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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패닉> 슬라보예 지젝>/ 20210218
2주차_ 어떻게 이 현실에 대처할 것인가
강사: 정혁현
발제: 서선미
참석자: 29명
공은주, 이수정, 박성호, 정명수, 박연옥, 서선미, 안태형, 이신정, 이샛별,
허은선, 이은경, 유혜숙, 한수아, 최경선, 정단희, 조정은, 이현주, 손지영, 장철원,
김용훈, 윤여군, 방선은, 임신희, 김상희, 조경선, 안선, 탁선경, 엄야사르, 전재범, 정단희
전지구적 재난의 순간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말라’라는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 고통받는 타자들에게 손을 대어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개별적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던 것을 넘어 그의 정신성, 성령을 이어받아 예수가 하던 일( 질병치유 등 기적)을 너희 주변사람들에게 하라는 것이다.
작금의 코로나19유행병상황에 행해야할 전세계적 연대와 우애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접촉 대면, 사적관계에서 벗어난 사유와 실천을 공적차원에서 할 것으로 나타나야한다.
세계적 연대 시스템 속에 존재하게 된 우리는 내 행위와 삶의 양식, 일상을 공적차원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구받고 있다.
‘우한바이러스’라는 명칭은 미국이 감염병책임을 중국에 돌리고자하는 의도 속에 나온 것이었다. 실상은 미국이 바이러스 전진기지였다는 것이다.
지금 바이러스의 숨겨진 의미를 찾기에 골몰하지 말 일이다.
재난에 대해 내 책임을 삭제하고 타자 탓으로 돌리는 책임회피의 태도가 국내 보수적 기독교에도 만연해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인간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천벌을 내리셨다 ’는 식의 배후의미를 찾지 말라는 것이다.
코로나19바이러스는 우연성, 우발성이 얽힌 결과물이다. 이 바이러스는 무의미하게 다가와 우리의 일상을 흔들므로 위험하다.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의미심장하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 투쟁에서 자유주의, 소부르주아는 공산주의가 서구사회이데올로기 주체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었다. 소련의 한계를 자유주의 방식으로 보완가능하다는 것이 지젝이 생각하는 공산주의이다. 구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는데 권력 자체가 빠지기 쉬운 무오류성, 완전성 때문이었다. 권력과 언론 사이의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만을 고려하는 자본주의는 심각한 비인간화를 낳는다. 1 vs 99퍼센트로 부가 양극화된 세계. 이 양극단의 차이를 만든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다.
현대사회는 니체가 ‘신의 죽음’의 시대라고 말했듯 공식종교가 퇴조하고 전근대적 세계이해에 기반한 종교관이 퇴조했다. 그렇지만 과연 사람들은 이성에 기반해서 행동하고 있을까? 오히려 믿음이 타자에 전가되어 무의식적으로 아무 것이나 믿으며 더 강하게 믿고 있지 않나? 이 세계를 더욱 요상하게 만드는 믿음이 판치고 있다.
감염병유행상황에서 영국,미국의 마트에서는 화장지가 동이 나는 일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성적, 합리적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화장지가 동이 날거라고 생각해서 사재기를 할 거야. 그러니 나도 그 행렬에 동참하는 수 밖에......“
한국에서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서)해서 주식투자하고 아파트 사는 현상은 모두 타자의 믿음을 믿어서 내 행동이 비합리성으로 드러나는 예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개인들의 행동양식이다. 즉 나는(만)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손해를 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창안해서 세계적 반열에 든 철학자로 벤야민과 푸코를 연결한 작업을 했다. 9.11사태 이후 미국이 여타 세계에 대해 더욱 폐쇄적이 되고 바운더리boundary를 치고 그 외부에 사는 사람들은 인권적용을 않겠다는 태도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유린으로 잘 드러났다.
칼슈미트의 정치철학에 반대 입장에 선 발터벤야민의 테제를 보자.“억눌린 자들에게 비상상태는 일상이다.”
자신의 권력을 초법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제멋대로 통치하는 미국패권 앞에서 미국 외의 인간은 호모사케르(법의 체제 외부에 방치된 인간. 한마디로 비인간이 됨)로 규정되었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에서는 코로나 대응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을 조사했다. 한국의 코로나 초기 통제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를 서구는 한국민이 전근대적 의식이 남아 있어서 그저 지도부의 지배에 따랐다는 폄하적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시사인 조사에 따르면 한국민은 서구보다 더 서구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행동으로 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감벤은 ‘자유’ 이념에 입각해 정부의 통제권을 남용하는 걸 경계하려고 했으나 지젝은 이들의 입장에 거리를 둔다. 급진자유주의자들의 입장 대부분은 무정부주의색채를 띄는데 전세계가 글로벌화 된 상황에서 오늘날 벌어지는 사태는 지역주의만으로는 통제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적이고 강력한 국가기구와 세계적 통제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자본주의 체제가 영속할 것이고 자본주의가 우리의 정신성까지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는 끝났다’고 본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지구적 자본주의가 이미 종말을 고한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점은 어디일까?
인간은 flexible하다. 상황의 변화에도 잘 적응하고 쉽게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결정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쿠야마는 잘못 짚었다. 인간은 돈을 벌 때 뿐만 아니라 작은 걸 이웃과 나눌 때에도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200년 밖에 안된 이 시스템( 자본주의 )에 완전히 노예가 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기이다. 우리가 영속하리라 믿어왔던 체제, 자본주의는 지금 이미 붕괴상황에 들어가는 중이다. 자본주의가 대처할 수 없는 위기가 바로 생태파국, 코로나팬데믹으로 나타나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는 이 시스템으로는 팬데믹에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만 자기가 비공( 오지파열술) 에 당한 것을 모르고 있다.
만화 ‘톰과 제리’에서 톰이 도망갈 때 낭떠러지를 지나 허공에서 한참을 달려가다가 발 아래를 쳐다본 순간 낙하한다. 자본주의가 바로 이 허공에 뜬 톰 신세라는 것이다. 변화가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이 사태를 알려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 없이 위기에 빠진 미국은 트럼프체제에서 변화를 인정하려들지 않고 문제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응했다. 그러다가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리는 중이다.
사적인 관계로부터 공적인 태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개인을 분열시키며 작동되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지금 희망이 없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신과 뼈는 대립물이라 할 수 있는데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이고 뼈는 사유없이 고정되어버린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헤겔이 ‘정신은 뼈다’라고 했을 때 둘이 구별 될 수 없는 상황은 둘을 구별하는 시선 자체가 무너진 상황, 즉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환상횡단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존재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오해한 세계가 붕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증상에 시달리지만 증상은 실은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이 내가 붕괴하는 것, 내가 사라지는 것 ,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분석의 목표이다. 분석가가 분석을 하면 나는 증상을 통해 전해오는 쾌락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분석에 저항하게 된다. 환상횡단은 한 인간이 극심한 충격을 받고 그걸 극복하는 인간에게 나타난다. 내가 나라고 믿고 있었던 게 내가 아니고, 내가 그걸 나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전개될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바이러스의 무의미성이 이 세계를 이토록 흔들어대는 상황은 정신과 뼈가 구별할 수 없는 실재의 상태임을 자각하라는 것에 다름아니다.
자본주의적으로 구성된 자아가 붕괴되어야 한다.
헤겔이 ‘정신은 뼈다’라고 했는데 이는 ‘무한판단’의 결과라고 한다.
우리 정신은 세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실재, 상징계, 상상계이다.
상상계는 이미지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자아이미지를 둘러싼 쟁투의 세계이다. 심리학은 인간을 나면서부터 자기이미지를 갖는다고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난다고 본다. 아기들은 자기가 우는 소리에 놀라 기겁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도와 육체의 자극이 분열되어 있다. 아기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하나로 구성된 이미지임을 알았을 때 환호한다고 한다. 라캉은 이를 ‘외과수술’에 비유한다. 분열된 이미지들이 봉합되어 자기 이미지를 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늘 타자에 반영된 이미지,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면 그들의 이미지를 자기의 이미지로 구성하고자 애쓴다. 우리는 또래의 얼굴을 보고 내 이미지를 구성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의 자아 이미지는 엄청나게 공유되어 있다. 내가 내것으로 가져와 내것으로 삼는 이미지가 내것인지 타자의 것인지 끊임없이 쟁투가 벌어지는 세계가 상상계이다. 인간의 진화 이전에 포식단계의 나타나는 공격성은 본능이 아니라 이미지를 둘러싼 투쟁 속에 인간 공격성이 근원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질투는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봤을 때 내 안에서 불같은 공격성이 끓어오르면서 생기는 것이다. 나와 타자가 구별이 안 되는 세계, 그것이 나라고 주장하기 위해 싸우는 세계가 상상계이다.
요즘 심리학은 자아를 토닥이고 힐링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우울증은 왜 걸리는 걸까? 빵빵하게 부푼 ego가 만족이 안되서 걸리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처방은 심리학과 다르다. 빵빵하게 부푼 자아의 바람을 빼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상상적 자기 이해, 즉 오인에 자아를 가두며 다독거리기만 한다. 그것이 소위 힐링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고 권유된다.
상징계는 대타자라고 할 수 있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대타자는 권위있는 타자이다. 프랑스말 autre, 영어 other를 대문자로 표기한 대문자 A로 표기한다.
아이가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의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엄마를 보고 묻는다. “저게 나인가요?” 엄마는 저 이미지를 내 것으로 가져도 좋다는 확인을 해준다.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2자 관계를 금지하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부른다. 곧 대타자이다. 인간에게 궁극적 대타자는 언어. 말이다. 왜냐하면 말이 우리 세계에 궁극적인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형제 많은 집의 자녀들은 서로 경쟁하기 마련인데 그들 사이를 규율해서 법적 체계를 세우는 아버지가 언어다.
인간과 언어는 뗄 수가 없다. 언어는 인간에게 기생하는 어떤 실체이다. 기호학자 소쉬르는 ‘우리는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언어에 의해 말 되어지는 주체다’라고 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가 유전자의 영속을 매개하는 매개물일 뿐이라고 한다. 언어는 인간보다 영속하는 질서로서 인간을 규제하는 실체, 궁극적 실체이며, 기생적인 실체다.
‘무의식은 타자( 대타자 )의 담화다’ 라고 한다.
인간이 말하는 존재가 되지 않았다면 무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데 말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실재라는 차원이 있다.
바이러스는 지양될 수 없는 잔여와 같다. 나눌 수 없는 잔여이다. 나눈다는 것은 언어의 능력이다. 단어는 사물을 구분한다. 이건 펜이다. 저건 사과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사물을 인식한다. 언어가 많을수록 우리는 사물을 더 인식하기가 가능하다. 한국인에게 눈SNOW의 이름은 예닐곱가지 정도 된다.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등..이 눈은 모두 서로 다른 양태로 내린다. 눈이 많은 에스키모인들에게 눈 이름은 서른가지가 넘는다. 눈이라는 실재를 언어로 표현하려면 그걸 나눌 수 밖에 없다. 말은 사물을 나눔으로써 사물을 죽인다. 말은 사물을 표현하지만 사물은 언어외부에 흐르는 실재 (칸트의 물=物 자체 개념)이다. 언어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실재다. 실재는 언어로 표현 못하는 접근불가한 것, 이해 불가한 것이다. 말로 통합해낼 수 없는 것이 실재다. 인간의 인식범주를 넘어선 것으로서 세계 그 자체는 물자체이다. 언어너머에 실재가 있다. 라캉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급진적이 되며 실재를 언어의 효과라고 보았다. 언어에 들러붙은 어떤 잔여가 실재라는 것이다.
이샛별작가의 회화작업은 실재를 가시화하고 있다. 풍경에서 뭔가 삐져 나와 풍경을 흩트린다. 말 그물을 통해 세계를 포착하려는데 그 그물이 성겨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실재이다. 실재는 항상 존재한다. 우리는 말로 이 세계를 촘촘히 구성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언어로 우리를 포섭해서 자본주의 세계 속에 두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본주의 외부의 세계를 보기 두려워하고 꺼려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만 보는 것이다. 실재는 상징계의 구멍이다. 상징계는 이 구멍을 가리고 감싸느라 구멍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이 나타난다. 실재 역시 나타나는데 우리 말의 그물이 촘촘하지 못해 세계를 장악하거나 포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체제의 구멍을 드러내는 어떤 것이 끊임없이 도래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실재의 차원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농담, 말실수, 꿈 등 어처구니 없이 왜곡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라캉은 완전히 논리정연한 말이 바로 텅 빈 말이며 엉성하게 터져나오는 말이 충만한 말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세 요소 -상상계, 상징계, 실재는 서로 맞물리며 보로뫼오의 매듭같이 세 차원이 얽혀 하나가 풀리면 모두가 해체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대상 a는 상징계의 구멍의 자리를 차지하는 어떤 사물이라도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제 눈에 콩깍지라는 말로 이해해보면 쉽다. 나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사물은 거의 완벽해보이고 내 결여를 완벽히 채워줄 것처럼 나에게 나타난다. 왜 ?그가 우연히 내 욕망의 어떤 자리를 점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상 a는 상상적 대상, 상징적 대상, 실재적 대성 세가지 속성 모두 있다. 우리의 정신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세 차원이 하나로 얽혀 구성되어 있다. 자기를 성찰하는 이는 자기 안의 상상적 차원을 잘 의식하는 것일 뿐이지 이를 제거할 수는 없다.
첫댓글 뒷부분에 설명해주신 L도식은 정리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