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와 금나라가 서로 치고 받고 싸울때, 중립을 지켰던 고려
때는 1114년 고려 예종9년. 고려에 요나라의 동경병마도부서사(東京兵馬都部署司)의 공문이 도착합니다.
"근래에 생여진이 그릇되게 행동하기에 관원(官員)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게 한 후 상부의 지시를 요청했습니다. 고려국(高麗國)도 여진과의 경계 지역에서 상황에 따라 작전을 펴되, 적의 근거지 깊숙이까지 공격해 인명과 재산 및 가옥을 점거한 다음 포로로 잡거나 완전히 소탕해야 할 것입니다. 그 후 방비를 굳게 하여 적들이 고려 땅 가운데 지형이 험한 곳으로 들어가 피신하지 못하게 단속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귀주대첩 이후 100여년,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준지 5년이 지난 시점에서, 고려의 북방지역 요나라에서 전란이 발발하였습니다. 요나라의 밑에있던 여진족 추장 아구다(아골타)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요나라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만한 반란이었지만, 반란은 쉽게 잠들지 않았습니다(되려 11월에 출하점에서 10만의 군사가 대패 당해 버리죠).
아구다는 요의 영강주(지금의 길림성)을 공격 함락시키고 급기야 1115년 황제를 칭합니다.
한편 고려에서도 그 정황을 포착합니다. 아구다의 조상은 원래 고려사람이 기원이었죠.
"(상략) 혹자는, 옛날 우리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나라의 선조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애초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는,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했다. 고을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고, 활라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슬기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우야소(烏雅束)가 지위를 계승했고, 우야소가 죽자 그 동생인 아구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
어쨌든 금나라가 막 세워지던 당해 초기에는 금나라가 아직은 수세에 몰린 입장이기에, 요나라도 딱히 고려에 원병을 청하지는 않았습니다(대비는 시킵니다만). 요나라 천조제에게 갔던 사신들이 4월에 가지고 온 글만해도 급박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죠.
"요즘 들어 변방 관리들의 수비태세가 해이해진 바람에 하찮은 도적들이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이 죄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일부 군대를 동원할 것을 결정한 바 있다. 경이 다스리는 지역은 적의 땅과 가까운데다 경은 우리 조정의 번국을 맡고 있으므로, 특별히 군사를 정비해 폭도를 축출하라는 조칙을 보낸 바 있다. 이제 경이 사신을 보내 답장을 올렸으니, 짐의 명령을 좇는 경의 충절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봄철을 맞은 지금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를 해칠 우려가 있으니 우선 훈련에 힘쓰면서 작전 시행은 따로 기다리도록 하라."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져서 11월에는 파병을 재촉하게 됩니다.
“지난번 여진이 불공한 행동을 보이기에 정벌을 통해 그 죄를 묻고자 지난 겨울부터 여러 방면으로 토벌에 나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현재 모든 군비는 갖추어졌으나 아직 적을 섬멸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제 각 부대가 모두 집결해 적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는 바, 그대 나라의 부대는 진작 군세를 점검했으니 즉시 먼저 출발하여 적을 협격하는 일에 늦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에 사신을 시켜 고려군의 출정을 살펴보게 했으니 충성을 다해 짐의 명령에 따라 공적을 떨치라.”
하지만 고려는 요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은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윤관의 여진정벌이 끝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고려로서는 병력을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1115년 8월에 요나라 사신이 와서 파병을 재촉했을시 왕이 대장군이상의 무반까지 참여시켜 의논을 거행하게 했는데, 결국에는 끝을 보지 못하고 유야무야 되고 맙니다. (참고로 이때 파병 반대파였던 사람들 중에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후일 삼국사기를 지을 김부식이 있었습니다(고려사 절요에만 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당해에 신기군을 사열하기도 하고, 왕이 서경으로 행차하여 무사를 선발하기도 하고 물놀이(혹은 수군훈련)을 하는 등 전란이 미칠 것을 나름 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아구다가 패할경우 잔당이 고려경내로 쳐들어 올 수도 있고, 만약 요나라가 이길 것 같으면 생색은 내야 했으니까요.
그러던 와중 1116년 고려는 돌연 태도를 180도 바꾸고, 요의 연호를 쓰는 것도 중지 시켜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