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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루이스의 정신"이란 프로펠러 비행기에 단독으로 몸을 싣고 1927년 5월20일 뉴욕을 출발해 33시간 30분 뒤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함으로서 세계 항공사의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가 위대한 대기록을 세운 뒤 겨우 1년 뒤인 1928년 7월 3일, 31살의 늘씬한 한 여성이 대서양 횡단에 도전하는 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보스턴을 출발했다.
당시의 비행기의 성능과 항법 능력으로 보아 대서양 횡단을 시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1919년 앨콕과 휘튼 브라운이 북대서양을 횡단한 이후 그때까지 총 6명만이 대서양 비행에 성공했고, 린드버그가 성공한 1927년 한 해에만 19명의 조종사가 대서양 횡단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여성이 도전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린드버그처럼 조종사가 아니라 2명의 조종사 뒤편에서 승객으로서 타고가는 것이었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수상기로 개조된 "포커 프렌드십"이란 프로펠러 3기의 비행기는 한참 가다가 무전기가 작동하지 않아 위치를 잃어버렸다.
조종석 뒷편의 보조 연료탱크 뒤에 항법계산용 탁자에서 쭈그리고 있어야만 했던 이 여성승객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위치를 잃어버린 비행기는 해면 위를 낮게 날면서 눈에 띄는 배의 갑판위로 오렌지에 묶은 편지를 투하했다. 그 편지에는 배의 선원들에게 지금 그들의 위치를 비행기에서 볼 수 있도록 배의 갑판에 크게 써 달라는 부탁의 글이 들어있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한 천신만고 끝에 비행기는 목적지인 웨일즈에 도달했다. 비행기 뒤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공포만을 맛보아야했던 이 여성도 최초의 대서양 횡단여성으로 크나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비행이 끝나고 그녀가 느낀 것은 성취감이나 영웅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이 비행의 주역이 되지 못한데 대한 회환이었다. 그러기에 거기서 머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어느날 갑자기 비행기에 타게 된 것은 아니다. 1898년 생으로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편안하지 않아 일찍부터 집안에만 갇혀있지 않았던 이 여자는 간호원이 되어 1차 대전에 참전했는데,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병원에 위문 공연 온 곡예비행팀 에어 나이트(Air Knight)의 곡예비행에 매료되어 비행의 꿈을 키워갔다.
간호원을 그만두고 임시 우편집배원으로 근무하면서 커티스 비행학교에서 최초의 여성조종사인 네타 스누크(Neta Snook)에게서 비행훈련을 받았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The Yellow Pril'이라는 작은 경비행기를 마련해서 본격적인 비행경력을 쌓아나갔다.
1928년 6월 출판인인 조지 퍼트남은 2명의 남자조종사와 1명의 유명한 여성을 태우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당대 부호인 피츠버그 철강의 상속녀인 에이미 게스트, 그러나 안전을 염려한 가족들의 반대로 갑자기 자리가 비니. 행사를 준비하던 퍼트남은 그동안 활동을 눈여겨 보아오던 31살의 이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 동행을 부탁함으로서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여성이라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이 여성의 이름을 알아봐도 되겠다. 그녀의 이름은 아멜리아 에어하트, 1920년대 말 미국을 휘어잡은 당대의 여걸이다. 에어하트가 비행의 꿈을 키우던 1920년대는 항공의 태동기로서 이제 막 항공 문화가 꽃을 피우는 시기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비행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시범비행이 행해지던 때였다.
속도 기록, 고도 기록, 장거리 비행 기록 등이 속속 세워지고 있었고 1차대전의 공중전에서 단련된 겁없는 조종사들은 전쟁에서의 기동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종류의 곡예 비행용 기동을 선보였다. 에어하트도 여기에 힘입어 다양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28년 9월 그녀의 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서 뉴욕을 출발해서 로스앤젤레스로 비행해갔다가 다시 뉴욕으로 되돌아왔는데 이것은 최초의 미대륙 왕복횡단 비행기록이다. 당시에는 항법 시설이 전무해 비행 중에 자신이 어느 마을 상공을 지나고 있는지 조차 알기가 힘들던 상황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보던 지도가 바람 때문에 조종석 밖으로 날아가 버려서 지도를 사려고 중간에 착륙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활동은 눈부셨다. 1930년 Women′s Air Derby라는 여성 비행경주에서 그녀는 3km 코스 속도기록, 100km 코스 속도기록, 화물탑재 상태에서 속도기록의 3관왕이 되었다. 드디어 항공계의 영웅이던 린드버그만큼 유명해졌고 어느덧 사람들은 그녀를 레이디 린디(Lady Lindy)라고 부르게 되었다.
첫 대서양 횡단때 아무 일도 못하고 뒷자리만을 지킨 후회와 미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조종사로서 대서양 횡단 비행에 도전했다. 1932년 5월 20일 뉴펀드랜드를 출발했으나 날씨가 나빠 거대한 폭풍 속에 빨려 들어가 가랑잎처럼 흔들렸고 난기류에 휘말려 한꺼번에 3천피트씩이나 곤두박질치기도 하는 수난 끝에 최종 목적지인 파리에 조금 못미친 북아일랜드 지역에 불시착해야 했다.
그러나 15시간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통해 에러하트는 가장 빠른 대서양 횡단 비행, 여성 조종사로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 여성 혼자서 시도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기록 등 세 개의 기록을 세워, 지금도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에어하트에게 언론의 찬사가 집중됐다. 그녀는 교황을 알현했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초청을 받았다. 여성 최초로 국립지리학회의 금장 메달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이제 더욱 야심찬 계획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세계일주 비행이었다.
1937년 3월 17일 캘리포니아를 떠난 비행기는 하와이까지 순조롭게 갔지만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고가 발생해서 수리를 해야 했다. 6월 1일 세계일주를 재시도하면서 이번에는 플로리다의 마이애미를 출발해 지구의 동쪽으로 돌았다.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에 도착했고 다시 아시아로 들어갔다. 6월 18일 그녀는 캘커타를 출발해 미얀마, 싱가포르, 자바, 호주 등을 지나 6월 30일에 남태평양 서남부의 뉴기니아에 도착했다.
7월 2일 오전 10시 뉴기니아를 이륙한 에어하트는 길을 잃어 목적지인 호우랜드섬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연료가 부족하다'는 무선 연락만을 남기고 실종됐다.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비행기의 잔해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것으로 에어하트는 영원한 전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미국 캔사스주의 조그만 소녀가 하늘을 나는 커다란 꿈을 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세계항공사에서 '여성최초' 내지 '사상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기록을 도캍아 세우면서 아들보다도 더 당찬 딸로서 전 세계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태어나는 여자 아이들의 이름을 아멜리아로 짓는 것이 유행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일생은 "여자이기 때문에..."라던가 "여자가 무슨..." 이라는 말로 가두어졌거나 스스로를 가두어놓은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도 커다란 교훈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남녀평등이 세계에서 유래없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성들의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편을 통해서 자신을 구현하려 하는 것으로 대신하려는 여성들이 많지 않은가?
57년 전 미국의 한 여성이 불국의 의지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간 것처럼 우리나라의 여성들도 얼마든지 자기의 뜻과 의지만 있다면 하늘을 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무엇이던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 땅의 어머니들이여, 설혹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이들의 뜻을 누를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아이들을 아멜리아 에어하트로 키우기 위해 그들의 뜻을 살려주라. 그러면 에어하트만이 아니라 안창남이나 최은희 같은 위대한 선배여성들의 족적과 기록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
첫댓글 ㅎㅎㅎ.. 사과는 바이킹만 타도 거의 죽음직전까지 가는데...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 아멜리아 에어하트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