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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1년 11월 10일 (토요일) [별도 탐방] ① 송야천 수계- 안동 서후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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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삼태사 이야기
삼태사(三太師)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세 분의 태사(太師)를 말한다. 이 세분은 원래 모두가 경주 김씨(金氏)였으나 큰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에게 고려 태조 왕건은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성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들의 시조가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이다. 왕건은 김선평에게는 대광, 권행과 장길에게는 대상이라는 벼슬을 주었으며 당시 고창(古昌)이라 불리던 이 지역 이름을 "안동(安東)"으로 바꿔 주었다. 이로 하여 삼태사 후손은 안동의 명문집안이 되었으며 지금도 삼태사를 제사지내는 삼태사묘가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 신라 말엽, 당시의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떼가 성행하였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고려가 일어나 날로 강성해 지고 있었다. 마침내 후백제 견훤은 927년(신라 55대 경애왕 4년)군사를 이끌고 경주(서라벌)까지 쳐들어갔다. 이때 신라의 경애왕은 비빈과 신하, 종친들을 대동하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하느라 견훤군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신라왕궁은 함락되고 경애왕은 포로가 되었으며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였으며 신라 왕궁의 재물을 빼앗고 죽인 경애왕의 동생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으로 즉위시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오히려 공산(公山) 동수전투(桐藪戰鬪)에서 견훤에게 포위당하여 살길이 막막해지자 최후의 수단으로 의제인 신숭겸(申崇謙)을 태조(왕건)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게 하여 장렬히 전사케 함으로써 이 틈을 이용하여 태조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는데, 훗날 그 전투가 있었던 대구 부근의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이라 부르게 하고 그들의 공(功)을 높이 치하하였다.
그 후 막강했던 견훤의 세력은 승승장구의 여세를 몰아 929년(경순왕 3년)에는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고창(古昌) 즉 지금의 안동(安東)을 공격하여 왔다. 이때 고창군(古昌郡)의 호족이었던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경애왕의 원수를 갚고 포악한 견훤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로 결의하고 태조 왕건을 돕기로 하였다.
이곳 지리에 밝고 용감무쌍하였던 세 분의 도움으로 왕건은 견훤을 낙동강가로 유인하여 대승함으로서 견훤(甄萱)은 8천여 명의 군사를 잃고 대패하여 물러났다. 그때 견훤과 합전교(合戰郊:현 안동시 송현동)에서 싸울 때 큰 나무를 묶어서 한 덩어리를 만들어 여러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를 앞세워 진격하였다. 이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정월 보름날을 기하여 나무묶음(동채)을 메고 싸움하는 놀이를 하였는데 이 놀이가 전래되어 오늘날 그 유명한 "안동의 차전놀이" 가 되었다.
이 국운(國運)을 건 대전투에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세 분에게 태조 왕건은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렸는데 바로 삼태사(三太師)이다. 삼태사는 권행(權幸)ㆍ김선평(金宣平)ㆍ장길(張吉) 세 사람으로, 모두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안동 권씨ㆍ안동 김씨ㆍ안동 장씨의 시조들이다. 이때부터 3대 가문은 안동을 대표하는 성씨가 되었는데, 그후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 까지 권문세가(權門勢家)를 누리고 있다.
삼태사의 후손들
태사묘(太師廟)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삼공신묘(三功臣廟)라고 하여 만들어졌는데 조선 광해군 때인 1613년에 이곳을 새로 고치면서 ‘태사묘’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안동 권씨들이 관리했었는데, 지금은 삼태사의 후손들이 같이 관리하고 있다. 태사묘는 경상북도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각에는 삼태사의 유물이 있는데 모두 12종류 22개 보물이 있다. 태사묘 경내에 고려삼태사묘정비와 각각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시조는 삼태사의 한분이신 권행(權幸)이며 고려시대에는 추밀원부사를 지낸 권수평(權守平)과 권위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권근(權近), 권람 등 많은 인재가 배출 되었고 특히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권율(權慄)장군이 안동 권씨이다. 근대에 와서는 권정달과 권선택, 권영길, 권영세 전 국회의원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배우겸 탈렌트 권상우도 안동 권씨다.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조선말 붕당 세력이나 세도정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동 김씨는 본관이 같아도 크게 둘로 나뉘어 구(舊) 안동 김씨와 신(新) 안동 김씨로 불리는데, 사실 이 둘은 서로 혈연관계가 전혀 없다. 여기서는 삼태사의 한분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 안동 김씨만 살펴보기로 한다. 신 안동 김씨로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시대 충신으로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 김조순이 있으며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은 순조와 혼인하게 되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시작되었다. 또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이 있으며 구한말 갑오경장으로 유명한 김옥균(金玉均) 그리고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그의 아들 김두한(金斗漢) 등도 있다. 독립운동가인 김가진(金嘉鎭, 충청도 관찰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김학규(金學奎, 광복군 제3지대장), 김복한(金福漢,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등도 안동 김씨이다.
안동 장씨(安東張氏)는 삼태사의 한분이신 장정필(張貞弼)이 시조이며 그의 처음 이름이 장길(張吉)이었다. 인물로는 조선개국 1등공신인 장사길(張思吉)과 그의 아들 장철(張哲)등이 있으며 화가 장득만(張得萬)은 인물화가로서 세조의 영정을 그렸으며 순국지사로 장태수(張泰秀), 우국 언론인 장지연(張志淵)도 있다. 근대에 와서는 시인 장만영(張萬榮) 또 언론인 장준하(張俊河)씨도 안동 장씨다.
안동 권씨 시조 권태사 묘소
☆… 고즈넉한 경당고택을 둘러보고 우리는,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태사 묘소’를 탐방하기 위해, 차를 몰아 924번 도로(풍산태사로)를 타고 가다가, 성곡리 사거리에서 좌측의 길로 접어들었다. 금계를 따라 올라가는 길목에 ‘권태사신도비’(비각)과 ‘권태사능동재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권사신도비(權太師神道碑)’는 안동 권씨(權氏)의 시조인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신도비이다. 태사의 묘사를 모시는 권태사묘 능동재사(陵洞齋舍)의 왼쪽에 있다.
권태사공(權太師公)
안동 권씨(安東權氏) 시조(始祖) 권행(權幸)은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였다. 신라(新羅)의 천 년 사직이 기울어 가는 서기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하여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하던 경애왕(景哀王, 제55대 왕, 재위 기간 924~927)을 자살하게 하자, 이에 격분한 김행(金幸)은 김선평(金宣平, 신안동 김씨의 시조), 장 길(張吉, 안동 장씨의 시조) 등과 함께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견훤의 군사를 맞아 싸워서 이겨서, 고려 창업에 공(功)을 세웠다.
이에 태조(太祖)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이들에게 ‘삼한벽상아부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亞父功臣三重大匡太師), 즉 ‘삼태사(三太師)’를 제수하였다. 특히 김행(金幸)에게는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하다’(能炳機達權)하여 권씨(權氏)의 성(姓)을 내리고,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여 식읍(食邑)으로 내리니, 비로소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문호(門戶)를 열게 되었다. 안동 권씨는 태사공 권행(權幸)을 시조로 하여, 아들 낭중공 권인행(權仁幸), 손자 권책, 증손자 권광한으로 이어졌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에 위치한 곳으로 고대(古代)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 시대(新羅時代)에는 고타야국(古陀耶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렸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견훤(甄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 후 영가군(榮可郡, 永嘉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附)로 승격되었다.
권태사신도비
‘권태사신도비(權太師神道碑)’는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의 행적(行績)을 기록한 비이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75m이고, 좌대의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과 용모양의 비머리(螭首)를 얹었다.
1661년 조선 현종(顯宗) 2년 권태사공의 24세손인 영천(지금의 영주) 군수 호연(浩然) 권성원(權聖源)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비문은 1661년 한성부 우윤 탄옹(炭翁) 귄시(權諰)가 짓고, 외손인 익헌공(翼憲公) 목호(黙好) 이경휘(李慶徽)가 썼다, 전액(全額) ‘高麗太師權公幸神道碑銘’(고려태사권공행신도비명)은 의정부 우의정 문정공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전서(篆書)하였다. 뒷면의 음기는 외손 예조참판 송곡(松谷) 조복양(趙復陽)이 짓고 외손 병조판서 귀계(歸溪) 김좌명(金佐明)이 썼다. 비문은 권시의 문집인 《炭翁集》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신도비 내용(번역)이다.
“ … 공(公)의 이름은 행(幸)인데 본래는 김(金)씨이니 신라왕과 동성(同姓)이었다. 신라 말엽에서 김선평(金善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을 지켰는데, 견훤(甄萱)이 신라에 쳐들어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전복시킬 때 고려(高麗) 태조가 구원에 나서 군의 북쪽 병산(甁山)에 주둔하여 견훤군과 전투를 할 적에 김선평, 장정필 양공과 함께 꾀하기를, ‘우리들은 의리상 견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차라리 왕공(王公)에게 힘을 보태어 이 역적을 함께 섬멸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 하여, 드디어 고을 사람들과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얻게 되어 의로운 소리를 크게 떨쳤다. 이에 고려 태조는 기뻐하며 ‘김행(金幸)이 미기(微幾)를 밝게 살펴 권도(權道)에 통달하였으니 권도에 능한 사람이라 하겠다.’ 하며 이어서 권(權)으로 성(姓)을 하사하시고 대상(大相)을 제수하며 군을 안동부(安東部)로 승격시켜 식읍(食邑)으로 봉하고 품계는 ‘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이라 하였다. 돌아가심에 안동부의 서쪽 천등산(川燈山) 조화곡(造火谷) 남향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인행(仁幸)이니 낭중(郎中)이고, 아들 책(冊)을 낳았다. …(중략)… 이 산의 무덤은 제일 위가 태사공(太師公)이고, 두 번째가 평창공(平昌公)이며 세 번째가 평창공의 부인 무덤이라. 그 아래에 서애(西厓) 정승 유성룡(柳成龍)의 부친 묘소가 있으니, 또한 외손이다. …(중략)… 24세손 한성부 우윤 권시(權諰) 찬(撰)하고, 이조참의 이경휘 서(書)하였으며, 사헌부 장령 허목(許穆)이 전(篆)하였다. 숭정(崇禎) 신축년(1661년) 9월에 세우다.”
안동 권씨 2기(基)의 사적비(事蹟碑)
견고한 담으로 둘러진 권태사신도비각(權太師神道碑閣)의 좌측의 공터에 최근에 건립한 두 기의 사적비가 있다. 좌측의 것은 병조좌랑 학림 권방(權邦)의 사적비이고, 우측은 평창군사 권옹(權雍)의 사적비이다. 평창군사 권옹의 묘소는 태사공(권태사) 묘소 바로 아래에 있다.
안동 권씨 능동재사(陵洞齋舍) — 추원루(追遠樓)
‘능동재사(陵洞齋舍)’는 삼태사 중의 한명인 권태사 권행(權幸)의 묘제를 위해 마련되었다. 성곡리 ‘능골’에 있다. 이 재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 왼쪽에 높은 축대를 쌓아 추원루(追遠樓)를 전면에 내세워 문루를 삼았다. 누문 안의 큰마당 건너 우뚝 솟은 재사 큰채와 그 앞 양쪽에 늘어선 동재·서재가 튼ㅁ자를 이루었다. 1653년(조선효종4년)에 16칸을 건립하고, 1683년(조선숙종9년) 권시경이 누각 7칸을 더 지었다. 1743년 불탄 것을 다시 지었고 1896년 다시 화제를 입었다. 그후 70여 칸의 건물 중에서 임사청. 전사청 등 몇 건물만 남았다. 재사로는 보기 드물게 큰 건물로 제례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낭중공(郎中公) 권인행(權仁幸)의 단소(壇所)
高麗郎中安東權公仁幸遺墟碑(고려랑중안동권공인행유허비)
高麗郎中安東權公仁幸之壇 / 夫人陽川許氏 祔(고려낭중안동권공휘인행지단. 부인양천허씨 부)
능동재사 우측의 산록에는 안동 권씨 2세 낭중공(郎中公) 인행(仁幸)의 유허비와 단소가 있다. 이곳의 석물들은 경북 청도군 공암에 있었던 낭중공(郎中公)의 기적들로 2010년 5월 7일 단소(壇所)를 이곳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새로 조성함으로써 선조 때부터 오랫동안 그곳에 기울였던 정성과 애착이 담긴 유적이므로, 기념물로 남기고자 2012년 07월24일 이곳으로 옮겨왔다.
안동 권문의 2세 인행(仁幸)은 태사공의 독자로 관직은 낭중(郎中)이고 양천 허씨 시조 선문공(宣文公)의 따님과 혼인했다. 안동 권씨 문중은 낭중공의 묘를 찾지 못하던 중, 청도군 운문면 정자동에 전(傳)하는 2기의 총이 있어 봉분을 수축했지만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 후 청도군 운문면에 있던 곳에 단소(壇所)를 설치하고 1935년부터 봉사(奉祀)해 왔다. 그러나 2총은 관련이 없었지만, 단소(壇所)를 옮겨온 것은 ‘근원을 추적하여 근본에 보답(追源報本하는 숭조정신(崇祖精神)'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능동 권태사 묘소
능동재사 앞을 지나 작은 개천[金溪]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우측으로 올라가는 산길 입구에 ‘安東權氏始祖墓所’(안동권씨시조묘소) 안내 표지석이 있다. 능동 시조 태사공 묘소로 올라가는 산길은 지난 10월 22일에 완공하였다. 오늘, 길 입구에 ’완공’을 경축하는 걸개가 아직도 걸려 있었다.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노폭을 확장하여 깔끔하게 공사를 해 놓았다.
입구에서 완만한 경사의 산허리 길을 따라 약 500m 정도 올라가면, 잔디로 말끔하게 단장한 세 기(基) 묘소가 있다. 산록의 제일 윗자리에 봉분이 큰 ‘태사공 묘소’가 있고 그 바로 아래 ‘평창군사 권옹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그리고 그 아래에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 유중영(柳仲郢)의 묘소’가 있다. 풍산 유씨 유중영은 권옹의 외손이다.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산록 아래에 자리한 태사공 묘소는 왕릉을 방불케 할 정도로 크고 엄숙했다. 사실 태사공의 묘소는 실전(失傳)되었다가 1470년 대손 평창군사(平昌郡事) 권옹(權雍)이 권태사의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묘역을 정비하였다. 태사공 묘비의 전면에는 ‘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權幸墓’(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권행묘)이라고 적혀 있고, 후면 음기(陰記)는 문충공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지었다.
평창군사 권옹(權雍)의 산소
평창군사(平昌郡事) 권옹(權雍)은 지금의 태사공 묘소를 정비한 장본인이다. 그가 죽은 후에 태사공 묘소 아래에 묻혔다. 부인 흥해 배씨와 합장이다. 1981(신유년)년에 세운 오석(烏石)의 묘비 전면에 ‘平昌郡事安東權公之墓(평창군사안동권공지묘) / 夫人興海裵氏祔(부인흥해배씨부)’라고 새겨놓았다. 비문은 권옹의 외예손(外裔孫) 풍산 유장하(柳長夏)가 찬(撰)하고, 문소(聞昭) 김구직(金九稷)이 썼다.
풍산부원군 유중영(柳仲郢)의 묘소
권태사 묘역 중 위에서 제일 아래 세 번째가 풍산 유씨 유중영(柳仲郢) 부부의 묘소이다. 유중영은 겸암(謙庵) 유운룡(柳雲龍)과 영의정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아버지이다. 거무티티하게 이끼가 낀 묘비에는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풍산대원군 유공지묘 / 정경부인 김씨의 묘(‘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贈… 豊山府院君柳公之墓 / 貞敬夫人金氏之墓’)라고 새겨놓았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왜 안동 권씨 권태사 묘역에 풍산 유씨의 묘소가 있는가? …… 그 내력은 이렇다.
시조 권태사 묘소와 권옹(權雍)의 산소는, 권옹의 재산을 물려받은 권옹의 딸과 사위인 유소(柳沼, 풍산 유씨 9세)가 보호하고 봉사(奉祀, 제사를 모심)를 해왔다. 부부가 죽은 뒤에도 그 풍산 유씨 후손들이 대대로 계승하여 권태사 묘역을 수호했다. 권옹의 아들 ‘권유(權裕)’와 ‘권작(權綽)’은 자기네 사는 평창(平昌)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권옹(權雍)은 아들이 있음에도 사위 유소(柳沼)에게 재산과 조상봉사를 물려 준 것이다. 딸이 혼인한 사위 집안도 한 집안처럼 지낸 특별한 인연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부계(父系) 관념으로 보면, 거북스럽고 따라서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유성룡의 형 겸암(謙巖) 유운룡(柳雲龍)이 쓴 〈천등산기(天燈山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 평창군사 권옹의 사위인 유소(柳沼)의 아들 10세 유자온(柳子溫)이 죽어 산소를 하회의 화산에 썼다가, 천등산으로 옮겼는데, 권태사 묘역과는 4백보(약 500m) 이상 떨어진 곳이다. 권태사 묘역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다. … 그 뒤 유자온의 부인이 (유운룡, 유성룡의 증조모) 죽어 합장을 하려 하니 그때 태사공(권태사)의 원손 권균이 정승이었는데 태사공 묘소의 계체(階砌, 계단)를 뜯고 장사를 지낸다는 참언을 하는 사람이 있어 권균이 안동부에 금장을 명령하니 유운룡의 조부 11세 참판공 유공작(柳公綽, 유운룡·유성룡 형제의 조부)이 서울에 올라가서, 상복 입은 채로 권 정승 문 앞에서 달이 넘도록 부복하여 마침내 대화하게 되어 조부 유공작이 친위 자손의 상황과 계장(繼葬)한 내력과 산세의 원근 등을 설명하니 권균이 이해하고 금장령을 풀고 장사를 지내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다.”
풍산 유씨 유소(柳沼, 9세)의 증손 유중영(柳仲郢, 12세) 산소가 평창군사 권옹(權雍) 산소 아래 있는 것은, 유운룡·유성룡의 증조부인 유중영이 선대에 이어 그 전답을 물려받고, 권태사-권옹의 제사를 받들고 산소까지 돌본 내력이다. 인척(姻戚)도 같은 혈통(lineage)이라는 생각이 작용한 것일 것이다. … 그러한 저간의 내력은 '유장하'가 쓴 권옹의 묘비문에도 언급되어 있다.
* [풍산 유씨 세계(世系)] ☞ (1세) 유절(柳節, 호장)→ (2) 유돈승(敦升, 호장)→ (3) 유정장(挺莊, 호장)→ (4)유백(伯, 급제)→ (5) 유난옥(蘭玉, 현령)→ (6) 유보(葆)→ (7) 유종혜(從惠, 전서)→ (8)유홍(洪, 사정)→ (9) 유소(沼, 호군, 權雍의 사위)→ (10) ② 유자온(自溫, 진사)→ (11) 유공작(公綽, 군수)→ (12) 유중영(仲郢, 감사)→ (13) ① 유운룡(雲龍, 목사) ② 유성룡(成龍, 영의정)
그래서 안동 권씨 능동재사 위쪽의 산록에 풍산 유씨 ‘금계재사’가 있다. 금계재사(金械齋舍)는 권태사 묘역에 있는, 유중영(柳仲郢)의 묘사(墓祀)를 위한 풍산 유씨의 재사(齋舍)이다.
풍산 유씨 금계재사(金溪齋舍)
경북 안동시 서후면 권태사길 116(성곡리 886)
「안동 풍산 유씨(豊山柳氏) 금계재사(金溪齋舍)」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부친인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 유중영(柳仲郢, 1515~1573)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제를 지내는 곳이다. 금계재사(金溪齋舍)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능골 위쪽의 산록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안동 권씨 능동재사(중요민속문화재 제183호)’, ‘권태사 신도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3호)’, ‘권태사 권행 묘소’ 등 재사(齋舍)와 묘소가 있어 이 골짜기를 큰 무덤이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능골’로 부른다. 풍산 유씨네 금계재사, 안동 권씨네 능동재사, 그리고 권씨 조상과 유씨 조상이 함께 누운 권태사 묘역은 모두 능골의 지근(至近) 거리에 있다.
유중영(柳仲郢)의 자는 언우(彦遇)이고, 호는 입암(立巖)으로, 중종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며 교육의 진흥과 민생안정에 힘써 어진 정치를 행했다.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으며, 16세기 중반 이전에 사찰로 사용하던 건물 숭실재(崇室齋)을 인수하여 사용하다가, 18세기 초부터 영모루(永慕樓), 대문간채 등 여러 건물을 지어 현재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금계재사는 앞에서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전저후고(前低後高)형 대지의 전면에 중층의 두 누각(영모루, 소루)이 높고 길게 자리하며, 그 뒤로 숭실재와 동부속채가 누각과 마주 보며 놓여 있다. 그리고 그사이의 앞쪽 마당 좌·우측에는 각각 대문간채와 동재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튼 ‘ㅁ’ 자형을 이룬다.
금계재사(金溪齋舍)에는 사찰에서 재실로 변화‧증축되어가는 과정 등이 잘 남아있다. 특히, 숭실재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柱心包) 양식과 인방(引枋,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르는 부재로 기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함)을 은폐한 벽체 구성, 영쌍창(楹雙窓, 문이 두 개인 쌍창의 중간에 문설주를 둔 것) 등 17세기 이전 건물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요소를 지녀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인방(引防):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르는 부재. 기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함
* 영쌍창(楹雙窓): 문이 두 개인 쌍창(雙窓)의 중간에 문설주를 둔 것
풍산 류씨(豊山柳氏) 문중은 문중 재사를 담당하는 족회소(族會所)를 두어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을 문중 내부적으로 전승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족중입의(族中立議) 등의 문서를 통해 후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법을 기록으로 남기는 등 유교적 이념의 확립과 조상숭배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도 후손에게 거의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풍산 유씨 집성촌인 안동 하회마을에서 서후면의 숭실재까지는 24Km나 된다. 자손들이 묘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편도 60리길을 걸어야 재사에 도착할 수 있다. 결국 묘제에 참여하려면 재사까지 오는데 하루, 묘제와 문중회의 등에 하루, 돌아갈 때 하루 최소한으로 3일은 소요된다. 이러한 여건 때문에 재사 건축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 [계속] ☞ 천등산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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