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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 속에 숨겨진 존재론적 음성 -보르헤스를 통해 본 윤대녕- 김 소 원 1. 들어가는 말 20세기 문학계의 화두를 장식하고 있는 보르헤스의 사상은 전통적 문학개념인 ‘재현성’이라는 사실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법칙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사유방식인 인식론적 가치체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문학 창조에 있어 자신의 인식에 맞게 전통적인 주제들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차용함으로써 독특한 문학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사유는 시간론과 무한론이라는 두 실로 엮어져 있다. 알레호 까르뻰띠에르(Alejo Carpentier)는 시간구조의 형식에 관해 언급하면서 현재의 시간에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현실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미래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오늘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전통적인 흐름, 현재진행의 직선상이라는 순차적인 시간구조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1)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보르헤스는 우주의 시간은 절대시간 하나 뿐이라는 통념화된 근대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며, 시간은 하나 뿐이 아니다는 다양한 시간 구조의 형식 그 자체를 텍스트의 관심사로 등장시킨다. 이는 보르헤스가 『또 다른 심문 Otras Inquisiciones』을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철학적 관점으로 시간 문제를 성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런데 시간을 부정하는 주체가 인간이므로 시간의 부정은 인간의 정체성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리고 이는 곧 보르헤스가 인식론에서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지으며 존재론적 물음에 답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편 한국 문단에서 자기고백적 문체로 존재의 원형을 탐색하는 진지한 주제의식을 지닌다는 면에서 윤대녕은 여느 작가와 차별성을 지니는 작가로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자들을 흡입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시간의 문제와 인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와 비교할 만한 대상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중심에 있는 윤대녕의 작품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속에 드러나는 보르헤스적 코드를 통해 그 둘의 문학 사상세계의 유사성과 변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시간의 문제를 논의해 봄으로써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화두를 논하고, 그 다음은 윤대녕 작품 속의 여러 인물들이 겪는 존재에 대한 탐색과정을 살펴 본 후, 마지막으로 인물들이 보르헤스의 인식론 체계에 있어서의 개별자와 보편자의 모습을 어떻게 형상화하며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에 그 초점을 두고, 결론적으로 두 작가의 작품 세계의 특징적인 얼개를 살펴보고 이 세계가 함축하는 의미를 풀어보기로 한다. 2. 시간 게임을 벌이는 보르헤스와 윤대녕 보르헤스는 인간 전체가 시각, 촉각, 미각 그리고 이것들로 정의되는 공간이 소멸되고 단지 청각과 후각을 통해 현실을 구성한다고 해도 인류는 멈추지 않고 그 역사를 계속 엮어갈 것이라 한다. 인류는 공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게 될 거며, 삶은 비록 형체가 없을테지만 인류는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이 열정적이고 필요불가결한 삶을 영위해 갈 거라고 한다. 즉 인류는 일체의 공간 밖에, 일체의 공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2) 따라서 우리의 사고 속에서 공간은 배제할 수 있으나 시간은 배제할 수 없는 본질적이며 존재의 궁극적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는 그가 사건들이 먼저 있고 시간이란 사건들의 계기(繼起)의 질서라고 생각한 라이프니츠적 시간관과 상통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이란 본질적인 문제다. 내 말은 우리가 시간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끊임없이 지나가는데, 이러한 계기가 바로 시간이다.3) 그런데 이러한 시간은 보르헤스에게 있어 선형적인 인과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는 시간의 전후가 인과율을 지키며 선형화된다는 상식적 믿음을 거부한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반론 Nueva refutación del tiempo」의 다음 대목은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관념론자들이 받아들이는 임의적이고 광대한 연속을 관념론의 논증으로 부정한다. 흄은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자리를 갖는 절대 공간의 존재를 부정했다. 나는 모든 사건들이 연결되는 단 하나의 시간의 존재를 부정했다. 공존성을 부정하는 것은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4) 이처럼 그는 선형적인 시간을 해체하고 각각의 독립적인 순간들로 이루어진 시간을 설정한다. 선형적인 시간에서는 단 하나의 시간의 축, 과거-현재-미래가 있지만 보르헤스의 시간에서는 각각의 순간들이 순환적이며 다선적인 시간의 축을 그려내고 있다. 중심이 없어 어디에나 점을 찍어도 중심이 될 수 있는 파스칼의 구처럼 다양한 시간의 축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파스칼은 우주가 무한하다고 한다면 그 우주는 어느 곳에나 원주가 지나가지만 어느 곳에도 중심은 없는 구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순간 이전에 무한한 어제, 즉 무한한 과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이 과거 또한 이 현재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 시간과 공간이 무한한 이상, 어느 순간에나 우리는 무한한 직선의 ‘중심’에 있으며, 무한한 ‘중심’의 어느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그 공간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5) 그런데 시간성의 붕괴는 공간적 좌표의 붕괴를 동반하며 영속하는 현재라는 시간을 형성한다. 그 곳에서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고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의 시간들이 수렴된다. 과거는 현재로 돌아오고 미래는 현재의 연속일 뿐인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실체는 부정된다. 이에 보르헤스는 「원형의 시간 El tiempo circular」에서 쇼펜하우어의 입을 빌어 현재만이 모든 삶의 형태라고 말한다. 의지의 출현 형식은 단지 현재이지 과거나 미래가 아니다. 과거나 미래는 단지 개념상 그리고 이성의 원칙을 따르는 의식의 연계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아무도 과거 속에 살지 않으며, 아무도 미래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만이 모든 삶의 형태이다.6) 따라서 우리가 운명이 내밀하게 같은 운명, 가능한 유일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면 세계의 역사는 한 사람의 역사가 되며,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된다. 수많은 과거 속에서 일어난 일들은 미래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한한 시간을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화시키는 시간들은 이 무한한 시간의 한 타래일 뿐이다. 많은 작가들은, 역사는 순환하며 보다 최하급의 세목을 지닌 세계의 한 상태는 느리게 혹은 빠르게 돌아올 것이라고 의견을 지니고 있다. (...) 그 경우는 세계를 일주하는 인간의 경우와 같다: 출발점과 도착점은 서로 다른 두 지점이지만 매우 비슷하다고 말하지 않고 동일한 지점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순환한다는 가설은 이런 식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특정한 하나의 상황을 보이는 동시대적인 모든 환경의 총체를 형성하고 있다.7) 이렇듯 순환적 시간에서는 변화는 무의미하며, 파스칼이 말한 ‘모든 곳에 중심이 있고 그 어디에도 변방이 없는 무한한 세계’속에서 보르헤스의 언급처럼 ‘나는 모두이며 모두는 나’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무한하다고 한다면 과거에 무한한 전생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수가 무한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무한한 것이 현재에 이를 수가 있는가? 어떤 시간이 무한하다고 한다면 그 시간은 모든 현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시간이 무한하다고 한다면, 그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시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8) 그런데 이러한 시간 문제에 있어 윤대녕도 단선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부정의 형태로 순환과 영원회귀라는 고대인의 시간관과 영속하는 현재라는 신화적 시간관을 제시하고 있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철새 되새떼의 이야기로 처음과 끝을 장식하며, 순환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발점과 귀착점이 동일한 공간적 구성을 지닌다. 1993년 겨울의 일이다. 12월로 막 접어드는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신문에서 우연히 되새떼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기사는 시베리아산 철새인 되새떼가 삼십여 년만에 우리나라에 다시 날아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9) 그녀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 나는 식탁에 앉아 조간신문을 보다가 우연하게도 되새떼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있었다. 기사는, 겨우내 지리산 쌍계사 일대에 서식하고 있던 되새떼가 바로 어제 시베리아로 돌아간 사실을 적고 있었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1994년 봄이 오고 있는, 어느 수요일 아침의 내 집 풍경은 이러했다.10) 그런데 여기서 철새 되새떼가 삼십여 년만에 다시 날아왔다가 겨울을 보내고 다시 시베리아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공교롭게도 주인공의 나이(33)와 대략 일치하는 기간을 두고 모처럼 우리나라를 찾아와 머문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적이고 주기적인 리듬으로 분철된 시간이다. 겨울은 순환의 주기가 마감되는 시간이자 또다른 생성의 준비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자연의 운행 속에서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리듬을 발견했던 고대인의 신화적 관념을 연상시킨다. 이야기는 고교시절 참혹하고도 아름다웠던 기억의 소실로 온전치 못한 기억을 부여 안고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주인공 남형섭 ‘나’는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의 ‘이쪽’에 있다. ‘저쪽’에 대한 기억의 소거로 불안한 생활을 보내던 중 M이라는 자가 나타난다. 그는 ‘나’의 과거의 기억을 회복하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며 주위를 맴돈다. 한편 ‘나’는 우연하게 만난 최선주에게서 과거를 느끼며 과거로의 여정, 영원회귀에 동행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귀착점에서 고교시절 동창인 유진과 희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병약한 희배와 수수께끼 같은 느낌의 유진은 그의 과거의 기억의 중심에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유진의 자살을 돕고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후 망각의 강을 건너온 것이다. 이러한 시간 이동을 통해 ‘나’는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 즉 영원회귀를 이룬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정체성 회복과 함께 실존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나’가 번역 의뢰 받은 리처드 모리슨의『시간의 화살』이라는 이론 물리학의 한 구절은 순환적 시간에 대한 사유로서 작품의 주제와 결부되는 대목이다. 고대인들은 시간을 순환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결국 파멸되고, 그 후에 재창조된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고 하는 신화가 어느 시대의 문명에서도 보인다. 이런 신화에 의하면, 세계는 몇 번이나 반복되도록 정해진 시간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후계자들 중에는 영원회귀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은 미래의 주기에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지어져 있고 동일한(또는 같은) 사건이 몇 번이나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아테네, 다른 소크라테스, 다른 재판, 다른 독배가 반복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누구나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원회귀설을 거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역사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이 순환적인 것으로 믿었다.11) 그리고 남형섭 ‘나’는 최선주에게 선형적 시간이 파괴된 곳에서의 ‘한 순간은 모든 순간이며 동일한 순간들의 반복’이고 ‘하나는 모두이며 반복’이다라고 말한다. 즉 순환적 시간 속에서 두 인격체는 독립된 개체이면서 동일 인격체로 해소된다는 것이다. “아까 우리는 을지로 순환선 전철을 탔어.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상상해 봐. 나는 전철을 타고 선주는 승강구에 그대로 서 있는 거야. 그런데 전철은 출발했지. 선주는 전철에 타고 가는 나를 보고 있을 거야. 움직여가고 있는 나를 말이지. 하지만 사실은 나도 정지해 있거든.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전철일 뿐야. 쉽게 말하면 전철에 대해 나는 정지해 있단 말이지. 이걸 과학에서는 상대적 사고라고 해.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고 공간이 서로 다르더라도 나는 순환선을 타고 있으니까 선주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면 내가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지. 순환의 출발점,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잇는 지점으로 말이야.” “...” “나는 우리 무의식 속에서도 이런 순환작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 산다는 건 단순히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만은 아니야. 때로 혼란이 오고 단절의 순간이 오고 그때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고통을 받기도 하지. 하지만 이윽고 거듭나게 되지. 살아 있는 것들과 다시 만나게 되고 시간과 박자를 맞춰 또 미래로의 여행을 계속하는 거야...” (...) “선주와 나는 사실은 아주 오래 전에 여기로 소풍을 왔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한성 백제시대에 또다른 선주, 또다른 내가 말이야.”12) 이렇듯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과거와 현재의 합일을 이룸으로써, 과거는 현재로 돌아오고 미래는 현재의 연속이 된다. 영속적인 현재의 시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은 자가 신년의 절기(성탄절과 주현절의 사이의 12일)에 되돌아온다. 이러한 신앙은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재창조되는 순간에 시간의 소거(消去)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의미한다. 시간의 소거가 가능해지면 그때 죽은 자와 산 자의 모든 벽이 깨져버리고 만다. 죽은 자가 되돌아온다는 것은 분명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때 그 역설적인 순간에 시간이 정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다시 산 자들과 동시대적일 수 있으며 더욱이 그때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마련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속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의 복귀를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13) 3. 비의(秘意)적 존재의 탐색과정 3-1. 시간의 순환적 고리를 나타내는 ‘흔적’ : ‘기시감(déjà-vu)’ ‘기시감’은 시간의 단선성이 파괴된 데서 오는 현상이다. 그것은 본질상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의 문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시간이 정지되지 않는 한, 자기 동일성을 지닌 존재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시간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보르헤스는 ‘기시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리고 있다. 때로 “이 순간을 언젠가 살았었다”는 느낌이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영원한 회귀를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랬었다고 확신하며, 그 당혹스러운 상태에서 그들의 신념의 확증을 찾으려 애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그 이론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실을 의미하는 것을 잊는 것이다. 즉,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시간이 과거의 기억을 완성시켜 가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다른 식으로 행동하려 하고 시간은 다른 주기로 접어들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14) 그런데 이런 상황은 보르헤스에게도 나타난다. 시간의 순환적 고리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나는 식사 후 밖으로 나가 산보하며 회상하였다. 산책 코스를 정해 두려고는 하지 않았다. (...) 소위 발길 닿는대로 걷는 것이었다. (...) 어쨌든 어떤 친숙한 힘에 이끌려 어느 구역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신비스러운 어떤 곳이라는 말이다. 그 어떤 곳이란, 말로는 완전히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거의 그렇지 못한, 가까운 이웃인 동시에 신화적인 경계점이다. (...) 나는 그 단순한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는 확신에 차 속으로 외쳤다: 이것은 삼십년전과 똑같다... 그 날짜를 추정해 보았다. 다른 나라들에서 최근의 시기이겠지만, 그러나 세계의 변화무쌍한 이 한 구석에서는 이미 아득한 옛날이다.15) 또한 윤대녕의 작품 속 남형섭 ‘나’도 시간의 미로를 헤매며 영원회귀를 꿈꾸는 과정에서 이러한 현상을 겪게 된다. 레코드 가게 <쇼팽네 가게> 의 여주인 최선주와 술집 <산수유> 에서 언뜻 스쳐지나간 여인에게서 ‘기시감’, 즉 기억의 잔상을 느낀다. 우주를 가로질러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는 <쇼팽네 가게>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밀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으로,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에 나는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가끔, 아주 우연한 순간에 불현듯 이런 느낌에 빠질 때가 있다. 분명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언젠가 한번 와봤던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요컨대 지금은 뚜렷이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순간이 돌연 내 눈앞에 현현돼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일종의 기시감(旣視感) 같은 것일 테지만, 아무려나 나는 <쇼팽네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같은 느낌에 빠져버렸다. 그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잔재와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16) 슬몃 곁눈질로 보니 아닌게 아니라 앞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17)
그리고 그때던가. 나는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서 유리문 밖으로 웬 여자가 스윽 지나가는 것을 문득 바라보고 있었다. (...) 그녀는 나와 구면인 여자였던 것이다. 기시감...이라고 웅얼거리는 나는 뻐근해진 머리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 어머니의 사진처럼 눈에 익은 여자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18) 이때 이런 ‘기시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시간은 ‘같은 물에 두 번 담글 수 없는’ 것처럼 불가역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사물의 운동과 변화 속에 내재해 있으며, 그 변화 속에서 지각하게 되는 반복적 패턴 역시 언제나 차이를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차이 없는 순수한 반복으로서의 ‘기시감’은 시간의 흐름이 파괴된 지점에서 발생한다.19) 즉, ‘기시감’은 시간의 단선성이 파괴된 데서 오는 느낌이다. 시간은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분할하는 무수한 현재의 선조적 연속이다. 그때 과거의 시간은 ‘기억’속에서, 미래의 시간은 ‘기대’속에서 현상학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기시감’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는 전적으로 다른 현상학적 사태이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에서 ‘나’는 레코드 가게에서 본 초면의 선주를 “어디선가 많이 본 여자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레코드 가게 여주인을 어디선가 보았다면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가능세계에서이다. 그때 ‘기시감’은 현실세계와 나란히 공존하는 가능세계들이 차원의 경계를 넘어 흔적을 남기는 현상이다. 이렇게 ‘기시감’은 시간을 여러 겹의 공간적 차원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에 보르헤스는 ‘기시감’으로 인한 시간의 해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동질의 사실들 - 아주 맑게 보이는 고요한 밤, 인동덩굴의 시골 냄새, 때묻지 않은 진흙 - 의 순수한 재현은 여러 해 전에 그 길 모퉁이에 있었던 것과 그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닮은 것도 되풀이 된 것도 아닌, 바로 그것인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동일성을 직관할 수 있다면, 시간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그 외견상의 과거 어느 순간과 그 외견상의 현재의 또 한 순간이 무차별적이고 분리될 수 없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시간을 해체시키기에 족하다.20) 3-2. 영원회귀로 통하는 ‘길’ : 사건의 지평선 - ‘벌레구멍(기억의 문)’21)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에서 윤대녕은 ‘영원’으로 회귀하기 위한 신화적 경계점으로 ‘벌레구멍’을 제시하고 있다. 이곳은 시공간성이 무(無)화되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사건의 지평선이라 부른 방이었다. 과거의 영역과 현재의 영역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빛의 접경선, 혹은 경계선. 그 방에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사물의 파동이 잠자고 시간은 정지해 어떤 소리도 빛도 감지할 수가 없었다. 내게 작용하고 있던 중력과 인력이 돌연 사라지면서 나는 광활한 공간에 부유하고 있는 한 점 먼지가 돼버렸다.22) 이러한 첫 번째 신화적 공간은 ‘잠실(蠶室)’의 ‘올림픽 공원’이다. 이곳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세계로 나아가는 ‘벌레구멍’이다. 선주는 ‘올림픽 공원’을 “벌써 열세 번째 와요” 라며 겨울에 오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이러한 선주의 13번째 방문은 12진법으로 보았을 때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12를 지나 또다른 새로운 순환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다. 그리고 겨울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물이 죽음과 소생이라는 이중적인 차원을 넘나드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도 이스라엘 출신의 카라반 작품 「빛의 길」을 통해 시간의 문이 열리며 잃어버린 기억의 한 장면이 나타나는 것을 감지한다. 카라반의 작품은 한쪽 면은 검은색(블랙홀)의, 또 다른 면은 흰색(화이트홀)의 나무 기둥이 도열해 있는 작품으로 정오가 되면 나무기둥들이 빛의 그림자를 던져 시간을 알린다. 그런데 이 순간 과거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희디흰 빛깔의 어떤 물체가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돌을 맞은 사람처럼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휘청거렸다. (...) 무엇이었을까. 그때 나를 세게 후려치고 지나갔던 희디힌 불덩이는. 그 순간 나는 칠흙 같은 밤, 번개가 치면서 돌연 눈앞에 펼쳐지는 어떤 풍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풍경이었던가. (...) 시계바늘은 때마침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23) 이러한 또다른 무화적 공간은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을 때, 다시 말해 ‘영원’으로의 회귀를 이루었을 때, 맞닥뜨리는 곳 ‘잠사’(蠶舍)=‘잠실’이다. 고교 동창이며 묘한 신비감을 풍기는 유진은 ‘잠사’에서 질량을 줄여 ‘영원’으로 가고자 한다. 그런데 물리학적으로 사람이 ‘벌레구멍’의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보다 빨라야 하며, 중량은 0에 가까워야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에게 목을 조를 것을 청하고 ‘나’는 그녀를 도와 죽음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온몸에 하얗게 명주실을 감고, 장독만한 고치가 되고 이윽고 한 마리 백조가 되어 은하수로 유유히 날아간다. 천체의 중력을 이겨내고 영구히 탈출하기 위해 최대한 속도를 내고 유한공간에서 무한공간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잠사’는 이중적인 신화적 공간이다. 주인공의 기억의 문 ‘벌레구멍’인 동시에 유진의 ‘벌레구멍’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누에에서 한 마리 백조가 되어 ‘저 먼곳’으로 날아가는 유진의 죽음은 또하나의 회귀의 몸짓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죽음은 또다른 소생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렇듯 여기서 ‘잠사(蠶舍)’는 기억의 ‘과거’ 속의 ‘벌레구멍’으로, ‘잠실(蠶室)’은 ‘현재’ 속의 ‘벌레구멍’으로 작용하고 있다. “난 늘 빛의 속도를 생각하고 있어. 내 몸의 질량이 0이 될 때까지의 속도를 말이야. 벌레 구멍을 통해 영원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속도를 말이야. 지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포함된 영역이야. 나는 거기로 가고 싶어.”24) “황도십이궁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을 벗어나야 해. 질량을 줄여나가야 돼. 그래야만 영원으로 갈 수 있어.”25) “난 지금부터 차츰 속도를 낼 테야. 빛의 속도가 될 때까지... 넌 내 몸의 질량이 0이 되는 순간까지 내 목을 눌러 줘... 내가 속도를 내서 벌레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줘.”26) 그로부터 며칠 후, 그러나 그녀는 이 정들었던 세상을 기어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길 없는 ‘저쪽’으로 영원히 가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그 잠사에서 였다.27) 또한 시간적 추이가 파괴되며 시간을 여러 겹의 공간적 차원으로 이해되게 하는 벌레구멍은 ‘영화관’이다. 이곳에서 ‘나’는 현실세계와 나란히 공존하는 가능세계들이 차원의 경계를 넘어 흔적을 남기는 ‘기시감’ 현상을 겪으며 어렴풋한 기억의 잔상을 떠올린다. 밖은 겨울인데 영화 안은 여름이다. 알랭 들롱과 모리스 로네와 마리 라포네가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 (...) 고등학교 때던가, 어떤 여자 애를 데리고 이 영화를 보러갔던 것 같은 생각이 난다. 너무 어렴풋한 기억이다. 그때 나와 영화를 보러 간 여자는 누구였을까. (...) 또 다른 기시감. 마리 라포레와 그 여학생. 도대체 누구였던가.28) 그런데 여기서 ‘내’가 지금 여학생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은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신화적 공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영화를 보고 나와서 레테의 강을 건너 혼자 이쪽 세상으로 떠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망각의 강 저편의 기억, 영화를 보러 가기 전의 저쪽 세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관’은 두 시간이 중첩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즉 보편자적 개인의 시간의 회전축과 개별자적 개인의 시간 지평이 맞닿는 곳이다. “쉽게 말하면 나는 극장에 들어가기 전의 세상과는 별개의 세상에서 지금껏 살아온 거라고 할 수 있지.”29) ‘나’는 차츰 과거의 한 공간으로 이동해가는 ‘영화관’에서 ‘옛날 영화’를 보았다. 보르헤스에게 글쓰기란 단지 편집 작업일 뿐이며 하나의 텍스트를 만든다는 것은 양피지에 덧씌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30)그리고 사실 작가들은 각자의 선구자들을 창조해 내는 것처럼31)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옛날 영화’를 보았다는 것은 모든 복제의 근원인 저 실재(realidad), 영원한 지각 형태를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질적이며 실재적인 ‘영원 세계’는 현재, 과거,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시간 축으로 돌아가는 경로의 안내자인 E와 처음 대면한 ‘영화관’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과거의 ‘기억’을 현실의 ‘기억’으로 바꾸었음을 이야기한다. “(...)지금 나는 내 기억의 현재와 만나고 있는 중일세.” “기억의 현재?” “그렇다네. 나는 지금 거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는 거기’에 있네. 반대로 자네는 ‘거기에 있는 여기’에 있는 거지. E라는 이름으로.”32) 이처럼 공동(空洞)화된 시간 속에 있는 ‘영화관’은 ‘나’의 ‘벌레구멍’이다. 그리고 ‘나’는 E의 도움으로 ‘거기에 있는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거기’ 즉 ‘현실의 공간’에서 ‘현실의 나’를 새롭게 발견한다. “오늘 난 한 편의 영화를 보러 왔네. 영화가 끝나면 나는 내 공간으로 돌아갈 작정이네. 현실의 공간으로 말이지. 여기가 바로 내 벌레구멍일세. 과거를 회복하는 공간 말이세.”33) “사실은 자네가 내 과거를 회복시켜 주었다네. 내 ‘여기에 있는 저기’를 일깨워준 것이지. 바꿔 말하면 현실인 나를 일깨워 주었단 말이지.”34) 3-3. 존재를 향한 인물들의 개별자적․보편자적 형상 보르헤스는 우리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과 같다고 한다. 언제나 우리는, 강물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강물은 그 강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방금 보았던 강물과 이 강물 사이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조금은 변하고 조금은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비한 그 무엇이다. 이처럼 기억은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들의 상당 부분은 우리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망각은 기억의 한 형식이고, 기억의 어두운 창고이며, 동전의 비밀스런 면”이라고 말한 것처럼,35) 그 기억은 상당부분이 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억이 없다면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듯 기억이란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과거 어느 공간에 있었는지 기억할 필요는 없다. 동시에 그런 장소에 있었던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 ‘현재’의 나는 다른 나(el otro)이다. 이에 보르헤스는 쇼펜하우어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무한한 시간이 나의 출생에 앞서 흘렀다. 이 시간 동안 나는 누구였는가? 형이상학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나는 언제나 나였다. 다시 말해 이 시간 동안에 ‘나’라고 말했던 모든 사람들은 현재 순간의 모든 나였다.36) 이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만든다. 즉 만일 자아, 즉 개인의 연속성이 환영에 불과하다면, 개체성도 마찬가지로 허위가 된다. 이런 추론은 보르헤스의 「죽지 않는 인간 El inmortal」에서 나타난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 바퀴 안에서 각 개인의 삶은 전생의 결과이며, 후생을 낳지만, 그 어떤 삶도 결정하지는 못하고.... 수세기 동안의 수도를 통해 교화된 죽지 않는 사람들의 공화국은 인내와 거의 냉담이라고 말할 정도의 완벽한 경지에 도달했다. 그들은 무한한 기간 속에서 그들에게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과거 혹은 미래의 덕행을 통해 모든 인간은 모든 자비심을 베푸는 사람이지만, 또한 과거 혹은 미래의 악행으로 인한 모든 배신의 책임자도 된다. (...) 즉, 그 누구도 아닌 것이 바로 그 누구이며, 단 한 명의 죽지 않는 사람이 모든 사람인 것이다.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가 말한 것처럼 나는 신이며 영웅이고 철학자이며 악마이고 세상이다. 이런 것은 바로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데 지겹도록 사용된 방법이다.37) 그런데 윤대녕에게 있어서도 기억 속의 ‘과거’ 회복을 쫓는 과정은 ‘영원’의 세계로 다가가는 발걸음이며, 그곳에서 그는 ‘영원한 현재’에 머물고 있는 또다른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를 만나게 된다. 개체로 파괴됐으면서도 끊임없이 존재 의미를 찾아 나선 결과 그 의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나는 현실의 나를 보고 있다. 나. 그러나 내가 정말 나인가? 누가 과연 나를 나라고 불러줄 것인가. 기껏해야 이렇게 말하겠지. 넌 그냥 보이는 대로의 너일 뿐이야. 물론 그렇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껍데기인 나에 속해 있을 뿐이다. 나에 관한 어떤 비의(祕意)도 신성(神聖)도 간직한지 못한 채. 결론. 모든 존재의 비의와 신성은 과거로부터 온다. 그러니까 한시 바삐 과거를 복원해야 한다. 매일매일 모래 위에 시간의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원회귀. 나는 영원회귀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 영원회귀의 순간이라는 게 있어서 과거의 나와 해후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통해 복원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무한 순환의 궤도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용기를 내자. 인생은 용기 있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38) 다선적이고 무한하며 순환적인 시간의 축이 반복되는 곳에서 ‘나’는 여기에 있고 동시에 저기에 있으며, 현재에 있으면서 동시에 과거와 미래에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있지만 주체라고 할만한 존재는 도처에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없다. 이런 세계에서 나의 경험은 타자의 경험이자 타자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관성이 없는 개인, 개별자는 ‘현실’이라는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허상을 뛰어넘어 보편 형식의 세계, ‘영원’에 도달하면 보편자의 형상을 띠며, 종(especie)이나 형식(forma)으로 화한다. 개체와 사물은 그것들을 포함하는 종에 참여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며, 그 종이야말로 그들의 영원한 실재이다. 결국 종이 우선시되고 개체들은 철저히 무화되는 것이다. 이는 보르헤스의 「보르헤스와 나 Borges y yo」를 통해 알 수 있다. 시간의 연속성을 부정한다는 것,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 광대한 우주를 부정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절망이면서 은밀한 위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두려운 것은 스웨덴보리의 지옥이나 티벳의 신화에 나오는 지옥처럼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공포스러운 것은 돌이킬 수도 없고 빠져나갈 수 없게 견고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시간은 나를 휩쓸어가는 강물이지만, 내가 바로 그 강물이다; 시간은 나를 갈가리 찢어 놓는 호랑이지만, 내가 바로 그 호랑이이다; 시간은 내 생명을 소진시키는 불이지만, 내가 바로 그 불이다. 세상은, 불행하게도,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보르헤스다.39) 여기서 ‘나’는 개별자로서의 보르헤스이고, ‘보르헤스’는 보편자인 ‘나’이다. 작가로 세상에 알려진 보편자인 ‘보르헤스’가 있지만, ‘나’는 여전히 개별적으로 나의 환경을 인식하고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개별자 ‘나’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닌 ‘보르헤스’로 남게 된다. 이는 각각의 개별자적 인식은 다시 끊임없이 보편자화 되는 한 공간 과정이기 때문에 개별자적 인식의 단계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화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르헤스가 「죽지 않는 인간」에서 인용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대로, “지상에 새로운 것이란 없고 새로운 것이란 모두 망각의 결과일 뿐”40)이다. 시간은 과거의 한 지점, 순환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마치 연주가 끝나면 다시 첫 소절로 돌아가는 턴테이블의 바늘처럼 똑같은 곡을 연주한다. 그러나 들을 때마다 매번 느낌은 다르다. 윤대녕은 개인에 따라 각기 고유한 시간, 다시 말해 순수지속의 시간이 있다고 한다. 또한 사람마다 의식적으로 체감하는 중력, 인력, 관성이 다 다르므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창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고, 각기 다른 시간대에 속해 일정한 장소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와 내 의식의 속도가 동일한 지점을 향해 육박해 간단거지. 요컨대 네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과 내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은 서로 달라. (...) 다시 말해 하나의 시간에 작용하는 네 질량과 내 질량은 서로 다르다는 거야. 나는 절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때가 많아. 내 의식 속에서 시간이 상대적으로 작용하고 있단 말이야.”41) 그러나 이러한 개인은 ‘시간의 지평선’을 통해 ‘영원’으로 회귀하면 서로 보편자적 존재로 만나게 된다. “사람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게 문제야. 하지만 우리 세 사람이 일정한 공간에다 일정한 리듬의 시간을 집어넣게 되면 우리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말하자면 동일한 시간을 취하면 된다는 거지.”42) 한편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의 제목을 보면 문법적 구조로 볼 때 동작의 주체가 되는 ‘주어’가 없다. 이는 그 ‘누구’라는 개별자가 아닌 ‘하나이자 모두이며, 또 아무도 아닌’ 보편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나오는 말 일상 삶의 경험은 인간의 마음에 기억이라는 형태로 고착되면서 한 인물에 대한, 한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렇듯 개인의 정체성은 기억에 있으므로 기억을 상실하면 존재의 모호함이 대두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최하위 물질의 현현된 존재로서 기억을 이상화하는 힘으로 영원의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불멸로 시간을 극복하려고 한다. 보르헤스는 기억과 죽음의 개념을 혼합한 다음 이 개념을 이용해 영원성을 선형적 시간의 거부로 이용한다. 시간의 반복은 시간의 역전을 의미할 수 있고 시간은 이제 거꾸로 흐를 수 있는 가정을 야기시킨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지난 길을 다시 걷는 것이다. 또한 지난 시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들에게 하등의 중요성도 없다. 내가 우리들을 느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보르헤스임을 느낀다는 것과 여러분이 A이고 B이고 C라고 느낀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혀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이러한 자아는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 속에 이러저러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멸이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이러한 불멸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불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적을 사랑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불멸은 드러난다. 그런 순간에 그는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시구를 반복할 때마다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 그 시구를 창작했던 순간의 단테나 셰익스피어이다. 결국, 불멸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으며 우리가 남겨 놓은 행위 속에 있다. 이러한 행위가 잊혀진들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43) 또한 그의 작품에서는 근대적 주체 개념이 부정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나’라는 하나의 실체를 전제하는데, 보르헤스에게 있어 이러한 실체 개념(‘나’)은 아무런 근거가 없이 도입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즉, 모든 가능성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공연속체를 상정한다면 존재는 하나이며 동시에 전체이고, 한시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하고, 유이면서 동시에 무이다. 마찬가지로 윤대녕은 현재의 기억을 뒤흔드는 과거, 즉 ‘영원’세계에 회귀하는 과정을 순환적 시간으로 설정한다. 그곳에서 우리 개인들은 수많은 세월을 지내온 한 마리의 새, ‘세월을 삼키는 나이팅게일’이 된다.44) 선형적 시간이 해체되는 순간에 보편자적 존재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자적 존재인 E가 속해 있는 시공간(‘거기에 있는 여기’)과 보편자적 존재의 의미성을 획득한 ‘내’가 속해 있는 시공간(‘여기에 있는 거기’)은 다르다. 그리고 영원회귀의 순간은 ‘여기에 있는 거기’ 즉 현실의 공간에서만 일어난다. ‘나’는 기억의 ‘현재’ 즉, 보편 세계에 있어 보편자인 유진을 만났지만 E는 기억의 ‘과거’ 즉, 개별 세계에 있어 그녀를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보르헤스와 윤대녕은 선형적 시간이 파괴된 곳에서 존재의 의미성을 깨닫는 것에 있어 상통함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윤대녕에게는 보르헤스가 「악몽 La pesadilla」에 대한 강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보편자로서의 자신을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꿈에서 자주 거울을 본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내가 꾼 악몽 중에서 가장 나쁜 꿈은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꿈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나는 가면을 쓰고 있다. 진짜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두려워 나는 이 가면 벗기를 아주 두려워하고 있다.”45) 윤대녕은 주인공이 과거와 해후하는 과정이 영원회귀라는 관념의 지배 아래, 아무런 내면적 갈등도 없이 이야기를 펼쳐냄으로써 보편 세계에 대한 그 진실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보르헤스의 글쓰기가 상당히 논리적인데 비해 윤대녕의 글은 필연성이 결여된 채 자행되는 사건 진행의 우연성을 ‘운명’을 빌미로 정당화시키고 있어,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그리고 영원회귀의 역시간적 여정 속에서 보르헤스가 「타자 El otro」와 「1983년 8월 25일 El 25 de agosto de 1983」에서 보여주는, 자아와 자아의 또 다른 분신을 통한 과거의 보르헤스와 현재의 보르헤스를 비교하며 은연중에 차이점을 발견하는 대목이 없다. 즉 윤대녕의 소설에서는 자아가 분열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최근에 와서야 나는 E라는 존재가 사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나를 지배하고 있던 또 하나의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내 마음의 배후”46)라는 대목을 통해 타자 속으로 숨어드는 자아의 모습만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린 자가 유령처럼 떠도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시간과 존재에 대한 화답을 구하는 작품에는 여인이 등장하지 않는 반면에 윤대녕의 작품에서는 성유진, 최선주, 이정란 등 영원회귀의 과정에 있는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이상으로 보르헤스와 윤대녕의 작품을 통한 문학사상 세계를 살펴보았다. 비록 우리가 영원히 동일한 신화적 시공간이 현재화되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며 살 수 없다는 것은 슬프고도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영원회귀를 꿈꾸어야 한다. 보편자로 거듭날 수 있으며 불멸이라는 영생의 삶을 위해 ....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깊이 사색하며 살아가는 거다.(...) 살아가며 느끼기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 용서되지 않는 시간, 이 추운 겨울의 막막함, 혼자라는 두려움, 혹은 서툰 사랑 하나하나까지도, 이 모든 것을 뜨겁게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야지.”47) 〈참고문헌〉 김윤식, 『작가와의 대화』, 문학동네, 서울, 1996. 김춘진 외, 『보르헤스』, 문학과 지성사, 서울, 1996. 낸시 케이슨 폴슨, 『보르헤스와 거울의 유희』, 정경원外 역, 태학사, 서울, 2002. 박병규 역, 『허구들』, 녹진, 서울, 1992. , “보르헤스-시간의 미로와 담론의 미로”,『서어서문연구』, 한국서어서문학회, 16호, 2000. 6. 보르헤스, 『모래의 책』, 송병선 역, 예문, 서울, 1995.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서울, 2001.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곽목록 역, 을유문화사, 서울, 2000.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김동광 역, 까치, 서울, 1998. 우찬제, “시간의 그림자 가로지르기”, 『문학동네』, 제 3권 제 4호, 통권 9호, 겨울, 1996.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중앙일보사, 서울, 1995. 이선영, 「보르헤스 작품에 나타난 인식론적 고뇌의 연구」, 석사학위논문, 한국외대, 2002. 정경원, “시간의 두 얼굴-「죽지 않는 인간 El inmortal」을 중심으로, 『서어서문연구』, 한국서어서문학회, 제 20호, 2001. 8. 프랑수아 레이몽 외, 『환상문학의 거장들』, 고봉만外 역, 자음과 모음, 서울, 2001. 하이데거, 『시간과 존재』, 책임기획 역, 청하, 서울, 1986. 황병하 역, 보르헤스 전집 4, 『칼잡이들의 이야기』, 민음사, 서울, 1997. 황종연, “일상에 갇힌 개인의 진정한 자아 찾기”, 한겨레신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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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 eso, se transforman irrealmente las imágenes del espacio y del personaje y se construye un universo puramente imaginario y literalmente ficcional. Este mundo tiene sus propias leyes como el azar y posibilidad, y existe a la manera independiente: un orden autosuficiente que no tiene ninguna relación con la realidad histórica y objetiva. Además el mundo borgiano y de Sr. Yoon se justifica por su existencia porque arraiga en la esfera de discursos literarios donde todo es posible. Y los autores ambos, Borges y Sr. Yoon proponen comúnmente 'la sensación de haber vivido ya ese momento(déjà-vu)'. Esa es la sensación mostrado en el tiempo destrozado y los ciclos del tiempo, y es una confirmación mnemónica del 'eterno regreso'. Esa pura representación de hechos homogéneos no es meramente idéntica a la que hubo en esa esquina hace tantos años. Es, sin parecidos ni repeticiones, la misma. La indiferencia e inseparabilidad de un momento de su aparente ayer y otro de su aparente hoy, bastan para desintegrar el tiempo. Pues, el tiempo va perfeccionando el recuerdo hasta el ciclo distante en que el individuo ya prevé su destino, y prefiere obrar de otro modo. En conclusión, los autores ambos refutan la identidad y hacen de cada hombre una colección o atadura de percepciones, que se suceden unas o otras con inconcebible rapidez. Por lo tanto, 'El pienso, luego soy' cartesiano queda invalidado poque decir 'pienso' es postular el yo, es una petición de principio. No hay detrás de las caras un yo secreto, que gobierna los actos y que recibe las impresiones; somos únicamente la serie de esos actos imaginarios y de esas impresiones errantes. ☞ Key Words: 보르헤스,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영원회귀, 무(無), 기시감(déjà-vu), 벌레구멍(worm holes), 보편자, 개별자 |
첫댓글 보르헤스 문학과 한국문학(혹은 개별작가)의 접목(椄木) 문제.
윤대녕의 경우---<그리고 영원회귀의 역시간적 여정 속에서 보르헤스가 「타자 El otro」와 「1983년 8월 25일 El 25 de agosto de 1983」에서 보여주는, 자아와 자아의 또 다른 분신을 통한 과거의 보르헤스와 현재의 보르헤스를 비교하며 은연중에 차이점을 발견하는 대목이 없다>........
이것은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보르헤스의 글쓰기 기법에 대한 실험중에 나자신이 겪어야했던 고민을
(혹은 그 한계를...) 윤대녕도 넘지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