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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개척자 "수잔 발라동 (Suzanne Valadon), 1865.9.23~1938.4. 7
수잔 발라동 (1865년 9월 23일 – 1938년 4월 7일)는 프랑스 오트비엔 의 베신쉬르가르탕에서 메리 클레멘틴 발라동으로 태어난 프랑스 화가이다. 수잔이라는 이름은 그녀를 화가의 길로 인도한 틀루즈 로트레크가 붙여 준 이름이다. 세탁소 어머니의 사생아의 딸로 태어나 거리의 소녀로 성장하였지만 프랑스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여장부 여류화가다. 발라동은 또한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어머니였다.
스잔 발라동은 광산의 노동자들과 예술가들로 붐비는 몽마르트 언덕 뒷골목에서 야생마처럼 자라났다. 학교에서도 선머슴처럼 거칠었고 수업시간에는 뛰쳐나와 공원에서 춤을 추며 놀았다. 어른의 통제가 곤란한 대담한 성격의 멀괄량이였지만 종잇조각이 보이면 무조건 그림을 그렸을 만큼 예술적 재능도 타고났다.
발라동은 거의 40년 동안 예술가로 살았다.드로잉과 그림의 주제는 주로 여성 누드, 여성의 초상화, 정물 및 풍경을 포함했다. 발라동은 아카데미에 참석한 적이 없으며 전통에 갇힌 적이 없다. 발라동은 많은 유명 예술가의 모델이었다.
발라동은 몽마르트르에서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자랐다.발라동은 아버지를 몰랐다. 상당히 독립적이고 반항적인 것으로 알려진 발라동은 일을 시작했을 때 열한 살까지 초등학교에 다녔다.
발라동은 12세부터 생계를 위해 미싱사, 세탁부, 제분업자 작업실, 장례식 화환 제조 공장, 야채 판매, 웨이트리스 등 생계를 위하여 닥치는 대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15세에 발라동은 가장 원하는 분야인 서커스에서 곡예사로 일한 직업을 얻었다. 그녀가 서커스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메드라노에 속한 서커스 장식에 참여했던 두 상징주의 화가인 앙투안 드 라 로슈푸코 백작 과 테오 바그너 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툴루즈 로트렉, 베르트 모리조 등의 예술가들이 서커스를 자주 찾았고 이것이 모리조의 발라동 그림에 영감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공중그네에서 떨어져 1년 만에 발라동의 서커스 경력이 끝난다.
일반적으로 발라동은 9살에 그림 그리는 법을 스스로 배웠다고 여겨진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지구에서 발라동은 예술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여 처음에는 예술가의 모델과 뮤즈로 일하고 그들의 기술을 관찰하고 배운 후에 스스로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실제 수잔발라동 모습
발라동은 1880년 15세의 나이로 모델로 일하기 시작했다. 발라동은 2년 동안 툴루즈 로트렉의 연인이었고, 1888년 그녀가 자살을 시도하면서 끝이 났다.
발라동은 예술가들의 기술을 관찰함으로써 예술에서 자신을 교육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발라동은 매우 집중하고, 야심차고, 반항적이며, 단호하고, 자신감이 있고, 열정적인 여성으로 여겨졌다. 1890년대 초 발라동은 대담한 선화와 섬세한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은 에드가 드가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발라동의 작품을 사서 격려했다. 발라동은 191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었다. 미술사가 헤더 도킨스(Heather Dawkins)는 모델로서의 발라돈의 경험이 남성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여성 표현보다 덜 이상화되는 경향이 있는 누드 여성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에 깊이를 더했다고 믿었다.
모리조의 1880년 발라동의 줄타기 워커 그림이 그 이전에 있었지만 가장 잘 알려진 발라동의 초기 이미지는 르누아르의 그림에 있다. 발라동은 동료 화가들과 함께 파리의 술집과 선술집을 자주 찾았고 발라동은 그의 유화 The Hangover에서 Toulouse-Lautrec의 주제였다.
그녀의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감탄한 작품
가족초상화
발라동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같은 동시대 화가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은 당대의 저명한 화가였다. 발라동은 전문 협회에 가입했고 발라동의 작품은 심사를 거친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발라동은 반항적인 시각으로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았다.
발라동의 가장 초기에 서명되고 날짜가 기입된 작품은 목탄 과 파스텔 로 그린 1883년 자화상이다. 발라동은 1883년에서 1893년 사이에 대부분 그림을 그렸고 1892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발라동의 첫 번째 모델은 가족, 특히 발라동의 아들, 어머니, 조카였다.
발라동은 1896년에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발라동은 강렬한 구성과 생생한 색상으로 유명한 정물, 초상화, 꽃 및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발라동은 솔직한 여성 누드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발라동의 작업은 부분적으로 그녀가 이상적이지 않은 누드를 그려서 당시의 사회적 규범을 뒤엎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발라동의 가장 초기에 알려진 여성 누드는 1892년에 처형되었다. 1895년, 미술상인 Paul Durand-Ruel은 다양한 단계의 화장실 변기에서 여성을 보여주는 발라동의 12개의 에칭 그룹을 전시했다. 이후 발라동은 정기적으로 파리 의 베른하임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였다. 발라동은 1894년 Salon de la Nationale의 출품업체로 처음 승인되었다. 합격 경쟁이 치열했다.
발라동은 1909년의 Salon d'Automne, 1911년의 Salon des Independants, 1933-1938년의 Salon des Femmes Artistes Modernes에 전시했다. 특히 Degas는 그녀에게서 그림을 구입한 첫 번째 사람이었고, Paul Durand-Ruel 및 Ambroise Vollard 를 포함한 다른 수집가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Degas는 또한 그녀에게 연질 에칭 기술을 가르쳤다.
부유한 은행가인 Paul Mousis와 결혼한 후 1896년 발라동은 전업 화가가 되었다. 발라동은 1909년에 드로잉에서 회화로 전환했다. 성적 쾌락과 관련된 살롱을 위한 발라동의 첫 대형 유화는 남성이 여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현대 회화의 첫 번째 사례 중 일부였다. 남성 예술가들의 이상적인 여성 대우와 유사하다. 이 주목할만한 살롱 그림에는 아담과 이브 ( Adam et Eve )(1909), 삶 의 기쁨 ( La Joie de vivre )(1911), 그리고 그물 던지기( Lancement du filet )(1914)가 있다.발라동은 평생 동안 약 273개의 소묘, 478개의 그림, 31개의 에칭을 제작했으며 단, 버려지거나 파괴된 조각은 제외된다.
발라동은 발라동의 일생 동안, 특히 발라동의 경력이 끝날 무렵에 잘 알려졌다. 발라동의 작품은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 그르노블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다.
발라동은 특정 스타일에 국한되지 않았지만 상징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미학이 모두 발라동의 작업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발라동은 주로 유성 페인트, 유성 연필, 파스텔 및 빨간 분필로 작업했다. 발라동은 잉크나 수채화 물감이 발라동의 선호에 비해 너무 유동적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 의 그림은 풍부한 색상과 대담하고 개방된 붓놀림으로 종종 발라동의 인물을 정의하고 윤곽을 나타내는 확고한 검은 선을 특징으로 한다.
투망
발라동의 자화상, 초상화, 누드, 풍경 및 정물은 학문적 예술의 경향 및 동시대 측면에서 분리되어 있다. 발라돈 그림의 주제는 목욕하는 여성, 누운 누드, 내부 장면과 같은 오래된 주요 주제를 종종 재창조한다. 발라동은 노동 계급 모델을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미술사가 Patricia Mathews는 발라동의 노동계급 지위와 모델로서의 경험이 이 여성들과 그들의 신체에 대한 친밀하고 친숙한 관찰에 영향을 미쳤다고 제안한다. 이 점에서 발라동은 대부분 여성을 그렸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중상류층의 지위 때문에 "주제에서 적절함의 범위를 잘 유지"한 베르트 모리조 및 메리 카사트와 다르다. 발라동의 소외된 지위는 그녀가 모델링을 통해 현대 남성이 지배하는 예술 영역에 진입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공식적인 학업 훈련의 부족으로 인해 발라동은 학문적 관습에 덜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발라동은 누드 여성에 대한 그림의 차이로 유명하다.발라동은 지나치게 섹슈얼화되지 않은 이상적이고 이기적인 여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계급의 함정과 성적 매력을 강조하면서 전형적인 여성 묘사에 저항했다.발라동은 또한 은 누드 자화상을 그렸으며, 나중에 발라동의 노화된 신체를 사실적으로 표시했다.
1883년 18세의 발라돈은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를 낳았다. 발라동의 어머니는 모리스가 모델링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를 돌보았다. 나중에 발라동의 친구 Miquel Utrillo는 모리스를 그의 아들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했지만 진정한 친자 관계는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1893년 발라동은 작곡가 에릭 사티와 짧은 관계를 시작했고 Rue Cortot 에 있는 그의 옆 방으로 이사했다. 사티는 그녀에게 집착하여 그녀를 그의 Biqui라고 불렀다. , "발라동의 전신, 사랑스러운 눈, 부드러운 손, 작은 발"에 대한 열정적인 메모를 작성한다. 6개월 후 발라동은 떠났고 그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발라동은 1895년 주식 중개인인 Paul Mousis와 결혼했다. 13년 동안 발라동은 파리의 아파트와 외곽 지역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았다. 1909년 발라동은 아들의 23세 친구인 화가 안드레 우터 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발라동의 모델이 되었고 그 해에 그려진 아담과 이브에서 아담으로 등장한다. 발라동은 1913년에 Moussis와 이혼했다. 발라동은 1914년에 Utter와 결혼했다. Utter는 발라동의 경력과 아들의 경력을 관리했다. 발라동과 Utter는 발라동이 거의 70세가 된 1934년 부부가 이혼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그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관계를 이어갔고 파리의 Saint Ouen 묘지 에 함께 묻혔다.
아담과 이브
1909년 수잔 발라동은 '아담과 이브'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미술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성서 내용처럼 이브가 나무에서 사과를 따는 장면을 포착한 그림이다. 중세시대부터 숱한 서양화가들이 이 장면을 그렸다. 그들 그림 속에서 이브는 죄인이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면서 인간 전체가 고통의 수렁에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아담 역시 이 범죄에 가담했지만, 어디까지나 주범은 이브였다. 여성은 오랫동안 인류를 재앙에 빠뜨린 악당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발라동의 그림 속 이브는 달랐다. 사과를 따는 이브의 표정은 당당하다. 죄책감은 없다. 이브 옆에 있는 아담의 표정은 심각하다. 아담은 사과를 따는 이브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얼핏 이브가 사과를 따지 않도록 말리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이브가 사과를 따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브가 욕망 앞에서 순수하게 몸을 활짝 열 때, 옆에서 아담은 온갖 계산을 하는 중이다. 발라동은 왜 이런 도발적인 그림을 그렸을까. 아마도 그는 아담을 그리면서 자신이 만났던 비겁한 남성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혼과 영감을 준 몽마르뜨 예술가들의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는 수잔 발라동
그러나 그녀 또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흰 스타킹을 신은 여인
발라동은 누드화를 많이 남겼다. 모델은 자신이었다. 여성의 몸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은 고대시대부터 있었다. 그것들 대부분엔 남성의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여성의 육체를 다루는 남성 예술가들의 머릿속엔 비너스가 있었다. 그들에게 여성의 몸은 어떤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예술사에 기록된 뮤즈들은 대부분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발라동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나이가 들며 얼굴에 주름이 늘고, 몸 구석구석에 군살이 붙고, 가슴도 처졌다. 발라동은 그런 몸을 덤덤하게 묘사했다. 저 아래 밑바닥에서 시작해 고군분투하며 삶을 개척한 사람 특유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그림들이다.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를 그린 그림
수잔 발라동과 모리스 위트릴리
모리스 위트릴리는 강렬하고 힘찬 인물묘사와 대담한 색채 표현이 특징. 대표작<파리의 골목>이 유명
파리의 골목-모리스 위트릴리
사망하던 해에 그린 그녀의 자화상
고양이 집사였던 것 같은 그녀.
고양이 그림도 많이 그렸다.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수잔 발라동 그녀의 마지막 명대사이다. 되새겨 생각하건대 이 한 문장에 공감표를 던지며 인상주의 시대의 예술에 대해 깊이를 둔다. 인상파 화가들의 꽃을 피우게 한 몽마르뜨는 서양미술의 묘비라고 할 수 있겠다. 몽마르뜨 언덕의 자유분방했던 예술가들의 활동에 빼놓을 수 없는 그녀, 모두의 뮤즈였다는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이 있다.
그녀는 세탁 일을 하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아버지)를 만나 태어난 사생아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난한 그녀 또한 파리로 입성하게 되는데 역시 몽마르뜨 언덕에 자리 잡게 된다. 그녀를 뮤즈로 탄생시킨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 카페. 많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와도 같았던 라 메종 로즈에서 수잔은 마담이자 예술가들의 공동 연인으로 전략하게 된다.
수잔이 몽마르뜨에 입성하던 날 화가 르누아르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수잔은 르누아르 보다 무려 26세나 어린 나이였었다. 그런 그녀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르누아르의 모델로 활동하게 되는데 종국에는 연인으로 지내게 된다. 르누아르를 만났을 당시 수잔의 나이는 20세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틀루즈 로트렉 작품속 모습
그 후 수잔은 로트렉이란 백작 가문의 장남을 만나게 되는데 로트렉은 어려서부터 잦은 병마와 싸워야 했었고, 키가 150cm 밖에 자라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도 화가의 기질이 다분하여 수잔의 눈길을 끌었으며 역시나 수잔은 로트렉의 모델이 되어 주었으며 르누아르와 마찬가지로 로트렉의 연인이 된다.
에드가 드가 작품 속 모습
이렇게 그녀는 가난을 채우기 위해 여러 화가들의 모델이 됨과 동시 그들의 연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성생활을 했으며 사생아인 자신을 낳은 그녀의 어머니의 삶을 그대로 닮게 된다. 그녀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들을 낳게 된다. 이후에도 그녀는 드가를 비롯해 많은 화가들의 모델이자 동거녀가 되는데 모델 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그림 실력으로 그녀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런 그녀를 화단에 데뷔시키게 해준 화가는 드가였다. 여성 최초로 프랑스 국립 예술원 회원이 되었는데 당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로트렉과 춤을 추던 그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에게 반한 가난한 음악가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에릭 사티(Erik Satie)이다. 에릭 역시 가난한 생계를 위해 술집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수잔은 그런 사티를 모델 삼아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평생 한 여자, 수잔만을 사랑한 사티는 알콜 중독으로 5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에릭이 죽은 후 그의 방에서는 검은색 벨벳 정장과 80여 장의 똑같은 손수건, 한 장의 사진 그리고 27년 동안 수잔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한 묶음이 있었다. 또한 벽에는 두 점의 그림이 붙어 있었는데 수잔이 그린 사티와 사티가 그린 수잔이 나란히 죽은 그의 방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에릭사티와 그가 그린 수잔 발라동/발라동과 그의 아들
사티의 죽음이 수잔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는데 수잔은 이후에도 사생아로 태어난 아들의 친구를 만나 동거를 하며 그를 상대로 ‘아담과 이브’라는 작품을 남긴채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그녀는 멀고도 고독한 길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담긴 한 문장을 남깁니다.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에릭 사티(Erik Satie)에게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은 유일무이한 사랑임을 증명하는 음악들이 있습니다. 춤추는 수잔의 모습에 반한 에릭의 마음을 담은 노래 Je tu veux(나는 당신을 원해요), 떠나버린 수잔을 기다리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녀를 위한 음악을 작곡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곡 짐노페디(Gymnopedie). 에릭 사티의 대표곡이기도 하지요. 그녀를 기다리며 그리움과 슬픔, 비통함을 담아 느리게 장중하게 연주한다.
피비 드 샤반느 작품 속-수잔 발라동
발라동은 친구 소개로 모델 일을 얻는다. 당시 파리에서 이름을 떨치던 화가 샤반의 모델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 시절 남성 화가의 모델이 된다는 건 순수하게 모델 일만 하는 걸 의미하지 않았다. 남성 화가들은 모델을 하녀처럼 부리고,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발라동은 샤반의 집에 살며 모델, 하녀, 연인 1인 3역을 맡았다. 발라동은 문득 자신도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험 삼아 그림 몇 장을 그려 샤반에게 보여줬다. 샤반은 "쓰레기 같은 그림"이라며 발라동의 도전을 하찮게 여겼다. 발라동은 출신은 초라했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줄 아는 인간이었다. 평소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줬던 샤반의 민낯을 본 발라동은 고민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르느와르 작품속 모습
르누아르 대표작 '부지발의 무도회'(1883)와 '우산'(1883)에 등장하는 여자는 발라동이다. 둘은 화가와 모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행복의 화가'라는 별명답게 르누아르 그림은 봄날의 미풍처럼 포근하다. 그의 그림에서 발라동은 수줍고, 싱그러운 여성으로 묘사된다. 거기엔 대도시 뒷골목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발라동은 르누아르가 자신의 외모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상처받는다.
인상파 화가인 르누아르와 모델에서 연인으로 오랜기간 화실에서 머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수잔은 르누아르에게 자신의 꿈을 고백하고 자신이 그린 화첩을 보여주게 된다. 사랑하는 연인의 칭찬을 기대했던 그녀에게 르누아르는 냉정하게 계약관계를 끊고 그녀를 내쫒아 버린다.
그녀의 나이 18세 뱃속에는 이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수잔이 낳은 아이는 르누아르가 아버지일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르누아르에게 쫒겨나 비탄에 잠긴 수잔을 위로한 사람은 같은 건물에 세들어 살던 틀루즈 로크레크였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선천적 유전병으로 장애를 앓으며 환락가를 전전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틀루즈는 발라동의 화가로서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녀를 화가의 길로 이끈다. 시간이 흘러 수잔은 틀루즈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불구의 몸에 성병까지 앓고 있던 틀루즈는 그녀의 구애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36세의 이른 나이로 죽은 틀루즈는 발라동이 원하던 가정을 줄 수 없었지만
22세의 발라동에게 수잔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수잔은 성경에 나오는 정숙한 연인 수잔나이다. 수잔을 드가에게 소개해준 인물도 틀루즈다. 드가를 만난 수잔은 드디아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드가는 그녀의 그림을 구입해서 자신의 방에 걸어놓고 예술협회에도 소개하며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늘 남자화가들의 누드모델이되어 남성적 에로티시즘이 투사하는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현실 속의 투박하면서도 인생의 거칠고 밑바닥을 살아 낸 원시적 그대로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사실적 누드를 그리며 19세기 화단에 큰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많은 화가 작곡가 변호사들이 그녀의 당당한 생명력과 창조력에 반하게 된다. 그중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폴 무시스와 1896년 결혼하게 된다. 그 후 어릴적 자신처럼 정신이 박약했던 아들의 친구 앙드레 위터와 사랑에 뻐지게 된다. 그녀는 13년 간의 결혼생활의 종지무를 찍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앙드레 위터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 위트릴로의 그림을 팔아 막대한 부를 챙기게 된다.
가난한 밑바닥에서 시작한 모자의 인생은 굴곡을 겪게 되지만 그 끝은 위대했다. 고된 살ㄻ을 살아내며 인생을 성찰했던 그녀였기에 종래의 회화교육 없이 비주류화가의 제약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1894년 여류화가 최초로 프랑스 국립예술학회에 작품을 전시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최초의 여성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 치열하고 뜨거운 생의 질곡을 거치면서 수잔 발라동과 그녀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는 삶의 주인공으로서 세상을 향하여 당당히 외치며 미술사에 용기를 북돋우고 강인한 예술가의 새 지평을 연다.
툴루즈 로트렉 작품속 모습
로트레크 작품 속에서 발라동은 낡은 옷을 입고 지친 눈동자를 하고있다. 그는 발라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 발라동은 자신을 진심으로 헤아려주는 로트레크에게 마음을 연다. 로트레크는 발라동이 연습 삼아 그린 그림을 본다. 그리고 발라동이 화가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로트레크는 친구였던 화가 드가에게 발라동을 데려간다. 발라동은 드가 밑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발라동은 로트레크에게 청혼한다. 로트레크는 완강히 거부한다. 부모로부터도 외면받은 그에겐 뿌리 깊은 자기혐오가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 진정한 사랑 따위는 가당치도 않다고 믿었다. 발라동은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로트레크의 마음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둘은 헤어졌다.
모딜리아 작품 속-수잔 발라동
모리스 위트릴리 작품 속 -수잔 발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