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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기억의 행성을 돌아 나오며
프롤로그
미얀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올해 유월쯤이었다. 같은 문예지로 등단해 알게 된 정 작가로부터였다. 처음엔 딱히 와 닿지 않았다. 우선 단체여행이라는 점이 나를 물러서게 했다. 물론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언제나 아무 것도 계획하지 않은 채 배낭 하나 둘러메고 마음 내키는 대로 혹은 지칠 때까지 돌아다니다 오는 편이었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미리 계획하고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는 여행에는 우선 거부감이 생겼다. 게다가 미얀마는 멀고 먼 나라일 뿐이었다. 내게는 그렇게 먼 나라로 여행을 갈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그게 정신적인 게 됐든 물질적인 게 됐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더군다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충전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런 와중에 일정표를 보게 되었고 그 중에 쉐우민이라는 명상센터에서 명상체험을 하는 코스가 있었다. 그 무렵 작업 중이던 장편 초고 수십 장을 날려버린 후 엄청난 내면의 부침을 겪고 있는 와중이어서 명상체험이란 말에 와락 끌렸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의 평정을 찾고 다시 소설로 빠져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시도건 해야 했다. 그 방법이 명상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뭘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건 표피적인 성지순례가 아니겠구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렇다면 한번 가보자. 이것이 내가 미얀마로 가게 된 계기다.
출발은 그러했는데 여행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나는 좀처럼 미얀마를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여행도중 내 곁을 스쳐간 사람들, 내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 내 마음을 흔들어놓던 그들의 슬픈 이야기들...
아마도 오래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필경 또 짝사랑이고 말테지만 말이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면 배낭하나 둘러메고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날이 머지않을지도 모른다.
2011년 9월 5일 월요일
태국에서 환승하는 비행시간이 한 시간이 넘게 지연되어서 밤 8시가 넘어서 밍글라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미얀마의 첫인상은 공항을 들어서면서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카펫냄새와 빛바랜 치마를 두른 남자들 그리고 입국 심사대 여직원의 화장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각인되었다. 그 얼굴은 쉐다곤 파고다에서 기도하던 그들과 완전히 달랐다. 사원에 엎드려 기도에 빠진 그 순한 영혼들. 물론 그들도 근무가 끝나면 쉐다곤으로 달려갈 것이다.
첫 일정은 쉐다곤 파고다의 야경을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양곤에 수많은 사원이 있지만 야경을 볼 수 있는 사원은 쉐다곤이 유일하다고 했다. 쉐란 말은 황금을 뜻하는 미얀마어란다. 탑 전체를 두른 황금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90톤이라던가.. 수많은 이민족들에게 외침과 멸망을 거듭하면서도 그토록 화려하고 웅장한 불탑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 부처를 모시고.. 그 도저한 열망이라니, 그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니
언어유희란 말이 생각났다. 그들은 어쩌면 정신적 유희를 즐겼던 민족이 아닐까.
나는 그때 비로소 공항직원의 무표정을 이해했다.
그들은 그러했던 것이다. 거칠게 노동하고 노동이 끝난 후에 사원으로 찾아가 간절히 염원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화려함만이 전부가 아닌, 그 이면에 빛나고 있을 정신의 고갱이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9월 6일 화요일
집에 있었다면 가까스로 눈을 부비며 일어날 시간이지만 나는 지금 바간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다.
미얀마는 도로 교통이 열악해서 주로 비행기를 이용해야 했다. 여행일정 내내 새벽이면 어김없이 모닝콜이
들어왔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밥을 먹어야 했다. 그나마 호텔식이라 서비스되는 수준은 집에서 먹던
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새벽밥에 익숙치않은 내 위가 거부할 뿐이었다.
공항도 시골 버스터미널 같이 추레해 보이더니 막상 오른 비행기도 50인승 정도의 작은 비행기다.
오래된 시골버스만큼이나 좁아터져서 그 안에다 몸을 어떻게 부려놓고 있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간신히 옹크리고 앉아 창밖을 보니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행기는 아무런 예고 방송도 없이
갑자기 이륙하고 그 아래로 도시의 정경이 보인다.
차를 타고 지나칠 때는 보지 못했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은 집들이 연이어 지나간다.
뭔가 아기자기하게 느껴지지만 형편없이 퇴락해있어서 쓰레기를 부려놓은 듯하다.
비행기는 한동안 양곤시내의 상공을 날고 원시 그대로의 자연을 품고 있는 그들의 도시가
서서히 스쳐지나간다. 비행기가 지나가자 구름들이 재빠르게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되풀이한다.
저공비행의 매력은 이런 것일까. 비행기를 탄 것이 아니라 놀이공원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탄 듯한 기분이다.
바간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먼저 도착한 곳은 냥유 재래시장이었다. 매일 아침에 서는 장이란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60년대 후반쯤 되는 생활 수준이니 냉장고며 이런저런 가전제품을 갖추고 살리는 만무하고
그러다보니 아침 시장이 활성화되는 듯했다. 그나마 갖췄다 해도 전기사정이 열악하니 그것을 가동시키며
살아가기도 힘들었을 터 아침에 장을 봐서 하루 동안 소비하는 패턴이다. 우리네 김치나 젓갈 같은
발효식품이 없는 음식문화도 그에 일조했을 테고.
장 풍경은 지극히 아기자기했다. 불과 한 평 남짓한 노점에 밭에서 갓 따온 듯한 신선한 채소와 생선들, 염장한 죽순,
그리고 자질구레한 생필품, 색상이 다채로운 론지며 스카프들...
사람 사는 일상은 어디나 같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우리네 시골 오일장이다.
정말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 할머니 집으로 놀러 가면 할머니는 오일마다 한 번씩 장에 가셨다.
워낙에 먼 거리라 처음엔 따라갈 엄두를 못 냈었는데 하루 종일 할머니를 기다리는 일도 지겨웠던지라
한 번씩 이십 리가 넘게 걸어 장에 가곤 했다.
그때 본 장터 풍경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던지. 한 번씩 나갔다오면 다음 장에도
꼭 따라가겠다고 설레발을 치다가 할머니를 애태웠던 일도 많았다. 그
때도 남동생들이야 할머니 몰래 장터에 나가서 주전부리를 하다가 돌아오곤 했지만
나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때 넘어갔던 고갯길, 산마루.. 아직도 눈에 선하다.
채소와 생선전을 지나니 공예품이며 의류매장이 나오는데 어느 순간 공예품 가게의 한 귀퉁이에 확 눈길이 쏠렸다.
아주 선이 고운 자태의 불상인데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물속에서 이백 년을 지내도 썩지 않는다는 티크나무로 만들었단다. 그
런데 부처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서는데 상인이 50달러를 외친다.
딱히 사야지 맘먹은 것은 아니었는데 부처의 감은 눈이 왠지 마음 한 구석을 찌르는 것 같다.
너무 비싸다고 지나쳐가려하자 상인이 허겁지겁 쫓아 나오며 얼마면 사겠냐며 가격을 적어보란다.
글쎄 얼마를 적을까하다가 내 곁을 지나치던 S를 불렀다.
S가 흥정을 하는 사이 나는 부처의 표정이 단원이 그린 남해관음을 닮았음을 깨닫는다.
흔히들 단원 김홍도하면 풍속화에나 능한 화가로 알지만 단원은 산수, 고사 인물, 신선, 화조 등
능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조선 최고의 화원이었다. 게다가 불화는 또 어떠한가.
단원이 그린 불화에 넘치는 기품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것은 십 여 년 전 용주사에서 본 후불탱화였다.
단원을 지극히 아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융건릉 주위에 용주사를 조성하면서
단원에게 대웅전 후불탱화 제작을 명했고 단원은 성심을 다해 그 임무를 완수했다.
당대에는 어쩌면 이질감이 느껴졌을 정도로 서양화 기법을 동원해 그린 부처의 얼굴이
동양인 같지 않게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있다.
그에 비하면 단원이 말년에 그린 남해관음은 지극히 한국적인 여성상이다.
어쩌면 단원의 어머니가 그런 얼굴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데다 자애로운 표정이 녹아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불상도 마찬가지다. 저 단아한 이마하며 부드러운 눈매, 보면 볼수록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상인과 흥정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더 낮춰질 낌새가 없어 보여 포기하고 돌아섰는데 시장을 돌아다니는 내내
그 불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동할 시간이 다가와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아뿔싸 어디서 뛰쳐나왔는지 그 상인이 우리가 탄 버스 앞까지 쫓아오며 20달러를 외친다.
버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지 가이드에게 물으니 그 정도면 적당한 아니 오히려 싼 값이란다.
결국 미얀마의 부처는 내 집 거실에 좌정하고 계신다.
-미엔꼬 사원
탑 위로 향하는 계단 입구는 동굴 같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고소공포증에 폐소증세까지 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오르기를 포기하고 버스로 왔다.
잠시 홀로 버스 안에 있는 시간, 혼자라는 사실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대오 이탈이 썩 내키진 않지만 며칠간의 여행 중 페이스 조절을 위해서는 잠시
멈춰야 할 순간도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오래 멈춰 있었다.
다시 나아갈 수 있을까 싶게
사실은 길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때로는 길 아닌 길을 과감하게 갈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담마양지
바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원으로 나라투 왕의 세속적 욕망이 그대로 반영된 탑이라 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형제는 물론 부인까지 살해한 후에 갖게 된 옥좌.
어떤 탑보다 거대하고 견고하게 쌓으리라는 일념으로 벽돌과 벽돌 사이 바늘 하나 못 들어가게끔
노역자를 학대한 끝에 결국은 자객의 칼을 받고 살해당해 미완으로 남은 탑이다.
전형적인 전탑 방식이고 사방을 둘러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쌍둥이 불상이 하나 있다.
탑 사방에 좌정하고 있는 부처들의 표정도 분노와 절망에 가득차 있다.
보는 내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동통이 느껴졌다.
슬픔이 마음을 찌르는구나
그 슬픔이 너를 죽게 하였구나
그 슬픔이 죽어도 죽지 못하게 하였구나
욕망과 예술은 결코 양립하지 않는다.
이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처절한 욕망의 탑을..
홀로 걷다. 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채 올리지 못한 성문, 누구도 완성시키고 싶지 않았을
담마양지...
온 사방을 시립하고 있는 탑들... 탑...탑.. 탑..
어쩐지 운주사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을 아늑함이 그리웠다.
담마양지의 숨이 막힐 듯한 벽돌들, 그 수고로움이
먹먹하게 가슴을 두드린다. 충분하다. 그러했으므로.
-마누하 사원
바간 왕조에 의해 멸망한 타톤 왕국의 마누하 왕이 포로 생활을 했던 작은 사원,
다른 사원에 비해 몹시 규모가 작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감옥이었다. 불상을 제작하면서 얼마나 답답한 심경이었는지,
터지지 못한 한숨이 가슴에 가득차 있었다.
보는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아, 그들은 어쩌자고... 어쩌자고...
그리고 채 흘리지 못한 눈물이 오랫동안 가슴 속에 맴돌았다.
(밤 10시 식당에 앉아 한 잔 하며 적은 감상)
습한 바람이 일었다가 사라진다. 어디선가 독경소리 끊임없이 들려온다.
벌레들 쉬지 않고 울어댄다. 밤이 되어도 좀처럼 열기는 식지 않는다.
드넓게 펼쳐진 사막위에 탑들의 혼이 운다.
나는 하루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몇 천 킬로라는 공간을 뛰어 넘어
여기에 있다.
천년의 시간도 속절없이 흩어지고 퇴락을 거듭하며 흘러온 탑들.
그것들은 왜 여기 있었을까.
그들은 왜 그토록 열심히 쌓고 쌓아왔던가.
그들의 신산한 삶이 그들의 억눌린 혼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를 뚫고 들어와 또한 관통해 나간 시간들, 나는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그들의 공간을 속절없이 스쳐 지나갈 테지만 ,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만났다. 그리고 또 만날 것이다.
-쉐산도 파고다
오늘 하루에만 두 차례 탑 위로 오르는 기회가 있었다.
미엔꼬 사원의 좁은 계단 앞에서 포기하고 말았는데
가이드 말이 쉐산도 파고다에 오르면 바간 전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천 몇 기가 된다는 탑림을 한눈에 둘러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잠긴다고.
특히 일몰 때가 아름다워서 그 시각이 되면 여행자들이 집결하는 장소라고.
뭐, 그렇게까지 말하니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얀마 정장(맨발)을 하고 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보는 순간
눈앞이 아찔하다. 그 경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파르다.
나는 담박에 포기하고 싶었다.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동행하던 S가 한번 해보라며 부추겼다.
무모한 시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권유를 외면할 수가 없어서
한 칸씩 오르기 시작했다.
이층 기단까지는 가까스로 올랐다. 거기서부터는 경사가 더 심해지고 계단폭도 줄었다.
온 몸의 맥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식은땀이 치솟는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 후로 약 이십 여분, 고소 증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진정시킬 겸 계단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돌아가 기단부를 서성이며 주변 정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올망졸망 보이는 탑군들. 가슴이 후련하다.
아, 그러나 내려가야 할 계단을 보면 다시 허물어지고 만다.
탑 위에까지 올라갔던 일행들이 하나둘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려가야 할 계단을 쳐다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때마침 내려오던 J가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다리가 풀려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J는 난감해 하며 나를 진정시키고 먼저 내려갔던 S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시 올라왔다.
하지만 내려가는 일은 불가능해보였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정말 못 내려가면 어쩌나.. 119 구조대 같은 건 없을까?
미얀마에 그런 게 있을라나?
만약 있다 해도 부르고 어쩌고 하면 더 일이 커지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자꾸 흘렀고 지체할수록 두려움만 커질 뿐이었다.
일단 크게 심호흡을 하고 S가 부축해준 상태에서 가까스로 난간을 붙들고 한 칸씩 내려서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쨌건 한 발을 내딛으니 다음 한 발은 좀 수월하게 느껴졌다.
눈은 뜨지도 못한 채 S의 목소리를 쫓아 더듬더듬 네 발로 기다시피 내려왔다.
사실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일단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도무지 호흡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를 수십 번 되뇌어도 조금도 괜찮아지지 않으니
뒤늦게 버스에 탑승한 M이 내민 청심환을 먹을 수 밖에..
에휴 그 일을 가지고 세 분이 계속 나를 놀려댔다.
우빼인 목교 앞에서도, 이라와디 강을 거슬러가는 유람선을 탈 때에도..
9월 7일 수요일
새벽 세시쯤 옆방에서 들려온 염송 소리가 잠을 깨웠다.
나지막히 읊조리는 '옴마니반메홈"
마치 영혼을 깨우는 듯하다. 뭔가 대오각성을 이뤄야 할텐데
피로에 지친 내 영혼은 한사코 외면하며 다시 잠들기만을 갈구했다.
그 때문인지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고 두통의 기미도 몰려오지만
이 시간에 대한 감각만은 너무나 뚜렷하다.
현실과 몽상 사이를 걷고 있는 듯한 색다른 기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지금은 덧없이 스쳐지나가지만 오래도록 이 순간을 그리워하리라.
여리고 순한 미얀마인들의 숨결, 노래하는 듯한 말소리,
그들은 그야말로 식물성이다.
버스를 타고 지나치며 본 그들의 집은 성냥갑처럼 작고 오밀조밀했다.
현지식으로 나오는 음식들은 다소 기름지긴 했지만 먹기엔 버겁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따라 다니며 작은 물건을 내미는 그들의 표정이 얼마나 순박해 보이는지
그런 그들을 모른 체하며 버스를 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탕을 달라며 입술을 손짓하는 아이들 그 작고 여린 생명들..
아, 정말이지 왜 이렇게 마음이 서걱거리나.
그들을 생각하는 내내 나는 슬픔에 잠겨 있다.
만달레이행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다.
(오전 7시 45분)
오전 일정은 우빼인 목교를 들러 마하간다용 수도원으로 이어졌다.
수도원을 둘러보던 중 공양 시간이 되어서 마주치게 된 그들의 탁발 의식은 시종일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얼핏 보기엔 우리네 양푼보다 더 큰 그들의 발우에 담긴 공양물로 수도자는 물론 인근 거지며 개들까지
그 날의 양식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들의 나눔이 왠지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쌀 한 톨 나눌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과속으로 치닫는, 경쟁만이 삶의 방법인 이 고속철 같은 삶이 진절머리 나게 서글퍼지곤 했다.
내 마음의 추가 뭔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수도원을 나와 유람선을 타고 이라와디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밍군으로 향했다.
미완성의 밍군 대탑을 보기 위해.
선상에서 가이드는 우리들이 배에서 내리면 개인 비서가 한 명씩 붙을 거라고
그들이 길안내도 하고 우리가 신발을 벗어놓고 탑으로 들어가면 신발도 지켜주고 할 테니
불쾌하게 생각지 말아달라고 농 섞인 당부를 한다.
배를 기다리는 그 애들이 멀리서부터 보인다.
소녀도 있고 좀 나이가 든 축도 있다.
그들의 손에는 부채라든가 팔지, 그런 갖가지 토속 상품이 들려있다.
물건 값은 고작 일 달러에서 비싸봐야 오 달러를 넘지 않는 소소한 것들이다.
배가 정박하고 진흙탕으로 낸 강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다가와 우리말로
"조심하세요"를 외치며 손을 내민다.
내 곁을 따르는 아이는 열 두어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이름이 뮤뮤란다.
그래 이름도 예쁘구나. 혼자 중얼거리는데 뮤뮤가 "언니 예뻐요." 하고 말한다.
니들이 얼마나 예쁜지 알기는 하니? 까무잡잡한 얼굴에 티 없이 맑은 눈이다.
애들이 하루 종일 몇 개의 물건을 팔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것을 팔아야 학교를 갈 수 있단다.
애초부터 물건 값을 깎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번 가격을 낮춰 불러 본다.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서서히 걷다보니 어느새 걸음은 밍군대탑 앞에 멈춰있다.
나는 밍군대탑의 아찔한 높이를 가늠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탑 중간부까지 오르니 다시 계단 폭이 좁아지고 경사가 심해진다.
몇 번을 망설이면서 오르고 또 올랐다. 오를수록 마음은 부서지고 몸은 천근이다.
가까스로 정상에 올라 인증샷을 한 컷 찍고 내려왔다.
탑 입구에 뮤뮤가 기다리고 있다. 순간 눈물이 솟구친다.
저토록 순한 눈빛이라니..왠지 부끄럽고 숨어버리고 싶다.
마음이 이토록 약한 것이었다니, 이렇게 약해빠진 마음 따위로 한 세상을 살아나가려 했다니..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싶다.
여행의 괴로움. 삶의 괴로움.
다시끔 유람선을 타고 돌아오는 시간, 황톳빛 강물은 슬픔의 강처럼 보였다.
강물은 끊임없이 나를 불러댔고 충동질했다. 그대로 발을 내딛으면 아득한 추락...
다행히 빠르게 황혼이 몰려들었고 나는 스산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호텔로 돌아오기까지 마음은 내내 울컥거리고 있었다.
J에게 얻은 담배 몇 대를 피운 다음 가까스로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룸메이트는 방으로 들어서자 바로 기도를 시작했고 나는 시집 한권과 노트를 들고 일층 로비로 나왔다.
여행 가방을 싸면서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책 몇 권이었는데 거기에 조용미의 시집 "기억의 행성"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로비에 앉아 시집을 읽다보니 이 미얀마라는 땅이 마치 기억의 행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가이드의 설명을 통해 내내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냈고, 탑들을 순례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내 개인적인 기억들이 소용돌이치면서 온통 내면을 헤집어놓고 있었던 탓일까.
그 밤 우울의 뿌리는 깊고도 질겼다. 몇 자 긁적이고 있는데 M과 J가 나왔다.
자리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술 몇 잔이 들어가니 가까스로 안에 갇혀 있던 울음 섞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술기운에 한 말들이라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미얀마인들 앞에서 참람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들의 슬픈 역사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가난이,
더불어 내가 가진 별 볼 일없는 물질이 그들 앞에서 부끄러웠다고..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건 비단 그날 밤에만 느꼈던 감정이 아니었다.
새벽이면 호텔에서 전용버스를 타고 비행장으로 가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서 다시 전용버스를 타고 관광을 하고
잘 차려진 현지식을 먹고, 또 혹시나 현지식을 부담스러워 할 연장자들을 위해
한식을 먹어가며 특급 호텔의 깔끔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버스가 멈출 때마다 사탕을 달라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 물건 하나를 팔겠다고 몰려드는 그들을 외면한 채,
설령 외면하지 않았다 해도 턱없이 물건 값을 깎고
그 사실을 즐거워하면서...
그 모든 것들이 어찌 부끄럽지 않다는 말인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9월 8일 목요일
사실상 마지막 날이다.
만달레이를 출발한 비행기가 30여분이 지나 우리를 혜호에 부려놓는다.
공항이 있는 곳이 해발 천 이백 정도라니 우리의 목적지 인레호수까지는
구절양장길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껏 다닌 곳이 거의 평지이고 사막형 지형이다보니 오랜만에 본 산악지대는
오히려 반가웠다. 설악산 미시령쯤 되는 어쩌면 그보다는 대관령 옛길 정도의 높이고
경사였다. 숲은 울창했고 가끔 눈에 띄는 대나무들도 관능적인 몸피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나무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몸피 굵은 대나무들이 쭉쭉 뻗어있는 광경에 그야말로 눈이 호사를 누렸다.
호수에 도착한 후 전용보트를 타고 인따족이 살고 있는 곳을 관광했다.
호수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부레옥잠이 우거진 호수 위에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외발로 노를 저어 낚시를 해가며 살고 있다.
몇 개의 수공예공방 그리고 쇼핑...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인지 도무지 감흥이 일지 않았다.
쇼핑하는 틈바구니를 벗어나 물가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잠깐 사이에도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 중에도 깜박깜박 졸고 있는데 앞에 앉아계시던 정사님의 염송 소리에 잠이 확 깼다.
오, 그 맑은 음성과 어우러진 염송 소리, 그야말로 각성 효과가 만점이다.
우리를 데려다 준 배가 떠나고 있다.
구름은 산에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놓고, 호수는 그 아래 고요하다.
마치 전생처럼 아득한 풍경이다.
드넓은 호수 위에 장식품처럼 떠 있는 방갈로들.
이런 삶도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러나 애써 외면한 채 살아왔다.
집을 떠난 지 오 일째, 시간들이 감각 없이 스쳐지나간다.
하릴없이 흘러간다. 바람이 스쳐가듯.
한번 지나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이다.
해가 진다. 호수 아래로 까무룩이.
하루가 몰락한다. 오늘이 스러져간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윤동주의 시 "팔복"이다.
어젯밤 문득 스쳐지나간 시 한편이 내내 나를 따라다닌다.
결코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여행이 뭐란 말인가.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일?
혹은 낯설고 물설은 환경에 나를 방치하는 것?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일? 혹은 나를 버리는 일?
삶의 해법을 구해나가는 일? 아니면 끊임없는 의문과 조우하는 일?
아무래도 내겐 마지막 조항이 이번 여행의 화두인 것 같다.
그리고 자꾸 그 여자가 보인다. 피하려 해도 한사코 외면해도
그 여자는 말 그대로 우울질이다. 터무니없이 예민하고 까탈스럽다.
거기다 한 까칠한다. 그 까칠을 숨기려 순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것까진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불자들과 함께하는 여행에
염송 소리도 견디지 못해 방에 들어가질 못한다.
옆침대에서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잠이 깨고 만다.
그래서 며칠째 깊은 잠에 빠져보질 못했다.
그나마 술기운이 있을 때 잠들 뿐이다. 그러다보니 더 예민해지고 처참해진다.
제길 그런 여자인 줄 몰랐다. 정말로 낯설고 아주 무섭다.
무겁다. 어깨가 빠개질 것처럼 아파온다.
9월 9일 금요일
9시 20분
인레호수에서 혜호 공항 가는 길
어제 내려온 만큼 올라가야 한다.
구절양장 차진 황톳길을 지나서
정말 낯설지 않다. 이렇게 나와 보니 오히려 세상이 낯설지가 않았다.
다만 삶이 그러할 뿐.
여행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겠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여행이라고 실망하지도 않겠다.
낯선 나를 혹은 날선 나를 만나는 것도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
뒤돌아보지 않고 가겠다.
13시 30분
아, 드디어 쉐우민을 얘기할 때가 되었다.
양곤 공항에서 한 시간 넘게 차를 달려 양곤시내를 통과했다.
쉐우민으로 가는 길, 처음엔 다소 난관에 봉착했다.
길은 협소했고 관광버스 같은 대형차가 지나간 적이 없었기에
차를 돌릴 지점을 찾을 수가 없으리라는 거였다.
그러면 걸어가는 게 어떻겠느냐 의견이 나왔지만 차도에서 3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대답에 결론은 쉽게 났다.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쉐우민을 향해갔다.
명상센터로 들어서자 뭔가 청정한 기운이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내부는 간결했다. 명상의 출발점이 그러한 것처럼. 또한 본질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명상센터 내부를 오가며 명상에 빠져있는 수행자들이 보였다.
단체 여행객들이 들어가 수런거리니 동요할만한데도 그들은 고요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갈구해온 맑은 마음의 실체를 언뜻 본 것도 같았다.
그곳에서는 사띠빳타나 수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들은 용어들은 생소한 것이어서 쉽게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원장의 말중에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고요하게 마음을 울렸다.
그토록 마음이 혹사당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가.
그래서 항상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쳤던 것일까.
온 몸의 감각이 깨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알아차리는 일,
그것이 자연스럽게 되면 마음은 힘을 받게 되고 거기에서 지혜는 스스로 우러난다고 한다.
감히 내가 그 경지까지 엿볼 수 있을까.
원장의 강연은 간결했고 좌중은 기꺼이 그 전언들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겨우 출발에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지속적인 수행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으로 뭘 할 수 있는가는 내 자신의 몫이다.
잠시 잠깐이었지만 수런거리는 번뇌가 가만히 몸을 웅크렸고 어떤 결계에서 풀려난 듯
가슴이 뻐근해지더니 숨쉬기가 편안해졌다.
나는 조용히 원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수행하는 이들을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 그러나 동경해마지 않았던 경지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쉐우민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고 아직도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에필로그
-기억은 지구를 반 넘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구는 기억의 출렁이는 파란 별,
지구는 기억이 파도치는 행성,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입니다.
미얀마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조용미의 시 "기억의 행성"부분이다. 내게 미얀마는 아주 잠깐 동안 봉인이 해제된 기억의 행성이다. 그 기억들은 휘황했고 처연히 빛났고 고통스런 단말마를 내뿜었다. 그것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더할 수 없는 행운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슬프고 괴로웠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들도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그냥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자로서의 여수(旅愁)를 지나 잠시나마 그들을 뼛속깊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내 그 기억의 탑들은 봉인되었다. 그 덕에 너무 아름다워서 차마 버릴 수 없는 그들의 유산은 지금도 건재하다.
첫댓글 긴 여운이 남는 글입니다. 풍광사진들이려니 하고 글을 열었다가 끝까지 공을 들여 읽었습니다. 글 말미에 쓰셨듯이, 여수(旅愁)에 머물지 않고 염처(念處)에서의 각성이 담긴 글이라서요. 윤동주의 시 <팔복>에서 읽어내신 '방하착'에 깊이 공감합니다./ 미얀마...옛이름 버마, 사띠 명상, 한국-중국과 달리 수행과 경전을 중시하는 남방불교국..정도 말고는 역사나 지리, 문화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어요, 막연히 오지처럼 느껴지고 종교까지 달라서 가고 싶단 생각이 안 든 것 같아요. 다만, 남방소승불교 교리가 사회참여를 꺼리는데도 반독재투쟁과 민주화 열망이 강한 민족이고 아웅산 수 치 여사가 있어 관심을 가졌지요. 잘 읽었습니다.
아, 단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묵혀두었던 글이었는데 이토록 관심가져주시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 주말, 버마의 아웅산 수 치 여사가 보궐선거에서 승리하고, '버마여행 보이콧' 캠페인을 중지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1996년 수 치 여사는, 관광산업으로 버는 외화가 모두 독재정권 유지에 쓰인다며 버마 관광을 보이콧해 달라고 전세계에 호소했었죠. 한국엔 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전세계 인권운동가들이 연대한 보이콧 운동은 그 동안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었어요. 버마 여행을 아예 안 가거나 가더라도 대부분 정부 소유인 호텔을 피하고 일부러 민박을 하는 식의 동참이었죠. 작년말, 20년간의 가택연금이 풀리고 버마의 자유화가 희망을 보인다고 판단한 수 치 여사는, 보이콧 운동을 풀고 버마를 다시 찾아 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합니다. 15년간 보이콧의 효과가 어땠는지 몰라도 자유를 열망하는 버마 국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준 것은 틀림없겠죠. 어려움에 동참하고 뜻을 같이 해준 친구가 있다는 연대의식이 큰 힘이었을 겁니다. 수 치 여사의 남편은 생이별 후 버마정부의 방해로 끝내 가족을 못본채 영국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비극의 가족사는 뤽 베송 감독이 <The Lady>라는 제목으로 작년에 영화화 했어요...버마 국민들은 독재정권이 쿠데타 이미지 희석을 위해 바꾼 이름 '미얀마'를 거부하며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날 되찾을 이름 '버마'로 불러 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민주화 열망을 지지하기에 '버마'라고 부르렵니다.
아웅산 수 치 여사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 ^^ 그녀를 지지하며 끝까지 기다려온 버마 민중들..소식을 접하면서 옳은 것은 언제든 승리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 공정여행이란 것도 있는데..여러 곳을 여행을 하면서 우린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는가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
여행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글이었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을 넘어 나를 되돌아 보고 사유까지 할 수 있는 시간....귀중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건승 하시길~^^
좋은 글이라는 표현, 고맙습니다. 기필코 건필하겠습니다.
'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라는 소설이 있었는데 님의 글을 읽으니 부끄러움을 배우려면 미얀마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 - 오래전부터 갈구해온 맑은 마음의 실체를 언뜻 본 것도 같았다. ~원장의 말중에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고요하게 마음을 울렸다.~잠시 잠깐이었지만 수런거리는 번뇌가 가만히 몸을 웅크렸고 어떤 결계에서 풀려난 듯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잠시 ... 멈췄습니다. 저두 느껴보고 싶네요.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그토록 세심하게 읽어주시니 제가 쓴 게 맞나하고 저도 다시 읽어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출가한 친구놈은 공양간에서 불경을 읽다 말고 성지순례를 떠난다 했습니다. 그때 성지순례 간다는 인근 나라엔 연일 폭동과 시위가 가득했지요. 그때만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뉴스를 챙겨보던 때가 없었습니다. 여행기가 그렇더군요.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고 생의 한 때를 길어올리게 만들더라구요. 이 글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불자도 아닌 제가 성지순례팀에 껴들어가서 민폐를 많이 끼쳤었지요.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기억들이 많습니다. 덕분에 얻은 것들도 많았구요. 공감해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Robbie Williams의 The road to the Mandalay를 들으며 여행하고 싶습니다.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