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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시>, 2013년 봄호.
【시인을 찾아서】
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 외 4편
조영관
차돌멩이는 부서지면서
산산이 깨져 나가면서 저렇게 눈부신데
행여 손끝 하나 바그라질까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는
이 한심한 영혼아
네가 자랑하는 순결은 이제는 너무도 낡았구나
네가 자랑하는 순결이란
부서지면서 꽝꽝 여물어질까
무너지면서 짱짱하게 말뚝이 박힐까
아니, 거침없이 통째로
산산이 부서져라
그렇게 부서지다 보면
그렇게 깨끗이 씻겨 나가다 보면
순결의 알통이란
구새 먹었어도 늘 푸른 저 팽나무 고목처럼
부시게 의연할까
봄볕 촉촉한 산그늘 제비꽃처럼
상크름한 향기 설핏 하늘거릴까
아니, 산산이 부서져라
부서지는 것 그대로
켜켜 샅샅이 수북한 먼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산산이 부서져라
배춧속도 양파들도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옹골차게 시허연 속을 내미는데
행여 터럭 하나 다칠까 재고 쭈뼛거리는
이 한심한 영혼아
네가 자랑하는 신념이라는 것도 이제는 너무 너덜하구나
산산이 부서져라
깨지고 매 맞고 뒤집히고 무너지면서
그냥 무너지는 채로
아름다운
산산이 부서져라
그렇게 깨끗이 부서지고 씻겨 나가서
진실의 알통이
그 알통의 허연 뱃살이 찰지고 맑고 흐벅지고
그래서 그 결결이 은은하게 눈부시건 말건
부서지는 그것 그대로
켜켜 샅샅이 아름다운 먼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산산이 부서져라
마당 회식
회식이 별건가,
커팅기에 나무를 퍽퍽 잘라서리
숭숭 구멍 낸 드럼통 안에다가
엇대고 기대고 가새지르고 포개서 올려놓고설라무네,
설렁설렁 신나 좀 뿌리고 산소 불대를 솔솔 들이대면
아무리 지가 강철 철판이라도 안 오그라지고 배길 것이여.
몇 방 용접 붕붕 지져 스텐 석쇠 만들어놓았겠다
마늘 까놓았겠다
고추, 상추, 깻잎 씻어놓았겠다, 초장, 된장 사왔겠다
개뿔이나 뭐가 걱정일 것이여.
탄다, 장작이.
숯불은 일렁거리고, 조개는 쓱 아가리를 벌리고, 소라는 거품을 내뿜고
바지락은 뱃살을 오므리고, 낙지는 쩍쩍 입에 달라붙는데
새뜻하게 만든 기계
시운전 끝냈겠다, 술술 물건 잘 뽑아 나오겠다,
덜컥 기분이 좋아버린 우리 공장장,
대천 웅천 시장 바닥을 뱅뱅 돌고 후비고 누벼서
바리바리 훑어온
조개, 소라, 바지락, 낙지와 전어.
바쁘다, 바빠 술잔이 바빠.
벌건 코가 벌룽벌룽, 눈알이 찔끔찔끔
고소하고 달고 매콤하고 쌉쓰름하고
손가락, 젓가락이 주책없이 바쁘구나, 바빠.
고놈의 것 잘 시집보냈으면 됐지, 줄창
야근한 것이 뭐가 그리 대수여.
이번 월급은 제 날짜에 나오려나부지.
어서 술이나 한잔 푸셔.
똥구멍까지 쉬훤하게 찬술이 넘어 넘어가는데
사모님은 경리 아니랄까 봐 에쿠, 술보초를 섰구나.
흐흐흐 덤벼라 덤벼,
종이컵이면 어때, 길 건너 매점의 배 사장도 덤비고,
깔고 앉은 각목에다가 말만한 궁둥이 좀 치받히면 어떠냐
밥집 아줌마도 덤비고,
크으, 덤벼라 덤벼,
카센터 느림보 사장 박가도 기름 장갑, 스패너 후다닥 던져버리고
목장갑 한 켤레 끼고 덤비고,
군포, 시흥, 부천을 두루두루 찍고 다시 돌아온
별수 없는 중국집 대머리 주방장 최가도 헐레벌레 덤비고,
사이사이 둘레둘레 서고 앉고 좁히고 들이밀고, 후루룩 크으,
고철, 철판, 기계 줄줄이 늘어선 좁은 공장을 홀랑 들어낼 듯
공장 마당이 요란 방자하게 뜰썩뜰썩하는데
길가 담벼락마다 벚꽃으로 목련으로
사방 천지가 환한 것까지 얼씨구나 좋구나.
2차 어때,
아니 노래방부터, 아니야 당구장이 순서지,
들썽들썽 주장도 많고 사설도 많은
우리 청춘의 봄날은 이렇게 깊어 깊어만 갔는데
그날, 우리 가슴에는 벚꽃보다 더 희고
명주조개보다도 속살 부드러운 것들이 소록소록 살았더라.
팽이
사람들은,
어떤 자는 내 대갈빡에는 뭔가로 꽉 차 있다고 한다
나는 머리가 텅 비어
땡볕에 목말라 머리끝까지 텅텅 비어
소금을 한 주먹 집어먹고 싶을 만큼
환장하게 어지러워 죽겠는데
거참 이상하다
뭔가 꽉 차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친구들은 나를 보고 앞뒤가 콱 막혀 있다고 한다
순진하다고,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한다
쉽게 말해 졸나게 멍청하다는 얘긴데
막혀 있건 꽉 차 있건 텅텅 비어 있건
매를 많이 맞아 맛이 갔건
내 근력으로 처자식 깜냥껏 먹여살리고
아직까지 누구한테건 뭐 좀 보태달라 한 적 없는데
아니 그러니까,
낡은 세상 좀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그렇게 곽 막힌 것인가,
어쨌든 간에 나는 매를 맞으면서 돌아가는 팽이처럼
망치 들고 뚝딱
용접봉 들고 징징징
쇠 철판 위를 이렇게 흥겹게 토끼뜀 뛰면서 잘만 돌아가는데
거참 이상하다
뭔가 앞뒤가 꽉 막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동료들은 내가 차돌멩이처럼 단단하다고 그런다
내가 차돌멩이처럼 단단하다면
구사대 매타작에 사직서를 쓰지도 않았을 터고
아니, 단단하고 마른 세상에 좀 야무진 것이
그렇게 섭섭한 것인가
어쨌든 간에 내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처럼
마음이 굳고 모질어졌다 쳐도
용접선 산소 줄이 어지러운 난장
호퍼, 탱크, 쇠를 밀어내는 그라인더 먼지 속에
뱃가죽에 척척 달라붙는 러닝을 떼어내며
쉬는 목에 쳐다보는 하늘가
녹슨 철판처럼 빨갛게 내리깔리는 구름에도 이리 눈물겨운데
거참 이상도 하다
내가 차돌처럼 단단하다는 것은
간혹 가다가 눈 밝은 친구들은
내가 사랑에 대해, 이념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비록 희망이란 항상 꿈꾸는 자에게 열린다고
입에 발린 말은 못해도
절망이란 배부른 자의 말장난이라고 차마 말은 못해도
아니, 살기 팍팍한 것이 절망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아니 아니, 절망이라는 것이
도깨비바늘처럼 갈고리를 달고 있는 것이기라도 한다면
바로 바로 여기 이 현장
내 옆 동료 작업복에도 철썩 붙어와서
가슴을 물어뜯고 허리를 호되게 걷어찼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는데
어쨌든 간에 나는 맞으면서 돌아가는 팽이처럼
이렇게 땅바닥에 뿌리를 박고 까딱없이
팽팽 잘만 돌아가는데
거참 이상도 하다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앞뒤를 잘 알고 있는 어떤 자들은
어깨를 툭툭 치며
이제 커다란 고민은 끝이 났다고, 잔치는 벌써 끝났다고
간지럽게 속삭이면서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고민 끝, 행복 시작인가
아니, 행복이란 결핍 그거 아닌가
우쨌든 그런 행복이란 것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목매달려
사정사정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래그래 우리 몰래 그새 무슨 잔치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니 아니,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환장하게 잔치를 하고 싶어
허기가 지도록 요렇게 껄떡거리며
늘 보고 있어도 허허롭게 그리운 벗들과 함께
땀투성이 뿌연 먼지 속에서
불 달아오른 철판 위를 토끼처럼 이리저리 뜀뛰면서
까딱없이 땅바닥에 뿌리를 박고
맞으면서 곤두서는 팽이처럼 여전히 팽팽 잘만 돌아가는데
거참 이상도 하다
뭔가 벌써 끝났다는 것은
1998년 겨울, 영종도
모두 여기를
여름에는 사우디, 겨울에는 시베리아라고 했다
별을 보고 출근해서 별을 보고 퇴근하는
겨울, 영종도 공사장
갯벌 막아 지른 황막한 벌판 눈길을
덜컹덜컹 트럭은 잘도 달려간다
방한모 뒤집어쓴 채 졸다 깨다
언뜻 어스름 눈 비벼대면
차창으로 게릴라처럼 뛰어드는 새벽안개
바람이 불 때마다 눈 더미가
갈대 자빠진 갯고랑에 수북이 떠밀려 쌓여가는,
눈바람 피할 곳도 막을 것도 없는
돌 더미 눈길 위로
시린 발 동동 찍으며
우린 날쌘 노루처럼 작업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곤 바로 철근 뾰족뾰족 솟아오른
시멘트 담벼락 아래
각목과 합판을 분질러 깡통에 불을 지핀다
귀싸대기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콧물 질질 흐르는 뺨을 문대며
불을 한 주먹씩 떠보지만
잡히는 것은
톱날처럼 파랗게 날 선 바람뿐,
옹송그리며 둘러앉아
곱은 손을 비벼가며 피워 무는 담뱃불 위로
갈매기 울음소리 끼룩끼룩
풀도 없는 돌무덤
들판 위로 유배되어
우리는
그리고 곧, 아직 촉촉한 갯벌을 후비며
덤프트럭이 달려오면
철갑 공룡들의 트림이,
새벽 체조가 드디어 시작되고
집게발로 하늘 향해 별이라도 후벼 팔 듯
얼쭝얼쭝 포효하던 포클레인이
갯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돌자갈을 몸통으로 깔아뭉개며
냉기 절절 흐르는 새벽 공기를 마구 짓쪼아 나가고
우리도 언 손마디가 뚝뚝 소리 나게
펄쩍펄쩍 후려 뛰면서 몸을 푸는데
안개만이 낯선 친구처럼
스멀스멀 회백색의 하늘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눈 위에 찔끔찔끔 찍히는 오줌발에
숭숭 구멍이 뚫려 비칠비칠 뒷걸음질치는
아, 포근한 잠이,
부리에 떨어지는 부신 햇살이 그리운 새들의,
물고기의 가슴에 돌을 퍼 담는
겨울, 영종도
물새들은 참으로 멀리 쫓겨나고
겨울 안개는 정말 너무 깊구나
학다리 들판에서
아부지를 땅에 묻고 걸어가는 들길에
왜 이리 푸지고 질긴 바람만 불어오는가
아까 들머리부터
줄래줄래 따라오던 늙은 개는
제 머리 땀나는 줄 모르고
벌건 하늘을 향해 컹컹 짖어대네
당신 뜻대로 살지 않아서
너무 안타깝고
내 맘껏 당신의 야윈 발 한번
뜨신 물에 닦아드리지 못해
많이 부끄러운,
그러고도 아직 많이 헐벗은 나
그래도 속 깊게 이해하던 당신
검은콩처럼 새까만 눈의 쥐가
방죽의 구멍으로 부르르 숨어들고
천둥오리의 어깨에 살짝 얹혀지는 빛살이
너무 희어서 아뜩하기만 한데
보이지 않는다고 정녕 없는 것인가
저 쥐의 눈알 속이나 천둥오리의 날개 솜털에도
똑같이 대동 저수지의 맑은 물이
후비고 지나가듯
저 늪,
소멸과 생성이 만나는
잿빛 카오스
산에 들어와 산을 잊듯이
내 안에 들어와 까마아득하게 나를 잊은 새야
얘기해다오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정녕 없는 것이라고
<연보>
1957년 8월 26일(음력) 전남 함평에서 아버지 조을현과 어머니 이순임 사이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학다리중학교를 거쳐 서울 성동고에 진학한 뒤 1976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교내 문학 동아리 ‘청문회’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군 제대 후 영문학과로 전과했고 교내 신문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1984년 졸업 후 일월서각에 입사해 2년 동안 일했고, 구로공단을 거쳐 인천 지역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부평에 있는 동미산업에 취업하여 노조를 세웠고, 인천 지역 건설 일용노조를 설립에 앞장섰으며, 인천 남동공단의 현대기계에서 일했다. 1992년 사학 민주화 운동 과정에 해직된 정춘순과 결혼했다. 2000년 『노나메기』 창간호에 시 「산제비」 발표했고, 2002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시 「1998년 겨울, 영종도」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인천 영정도, 경춘고속철도 공사장 등에서 일하다가 2006년 간암 판정을 받았다. 2007년 2월 20일 타계했다. 2008년 유고 시집 『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실천문학사)가 간행되었다.
<시인 읽기>
차돌멩이가 부른 당당한 노래
―조영관론
맹문재
1.
조영관 시인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그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받았지만,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그가 독자들에게 낯선 이유는 2002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시단에 나온 뒤 4년 만에 세상을 뜬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작품 활동 기간에 짧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지면을 유고 시집에 정리된 것으로 살펴보니 『노나메기』(2000년 창간호), 『현대시학』(3002년 12월호), 『진보평론』(2005년 겨울호), 『작가들』(2006년 여름호), 『삶이 보이는 창』(2005년 11-12월호), 『실천문학』(2003년 가을호)이 전부이다. 1년에 한 군데 정도 발표한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영관을 시인을 기억해야 하며, 특히 시인 이전의 그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이해하고 의미를 새기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가 살아갈 길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일이다.
유고 시집에 실린 연보에 따르면 그는 1984년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일월서각이란 출판사에 취직한다. 그리고 2년 정도 근무하다가 퇴사하는데, 그 뒤 그는 구로공단에서의 학습 모임을 거쳐 인천 지역의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이때 그는 용접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 현장 노동자들과 학습을 하다가 안기부에 들켜 대부분 구속되었고 그도 수배 생활을 한다. 그와 같은 와중에서도 그는 부평에 있는 동미산업에 취업해 노동조합을 세우고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그렇지만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과정에 구사대에 폭행당하고 해고까지 당한다. 그는 그 뒤 인천 지역의 건설 일용직 노동조합 설립에 앞장선다.
우리는 조영관 시인이 활동한 이 시기가 1988년 무렵인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은 6월항쟁이 일어난 시기이기 때문이다.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는 국민들을 탄압하며 장기 집권의 의도를 밀고 나갔다.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포함한 국민들의 정치 민주화 요구를 강경탄압으로 무시한 것이다. 개헌 논의를 중지하고 제5공화국 헌법으로 정부를 이양하려는 이른바 4․13호헌 조치를 발표한 것이 그 단적인 면이었다. 이에 각계각층에서 호헌 조치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시국 선언이 잇따랐다. 더욱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에 끌려가 강압적인 조사로 사망한 사건이 5월 18일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의 노력으로 은폐, 축소, 조작된 것이 밝혀졌고,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 군이 시위 과정에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생명이 위독하자 민주화 투쟁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민주화를 촉구하는 국민들의 거리 집회와 농성이 국민 저항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이다. 이에 전두환 군사정권은 더 이상 탄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마침내 6․29선언을 내놓았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발표한 이 선언으로 정국은 겨우 수습되었는데, 그만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정치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컸던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노동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과거의 권위주의적 사용자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노사협조를 추구하는 차원을 넘어 노동자들의 계급성을 자각하고 노동운동의 길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해 임금 인상이나 작업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고, 전국적인 연대 운동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에 국가의 비호를 받는 사용자 계급 역시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좌경, 불법, 폭력 세력 등의 색깔론으로 탄압했다. 또한 업무 방해, 불법 시위, 폭력 행위 등의 명목으로 단속해 구속 노동자와 해고 노동자가 양산되었다. 또한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확산시켜 나갔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굴복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 노조원이 200만 명에 이르렀고, 500인 이상 대기업의 노조 조직률이 80%를 넘어섰다. 노동조합이 새로운 사회 변혁의 핵심적인 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에는 조영관 시인 같은 노동자들의 역할이 분명 있었다.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노조를 설립하고 노조원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한 토대들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고 노동운동이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조영관 시인은 시인 이전에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제대로 평가하고 새겨야 한다. 우리는 그의 삶에서 시대를 이해할 수 있고, 역사성을 찾을 수 있다. 점점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가 더 이상 타락하지 않으려면 사회적 정의를 위해 투신한 조영관 시인 같은 노동자들의 삶을 새겨야 하는 것이다.
2.
조영관 시인은 『실천문학』(가을호)의 신인상 당선 소감에서 “시는 황소보다 힘이 세다”고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해 자부심을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시대적인 인식을 강하게 내비쳤다. “한때 문학청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현실의 완강함에 비추어 그때는 시를 쓴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보다 더 급한 것들이 그 시절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필을 잡아들게 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고 있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것보다 급한 것이 얼마든지 있었던 시대를 그는 거쳐 왔다. 그 시대적 요청을 회피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그는 묵묵히 노동자로서 일하고 노동운동에 헌신해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더 투신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했다. 그와 같은 차원에서 그는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는 그가 노동자 신분으로서 겪어온 이전 시대와는 엄청나게 다른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아이엠에프 환란으로 인해 실업자가 된 그로서 겪어야 하는 심리적 동요와 현실적 고통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회사의 구조 조정으로 인해 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해고자들이 겪어야 하는 시련이었다. 회사에 어렵게 살아남은 동료들의 상황도 만만하지 않았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휴가는커녕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해외 여행객이 사상 최대라는 텔레비전 뉴스를 묵묵히 바라보아야만 했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느끼는 참담함은 분노조차 가라앉힐 정도였다. 그만큼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은 것이다. 그리하여 조영관 시인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과 모순적인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분노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 상황에 맞서 더 큰 전략을 세운 것이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주의 체제의 고발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즉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주체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회식이 별건가,
커팅기에 나무를 퍽퍽 잘라서리
숭숭 구멍 낸 드럼통 안에다가
엇대고 기대고 가새지르고 포개서 올려놓고설라무네,
설렁설렁 신나 좀 뿌리고 산소 불대를 솔솔 들이대면
아무리 지가 강철 철판이라도 안 오그라지고 배길 것이여.
몇 방 용접 붕붕 지져 스텐 석쇠 만들어놓았겠다
마늘 까놓았겠다
고추, 상추, 깻잎 씻어놓았겠다, 초장, 된장 사왔겠다
개뿔이나 뭐가 걱정일 것이여.
탄다, 장작이.
숯불은 일렁거리고, 조개는 쓱 아가리를 벌리고, 소라는 거품을 내뿜고
바지락은 뱃살을 오므리고, 낙지는 쩍쩍 입에 달라붙는데
새뜻하게 만든 기계
시운전 끝냈겠다, 술술 물건 잘 뽑아 나오겠다,
덜컥 기분이 좋아버린 우리 공장장,
대천 웅천 시장 바닥을 뱅뱅 돌고 후비고 누벼서
바리바리 훑어온
조개, 소라, 바지락, 낙지와 전어.
바쁘다, 바빠 술잔이 바빠.
벌건 코가 벌룽벌룽, 눈알이 찔끔찔끔
고소하고 달고 매콤하고 쌉쓰름하고
손가락, 젓가락이 주책없이 바쁘구나, 바빠.
고놈의 것 잘 시집보냈으면 됐지, 줄창
야근한 것이 뭐가 그리 대수여.
이번 월급은 제 날짜에 나오려나부지.
어서 술이나 한잔 푸셔.
똥구멍까지 쉬훤하게 찬술이 넘어 넘어가는데
사모님은 경리 아니랄까 봐 에쿠, 술보초를 섰구나.
흐흐흐 덤벼라 덤벼,
종이컵이면 어때, 길 건너 매점의 배 사장도 덤비고,
깔고 앉은 각목에다가 말만한 궁둥이 좀 치받히면 어떠냐
밥집 아줌마도 덤비고,
크으, 덤벼라 덤벼,
카센터 느림보 사장 박가도 기름 장갑, 스패너 후다닥 던져버리고
목장갑 한 켤레 끼고 덤비고,
군포, 시흥, 부천을 두루두루 찍고 다시 돌아온
별수 없는 중국집 대머리 주방장 최가도 헐레벌레 덤비고,
사이사이 둘레둘레 서고 앉고 좁히고 들이밀고, 후루룩 크으,
고철, 철판, 기계 줄줄이 늘어선 좁은 공장을 홀랑 들어낼 듯
공장 마당이 요란 방자하게 뜰썩뜰썩하는데
길가 담벼락마다 벚꽃으로 목련으로
사방 천지가 환한 것까지 얼씨구나 좋구나.
2차 어때,
아니 노래방부터, 아니야 당구장이 순서지,
들썽들썽 주장도 많고 사설도 많은
우리 청춘의 봄날은 이렇게 깊어 깊어만 갔는데
그날, 우리 가슴에는 벚꽃보다 더 희고
명주조개보다도 속살 부드러운 것들이 소록소록 살았더라.
―「마당 회식」 전문
위의 작품에서 사장에게 징징대는 나약한 노동자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사장의 눈치를 보거나 주눅 든 모습도 볼 수 없다. 어디까지나 공장의 주인은 노동자들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몇 방 용접 붕붕 지져 스텐 석쇠 만들어놓았겠다/마늘 까놓았겠다/고추, 상추, 깻잎 씻어놓았겠다, 초장, 된장 사왔겠다/개뿔이나 뭐가 걱정일 것이여.”라는 시인의 노래에는 당당함이 보인다. 노동자들의 걱정거리를 시원하게 날려 보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 만든 기계로 시운전을 해서 물건을 제대로 뽑아내 기분 좋게 회식을 하는 시간, 노동자들에게는 야근도 월급도 대수가 아니다. 공장 마당이 들썩들썩하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얘기하는 노동자들의 세계, 그것을 시인은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시인에게는 많은 월급이나 좋은 작업 환경 등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노동자로서 주체성을 지키는 일이 보다 중요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내세웠다. 위의 작품은 그와 같은 시인의 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 세계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얼마나 거센지 노동자 신분으로서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이다. 시인은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사탕을 거절할 수 없어 고민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조건을 무시할 수 없어 갈등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내리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또한 고민했다. 자본주의의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그 대가로 해고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는 탄압이기에 시인은 괴로워했다. 그리하여 한 번 해고된 노동자는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자는 더욱 강자로 만들고 약자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드는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 앞에서 절망했다. “겨울, 영정도/물새들은 참으로 멀리 쫓겨나고/겨울 안개는 정말 너무 깊구나”(「1998년 겨울, 영정도」)라고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네가 자랑하는 신념이라는 것도 이제는 너무 너덜하구나//산산이 부서져라”(「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노동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일도 어렵지만 노동자의 역사적 주체성을 지키기란 참으로 힘든 시대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힘듦과 피곤과 불안 등에 무너지고 만다. 연대하기가 쉽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조영관 시인이 간암으로 세상을 뜬 것이 그 단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재적 상황이나 결과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결과가 있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과정을 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조영관 시인은 한 노동자로서 시대적 소명을 최선을 다해 짊어지고 걸었다. 우리는 그 점을 분명하게 평가하고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일은 시대를 품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차돌멩이 같은 그가 우리에게 불러준 슬픈 노래여, 단단한 노래여, 당당한 노래여,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더욱 크게 울려주시라.
맹문재
저서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등. 안양대 국문과 교수.
첫댓글 조영관 시인의 글들을 읽고/ 제 곁에 있는 현실을 난 무엇을 하고 있는가..후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내 손에 주어진 노동..저렇게 풀어 내면 되는 데..왜 이리도 힘겨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