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로 길을 떠날 땐 의례 설레기 마련이다. 희한하게도 이날은 낯선 곳을 향하는 설렘이 없었다. 대마도, 한 번쯤은 가보아야 할 곳이란 막연한 느낌만 들었지 어떤 기대감이나 선망이 생겨나질 않았다. 도리어 갑갑한 과거사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리란 편치 않은 부담감이 더 컸다.
섬이 멀찌감치 시야에 들어온다. 이젠 잠잠해지는가 싶었던 배의 흔들림이 더욱 거세진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8시 30분에 출발한 니나호가 대마도 남쪽 이즈하라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10분이다. 두 시간 사십 분이 소요되었다. 뱃멀미에 시달리며 오기엔 지루하고 긴 시간. 단 일분이라도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은 생각뿐이다.
소나기가 지나간 섬은 후덥지근했다. 입도 수속을 마치고 제일 먼저 식당으로 향한다. 첫날은 이즈하라시내 전역을 도보로 걷는 일정이다. 슈젠지와 팔번궁 신사, 조선통신사비, 금석성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티아라몰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쓰여 지지 않는 시처럼 쓰여 지지 않는 여행기를 기록하기란 쉽지 않다. 짧은 이틀이었지만 생각은 엉키고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눈으로 마음으로 편히 즐기지 못한 여행의 고단함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대마도를 가기로 정한 순간부터 편치 않았다. 다크투어리즘, 역사적인 장소를 돌아보는 조금은 무거운 여행이다. 가깝고도 먼 일본이란 나라와의 답을 찾기 힘든 관계는 언젠가 풀릴 거란 예측조차 하기 힘들다. 너무도 오랫동안 뒤엉킨 역사는 짧은 여행마저 이토록 불편하게 만든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는 세 번째 큰 섬으로 울릉도의 열 배, 거제도의 두 배에 해당하는 면적의 섬이다. 현재 인구는 삼만 팔천여 명으로 노년층 인구가 증가해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남북 이백 여리의 가늘고 긴 모양의 섬으로 북쪽으로는 한국의 부산과 남쪽으로는 이키섬과 규슈(九州)에 면해 있다.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섬 면적의 89%가 산림지형이며 가파르고 울창한 산림이 해안까지 이어진다.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의 하카타항과는 145km 거리에 있지만 부산과는 49.5km로 더 가까운 거리에 있어 맑은 날은 서해안에서 한국의 산과 도시를 볼 수 있다. 본섬은 아소만과 미우라만 사이의 운하 만제키세토를 경계로 두 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다. 북쪽의 상도와 남쪽의 하도는 운하 위의 다리 만제키바시로 연결되어 있다. 본섬 외에 107개의 주변 섬이 있으며 그 중 다섯 개의 섬이 유인도이다.
한국과 일본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위치한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특성 외에도 우리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고려 창왕 때 박위의 쓰시마 토벌, 조선 세종 때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은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대한제국 최익현의 순국비와 비운의 옹주 덕혜의 결혼봉축비 같은 씁쓸한 흔적도 남아있다.
금석성 노문 옆 조선통신사비는 두 나라의 오랜 인연을 말해준다. 조선통신사란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선린외교 사절이다. 세종 때 2회, 세조 때 1회, 성종 때 2회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양국의 교린관계는 임진왜란 후 중단된다. 그 후로 중단되었던 사절단이 일본의 요청에 의해 선조 40년(1607)에 재개되며 순조 11년(1811)까지 열두 차례의 통신사가 파견된다. 총 12회에 걸쳐 204년 간 파견된 이 시기의 사절단을 별도로 조선통신사라 칭한다. 그때의 조선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1992년 기념비를 세웠다. 대마도는 지리적 특성상 에도로 가는 조선통신사의 중간기착지 역할을 해왔다. 수백 명이 넘는 사절단 행렬의 장관은 하천 벽화로 이즈하라 시내 곳곳에 새겨져 있다. 1980년부터 매년 8월에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가 이즈하라시에서 열렸다는데 대마도 관음사의 불상 도난사건이 있은 후 2013년부터 2017년 현재 중단된 상태다.
이곳 관광객의 대부분은 한국인이다. 하다못해 거리를 지나는 행인 한 사람도 만나기 힘들만큼 섬은 조용하다. 작은 시골읍내를 떠올릴 정도로 아담한 이즈하라 시내는 대마도에서 그나마 제일 큰 번화가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얄밉도록 잘 정돈된 골목길을 지나 슈젠지로 간다. 이 절엔 구한말의 선비 최익현의 순국비가 있다. 그는 74세의 노구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킨 죄목으로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내 상투를 자르려거든 내 머리를 먼저 자르라며 단발령에 항거했던 결기 꼿꼿한 선비 최익현. 그런 그가 적의 땅에서 나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적의 땅인 이 섬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으니 얼마나 원통할까. 백제의 묘법스님이 창건했다는 이 소박한 비구니사찰 수선사는 그의 장례를 치룬 곳이다. 1986년 고 정호영박사가 이곳에 순국기념비를 세우려할 때 최익현의 결연함을 헤아린 건지 대마도 유지들이 뜻을 모아 동참했다고 한다.
골목길을 지나며 가뜩이나 심란한 맘에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몇몇 상점에 붙은 기막힌 안내문이 주인공이다. 한국인의 출입을 금합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니 출입을 사절합니다, 등등. 우리가 중국인 관광객을 종종 홀대하듯이 일부 일본상인들이 우리를 홀대하는 걸 대하자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다소 몰지각한 어글리 코리언의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게 원인이라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건 몇 해 전의 불상 도난사건이 혐한감정에 불을 붙였다는 얘기도 있다. 어디 그때 일 뿐이겠는가. 수시로 꼬이는 두 나라 간의 감정으로 문제가 일어날 소지는 늘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전체 관광인구 중 98%가 한국인이라는데, 경제의 일정부분을 기대는 대마도에서 한국인 거부 문구를 보게 됨은 매우 불쾌한 일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