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智異山) 산행 및 사찰순례(寺刹巡禮) ②
-성철대종사 생가(性徹大宗師 生家) 겁외사(劫外寺)를 찾아서-
목화시배유지에서 불과 5분내에 있기에 11시경 겁외사에 도착했습니다. 겁외사가 완전 낙 성되기 전 두어 번 찾기는 했으나 낙성된 후로는 처음 찾았으니 꽤 오래 전에 찾은 셈입니 다. 여기를 찾으면 좀 안타까웠던 것은 겁외사, 생가 위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점이었습니 다. 생가가 여기에 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볼 때마다 아쉽기만 했습니다.
이제 경내로 들어가 성철대종사의 궤적을 더듬어 봅니다.
지리산 겁외사(智異山 劫外寺)
겁외사(劫外寺)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210번지에 위치한 성철 스님의 생가터에 자리 한 절입니다. 이곳 단성면 묵곡리는 1912년 음력 2월 19일 성철대종사가 태어나신 곳입니 다. 해인사 성철스님 문도회와 산청군은 1998년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아 이곳에 생 가를 복원하고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워 스님의 철저했던 수행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자 겁외사를 건립고자 발원하여 마침내 2001년 3월 30일 낙성하여 문을 열었습니다.
사명(寺名)이 특이한데 성철스님께서 만년에 몇 해 동안 겨울철이면 추운 백련암을 떠나 부 산으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그곳을 겁외사라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겁외사는 이에 연유한 사명으로 '시공을 초월한 절'이란 뜻입니다.
안쪽에는 벽해루(碧海樓)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벽해루라는 이름은 성철스님께서 평소 즐겨 이야기하셨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라는 이 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는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 오른다는 뜻입니다. 이는 용맹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이 누각은 18개의 석주가 떠받치고 있는데 일주문을 겸하고 있는 누각입니다.
벽해루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성철대종사 존상을 만납니다.
우측 경내 모습
보이는 전각은 쌍검당(雙劒堂)으로 스님의 수행처인데 집 바로 위로는 대전-통영간 고속도 로가 나 있습니다. 생가를 복원하기 전부터 난 고속도로입니다. 옥에 티로 여겨집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여기는 겁외사(劫外寺)인데... ^^
좌측의 모습
대웅전이 보입니다. 우선 대웅전으로 갑니다.
운치있는 소나무에 가려진 대웅전 모습입니다.
대웅전
본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단독상을 모셨고 후불탱화는 목각탱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팔대보살과 팔부신중을 모시고 있습니다.
불단 좌측에 자리한 퇴옹당 성철대선사 진영. 김호석 畵.
법당에 들어 참배하고 나와 벽화를 보니 성철대종사에 대한 일대기 형태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출가 전 대원사에서 수행하시는 모습.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대원사(大源寺)는 성철스님이 출가하기 전 수행한 절입니다. 스님은 이곳 탑전에서 참선 수행, 40여 일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불경(佛經)을 보니까 아주 마음에 들더라 이거야. 그래서 참선하려고 대원사를 찾아갔지. 그때 대원사 탑전이 참 좋았어. 그래 거기 들어 가봤거든. 참선하기에 좋아 보이기에 안에 들어가 좀 있었지. 그런데 주지가 그걸 보고 펄쩍 뛰어. 본시 탑전이란 데가 스님들만 있는 곳이지 속인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한판 했지. 너거들은 절에서 처자식 거느리고 살림 다 살고 떡 장사도 하지 않느냐. 그러고도 중이냐. 내가 참선공부 한다는데 웬 말이 많노. 절이 불교공부 하는 곳이지 살림 사는 곳이가. 그런데 얼마 안가 주지가 바뀌었지. 젊은 중이 주지대리인가 뭐를 맡았는데 그 사람하고는 그래도 말이 통했거든. 그래서 그 탑전에서 겨울을 보냈지.” -원택스님의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중에서-
삭발출가
출가시(出家詩)
彌天大業紅爐雪(미천대업홍로설)이요 跨海雄基赫日露(과해웅기혁일로)라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가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이로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1936년(25세)에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 그 해 3월 하동산스님(河東山: 1890~1965)을 은사 로 수계(受戒) 득도(得度)하셨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노모를 업고 금강산 구경 시켜드리는 모습
성철스님께서 출가한 지 4년쯤 지나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 들어가 하안거를 날 때, 어머니 가 고향에서 자식이 그리워 물어 물어 천리길을 찾아오셨는데 스님은 내다보지도 않고 참선 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대중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아무리 생사를 걸고 정진하는 수도 승이지만 어머니가 진주 남쪽 끝에서 찾아왔으니 마냥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머 니를 맞이하든지 아니면 선방을 떠나야 한다."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맞이하였습 니다.
뭐 하러 이까지 찾아오냐고 투뱍하게 말하니 노모는 "나는 니 보러 온 것이 아이다. 금강산 구경하러 왔다."
이리하여 스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 유람에 나섰다고 합니다. 이 바람에 수행에만 전 념하느라 못 보던 금강산 비경도 보셨다고 합니다.
금강산을 유럄한 뒤 훗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중에서 인용해 봅니다.
"보고 싶던 아들 손 잡고 금강산 구경 잘했제. 험한 길에 가면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 되는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졌제. 금강산 돌아다닐 때는 거기가 극락인 줄 알았는데 돌아올라카니 앞이 캄캄해. 산에서 내려와 기차를 타고 진주로 돌아오는데, 아이구 며느리만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해 줄 말이 없어 가슴이 답답한 기라..."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동구불출(洞口不出) 수행
성철스님은 장좌불와 동구불출 수행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장좌불와는 1944년 문경 대 승사로 옮겨 수행한 방법으로 잠을 잘 때도 눕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8년간 지속되었습니 다. 동구불출은 1955년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철망을 치고 신도들의 접근을 막고 수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퇴옹당 성철대종사(退翁堂 性徹大宗師) 진영
성철 스님은 해인총림 방장 뿐만 아니라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7대 종정(宗正)을 역임 하셨 습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멸(寂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는 1981년 성철스님께서 제6대 조계종 종정에 취임 하실 때 내린 법어입니다.
백일법문(百日法門)
성철 큰스님깨서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어 해인사에 주석하시면서 그 해 여름 안거에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회는 오전 8시에 시작 되었으며 하루 2~3시간씩 사부대중을 위해 설법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여름 한철이 다 끝 나고서 해제를 맞이할 때에야 이 법문도 끝이 났는데 거의 일백일에 가까운 법문이어서 절 집에서는 이를 백일법문(百日法門)이라 불렀습니다.
현재 백일법문을 정수님께서 연재하고 있으니 관심을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
성철대종사 다비식 장면
1993년 11월 4일 우리 곁에 오셨던 부처라 불리던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법납 58세, 세수 82세였습니다.
涅槃頌 열반송
生平欺誑男女群 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 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 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 일륜토홍괘벽산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스님의 열반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관심이 집중되고 고조되어 신문과 방송은 연일 이 소식을 전했던 기억이 새롭게 회상됩니다. 세속의 관심은 사리가 얼마나 나오냐에 집중되기도 했습니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사리가 수행이 깊은 스님한테 나오기는 한다만, 사리만 나오면 뭐하노. 살아서 얼매나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사는가 카는 게 중요하지, 사 리가 중요한 거는 아이다."
다비후 사리를 수습하니 오색영롱한 사리가 무수히 나왔는데 수습된 사리만 110과와 파쇄 되지 않은 채 모신 사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현재 해인사에는 현대식 조형미가 넘치는 사리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앞의 두꺼비 모양의 바위
성철대종사(性徹大宗師) 존상(尊像)
퇴옹당(退翁堂) 성철대종사(性徹大宗師)
성철스님은 1912년 음력 2월19일 태어났습니다. 부친 이상언(李尙彦)과 모친 강상봉 사이 에서 3남4녀 중 장남입니다. 속명(俗名)은 영주(英柱)이고, 법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 (性徹)입니다. 다음은 백과사전의 글입니다.
『성철(性徹: 1912년~1993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승려이다. 속명은 이영주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선불교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했다.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東山)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화상 을 계사(戒師)로 보살계 · 비구계를 받았고, 그 뒤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 등과 함께 수행하며 부처답게 살 것을 결사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 (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6대 종정(宗正)에 취임하 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 다.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 · 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 에 따르면, 앎과 행동이 일치된 단계의 앎만이 진정한 앎이며, 지눌의 돈오점수는 이론적 앎 일 뿐 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인생의 가르침을 폈으며, 성철은 수행승을 대상으로 했다.
《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의 조사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에 빠지지 말 것과 견성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1993년 해인사에 서 입적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성철의 유명한 법어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수행하는 사람 이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로 보이는 혼돈을 겪게 되지만, 깨달음의 수준이 자라면서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는 즉, 만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목탁과 종
성철스님 존상 좌우에는 범종과 목탁을 형상화한 작품과 염주를 형상화한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명 : 부처님 마음 작가 : 원정 차대완
단주 돌아가는 소리에 부처를 만난다. 2003. 7
염주를 통해 본 생가
쌍검당(雙劒堂)
대웅전 우측에 있는 스님들의 수행처 선방입니다. 보통은 심검당(尋劒堂)이라하는데 쌍검 당(雙劒堂)이라 했으니 보다 예리한 선지가 번뜩일 것 같습니다.
정오당(正悟堂) 요사채
☞ 다음은 성철 스님의 생가와 유물전시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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