 들고 마셔 빠른 속도로 취해 갔다. 한 참 뒤 혀가 꼬부라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군가를 부르고 싶다. 삼청동 유년학교 때 불렀던 ‘독립가’말야. 큰소리로 부르면 헌병이 달려 올 거고 홍사익 중위 육대 가는 데 장애가 되겠지. 사익아, 말리지 말아 줘. 조그맣게 부를 테니까.”
홍사익은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세아의 대조선이 자주 독립 분명하다
애야 에야 애국할세 나라 위해 죽어 보세
분골하고 쇄신토록 충군하고 애국하세
깊은 잠을 어서 깨여 부국강병 진보하세
박승훈은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큰 편이었으나 음성을 죽여 불렀다. 홍사익과 안병범도 따라 불렀다. 목이 메었다. 큰 소리로 노래하지 못하는 조국의 현실이 슬프고 실천하지 못하는 양심의 아픔도 컸다.
홍사익은 두 친구와 료칸(旅館)으로 가서 함께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자다가 꿈을 꾸었다. 일본군 장군이 된 자신이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들이 썼던 투구를 쓰고 질풍처럼 말을 달려 고국 강토를 휩쓰는 꿈이었다. 잠에서 깨 한숨을 쉬었다. 두 친구도 편한 잠을 못 자는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성락원의 만찬
이응준이 평양으로 떠난 다음날 오후, 지석규는 김광서와 함께 의친왕의 초대를 받아 성락원으로 갔다. 의친왕이 승용차를 보내줘 인력거나 택시를 탈 필요가 없었다. 숲속 언덕에 있는 별궁에 도착했을 때, 젊은 여인이 택시를 타고 막 도착하고 있었다. 김광서 중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중위님.”
김광서가 그녀를 현계옥이라 소개했고, 지석규는 목례만 하였다. 그때 도착시간에 맞춰 미리 나와 기다린 듯 양복을 입은 신사가 걸어 나왔다.
“어서들 오시게.”
그가 의친왕 이강이었다.
의친왕은 천천히 걸으며 성락원의 전원(前苑)과 후원, 그리고 구조물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지석규는 의친왕이 정원 산책에 현계옥을 당연한 듯이 합류시키는 것을 보고 그녀가 과연 조선 제일의 품격을 갖춘 기생이구나 생각했다.
성락원 본원(本苑)에 있는 영벽지(影壁池)라는 연못 앞에 의친왕이 발을 멈추고 섰다. 철쭉이 핀 절벽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연못 위에 비쳐 보였다.
“사람 마음을 저렇게 거울처럼 비쳐 볼 수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들은 왜놈들한테 미리 다 붙잡혀 가겠지.”
의친왕이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지석규는 그것이 두 사람의 마음속을 알고 싶다고 하는 뜻임을 알아차렸으나 그냥 묵묵히 서 있었다. 의친왕과 친하다는 김광서도 묵묵했다.
의친왕이 지석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아우를 만난 적이 있는가?”
지석규의 유년학교와 육사 후배인 영친왕을 말하는 것이었다.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습니다.”
“기유년(1909년)에 그대를 포함하여 무관학교 생도들이 떠날 때 나는 지금처럼 감시 받으며 이 나라에 있었지. 내 나라 사관생도들을 적국 사관학교로 보내는 건 황실의 굴욕이었어. 그러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걸었었지. 지금 모두 다 임관해서 일본군 부대에 배치되어 있겠지. 만주로 탈출했다가 체포된 조철호라는 오산학교 교사가 육사 출신인 걸 나는 알고 있네.”
의친왕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송석정(松石亭) 앞이었다. 연못을 앞에 두고 앉은 높다란 누각이었는데 장송(長松)이 지붕을 뚫고 올라간 형상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니 널따란 마루에 이미 저녁식사를 겸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의친왕은 술을 몇 잔 돌린 뒤 계옥에게 가야금 병창을 하라고 명령했다.
계옥이 가야금 병창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의친왕은 병창을 듣기 위해 시킨 게 아니었다. 곡이 시작되자마자 허리를 두 사람에게 기울이고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혹시 가까운 곳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정탐꾼을 방해하기 위한 것인 듯했다.
“사람들은 황실이 무력하게 나라를 일본에 들어 바쳤다고 생각하지. 지석규 중위, 자네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봐.”
지석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무관학교에서 저희를 가르친 노백린 교장님과 이갑 참령님 같은 분들은 ‘너희가 정신 차리면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일본에 간 얼마 후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일본 사관학교를 다녔습니다. 황실에 대한 원망감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의친왕은 들고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나는 황족인 게 부끄러워서 하루도 절치부심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지만 잊을 수가 없어.”
의친왕의 목소리는 물기에 배어 있었다.
그때 김광서가 상반신을 의친왕에게 기울였다.
“저희는 독립운동 전선으로 가려고 병가를 얻어 나왔습니다. 만주로 갈 결심입니다.”
패망한 나라의 왕자는 눈을 번쩍 섬광처럼 빛냈다.
“내 예감이 맞았군. 나도 탈출할 생각이야. 황실에서 누군가가 독립전선에 나서 싸우다가 죽어야 백성들이 용서할 게 아닌가. 만주, 만주 땅이 우리 희망이야. 그대들이 뜻을 이루기를 비네.”
그때 현계옥의 가야금 병창은 자진모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의친왕이 다시 말했다.
“계옥은 사나이들 몇 사람보다 큰 지사(志士)이네. 독립운동을 하는 정인(情人)을 잡으러 경찰이 쳐들어왔는데 태연하게 모친 이불 속에 숨겼네. 정인이 엊그제 서대문 감옥에서 나왔어. 곧 둘이 만주로 탈출할 것이네.”
의친왕은 지석규와 김광서의 손을 모아 잡았다.
“조심들 하게. 나는 일부러 방탕한 척하면서 지내네. 탈출해 독립운동 전선에서 만나세.”
김광서가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군자금을 마련하십시오. 만주로 못가시면 저희에게 주십시오.”
“마련하려 애쓰는데 쉽지 않네. 마련되면 내가 갖고 나가겠네. 물론 그대들과 함께 쓸 생각이네.”
의친왕이 말했다.
지석규와 김광서는 현계옥과 함께 의친왕이 내준 승용차를 타고 성북동을 떠났다. 지석규 중위가 조수석에 앉고 김광서가 그녀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두 분 중위님, 제게 잘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현계옥의 말을 받아 김광서가 말했다.
“나도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네.”
그녀를 그녀의 집이 있는 수표교 근처에 내려주고 두 사람은 사직동으로 갔다. 후원에 있는 경천각에서 술을 깨기 위해 차를 마셨다.
김광서가 말했다.
“이제 현계옥과 의친왕에 대한 오해가 풀렸나?”
지석규는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그 여자의 정인이라는 현정건은 누굽니까? 현정건, 현계옥 동성동본 아닙니까?”
“현영운(玄暎運) 장군의 아들인데 독립투사라네. 독립운동하다가 열흘 전 체포됐는데 증거 부족으로 풀어준 모양이야. 계옥이 우리에게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영친왕에게서 현정건의 군자금을 받으려 할 것이네. 쉽지 않을 거야. 황실 자금은 총독부가 장악하고 있으니까. 현정건, 현계옥, 동성동본은 맞네. 현정건 집에서 첩실로도 안 된다고 반대하는데 그래도 두 사람 사랑이 굳건하다네.”
김광서가 말했다.
지석규는 밤이 깊어진 뒤 집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김광서가 솟을대문 앞에 나와 배웅하며 말했다.
“이응준은 어떻게 된 걸까?”
“약혼녀를 만나 회포를 풀고 있겠지요. 십 년 만에 만났을 텐데 또 헤어지게 되니 참 딱한 일이지요.”
“그러게 말일세. 그리고 이상재 선생이 잡혀가셨으니 우리도 조심하세. 오늘 성락원에 다녀온 걸 경찰이 알 것이네.”
“네.”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헤어졌다.
이응준의 갈등
이응준은 평양에 머무는 동안 매일 오전 이갑 참령의 조카 이태희의 서경병원에서 위장병 치료를 받고 나머지 시간은 정희와 함께 보냈다. 그는 임시로 하숙을 얻어 묵고 있었지만 정희가 병원 뒤에 붙은 사촌오빠 이태희의 살림집에 머물고 있어서 진료할 때 나와서 지켜보기도 했다.
첫날 진료를 하고 이태희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중위의 위장상태는 아주 나빠요. 더 악화되지 않고 간신히 상태가 유지되고 있어요. 하긴 군병원에서 장기간 요양휴가를 승낙한 건 최악의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겠지요.”
이응준은 웃으며 물었다.
“당장 몸을 험하게 굴리는 일을 하기는 어렵겠군요.”
이태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숙부님처럼 망명투쟁을 생각한다면 당장은 안 되고 반년쯤 차분하게 치료한 다음 해야겠지요. 거친 음식을 거듭 먹는다거나, 끼니를 거른다거나, 풍찬노숙을 하면 투쟁이고 뭐고 힘도 못쓰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될 겁니다. 아무튼 이 형은 섭생에 주의하고 나는 최선의 치료를 해봅시다. 약을 한 번도 거르지 말고 챙겨드세요.”
이태희는 이응준이 곧 망명탈출을 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이른 오전에 진료를 받고는 정희와 함께 대동강변,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등 평양의 명승지를 찾아갔다.
강 건너 능라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강둑을 걸을 때였다. 정희가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꿈속을 걷는 것 같아요. 경치가 꿈결처럼 아름다운데다가, 오라버니와 함께 있는 게 꿈만 같아서요.”
4월의 부드러운 바람이 목을 어루만지듯 불고 강남에서 온 제비 한 쌍이 강물 위를 스치듯이 날고 있었다.
응준은 오랜만에 누리는 편안함과 행복감에 몸을 맡겼다. 지난 10년 낯선 땅에 던져져 군사교육을 받느라 기를 쓰고, 임관 후 러시아 전선에 출정해서는 동포 항일조직의 정보를 파악하는 임무 때문에 위장을 해친 그였다. 이제는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안했다.
가파른 길을 걸어 부벽루로 올라갈 때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손을 잡았다.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젊은 남녀가 망측하게 대낮에 손을 잡는다고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처음 병원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쑥스러움을 덜어버린 정희가 생글생글 웃었다.
“저 사람들, 러시아에 가면 기절해 버리겠네. 저는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버지 모시고 만주 목릉에서 우수리스크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기차에서 내렸을 때 인형처럼 예쁜 러시아 처녀가 뭐라고 소리치며 우리 곁을 달려갔어요. 방금 기차에서 내린 남자 가슴에 뛰어들더니 목을 껴안고 허리에 다리 깍지를 끼고는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는 거였어요. 엄마와 저는 부끄러워서 팔로 눈을 가렸지요.”
연해주에서 비슷한 장면을 많이 본 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더 소중하게 고쳐 잡았다. 그는 서른 살의 건강한 남자였지만 마음은 10년 전 떼를 쓰는 소녀를 업어주고 담장 위에 올려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희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안락의자를 남향으로 놓고 거기 앉아 늘 웃으셨어요. 그러면서 하루 대여섯 통 편지를 대필하게 하셨어요. 외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쓰게 하셨어요. 한 달 쯤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 선생이 들러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매일 찾아와 편지를 대필해드리기도 했어요. 춘원이 응준 오라버니를 유학생회 모임에서 만난 이야기를 하자 아버지는‘응준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데 일본 군대라 그럴 수 없어.’하고 슬퍼하셨어요.”
이응준은 이갑 참령의 은혜를 생각하며 가슴이 젖어들었다.
“오라버니는 우수리스크에 제가 없다는 걸 알고 마음이 어땠어요?”
정희가 화제를 돌렸다.
“정희가 경성으로 떠난 걸 안공근 선생한테 들었지. 마음이 허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정희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저는 석 달이나 지나서 알았어요. 안타까워서 밤새도록 눈이 붓도록 울었어요.”
일본군 장교와 조선인 애국지사의 딸이라는 신분 때문에 편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사정, 두 사람은 지금도 그런 간극의 끝에 놓여 있었다. 그가 곧 망명길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희에게 망명계획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간곡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갑 참령님의 따님답게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내 말을 들어 줘. 내가 요양휴가를 얻은 건 독립운동 조직을 찾아 망명하기 위해서였어. 우리가 십 년이나 떨어져 살고, 약혼하고도 삼 년이나 만나지 못했지만 나라를 찾는 일에 나 개인의 일을 희생할 수밖에 없어.”
정희는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짐작하고 있었어요. 저는 이갑 참령의 딸이니까요. 결심대로 하셔요. 오라버니가 내일이라도 갑자기 망명탈출하게 되어 결혼이 미뤄진다면 저도 만주로 떠나 독립투쟁을 할 거예요.”
이응준은 안도하면서도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팠다.
평안도 출신으로 일본 육사를 나온 그가 평양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퇴역한 무관생도 후배 이동훈이 찾아왔다.
응준은 민간복을 입은 채 거수경례를 하는 후배를 얼싸안았다.
“반갑네. 헤어지면 언제고 반드시 다시 만난다더니 우리가 이렇게 만나네.”
이동훈은 평안남도 은산(殷山)이 고향이었다. 각별히 친하지는 않았어도 같은 서북 출신이라 미덥게 바라본 후배였는데 10년도 더 지나 만나는 것이었다. 임관 직후 퇴역한 걸 알고 있었는데 평양 광성고보에서 체조선생을 하며 살고 있었다.
“평양청년회 운동부장도 맡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군인이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군복을 벗은 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후배는 그렇게 말했다.
이동훈을 통해 청년 유지들과 민족지도자들을 만났다. 평양에는 그의 고향 안주 사람들의 인맥도 있었고, 장차 그의 처가가 될 숙천 사람들의 인맥도 있었다. 평양의 유지들은 평안도 출신으로서 무관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육사를 졸업하고 온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일찍이 일개 가출 소년으로서 숙천이 자랑하는 우국지사인 이갑 참령의 눈에 들어 사위로 지목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다. 아무도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낮에는 진료를 받고 정희를 만나고 저녁에는 그들과 교유했다.
어느 날. 최성수(崔成洙)라는 서른 살 동갑 청년을 알게 되었다. 이 참령과 같은 숙천 출생으로 만주 땅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고 해서 거기 사정을 들으려고 하숙으로 데려 갔는데 본색을 털어 놓았다.
“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자금 모집 밀사입니다.”
최성수는 임정이 발행한 ‘제47호 신임장’과 ‘애국금수령서’를 내놓으며 다시 말했다.
“내가 중위님 속마음이야 알 수가 없지만 만약 이갑 참령님처럼 망명투쟁에 나선다면 조국에 큰 힘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군자금부터 준비하십시오. 준비 없이 망명하는 건 무모한 일이에요. 만주 땅의 독립투사들이 자금이 없어 얼마나 큰 고초를 겪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응준은 본심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군자금 모집이 쉽지 않다면서요? 재산 많은 애국자들이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발각되면 경찰에 끌려가 혹독하게 당하니까 그게 두려워서 안낸다는 말도 있습디다. 차라리 뺏어주기를 바란다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권총 들이대며 협박해 빼앗겼다고 하면 처벌이 약할 테니까요.”
최성수는 다시 주위를 돌아보고 그의 귀에 입을 들이댔다.
“권총을 갖고 나오신 걸 압니다. 며칠만 빌려주십시오. 부자들에게서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내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이응준은 펄쩍 뛰며 손사랫짓을 했다.
“그럴 순 없지요. 한다면 차라리 내가 직접 하지 총을 빌려줄 순 없어요.”
그때 하숙집 여주인이 밥상을 차려 와 그걸 받아드는데 최성수는 어떻게 알았는데 반닫이를 열어 권총을 꺼내들고 번개같이 문을 막차고 달아나버렸다. 이응준이 힘차게 달려 쫓아갔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마 헌병대에 고발할 수가 없었다.
권총분실에 마음이 찜찜한 채로 다시 경성으로 갔다. 경성행 기차를 타기 전에 정희를 대절마차에 태워 숙천으로 보내며 곧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이제 부모님에게 갈 차례였으나 가지 못했다. 집이 옛날처럼 평안도 안주에 있다면 하루 이틀 들를 수가 있겠으나 함경도로 이사했으니 그냥 경성으로 가야 했다. 김광서 선배가 서간도의 비밀조직과 연결되면, 혹은 일신에 위험이 닥치면 떠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경성에 도착해 삼청동 지석규의 집으로 가니 대문에 금줄이 달려 있었다. 외로 꼰 새끼줄에 고추와 흰 헝겊과 솔가지와 숯이 꿰어 매달린 것을 보고 그는 친구의 아내가 세 번째 아기를 낳았음을 알 수 있었다. 발길을 돌려 종로통으로 가서 미역을 사 들고 다시 삼청동으로 갔다.
그가 대문을 두드리자 지석규가 나와 미역을 받아놓고 다시 외출복 차림으로 나왔다.
“고맙네. 나는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됐네.”
두 사람은 종로통을 향해 걸었다. 지석규가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상재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것, 김광서 선배와 성락원에 가서 의친왕과 현계옥을 만났다는 것 등이었다.
“김광서 선배님은 군자금을 만들기 위해 은밀히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했어. 우리가 망명길에 올라 신흥무관학교에 교관으로 간다 하지마는 거기 사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고 믿을 건 금화가 아닌가.”
그렇게 말하고 지석규는 한숨을 쉬었다.
이응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군자금이 생명이라는 말을 평양에서 임시정부 밀사로부터 들었어.”
그는 권총을 분실한 일을 털어놓았다.
지석규는 쯧쯧 혀를 찼다.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나, 이 사람아? 그 최성수라는 밀사가 체포되기라도 하면 자넨 군사재판 감이야. 밀사가 붙잡히지 않기를 기도하게.”
“그러는 수밖에 없지. 사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조국에 바칠 게 일본 육사에서 배운 군사지식과 기술, 일본 군대에서 얻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군자금이 문제란 말이야. 어느 정도는 갖고 가야겠지. 나는 거의 무일푼이고 자네는 부인과 아이 셋을 위해 재산을 남겨두고 가야지. 나도 보성학교 동창들 중심으로 이리저리 융통을 해볼 테니 자네도 배재학당 동창들한테 도움을 청해 봐.”
“그게 쉽지 않아. 친구를 믿었다가 누설되면 우린 군사재판에서 중형을 받을 테니까.”
“물론이지. 그렇다고 절대로 집이나 토지는 처분하지 말게.”
그가 단단히 당부했으나 지석규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영섭이 인천에서 올 것이니 저녁에 둘이 사직동 집으로 오라는 김광서 선배의 전갈을 지석규가 받아놓은 터였다. 대한제국무관학교를 다니고 혼자 일본행을 거부했던 김영섭, 도쿄 유학생회에서 재회했었는데 지석규 말을 들으니 김광서 선배를 경성에서 만나 의기투합하며 동갑 친구로 지낸다고 했다.
사직동 김 선배 집에 가니 김영섭은 이미 와 있었다. 응준은 반가운 포옹으로 재회의 감격을 나누었다.
“나는 인천 내리교회 부목사야. 미국에서 유학 초청장이 와서 곧 떠날 거야. 독립운동은 미국 다녀와서 할 거야.”
김영섭의 말에 응준은 웃으며 친구의 손을 잡았다.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모두 궁금해하기에 정희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광서가 이야기를 다 듣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경성에 함께 올 걸 그랬군. 우리 집에 방이 남잖아.”
이응준은 김광서와 지석규에게 위장병에 대해 물었다. 그들도 그것으로 요양휴직을 한 때문이었다.
“김태진 형네 병원에서 준 약을 좀 먹기는 했지만 고국에 돌아온 뒤 저절로 나았어.”
김광서가 말하자 지석규는 자신도 그렇다는 듯 머리를 주억거렸다.
군자금 걱정 외에 특별하게 의논할 것은 없었다. 김광서가 접촉하는 서간도 독립운동 조직이, 그들이 압록강을 넘자마자 신흥무관학교까지 안전하게 호송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때문이었다. 만주지역은 군벌 군대와 닥치는 대로 빼앗는 마적들, 그리고 요동지역에 주둔하는 일본군 등으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조선인 공동체가 있었으나 조선인들 가운데 무수히 많은 일본 밀정들이 숨어 있었다.
김광서가 말했다.
“우리 셋이 비슷한 시기에 병가를 얻어 국내로 와서 붙어 다니니 내가 사찰책임자라도 주목할 거야. 각별히들 조심하게. 내가 오늘 김영섭 목사를 인천에서 오시게 한 건 우리가 탈출한 뒤의 일을 맡길 참이라 그런 것이니 그리들 아시게.”
김영섭이 마지막 무관생도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강한 터라 지석규와 이응준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이응준은 보성중학 동창들을 만났다. 한 친구가 말했다.
“지방에서 간간히 이어지던 만세시위도 이제 잦아들어 버린 듯해. 가혹한 탄압 때문이었지만 도대체 조선의 독립을 세계열강에 호소해 봤자 소용없다는 낭패감도 큰 원인이겠지. 파리강화회의는 독일과 오지리(墺地利 오스트리아)를 해체하고, 연합국과 맞섰던 나라들을 날개를 꺾어버리는 결정으로 끝을 맺는 거 같아. 연합국인 미국·영국·일본에 예속된 약소국들의 간절한 희망은 무시된 거지.”
다른 친구가 동의했다.
“신문 논조도 그래.『동아일보』는 사설에서 통렬한 논조로 미국과 윌슨 대통령이라는 자를 비난했어.”
그리고 동창들은 YMCA 총무이자 당대의 명망가인 윤치호가 파리강화회의 참가 요청을 거절하고 3 ‧ 1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서명을 거부한 일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글쎄 송진우와 최남선이 각각 찾아가 파리강화회의 참가를 권했고, 신익희가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권했는데 거절했다는 거야.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들이 자기 나라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약소국이나 후진국을 도와주겠냐고, 왜 동맹국인 일본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겠냐고, 지구상에 도덕적으로 정당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는 거야. 삼일만세운동은 맹목적인 애국이라고 답했다는 거야.”
디음날 김광서와 지석규를 다시 만났을 때 이응준은 그 문제를 말했다.
김광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모두 사실이야. 윤치호 선생은 돌아가신 내 아버님하고 친하셨고, 당신이 외부 협판(協辦)을 할 때 황실유학생 파송을 맡았던 터라 나를 아끼는 편이지. 나는 작년 금년 선생을 자주 만났어. 동경에서 아우 치창(致昌) 씨가 눈병이 걸려 입원했는데 내가 병원비도 전달해줬지. 선생이 내게 그러시더군. ‘만세운동은 가상하지만 우물에 갇혀 우물 밖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순진하고 우직한 애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세계열강은 우리 편이 아니야. 다윈의 진화론을 생각해 봐. 강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는 건 자연의 법칙이고 인류역사는 그렇게 진행돼 왔어.’ 그러더군. 그래서 내가 ‘독립운동이 소용없단 말인가요? 언제까지 일본에 굴종해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물었지. 그 사람이 뭐라고 답했는지 알아? ‘독립운동? 그건 비현실적인 맹목의 애국이야. 슬프지만 힘을 기를 때까지 일본에 굴종하며 살아야 하네.’ 하며 손사랫짓을 했어. 그래서 군자금을 얻어내려던 계획도 포기하고 그 사람 이름을 내 가슴에서 지워 버렸어.”
“한 때 독립협회 회장 지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제 정신이 아니군요.”
지석규가 주먹을 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김광서가 마음을 다잡자는 뜻으로 정색하고 말했다.
“윤치호가 어땠든, 미국이 어떻든 우리는 나라 찾으러 나서야지. 다시 한 번 탈출을 맹세하고 결심을 굳히세. 나와 함께 탈출할 건가?” 지석규는 “네, 저는 갑니다.”하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이응준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게 냉정한 우리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국주의 일본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연해주 참전으로 실감한 그였다.
5월이 왔다. 이응준은 평양에 다시 다녀왔다. 이동 중에도 위장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러자 조금씩 낫는 느낌이 들었다.
5월 말, 서간도의 비밀조직이 완벽한 호위 계획을 세웠음을 통고해 왔다. 김광서 선배는 출발 날짜를 6월 중순으로 잡았다. 이응준은 분실한 권총 문제도 해결하고 군자금을 어떻게든 마련하고 정희와 며칠 더 같이 지낼 생각으로 6월초 다시 평양으로 갔다.
그가 평양에서 교유해온 친구들 중에 부자인 윤정도(尹貞度)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출정 시절에 사귄 친구로 그와 동향인 안주 출신이었고 사업 수완이 좋아 재산이 많았다. 군자금 제공을 약속한 최 씨 성을 가진 부자도 있었다. 그들에게서 떠나 6월 10일 군자금을 받기로 약속했는데 6월 5일 김광서가 보낸 밀사가 왔다.
기밀이 새나간 듯하여 출발 일을 내일 6일로 당기고 경의선 기차 승차역도 바꿀 것이니 즉시 수원으로 오든지 내일 오후 5시 30분 평양역에 정차하는 기차를 타라는 지시였다. 기차를 놓칠 경우에 신의주에서 압록강 국경 넘는 것을 도울 비밀조직과 접선하는 방법도 들어 있었다. 응준은 최 씨와 윤정도를 급히 만났으나 군자금을 받아내지 못했다. 권총을 가져 간 최성수도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그는 내일의 탈출계획을 정희와 이태희에게 털어놓았다.
이태희가 말했다.
“위장상태가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계속 조심해야지요. 떠난다면 약을 한 보따리 싸들고 가세요.”
정희는 두 눈을 똑바로 들어 정색하고 말했다.
“그분들과 같이 떠나셔요. 이런 일은 망설이면 안 되요. 안 가시면 평생 후회할 지도 몰라요.”
마음의 갈등 때문인지 밤에 그는 심한 위경련에 시달렸다. 문득, 비밀조직과의 접선방법을 알고 있으니 위장병을 치유하고 군자금도 조금 얻어 김광서와 지석규보다 늦게 출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셋이 함께 가면 셋이 모두 체포당할 수가 있고 분산출발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잃어버린 26식 권총도 찾아 품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 또 다른 자아가 고개를 들어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윤치호가 말했다는‘맹목의 애국심’으로 나를 던지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머리를 땋은 가출소년 시절, 이갑 참령의 집에 의탁하며 갖기 시작해서 15년 동안 안고 온 독립투쟁의 신념은 결정의 순간에 그렇게 흔들렸다. 갈등이 커지자 위경련은 더 심해졌고 그는 고통 속에 밤을 거의 새웠다.
이종혁 중위의 훈장과 굴레
1919년 6월, 고국 땅에서 세 중위가 탈출을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 1,000km 북쪽 러시아 연해주에서 마지막 무관생도 출신 장교 하나가 생애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지난해 8월 이응준 〮염창섭과 같은 수송선을 타고 파견된 이종혁이었다. 그는 4월에 중위로 진급해 있었다.
이종혁의 소대는 파병 아홉 달 동안 20여 차례 격심한 전투들을 겪었는데도 30명의 대원 중 전사자는 4명으로 대대의 36개 소대들 중 가장 적었다. 소대장인 그가 위기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앞장서 돌진하고, 부하들 생명을 자기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 때문이었다. 조선 출신이지만 부하들의 신임과 존경은 매우 컸고 같은 대대의 소대장 36명 중 그는 가장 탁월한 3명에 들었다. 내가 살아남고 부하들을 무사히 지켜서 가족에게 보내야 한다. 그것이 지상과제였다. 도무지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격전을 끝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놀라곤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나약하고 소심하다고 여겨 왔는데 내부에 과감한 용기가 본성으로 숨어 있었단 말인가.
일본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맹추위였다. 겨울은 길어서 넉 달이나 됐고 한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 병사들은 보초를 서다가 동사하기도 하고 태반이 동상에 걸렸다. 출동할 때는 기동이 느렸다. 러시아 혁명군인 적군(赤軍)은 추위에 익숙해 혹한 속을 쉽게 기동했다. 콧수염에 고드름이 맺히는데도 힘차게 기동해 습격해 왔다.
적군은 노동자 농민만으로 조직된 오합지졸의 민병대가 아니었다. 차르 황제파의 백군(白軍)으로 있다가 혁명에 찬동해 탈출해 군복을 바꿔 입은 장교와 사병이 늘어나면서 전술도 정교해지고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보이자 사기도 충천해 있었다.
적군과 정규전을 벌일 때는 힘과 힘, 지휘관의 지략과 병사들의 용기로써 맞붙어 한 판을 벌이는 것이니 해볼 만했다. 총검술로 적을 찌르고 몸과 몸이 부딪는 육박전이 벌어진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이종혁도 실탄이 떨어져, 총검을 겨누며 달려드는 적군 병사를 군도로 찔러 죽음을 모면한 적도 있었다.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적군 파르티잔 부대의 유격전이었다. 파르티잔들은 민간 복장을 하고 민간 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과 백군이 추격하면 후퇴해 숨어버리고, 추격하다 지쳐 쉴 때는 공격해 왔다. 야영지에서 밤에 병사들을 재우려 하면 허공에 총을 쏘아 잠을 깨웠다. 만반의 대비태세를 하며 새벽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병사들이 수면부족에 지친 몸으로 행군하면 공격해왔다.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비하면 막상 공격이 없었다.
육사 3년 선배인 중대장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파르티잔 놈들 뒤쫓는 데 넌더리가 난다. 쥐새끼를 잡듯 다 잡아 죽여라. 그놈들을 숨겨준 마을은 용서하지 말고 보복하라.”
병사들은 강아지와 병아리 한 마리까지 생명체는 모두 죽이고, 모든 구조물을 불태우는 보복으로 민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조선인들도 일본군의 골칫거리였다. 조선인 무장세력은 일본군이 1918년 8월 하바로프스크를 함락시키고 수천 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여성 지도자인 김알렉산드라를 처형한 뒤 주춤했다. 그러다가 다음해 3월 고국 땅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두만강 접경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초기 개척시대 한인 유민들이 연추(延秋)라고 불렀던 포시에트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도시 우수리스크와 그곳에서 서쪽 지나 국경에 이르는 옛 추풍(秋風. 러시아식 지명 수이푼) 지역이 그랬다.
상대가 조선인들이고 조선반도에서 가까우므로 일본군은 1919년 4월에 2개 사단을 집중시켜 이들 지역에서 조선인 무장세력에 대한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라는 최재형을 총살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때 이종혁의 부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산악지역 수청(水淸. 러시아식 지명 수이찬)에 진출해 있었다. 그곳에는 조선인 가옥이 드물었으며 조선반도와 멀어선지 조선인 유격대가 출몰하지 않았다. 이종혁은 동포 무장세력과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상급부대에서 내려오는 명령서는 박진순(朴鎭淳 1897~?)· 박애(朴愛 ?-1927)·김규면(金圭冕 1881~?)·정재관(鄭在寬 1880~1990)·이용(李鏞 1887~?) 등이 한인사회당의 지도 아래 러시아 적군과 연합해 무장봉기를 기도하고 있으며, 대토벌작전에서 살아남은 잔당이 삼림이 우거진 수청지역으로도 이동할 것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었다.
상급부대의 정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5월 말 그의 대대 소속 한 소대가 산길을 순찰하다가 매복에 걸려 소대원 절반이 전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파르티잔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생포됐는데 조선인들이었다. 총살하기 전 심문했는데 추풍에서 이동해온 세력이었다.
6월초 그의 소대는 조선인 파르티잔 하나를 생포했다. 배낭에서 판화로 찍은 선전물과 기밀서류가 나왔다. 이종혁이 기밀서류를 분석하는 동안 최고참 하사관인 조장(曹長)이 통역을 앞세워 심문했다. 저쪽에서 심문하고 답하는 내용을 들으니 파르티잔은 죽음을 각오했는지 당당하게 응하고 있었다.
“나는 빼앗긴 내 조국을 찾기 위해 독립전쟁을 하고 있다.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대장처럼 투쟁에 나선 것이다.”
급히 중대장에게 전령을 보내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전령은 즉결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아왔다.
자기 손으로 동포 독립투사를 처형하게 되어 그는 착잡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그보다 열 살이 더 많은 군조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그의 곁으로 다가와 명령을 기다렸다.
이종혁은 엄숙하게 명령했다.
“중대장님 명령대로 처형하시오.”
총살형을 당할 큰 나무를 향해 병사들에게 총검으로 떼밀려가던 파르티잔이 갑자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국어로 말했다.
“거기 있는 장교, 당신 조선 사람이지?”
이종혁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파르티잔에게 다가갔다.
“그렇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명령에 의해 처형하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종혁은 그렇게 말하고 길게 숨을 들이켰다.
동포 파르티잔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놈! 민족이 왜놈들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왜놈 장교 복장을 하고 꼭두각시 짓을 하고 있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파르티잔은 루바슈카의 등을 보이며 당당하게 처형장으로 걸어갔고 곧 눈에 헝겊이 가려졌다.
자작나무숲에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리는 다섯 명의 병사가 동시에 쏜 총성들에 묻혀 버렸다.
이종혁은 무쇠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늙은 조장에게 명령했다.
“조국을 위해 싸운 투사이니 잘 묻어주시오.”
이종혁이 속한 중대는 조선인 파르티잔이 소지한 기밀서류와 진술을 토대로 공격을 해서 조선인 무장세력을 괴멸시켰다. 이종혁은 공적을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받았고 그 후 견디기 힘든 가책과 회의에 빠져들었다.
탈출
1919년 6월 6일은 금요일이었다. 지석규가 아침 일찍 잠에서 깼을 때 방안이 어둑어둑했다. 밖에 비가 내리기 때문이었다. 옷을 입고 대청으로 나갔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미리 깨어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아내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대청으로 올라왔다.
“비가 오는데 괜찮겠어요?”
아내는 표정은 태연했으나 목소리는 떨렸다.
“오히려 그게 낫소.”
아내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인지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갔다.
간밤에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마 내일 떠날 것 같소. 헌병 경찰이 와서 내가 어디 갔냐고 물으면 평소에도 행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섰다고 말해요. 십여 일 계속 헌병과 형사가 탐문하면 내가 망명길에 오른 걸로 생각하고, 이십여 일 계속되면 내가 무사히 탈출한 걸로 여겨오.”
아내는 태연했다.
“각오한 바예요.”
“당신에게 미안하오.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저는 괜찮아요. 당신은 가정보다 더 큰 조국을 구하러 가시는 거니까요.”
그런 대화를 나누고 부부는 꼭 끌어안고 잤다. 그리고 아침이 온 것이었다.
아침상이 들어왔다. 그는 아이들을 양쪽에 앉히고 천천히 숟가락을 놀려 밥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열한 살짜리 아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학교 갈 생각만 하며 밥을 먹는 듯했다. 여섯 살짜리 딸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밥을 먹었다.
숭늉을 마시고 밥상에서 물러난 그는 강보에 쌓인 채 윗목에 누워 있는,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딸에게로 가서 몸을 엎드려 끌어안았다.
“아기야, 미안하다.”
그는 중얼거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엄마가 시켰는지, 학교에 가기 위해 책가방을 메고 나서던 아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탈 없이 튼튼하게 자라고 동생들을 잘 살펴야 한다. 그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에 메어 와 그러지 못했다.
10시쯤 그는 새로 준비한 양복을 입었다. 댓돌로 걸어 내려가 구두를 신고는 안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줄기는 우산을 안 써도 좋을 정도로 약해지고 있었다.
아내를 향해 돌아섰다.
“여보, 미안하오.”
아내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몸을 돌려 곧장 대문을 걸어 나갔다.
김광서 선배를 만나 정오쯤 경희궁 정문 건너편에서 자동차를 대절해 탔다. 경성역보다는 이목이 적은 곳이 낫다고 판단해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자고 결정한 바였다. 자동차는 비오는 거리를 달려 숭례문 앞을 지났다. 그리고 경성역 앞을 통과하는데 큰소리를 내며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가슴을 졸였지만 무사히 수원에 도착했다.
청국요리집에서 쉬면서 저녁을 먹었다. 김광서가 휴우 한숨을 쉬며 허리에서 군자금 복대(腹帶)를 풀었다. 단단히 꿰매어 속을 알 수 없으나 금반지, 금비녀 등이 묵직하게 들어 있는 듯했다.
“국경 건널 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혹시 내가 총을 맞아 쓰러지게 되면 자네가 이걸 풀어 허리에 감고 탈출하게.”
김광서의 음성과 표정이 비장했으므로 지석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둘 게 있네. 의친왕한테서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네.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군자금 마련해서 자기도 탈출한다 했으니 두고 보세.”
김광서는 다시 복대를 허리에 찼다.
청국요리집을 나와 각자 떨어져서 기차역으로 갔다. 신의주역까지 가는 기차표를 1등석으로 샀다. 기차가 오자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 떨어져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지석규는 서른두 살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날 자신이 선택한 길이 조국 독립을 위한 성공의 길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는 줄곧 그렇게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수원역에서 떠난 기차는 경성역에 도착했다. 한낮에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애를 태웠던 곳, 플랫폼을 보니 정복을 입은 경찰과 헌병, 그리고 사복 입은 형사들이 승차하려는 사람들을 붙잡고 차표와 신분증 검사를 하고 있었다. 몹시 긴장되었으나 태연하게 앉아 있는데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후 졸음이 왔다. 그는 차창에 기대고 잤다. 혹시 통로로 사복형사가 지나가더라도 그렇게 잠들어 버리는 게 더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평양역에 섰을 때 그는 초조하게 이응준을 기다렸다. 오후 5시 30분부터 기차가 머문 15분 동안 이응준은 끝내 오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생긴 거겠지, 생각하면서도 그는 응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의주역에 도착한 두 사람은 기차에서 내려, 짐을 들고 광성(光成)여관에 들었다. 둘 다 최고급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그들은 미리 줄이 닿은 비밀 연락책에게 전화를 걸어 여행권을 보내라 부탁했다. 압록강 건너 안둥에서는 대한독립청년단이라는 청년단체가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응준과는 혹시 평양에서 기차를 못타면 신의주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한 터였다. 응준이 약속한 복장을 하고 역에 내리면 비밀요원들이 안내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 기차에 오지 않았다. 언제 헌병들이 닥칠지 몰라 마음이 초조한데 연락도 없었다.
“더 기다리면 위험해지니 우리 둘만이라도 가지요.”
그의 말에 김광서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자네는 이응준이 또 꼭 올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이지요. 이갑 참령님의 유지를 실행할 사람이니까요.”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으나 김광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녁 무렵, 여관 주인의 아들을 보내 여행권을 받아오게 했다. 그래도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헌병 보조원이 임검을 나왔다. 두 사람의 여행권은 이미 약속한 대로 박 씨 성을 가진 사촌형제로 되어 있었다.
“허허, 두 분이 다 저하고 종씨군요. 저는 밀양박씨입니다.”
헌병 보조원의 말에 김광서가 반색을 했다.
“오, 그렇습니까. 우리도 밀양박씨입니다. 참 반갑습니다.”
지석규가 물었다.
“국경이라 늘 임검을 하는 모양이지요?”
보조원은 머리를 끄덕였다.
“경성에서 육군 중위 둘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탈출했는지 행방불명이 됐다고 합니다. 현상금이 5만 원이나 붙었지만 어디 쉽게 잡히겠습니까.”
헌병 보조원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나간 뒤 두 사람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압록강 국경을 기차로 건넜다. 2등 칸을 탔으나 동행하지 않고 떨어졌다. 지석규는 기차 좌석에서 완벽한 일본인 행세를 했다. 옆자리의 일본인은 능숙하게 일본어를 하는 그를 일본인으로 여기고 말을 걸어 왔다. 일본인과 대화하며 만두를 사 먹는데 헌병들이 지나갔다. 전혀 그를 의심하는 눈길을 보이지 않았다.
안둥역에 내리니 전등이 대낮같이 밝았다. 지석규는 옆자리에 앉았던 일본인과 맨 앞에 서서 나갔다. 헌병과 순사, 그리고 사복 형사와 밀정 들이 눈을 빛내며 조금만 동작이 이상하거나 얼굴이 굳어 보이는 사람을 찍어 냈다.
“우선 좀 지나갑시다.”
지석규는 중절모를 벗어 약간은 오만하게, 마치 당연한 듯이 검문자들의 울타리를 지나갔다.
역사(驛舍) 밖으로 나와 꼿꼿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면서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만주인 차림의 인력거꾼이 다가왔다. 목에 때 묻은 수건을 감고 허리춤에 붉은 천을 차고 있었다. 약속된 대한독립청년단 밀사라고 판단했다.
“강호반점까지 갑시다.”
지석규가 조선어로 암호를 말하자 인력거꾼도 조선어 암호로 대답했다.
“삯이 3원인데 50전만 더 주십쇼. 아내가 아파서 누워 있습죠.”
그가 안심하며 인력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자 인력거꾼이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동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인력거가 밋밋한 언덕을 오를 때 압록강 철교가 보였다. 지석규는 인력거를 끄는 밀사에게 잠깐 서 달라고 부탁했다. 강 건너 모국 땅을 보고 싶어서였다. 강 건너 조국은 푸르고 싱싱한 신록 때문에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 보였다.
“잘 있어라, 조국 땅아.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아.”
그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인력거는 토담으로 만든 허름한 지나인 집 앞에 섰다. 대한독립청년단들이 문 앞에 나와 영접하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때 막 김광서가 도착했고 모두가 그 집에서 밤을 보냈다.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종적이 갑자기 사라지자 일본 헌병은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는 5만 원의 현상수배가 걸렸다. 만약 체포되면 군법회의에 넘겨져 중형을 선고받을 일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남만 삼천
지석규는 독립군 비밀요원의 안내를 받아 김광서와 함께 하루에 100리 쯤 걷고 동포 마을에서 잠을 자며 이동했다. 동포들은 정성을 다해 두 사람을 대접했다. 그렇게 만주 대륙을 엿새 동안 이동해 유허현(柳河縣) 구산쯔(孤山子)에 도착했다. 비록 규모가 큰 옛 양조장 건물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민족의 희망 신흥무관학교가 거기 있었다.
지석규가 동포 마을에서 잘 때마다 원로 유지들에게 들은 내용을 합하면 신흥무관학교의 내력은 이러했다.
1880년대 말, 조선인 유민들은 유허현의 싼위안바오(三源堡)와 인근 지역에 잡초처럼 뿌리를 내렸다. 을미년(1895년)에 의병을 일으켜 전국을 휩쓸었던 유인석(柳麟錫)은 힘이 다하자 만주로 왔고 10년 간 싼위안바오 북동쪽 지역에서 재기병을 하려 애썼다. 그의 희망이 수포로 돌아간 뒤 1910년에 이회영 ․ 이시영 등 6형제가 독립전쟁 기지를 만들려는 일념으로 전 재산을 처분해 찾아와 싼위안바오 읍에서 10리 쯤 떨어진 쩌우자가(鄒家街)에 자리잡았고 여러 선각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해 청년들을 훈련시켜 장교를 양성해 때가 오면 독립전쟁에 집중시킨다는 비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1911년 4월 경학사라는 자치단체를 조직했다. 황무지를 개척해 둔전을 만들고 장차 독립전쟁을 이끌어갈 청년들을 가르치자는 것이었다. 그 일이 순조롭게 되어 마침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투쟁의 전위로 키워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흉작과 질병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몇 달 뒤 경학사를 해체하고 그 후신으로 부민단을 만들었다. 싼위안바오가 눈에 띄기 좋은 곳이라 독립운동 기지와 신흥학교를 싼위안바오 남동쪽에 있는 퉁화현(通化縣) 하니허(哈泥河)로 옮겼다.
이회영 일가가 겪은 고초는 심했다. 삼한갑족으로 불렸던 그들 일가는 전 재산 40만원을 독립전쟁 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 개교에 바치고는 생명 유지의 밑바닥까지 이르도록 굶주렸다.
지석규가 김광서와 함께 하니허에 도착했을 때 신흥무관학교는 애국지사들에 의해 무수한 시련의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희망이 커지는 시기였다. 지금까지 배출한 5기생까지 신흥무관학교의 생도 수는 매년 백여 명에 불과했는데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1천 명이 넘게 쇄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니허의 시설로는 부족해서 구산쯔에 새로운 교육시설을 만들고 있었다.
지난날의 부민단은 한족회로 발전해 있었고 한족회는 군정부를 만들었는데 자치행정과 무력항쟁을 분리하기 위해서였다. 군정부는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것은 최근 상해 임시정부의 방침을 받아들여 서로군정서로 바뀌어 있었다. 북만주의 무장 세력은 북로군정서라 부른다고 했다.
일본 육사 출신 장교 두 사람이 탈출해 교관이 되겠다고 찾아온 것은 서간도 동포 공동체를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동포 지도자들은 한족회 본부가 있는 싼위안바오에서 마차를 타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로 왔다.
생도들이 군모를 벗어 흔들며 환호하는 가운데 김광서는 지석규와 함께, 다가오는 애국지사들을 향해 일본 육사 출신답게 직립부동의 자세로 서서 거수경례를 했다. 무관 출신인 몇 사람은 거수경례로 답례했다. 최고 서열인 일송 김동삼 선생은 ‘남만의 맹호’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지만 김광서와 지석규의 손을 잡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장하오, 두 동지. 고맙소, 두 동지. 동지들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내려준 선물이오. 이제 우리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할 수 있게 됐소.”
이장녕(李章寧) 선생을 비롯한 한족회와 군정서 간부들, 그리고 무관학교 교관인 여준(呂準) ․ 윤기섭(尹琦燮) ․ 김창환(金昌煥) ․ 성준용(成駿用) ․ 원병상(元秉常) 선생 등이 모두 눈물겨운 환영을 했지만 제일 기뻐한 것은 신팔균(申八均)이었다. 실질적 군사교육을 그가 혼자 도맡다시피 해왔기 때문이었다.
“두 동지는 때 맞춰 정말 잘 왔소. 이제 우리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할 수 있게 됐소.”
신팔균은 감격에 차서 말했다.
신팔균은 1882년생으로 이해 38세, 김광서와 지석규보다 일곱 살이 위였다. 한양의 유명한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신헌(申憲)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협상하고 체결한 인물이었다. 그런 환경 때문에 유년기부터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1903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여 참위로 임관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군대를 떠나 항일투쟁에 뛰어든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무관학교 설립자인 이시영 선생은 상하이로 떠난 뒤여서 만나지 못했다. 외가(外家)로 가까운 친척이 되는 터라 몹시 기대했던 지석규는 실망이 컸다. 이시영 선생은 이해 42세로 두 망명자보다 열 살이 위였다.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해 왔는데 이 무렵에는 한족회와 군정서, 그리고 무관학교를 임시정부에 연결시키기 위해 상하이에 머물고 있었다.
한 몸을 바쳐 조국을 찾겠다고 찾아온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신명이 나서 말했다.
“아, 우리는 이제 일본 육사와 똑같은 교육을 받게 됐어.”
김광서와 지석규는 즉시 생도 교육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국사, 법규, 지나어, 일본어 등 일반학은 고참 교관들이 맡고, 군사학은 두 사람과 신팔균이 맡았다. 학교 분위기는 싹 달라졌고 생도들의 눈빛도 활활 타올랐다.
두 사람은 몸이 하나인 것이 아쉬울 정도로 바빴다. 하니허에 있는 본교, 구산쯔에 있는 분교 양쪽 모두 생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군마가 한 필 있어 다행이었다. 김광서는 말을 타고 오가며 양쪽 생도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한 달이 금방 흘러갔다.
어느 날 저녁, 김동삼 선생과 교관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신팔균이 말했다.
“김광서 동지와 지석규 동지가 탈출해오고 우리 무관학교가 제대로 돌아가니 왜놈들이 첩자나 자객을 파견할 겁니다. 그래서 가명을 썼으면 합니다.”
김동삼 선생이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 동지부터 바꿀 이름을 말해보시오.”
신팔균은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듯 즉시 대답했다.
“동녘 동(東)에 하늘 천(天)입니다. 해가 뜨는 동쪽 하늘이 좋으니까요.”
“신동천, 참 좋군. 김광서 동지와 지석규 동지는 뭐가 좋겠소?”
김동삼 선생의 물음에 김광서가 먼저 대답했다.
“저도 하늘 천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지으신 저의 집 후원 정자 이름이 경천각(擎天閣)입니다. 하늘을 떠받친다는 뜻이지요.”
“김경천도 괜찮군.”
김동삼 선생이 박수를 치며 지석규를 바라보았다.
지석규는 방금 생각한 것을 말했다.
“저도 하늘 천을 쓰겠습니다. 언제나 푸른 하늘이 좋아서 청천(靑天)입니다. 다만 저는 성(姓)이 희성이라 이청천(李靑天)으로 하려 합니다.”
세 사람의 가명은 순식간에 지어졌다.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은 이들 세 독립투사를 ‘남만 삼천(南滿 三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신흥무관학교에 또 좋은 일이 생겼다. 젊은 이범석(李範奭)이 교관단에 합류한 것이었다.
이범석은 이천군수의 3대 독자였으며 보통학교 졸업 때 강원도 전체 수석을 차지한 수재였다. 경성제일고보 재학 시절 한강에 수영하러 나갔다가 여운형(呂運亨)을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민족적 각성을 갖게 돼 다음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지만 결혼한 몸이었다. 상하이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그가 영리함을 주목했다. 그래서 윈난성(雲南省)의 고원 쿤밍(昆明)에 있는 3년 과정의 윈난강무학교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유수한 군벌의 자제들을 제치고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애국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에 몰려들고 김광서 선배, 지석규 선배가 일본군을 탈출해 교관단에 합류했다고 들었어요. 밀려드는 생도들을 가르치지 못해 쩔쩔맨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그런데 어찌 제가 지나(支那) 군대 장교로 앉아 있습니까.”
약관 20세의 젊은 장교는 그렇게 말하며 교관들의 포옹을 받았다.
지석규를 포함한 ‘남만 삼천’선임 교관들은 후배인 이범석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지난날의 대한제국 무관 출신, 일본 육사 출신, 여기에 지나 정규무관학교 출신이 있으니 금상첨화라는 생각에서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사정은 아주 나빴다. 우선 총이 없어서 목총으로 대신하였다. 그러니 사격훈련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학과 공부도 등사판으로 찍어낸 갱지 유인물을 교과서 대신 사용하였다. 게다가 급식은 매우 형편없었다.
세 명의 젊은 교관은 학교 밖 민가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셋 중 가장 뱃구레가 큰 이범석은 조밥 세 공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어느 날 그는 아쉬운 듯 밥공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는 열 그릇은 먹어야 속을 채울 겁니다. 도무지 배가 고파서 구령을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참아야지요. 생도들 급식은 정말 형편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물을 마셔 빈속을 채우고 힘을 냅니다. 두 분 선배님도 이렇게 굶주려 본 적이 없지요?”
끝의 한 마디는 물기에 젖었다.
지석규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없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가난하긴 했지만 굶주리지는 않았지.”
정말 그랬다. 이렇게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굶주리는 생활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이회영 · 이시영 6형제의 재산 40만원으로 지어졌으며 둔전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서간도 동포사회가 오래 전에 공동체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동포들의 지원으로 그럭저럭 잘 돌아가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9월에 들어 신흥학교라는 이름에서 신흥무관학교로 바꾼 뒤의 첫 졸업생, 그러니까 김광서 ․ 지석규 ․ 이범석 등 젊은 교관들이 키운 졸업생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을 6기생이라고 불렀다. 졸업생들은 독립군 부대를 찾아가 초급장교로 활동하거나 학교가 지정한 지역에 가서 교사 노릇을 하게 되어 있었다.
졸업장을 받아든 제자들이 모두 정렬하여 경례를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할 때 지석규는 큰 소리로 외쳤다.
“자랑스런 제자들아, 어서 가서 독립전쟁에 앞장서라!”
제자들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흡족하게 가르쳐 내보내긴 했는데 다음 기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교관들은 생도들을 뽑아 가르칠 군자금 마련에 골똘해야 했다. 게다가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만주와 러시아 여러 곳에서 지도자들을 목마르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투쟁의 지평이 몇 배로 넓어져서 사람이 필요했다. 1,000명이 넘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만주 전역으로 퍼져 나가 초급간부가 되었지만 중견 지도자나 지휘관이 없었다.
‘삼천’중 하나인 신팔균이 제안했다.
“이렇게 합시다. 하나는 학교에 남고, 하나는 만주 일대를 돌며 동포들의 지원을 얻고,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 쪽으로 가서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합시다. 그리고 내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자성(慈城), 후창(厚昌), 또는 혜산진(惠山鎭) 중 국경지역의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치고 내려가기로 합시다.”
“그럽시다.”
지석규도 김광서도 동의했다.
긴 시간 숙의를 거듭한 끝에 지석규는 학교에 남아서 계속 생도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신팔균이 북간도를 맡고 김광서는 함께 북간도로 가되 러시아 연해주까지 가서 무기구입 루트를 맡기로 했다.
경성을 탈출한 뒤 줄곧 행동을 같이 해온 김광서는 지석규의 곁을 떠났다.
“지 동지, 몸조심하게. 그리고 내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 진공을 하기로 한 우리 목표를 잊지 맙시다.”
“네, 선배님.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지석규는 사관생도 시절처럼 차렷 자세로 서서 경례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는 동포 지도자들로부터 파격적인 결정을 통고받았다. 그를 남만주 독립군 진영의 최고 지휘자인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중책을 맡은 몸으로 하니허와 싼위안바오를 오가며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