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적 유한계급의 진화와 그 계급이 노동계급의 일반적 형태에서 분화된 것을 논하는 곳에서 한층 더 세분된 분업-여러 하인계급의 문화에 대한 논의도 했다. 주로 대행적 유한을 일로 삼고 있는 일부 하인계급들은 새롭고 부차적인 임무-재화의 대행적 소비-를 맡게 된다. 이러한 소비가 일어나는 가장 명백한 형태는 하인들에게 제복을 입힌다던가 커다란 거처를 마련해 주는 데서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그에 못지않게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는 귀부인들에 의한 음식, 의복, 주거, 가구 및 기타 가정비품의 소비이다.
그러나 귀부인 층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경제적 진화의 어떤 시점에서 금력의 증거로서 특수한 재화의 소비가 어느 정도 정밀한 제도로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소비의 분화는 금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나타나기에 앞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초기 약탈문화단계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으며 그 최초의 분화는 약탈생활이 시작되기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견해까지 있다. 재화의 소비에 있어서 이와 같은 가장 원시적인 분화는 그것이 주로 의례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후의 분화와 비슷한 것이지만 그것이 축적된 부의 차등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그 후의 분화와 다른 것이다. 부의 증거로서 소비의 효용은 하나의 파생적 성장으로 분류되어야한다. 그것은 인간의 습관적 사고 속에 전부터 존재해 있었고 또 충분히 확립되어 있는 차별이 선택적 과정에 의해 새로운 목적을 적응하는 것이다.
약탈문화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유일한 경제적 분화는 한편으로는 굳센 남성으로 구성된 명예로운 상층계급과 또 한편으로는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으로 구성된 천한 열등계급 간의 확실한 구별이다. 그 당시의 이상적인 생활양식에 의하면 남성의 일은 여성이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할애된 소비는 다만 그들의 노동에 수반되는 것뿐이며 이것은 여성의 안락과 충족한 생활을 위한 소비가 아니고 그들의 계속적인 노동의 수단일 뿐이다. 재화의 비생산적인 소비는 기본적으로는 무용의 표시 및 인간권위의 필요물로서 명예로운 것이며 부차적으로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명예로운 것이다. 특히 더 갖고 싶은 물건을 소비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훌륭한 음식물의 소비나 희귀한 장식물을 소비한다는 것은 여성이나 어린이에게는 금기로 되어있다. 또한 만약 천한 노예계급이 있다면 이것은 그들에게도 역시 금기로 되어있다. 문화가 더욱 발달됨에 따라 이러한 금기는 다소 엄격한 성질을 띤 순수한 관습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이 유지되는 이론적 근거가 금기이건 관습이건 간에 그러한 인습적 소비양식의 특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동산노예제란 기본적 제도를 가진 준 평화적인 산업단계에 이르면 비천한 노동계급은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만 소비해야 된다는 일반원칙이 다소 엄격하게 적용된다. 사치품이나 안락한 생활을 위한 용품은 그 성질상 유한계급에 속한다. 이러한 금기 밑에서 좋은 음식물, 특히 술 같은 것은 상류계급이 사용하기 위해 엄격히 제한된다.
음식물에 대한 의례적인 차별은 술이나 마취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가장 잘 나타난다. 만일 이러한 소비품의 값이 비싸다면 그것은 고귀하고 명예로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주로 여자들인 비천한 계급은 이런 술을 아주 싼값으로 구입할 수 있는 나라를 제외하고는 강제로 술 먹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부권시대에까지 오랫동안 이와 같은 사치품을 마련하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으며 그것을 소비하는 것은 명문남성들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술은 마음껏 마시고 주정을 하거나 병을 얻는 것은 그 술을 진탕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우월한 자의 표지로서 명예로운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과음으로 인한 병을 남성적인 특성이라고 너그럽게 용인한다. 그러한 원인으로 일어나는 좋지 않은 건강상태를 고귀, 품위의 동의어로서 일상용어화 하는 일조차 일어난다. 돈이 많이 드는 악덕의 증상이 우위자의 표지로서 널리 인정되고 또 미덕이 되고 나아가서는 사회적 존경까지 받게 되는 경향은 다만 비교적 초기문화단계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드는 악덕에 따른 명성은 오랫동안 상당한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유층이나 귀족계급의 지나친 방종에 대한 비난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방종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은 부녀자와 열등자에게는 훨씬 차별적이다. 이러한 부당한 전통적 차별은 오늘날의 선진된 사람들 사이에조차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다. 유한계급에 의해서 세워진 선례가 모든 관례상의 규범으로서 강제력을 갖고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의 술에 대한 이런 인습적인 절제가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명망 있는 계급의 여자들이 실천하고 있는 이런 절제의 특징은 상식을 무시한 지나친 논리의 순화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여성들에 대한 이러한 심한 절제는 어느 정도 강제적인 인습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습은 대체로 부권시대의 전통-여성은 하나의 동산이라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경우에 그 힘이 가장 강한 것이다. 그 범위와 엄격성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완화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그 의미를 결코 상실하지 않고 있는 이러한 전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여성은 동산이기 때문에 그들의 보다 많은 소비가 주인의 안락과 명성에 이바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존에 필요한 정도만 소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치품의 소비는 소비자 자신의 안락을 위한 것이므로 그것은 주인의 표지인 것이다. 주인 이외의 사람이 이화 같은 소비를 하는 것은 단지 묵인 하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습관적 사고가 부권시대의 전통에 이뤄진 사회에서는 적어도 자유롭지 못한 예속계급이 사치품을 사용한다는 것을 관례상 반대하는 금기라는 유물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예속계급이 사용하므로써 주인의 안락이나 쾌락을 현저히 해치거나 또는 다른 이유로서 그 사용의 정당성 여부가 의문시되는 특정한 사치품에 대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서구문명권의 대단히 보수적인 중산계급은 이러한 각종 주류에 대한 금기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부권시대의 예의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게르만문화권이 중산계급 사이에서는 더욱 명백하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여러 가지 제한으로-부권시대의 전통이 점차 약화됨에 따른 더 많은 제한으로- 여성은 자기 주인을 위해서만 소비해야 한다는 일반원칙이 정당하고 의무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성의 의상이나 가재도구에 대한 지출은 이러한 원칙의 분명한 예외라는 이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예외는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더욱 표면적인 것이다.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 있어서는 아낌없는 재화의 소비, 특히 고급재화의 소비-이상적으로는 최소생존비용을 초과한 모든 소비-는 대체로 유한계급에나 관계되는 일이다. 이러한 제한은 재화의 사유제와 임금노동, 또는 소가족경제에 입각한 산업제도를 갖게 되는 후기 평화적 단계에 도달한 후에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소멸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유한계급의 제도가 후기시대의 경제생활에 영향을 끼친 허다한 전통이 형성되고 확립되었던 준 평화적 초기단계에서는 이 원칙은 관습법으로서의 힘은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소비를 이루는 규범으로서 이바지했고 또 그 원칙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그 발전과정에서 조만간 배제되는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준 평화적인 시대의 유한신사들은 생계와 육체적 능력유지에 소요 되는 최소한도의 것을 훨씬 넘어서 많은 생활 자료를 소비할 뿐 아니라 소비하는 재화의 질에 있어서도 특수한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음식, 음료, 술, 주거, 봉사, 장식품, 의복, 무기장구, 오락, 부적, 우상 및 신력 등을 자기 마음대로 가장 좋은 것을 소비한다. 그 소비품이 점차 개선되는 과정에서 혁신의 추진적 원칙 및 직접적인 목적은 개인적인 안락과 행복을 위해 개선되고 보다 세련된 생산물이 한충 더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하는데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소비의 목적으로서 남는 것은 아니다. 명성의 규준이 있으며 그 기준에 따라 영구히 존속할 수 있는 혁신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다 훌륭한 재화를 소비한다는 것은 부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명예로운 것이 된다. 반대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정당한 소비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열등과 무력의 표시가 된다.
이러한 음식물 등의 질적 우열에 대한 까다로운 차별의 발달은 유한인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훈련과 지적 활동에도 영향을 준다. 그들은 이미 단순히 성공한 진취적인 남성-힘세고 재력 있는 용감한 남성-만은 아니다. 그들은 바보같이 보이지 않기 위해 취미도 배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소비재에 있어서 어느 정도 귀천은 정확히 분별해야만 한다. 그들은 각종 훌륭한 식품, 남성다운 격에 맞는 술과 장신구, 훌륭한 의복과 가구, 무기, 오락, 무용, 마취물 등의 감식가가 된다. 이러한 심미적 능력을 개발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이러한 방면에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알맞은 방법으로 표면상의 유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유한생활은 다소 어려운 노력으로 변모해가는 경향이 있다. 유한인은 자유롭게 마음에 드는 재화를 소비해야 한다는 필수조건과 밀접히 관련해서 그것을 훌륭한 방법으로 소비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필수조건으로 되어 있다. 그들의 유관생활은 틀에 짜인 격식에 따라 행해져야만 하므로 전장에서 언급한 훌륭한 예절이라는 것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교양 있는 예절과 생활양식은 과시적 유한 및 과시적 소비의 규범을 준수하는 항목이다.
가치 있는 재화의 과시적 소비는 유한인에 있어서는 명성의 수단이다. 부가 그들 수중에 축적됨에 따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기의 풍부함을 충분히 입증할 수는 없게 된다. 그러므로 값진 선물을 하거나 비용이 드는 향연이나 연회를 베풀어서 친구나 경쟁자의 조력을 얻게 된다. 선물이나 향연을 베푸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소박한 겉치레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유래된 것이겠으나 그것은 매우 일찍이 이러한 목적을 위한 효용을 간직해서 그 성질을 오늘날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 효용은 오늘날까지 오랫동안 이런 관습이 의존하는 실질적인 원인으로 되어왔다. 연회나 무도회와 같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특히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연회의 접대 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의 경쟁자와 비교하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초청 객은 주인을 대신해서 소비하는 동시에 주인이 혼자서는 처분할 수 없는 초과물자의 소비를 입증하는 증인이 되고 또한 주인의 예절의 대한 솜씨를 목격하게 된다.
비용이 많이 드는 연회를 베푸는 데는 그밖에 보다 우아한 성질의 동기가 있다는 것은 물론디아. 연회에 모이는 풍습은 아마 주연의 필요 때문에 존속되는 것이겠지만 역시 그것은 부당한 차별을 위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공인될 수 있는 동기에는 차별적 요소가 없다고 공언하는 데도 적지 않게 효율적으로 이바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교적 예의의 경제적 효과는 재화의 대행적 소비나 힘이 들고 비용이 많이 드는 예의의 성과를 전시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감퇴되지 않는다.
부가 축적됨에 따라 유한계급은 그 기능과 구조에 있어서 더욱 발전하여 그 계급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난다. 계층과 동급에 대한 다소 정밀한 체계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분화는 부의 상속과 그에 따른 명문의 상속으로 더욱 촉진된다. 훌륭한 가문을 상속하다는 것은 의무적인 유한을 상속하다는 것이다. 또한 유한생활을 넘겨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진 명문이 위신 있는 유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부를 갖추지 않고서 상속되는 수도 있다. 훌륭한 가문이 명성을 얻기 위해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재화를 충분히 갖추지 않고 계승되는 수도 있다. 이리하여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가난한 유한계급이 생기는 것이다. 이 반신불수와 같은 유한인은 계층적 등급제도에 빠지게 된다. 부유한 유한계급 가운데 비교적 높은 계층과 최고계급에 가까운 사람은 출신 또는 부력이라는 점에서 신분이 낮고 금전적으로 약한 사람보다 상위에 선다. 이 낮은 계층, 특히 빈곤의 한계점에 처한 유한인들은 예속 또는 충성이라는 방법으로 상층 유한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보호자로부터 유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명성과 수단을 보다 더 많이 얻는 것이다. 그들은 보호자의 지위에 대한 지표가 되고 그의 풍족한 부의 대행적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종속되어 있는 많은 유한인들은 자산에 대한 아무 권리도 없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는 대행적 소비자로 전혀 인정 못 받는 자도 있고 일부분만 인정받는 자도 있다. 그러나 보호자의 시종이나 예속 자가 된 그들 대부분은 무조건 대행적 소비자로 분류될 수도 있다. 또한 이들 보호자의 대부분이나 보다 등급이 낮은 다른 귀족계급들은 처자, 하인 및 시종들로 구성되는 다소 포괄적인 대행적 소비자 집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행적 유한과 대행적 소비의 계층적 체계를 통해 그 유한과 소비는 주인에게 귀속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 따른 명성도 주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나 상태로서 그들의 임무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들이 주인이나 보호자를 위해 행하는 유한과 소비는 주인이 명성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투자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은 행연이나 증여에 있어서는 특히 그러하여 이 경우에는 일반 세평에 의해 즉각적으로 주인이나 보호자의 명성으로 되는 것이다. 유한과 소비가 시종자에 의해 대행적으로 행해지는 경우에는 그들이 보호자의 주위에서 상주해가며 어떤 원천에서 생활비를 염출하고 있는가를 여러 사람에게 알림으로써 주인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명성을 획득하는 집단이 늘어감에 따라 유한행위의 미점을 나타내는데 필요한 보다 더 명백한 방법이 필요하게 됨으로써 이 목적을 위해 제복, 배지 등이 유행하게 된다. 제복을 착용한다는 것은 대체로 예속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사실상이건 표면적이건 예속의 표지라 해도 무방하다. 제복착용자는 대체로 자유로운 자와 예속된 자 또는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의 두계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들이 수행하는 직무도 그와 같이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으로 구분된다. 물론 그 구분이 실제에 있어서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비천한 일 중에서 비교적 덜 비천한 직무나 고귀한 직무 중에서 비교적 덜 고귀한 일을 한 사람이 처리하는 일도 흔히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구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좀 더 난처한 것은 표면상의 직무의 성질에 따른 귀천에 대한 기본적 구분이 그 직무를 부과시키고 제복을 입힌 사람의 신분에 따른 부차적인 귀천에 의해 방해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한계급의 본래 직업은 고귀한 것이다. 그것은 정치, 전쟁, 사냥, 무기 및 장비의 관리와 같은 것들-즉, 분명히 약탈적 직업으로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에 수공예, 기타 생산적 노동 및 하인업무 등과 같은 노동계급에게 마땅히 돌아가는 일은 비천한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높은 사람들을 위해 행해지는 비천한 직무는 매우 명예로운 직무가 되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왕의 시녀, 여관 또는 왕의 승마, 수렵관 등이 그것이다. 나중에 예거한 2개 직책은 어떤 일반적인 뜻을 가진 원칙을 시사 하는 것이다. 이 경우와 같이 문제의 비천한 직무가 전쟁 및 수렵과 같이 유한계급의 기본적 업무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면 그에 반영된 명예로운 성질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이리하여 그 자체의 성질로 보아서는 비천한 부류에 속하는 직업에 커다란 명예가 따르는 것이다.
평화적 산업의 후기발전단계에서는 제복에다 무장을 한 무위도식배들을 고용하는 관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주인이나 보호자의 문장을 달고 있는 예속자들에 의한 대행적 소비는 제복을 입은 하인들에게 국한된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제복은 예속, 또는 노예상태의 표지가 된다. 무장한 시종자의 제복에는 항상 어떤 명예로운 성질이 따라 다녔지만 그 명예로운 성질은 제복이 하인의 유일한 표지가 되어버리자 소멸된다. 제복을 착용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사실상의 노예상태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노예상태의 오명에 매우 민감하다. 이러한 반감은 어떤 회사가 그 회사의 고용원을 구별하기 위해서 만든 제복의 경우에까지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반감은 이 나라에서 제복을 착용하게 되어있는 공무원, 군인들을 그렇게 확고하지는 않지만 불신하는 정도에까지 이끌어간다.
노예제도가 소멸됨에 따라 한 사람에게 딸려있던 많은 대행적 소비자가 대체로 감소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그 유한인을 위해 대행적 유한을 영위하던 많은 하인들의 경우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이 두 계급은 전체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상호 일치한다. 최초로 이러한 임무를 위탁받은 예속자는 처나 정처였다. 그리고 이 제도의 후기발전단계에 가서 이러한 임무를 계속 맡아보던 인원이 점차 줄어들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남는 사람은 처이다. 그 사회의 보다 상류계급에게는 이러한 두부류의 직무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며 처는 당연히 꽤 많은 하인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 계층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대행적 유한과 소비의 임무는 오직 처에게만 남게 된다. 오늘날의 서구 문명사회에서는 하층중산계급에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신기한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이 하층중산계급의 가장은 유한을 꾀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위환경에 의해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산계급의 부인들은 여전히 자기 가정과 주인의 좋은 평판을 위해 대행적 유한을 영위하는 것이다. 어떤 근대산업사회에서도 사회적 계층이 낮은 곳에서는 그 기본적 사실-가장의 과시적 유한-이 상당정도 소멸된다. 중산계급의 가장은 흔히 오늘날의 실업가의 경우와 같이 주로 근로의 성격을 띤 직업으로써 생활비로 획득해야 하는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그들의 유한이 소멸되게 된다. 그러나 그 파생적 사실-부인에 의해 행해지는 대행적 유한과 소비 또는 하인에 의한 보조적인 대행적 유한-은 명성을 원한다면 경시될 수 없는 하나의 인습적 관례로서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처가 시대의 상식이 요구하는 정도의 대행적 유한을 격식에 맞춰 영위할 수 있도록 성실히 일하는 남성을 보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처가 영위하는 유한은 물론 단순한 태만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 가사일, 사교상의 예의라는 구실 하에 항상 일어나는 것으로 봐서 그녀가 어떤 유용성 있고 실질적인 용도가 있는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이외에 어떤 궁극적인 목적도 거의 또는 전연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인 것이다. 이미 예절이라는 항목 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산계급의 주부들이 모든 시간과 노고를 바치는 반복되는 가사일이라는 것은 대부분 이런 성질을 띠고 있다. 주부가 장식적인 성질의 가사에 정신을 쏟는다는 것은 중산계급의 예절을 배워온 남성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이렇게 집안을 장식하고 정돈하는 것을 즐기는 취미는 그 허비된 노고의 증거를 요구하는 예의규범의 도태적 규준 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 효과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주로 우리가 그러한 것에 즐거움을 갖도록 배워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사상의 임무에는 형태와 색채의 적절한 배합과 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분류되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 많은 배려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실질적인 미적 가치를 가진 효과는 가끔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생활의 즐거움에 관해 여기서 논의된 대부분은 주부의 노고는 시간과 물질을 과시적으로 소비하는 법칙에 의해서 조성되어 온 관습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미나 안락이 얻어진다면-그것이 사실이라면 다소 우연한 경우일 것이다- 그것은 허비된 노고라는 위대한 경제 법칙이 따르는 방법으로 이룩되었을 것이다. 중산계급의 가재도구 중 남 앞에 내놓을 만하게 훌륭한 것의 하나는 과시적 소비품이요, 다른 하나는 주부에 의해 영위되는 대행적 유한을 입증하는 기구이다.
처의 손에 의한 대행적 소비의 요구는 대행적 유한을 요구할 수 없는 훨씬 낮은 금전적 계층에서조차 계속 작용한다. 의례적인 정결과 같은 헛된 노고를 가장하는 일이 거의 없는 낮은 계층과 표면상의 유한을 의식적으로 시도하는 일이 전혀 없는 계층에서도 체면유지라는 것은 처로 하여금 가족과 가장의 명성을 위해 약간의 재화를 과시적으로 소비하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낡은 제도의 진화 결과 처음에는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남성의 동산 노예-남성이 소비하는 재화의 생산자-였던 처는 남성이 생산한 재화의 의례적인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처는 이론상으로는 여전히 틀림없는 남성의 동산노예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대행적 유한의 소비는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것은 하인의 변함없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중하계급의 가정에서 영위되는 대행적 소비는 유한계급의 생활양식의 직접적인 표시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금전적 등급의 가정은 유한계급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한계급 생활양식이라는 것은 좀 거리가 먼 표현이라 하겠다. 유한계급은 명성이라는 점에서 사회구조의 최고층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양식과 가치의 규준을 그 사회의 명성의 규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수준에 어느 정도 접근하려면 모든 하층계급은 이러한 기준을 준수해야만 한다. 현대문명사회에 있어서 사회계급 사이의 경계선은 막연하고 무상한 것으로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생겨나면 상류계급이 정해 놓은 명성의 기준은 아무장해도 받지 않고 최저계층에까지 강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그 결과 각 계층의 사람들은 바로 자기 위의 계층에서 영위되는 생활양식을 체면 있는 생활의 이상으로 받아들여 그 이상에 따라 생활하기 위해 모든 정력을 쏟는다. 만약 이런 노력이 실패하면 명성과 자존심을 상실할 염려가 있으므로 그들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공인되고 있는 규범에 따라가야만 한다.
고도로 조직된 어떤 산업사회에 있어서나 궁극적으로 명성의 기반이 되는 것은 금력이며 또한 금력을 과시하고 명성을 획득, 유지하기 위한 수단은 유한과 재화의 과시적 소비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은 그것이 가능한 한 훨씬 하층계급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또한 이 두 방법이 사용되고 있는 하층계급에서는 이 두 가지 직무가 대체로 처자에 맡겨지고 있다. 표면상으로나마 처를 위한 유한이 전혀 불가능한 정도의 낮은 계층에서도 재화의 과시적 소비는 처자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가장도 역시 이러한 소비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빈민층의 극한점으로 몰락한 낮은 계층에서는 가장과 자녀들은 사실상 체면을 위한 값진 재화의 소비를 못하게 되고 처만이 그 집안의 금전적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사회의 모든 계층, 최극빈 계급까지도 모든 인습적인 과시적 소비를 그만두지 못한다. 이러한 소비규범의 마지막 품목은 절박한 궁핍 상태에 놓일 때를 제외하고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비굴과 불쾌감을 견뎌내면서 마지막 장신구나 또는 금전상의 체면유지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차적이고 정신적인 욕구를 모두 거부하고 육체적 욕망의 압력 앞에 굴복한 계급이나 국가는 없었다.
과시적 유한과 소비의 성장에 관한 이상과 같은 연구검토에서 명성의 목적을 위한 그 두 가지 효용은 모두 공통적으로 낭비의 요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자(과시적 유한)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요, 후자(과시적 소비)는 재화의 낭비이다. 양자는 모두 부를 과시하는 방법이요, 또 같은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양자택일이란 다른 근원에서 야기되는 별개의 예법 기준에 의해 영향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순히 자기선전을 위한 방편의 문제이다. 편의상의 이유로 경제발전의 개개단계에서 양자택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 두 방법 중 어느 것이 자기선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환경에 따라 그 답도 달라진다.
그 공동체나 사회집단이 단지 일반의 세평으로 충분히 좌우될 정도로 작고 밀집된 상태에 있는 한-즉, 개인이 세평에 순응해야 되는 주위환경이 친지나 이웃의 뒷공론으로 한정되어 있는 한-이 두 방법은 거의 같은 효과를 가진다. 그러므로 사회발전의 초기단계에서는 각각의 방법은 똑같이 잘 쓰일 것이다. 그러나 분화가 심화되고 한층 더 광범위한 인간관계에 도달하게 되면 소비는 체면유지의 정상적인 수단으로 유한보다 상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후기 평화적 경제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특히 그러하다. 통신수단 및 인구이동은 이제 여러 사람이 직접 보는데서 얻을 수 있는 재화(때로는 예절)를 과시하는 것 이외에는 개인의 명성을 판단할 다른 방법이 없는 많은 사람들 앞에 개인을 드러낸다.
현대산업조직도 역시 그와는 다른 방식에 의해 똑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현대산업제도의 절박한 요구는 흔히 개인과 가정을 병치관계에 두는 것이니 그 사이에는 병치관계의 의미 이외에 아무런 접촉도 없다. 기계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사람의 이웃을 종종 사회적으로는 이웃도 친척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일시적인 훌륭한 세평은 커다란 효력을 갖는다. 타인의 일상생활에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금전적 능력에 대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불능력의 부단한 과시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들의 일상생활을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 빈번하다. 교회, 극장, 무도회, 호텔, 공원, 상점 등이 그 예다. 이와 같이 잠시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겨 줌으로써 자기만족을 얻으려면 자신의 금력의 표지를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문자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발전추세는 분명히 유한보다 과시적 소비의 효용을 높이려고 하는데 있다.
명성의 수단으로서 소비의 효용은 물론 체면유지의 요소로서 그것은 강조한다는 것은 개인접촉이 가장 광범위하고 인구이동이 심한 사회에서 그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과시적 유한은 농민소독보다 도시인의 소들을 더 많이 요구하며 그것은 불가피하다. 그 결과 도시인의 체면유지 때문에 농촌사람보다 훨씬 더 하루살이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미국 농민들은 같은 수입을 갖고 있는 도시직공의 가족보다 의복, 거동 등에서 훨씬 뒤떨어져 있다. 이것이 도시인은 천성적으로 과시적 소비에서 오는 특유한 만족감은 얻는데 열성적이고 농민들은 금전적인 체면을 그다지 유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의 증거에 대한 자극과 일시적 효과는 도시에서 한층 더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인은 이런 방법에 보다 쉽게 의존하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자신의 과시적 소비의 정상수준을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까닭에 도시에서 일정한 정도의 체면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면으로 비교적 막대한 비용이 들게 된다. 이와 같은 보다 더 높은 수준에 맞춰 가야 한다는 필요조건은 불가피한 것으로 된다. 체면유지의 수준은 어떤 계급에서나 점점 높아만 가고 또한 사회신분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체면유지의 필수조건에 맞춰 살아야 한다.
소비는 농촌보다 도시에서 생활수준의 비교적 커다란 요소가 된다. 농촌사람들의 소비는 어느 정도 저축과 가족의 안락으로 대치되며 이런 것들은 동네의 소문을 통해 알려지기 때문에 금전상의 세평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안락과 유한에 빠진다는 것은-그것이 지나친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대체로 과시적 소비의 항목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저축도 이와 마찬가지다. 직공계급의 저축이 대체로 적다는 것은 직공계급의 경우에는 그 저축이 농장이나 작은 촌락에 사는 사람들의 저축에 비해 그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관련해서 선전수단으로서의 효과가 적다는 데 기인한다. 농민이나 작은 부락민들 사이에서는 이웃사람들의 문제, 특히 금전상의 지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단순히 이 자체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 직공이나 도시노동계급이 받는 이런 자극은 저축액을 격감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체면유지 수준의 상승을 통한 누적적 작용에서 저축 성향을 해치는 효과는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명성의 규준이 초래하는 행위의 한 가지 적절한 실례는 도시의 노동자, 직공 및 하층중산계급사이에서 습관으로 되어있는 공공장소에서 대포 한 잔을 대접한다든가 담배는 나눠피는 행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과시적 소비를 매우 좋아하고 그러므로 비난받을 만한 뚜렷한 결과는 초래하는 계급으로는 행상인쇄공을 들 수 있다. 이런 관심에서 이 계급에 특유한 습관은 대체로 그들이 갖고 있다고 인정되는 어떤 분명치 않은 정신적 결함이나 또는 그들의 직업이 명확치 않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끼치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정신적으로 해로운 영향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보통 인쇄소의 식자실이나 인쇄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상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인쇄소나 도시에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은 다른 곳에서도 쉽게 통용된다. 즉 특수훈련으로 인한 타성이 적다는 것이다. 또한 이 직업은 평균지능과 일반적인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노동 수요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그 결과 향수심으로 인한 타성도 적다. 그와 동시에 이 직업의 임금도 용이하게 직장을 옮길 수 있을 만큼 높다. 그 결과 인쇄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이동성이 커지며 아마도 그 이동성은 직업종류가 똑같이 명확하고 상당한 노동자를 갖고 있는 어떤 직종보다도 큰 것이다. 이 사람은 항상 새로운 집단의 친지들과 접촉하게 되며 그들과의 관계가 일시적일지라도 그 동안까지는 호평을 받는 것이 역시 중요하다. 허세를 좋아하는 인간의 성벽은 이친구의 정의라는 데 이끌려 이들에게 이러한 요구에 가장 잘 기여하는 방향으로 기분 좋게 돈을 쓰도록 유도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습관이 일반화되면 곧 하나의 규범으로서 체면유지의 공인된 기준으로 구체화된다. 다음단계에는 이 체면유지의 기준이 장래의 같은 방향의 전진을 위한 출발점으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직장에서 누구나 당연지사로 돈을 탕진하는 기준에 정신없이 따라간다는 것이 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쇄공들 사이에서 돈을 탕진한다는 것은 다른 노동자들보다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 업종의 이동성이 용이하다는 것과 이 직장에서의 인간접촉이 더욱 일시적인 성질을 띤다는 데 기인된다. 그러나 돈을 탕진한다는 것이 크게 요구되는 본질적인 이유는 프랑스 소농을 근검절약하게 만들고 미국의 백만장자가 대학, 병원, 박물관 등을 만들도록 하는 우월감과 금전상의 체면을 과시하려는 성향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 과시적 소비의 규준이 그와는 판이한 다른 인간성의 특징에 의해 상당 정도 상쇄되지 않았더라면 도시의 직공 및 노동자들은 아무리 많은 임금과 소득을 올릴지라도 저축이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부나 그 과시 외에도 다른 세평의 규준과 어느 정도 불가피한 행동규범이 있다. 그리고 이 중 어떤 것은 과시적 낭비에 대한 명백하고 기본적인 규준으로서 강조되고 자격이 부여된다. 선전효과라는 단순한 판단 기준하 에서는 유한과 과시적 소비가 당초에는 금전적 경쟁의 분야를 완전히 균등하게 양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사회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유한은 점차 그 영역을 잃어 이제는 폐물이 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재차의 과시적 소비는 상대적으로나 점대적 으로나 점차 중요성을 증대하게 되고 종국에는 최소한도의 생계를 제외한 모든 가용재화를 흡수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발전경로는 이러한 이상적인 도식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처음에는 유한이 우위를 차지했으며 준 평화적 문화단계에서는 부의 직접적인 지표로서 또 체면유지의 기준요소로서 재화의 낭비적 소비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했다. 그때 이후 소비는 그 기반을 강화하여 현제는 최소 생산 자료를 제외한 모든 재화를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당초에 유한이 명성의 수단으로서 월등했던 것은 고귀한 직업과 비천한 직업 간의 고래의 구별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유한이 명예롭고 불가피하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것이 비천한 노동으로부터의 면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고귀한 계급과 비천한 계급 간의 낡은 사회적 분화는 명예롭고, 천한 직업 간의 부당한 차별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인 차별은 초기 준 평화적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체면유지의 규준으로 발전한다. 이의 우월성은 유한이 여전히 소비와 마찬가지로 부의 증거로서 완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의해 촉진되는 것이다. 사실상 비교적 소규모의 안정된 인간환경에 개인이 놓여있는 문화단계에서는 유한이 너무 효과적이므로 모든 생산적 노동을 경멸하는 낡은 전통은 돈과 인연이 없는 많은 유한계급을 낳았으며, 그 사회의 생산량을 최소생계수준으로 제한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생산의 억제는 명성에 대한 의무보다 훨씬 엄격한 강제 하에 놓여있는 노예계급이 노동계급의 최저생활자료를 초과해서 생산토록 강요되어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로 명성의 기반으로서의 과시적 유한의 효용이 상대적으로 감소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부의 증거로서 소비의 상대적 효용이 증가하는 데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과시적 낭비의 관습과는 어느 정도 상반되는 또 하나의 다른 힘에 의해 유래하는 것이다.
이 다른 요인은 제작본능이다. 다른 사정이 허용한다면 이 본능은 인간에게 생산적 효율과 인간에게 유용한 모든 것에 대해 호의를 갖게 한다. 또한 물질이나 노고의 낭비를 경멸하게 만든다. 이 제작본능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심한 역경 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소비가 사실상 아무리 낭비적일지라도 적어도 표면상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구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능이 특정 상황 하에서 공훈에 대한 취미와 계급의 귀천에 대한 부당한 차별로 되어버리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전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제작본능은 과시적 낭비의 법칙과 모순되는 한 본질적 효용을 고집하지 않고 명백히 무익한 것은 가증스러운 것이며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는 변함없는 관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인 감정의 성질이기 때문에 그 규준은 주로 또는 직접적으로 그 요구조건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만을 골라낸다.
모든 노동이 철저히 또는 예외 없이 노예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는 한 모든 생산적 노고는 비천하다는 것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제작본능은 생산적 효용이라는 방향으로 그 효과를 크게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나 노예제와 신분제를 가진 준 평화적 단계가 임금노동제와 현금지불제를 가진 평화적 산업단계로 이행하게 되면 이 본능은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무엇이 유용한가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적어도 자기만족이라는 보조적 규준으로 자기주장을 한다. 모든 외적 조건을 도외시한다면 오늘날 어떤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성향을 조금도 갖지 않거나 또는 인간에게 유용한 어떤 대상이나 사실, 관계를 조성하고저 하는 충동에 촉구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러한 성향은 훌륭한 유한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자극에 의해 또한 품위 없는 유용성은 기피하므로써 상당히 억제될 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표면적으로만 작용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사회적 임무, 준 예술적, 준 학문적인 업적, 주택의 단장, 자선 재봉회의 활동, 의복의 개량, 그리고 의상, 트럼프, 요트, 골프, 기타 각종 스포츠에 대한 익숙한 솜씨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환경 때문에 부득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것은 마치 암탉에 알을 품게 함으로써 포난본능의 실재성이 반증된다는 것과 같이 본능의 존재를 반증하는 것이다. 오늘날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예절에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거둘 수 있는 어떤 의의 있는 활동형태를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현대의 유한계급과 준 평화적 단계의 유한계급과의 태도의 차이점을 명시하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기단계에는 노예제도 및 신분제도 등 모든 지배적인 제도가 순수한 약탈적 목적 이외의 것을 위한 노력을 철저히 저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적성집단이나 자기집단 내의 예속계급에 대한 실력공세나 억압을 위한 활동경향을 가진 어떤 관습적인 직업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적으로 유용하거나 또는 표면상으로나마 유용한 직업에 의존함이 없이 유한계급의 압력을 제거하고 그 정력을 딴 데로 돌리게 하는데 이바지한다. 수렵의 관습도 어느 정도 같은 목적에 이바지한다. 사회가 평화적 산업조직으로 발전되고 보다 더 완전한 토지의 점유가 수렵의 기회를 거의 없앨 정도로 감소시켰을 때 의의 있는 직업을 찾는 정력의 압력은 어떤 다른 방향으로 그 배출구를 찾게끔 되었다. 유용한 노력에 부수되는 굴욕감도 역시 강제노동의 소별과 함께 둔화되었다. 이리하여 제작본능은 한층 더 확고한 기반을 갖고 나타난 것이다.
최소한의 저항선은 어느 정도 변화하였고 여태까지 약탈적 활동에서 배출구를 찾았던 정력은 이제 어느 정도 표면상 유용한 목적의 방향을 갖게 된다. 표면상 목적이 없는 유한은 경멸받게 되었으며, 특히 유한계급 중에서도 서민출신이기 때문에 명예로운 유한이라는 전통과 유리되어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러나 생산적 노고라는 성질을 갖고 있는 모든 직업을 경멸하는 명성의 규준은 여전히 존재하며 실질적으로 유용하고 생산적인 직업에 극히 일시적인 명성 이상의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유한계급에 의해 영위되는 과시적 유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형태의 변화지 본질의 변화는 아니었다. 이 두 개의 모순되는 요구조건의 조화는 가장의 방법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여러 가지 복잡한 예법준수와 의례적 성질을 가진 사회적 의무가 발달되어 공식적 체제나 명칭이 구현된 개선이라는 그럴 듯한 목적을 가진 여러 가지 단체가 생기게 된다. 왕래가 많아지고 많은 대화가 오가나 그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왕래가 어떤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는가 돌아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의의 있는 직업의 가장과 함께 그 조직 속에 짜여서 반드시 그렇지 않으나 대체로 어떤 중요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의의 있는 노력의 요소가 다소 존재하는 것이다.
대행적 유한의 보다 더 좁은 영역에서는 유사한 변화가 훨씬 앞서 갔다. 발전된 평화적 단계의 주부는 부권시대의 전성기 때와 같이 뚜렷한 태만 속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가사를 돌보는데 성실히 임하고 있다. 이러한 가사상의 직무가 발전하는 특징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재화나 용역이나 또는 인간 생활이나를 막론하고 과시적 소비의 진화를 통해 보면 소비자의 명성을 효과적으로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과다하게 소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명성을 얻으려면 낭비를 해야 한다. 최소한도의 생활 자료도 얻을 수 없는 극빈자와의 비교를 제외하고는 단순히 생필품을 소비하는 것만으로 보람을 찾을 수 없다. 또한 그러한 비교로부터는 가장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체면유지의 수준 이외에는 아무런 소비의 기준도 나올 수 없다. 풍요 이외의 관점에서 차별적 비교를 허용하는 생활 기준도 역시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정신적, 육체적, 지적, 또는 미학적 역량의 표시에서 여러 방면으로 비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비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비교하는 것이 오늘날 유행되고 있으나 이런 점에서 행해지는 비교도 대체로 금전상의 비교와 너무나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거의 구별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지성적, 예술적 역량 또는 그 솜씨를 표시하는 데 대한 일반적 평가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질적으로 금전적인 차이에 불과한 것을 흔히 지성적, 예술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낭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적당치 않다. 이 말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될 때는 비난의 뜻이 섞여 있다. 여기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와 같은 동기와 현상을 달리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는 인간 생활이나 인간의 생산물을 부당하게 소비하는 것을 뜻하는 저속한 의미로 생각해서 는 안 된다. 경제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소비는 어떤 다른 소비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여기서 낭비라고 부르는 것은 이 소비가 대체로 인간생활이나 행복에 기여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지 그것을 택하는 각각의소비자의 입장에서 보아 노력 또는 지출을 낭비하거나 오용한다는 이유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만일 그것을 선택하면 낭비라는 이유로 비난받지 않을 다른 소비 형태와 비교해서 그에 대한 상대적 효용의 문제는 처리된다. 소비자가 선택하는 지출의 형태가 무엇이든, 또는 그 선택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그의 기호에 의해 그에게 효용을 주는 것이다. 소비자 개개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본래의 경제이론의 범위 안에서는 낭비라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술적 용어로서 낭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과시적 소비의 규준하에서 소비자가 추구하는 동기나 목적을 비난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생활 용어로서 낭비란 것은 허비란 것으로 특정지어지기 때문에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상식적인 함축은 그 자체가 제작본능의 발로이다. 낭비가 일반적으로 배격 받는 것은 사람은 평안히 살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의 노력과 즐거움에서 인간전체의 생활과 복지의 증진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경제적 사실이라도 절대적인 찬성을 얻기 위해서는 비개인적인 유용성-인류전체의 관점에서 본 유용성-의 관점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한 개인의 다른 사람에 대한 비교의 상대적 또는 경쟁적 이점은 경제적 양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EH한 그러므로 경쟁적 금전 지출은 이러한 양심의 찬동을 얻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차별적인 금전상의 비교로 인해 야기되는 금전 지출을 제외하고는 어떤 과시적 낭비의 항목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종목이나 요소를 이 항목에 포함하기 위해서 금전 지출을 이러한 의미의 낭비로서 인정해야 된다는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주로 낭비적인 것으로 시작된 생활수준의 요소도 나중에는 소비자가 보기에는 생활필수품으로 되는 일도 흔히 있다. 이리하여 그것은 소비자가 일상 지출하는 기타 항목과 마찬가지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런 항목에 가끔 포함되는 품목으로서 또는 이런 원칙이 적용되는 양식의 예증으로는 양탄자, 은제식기, 급사의 서비스, 실크․해트, 예복, 각종 보석 및 의상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습관과 인습이 형성된 후에야 이러한 것들이 필수품으로 된다는 것은 용어의 기술적 의미로서 그 금전 지출이 낭비냐 아니냐는 것을 분류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 것을 결정하려고 하는데 필요한 모든 금전 지출의 기준은 그것이 전체 인간생활을 증진하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이바지하느냐의 여부-즉, 그것이 개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된 생활과정을 촉진하느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제작본능의 판정에 대한 기초이며 그 본능은 경제적 진리 또는 타당성에 대한 최고 재판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냉정한 상식에 의해 행해지는 판정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개인적 습관과 사회관습의 현존상태 하에서 일정한 금전 지출이 특정 소비자의 만족이나 또는 정신적 평화에 기여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습득한 취미와 관습 및 인습적인 체면유지의 규범은 차치하고라도 그 결과가 안락과 충족한 생활에 실리를 주느냐의 여부에 있는 것이다. 습관적인 금전 지출은 그 습관이 차별적인 금전상의 비교를 이루는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낭비의 항목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이러한 금전적 명성의 원칙이나 또는 상대적인 경제적 성공의 후원을 받지 않고서는 습관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한 그렇다.
일정한 지출의 대상이 과시적 낭비의 범주에 들어가려면 절대적으로 허비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필요치 않다. 한 물건은 유용성과 허비성을 모두 갖고 있을지도 모르며 그것이 소비자에게 주는 효용도 여러 가지 비율로 유용성과 낭비성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소비재 뿐 아니라 생산재까지도 그 효용의 구성요소로서 대체로 이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소비재는 낭비적 요소가 우세하고 생산적 품목에는 이와 반대로 되어 있다. 얼핏 보면 오직 순수한 허식에만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품목에 있어서 조차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용한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항상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인력으로 만든 조악한 품목은 물론 어떤 특수한 산업공정을 위해 만든 특수기계공구에 까지도 과시적 낭비 또는 적어도 최소한의 허식적 습관의 흔적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재화나 용역의 주요목적이나 요소가 아무리 뚜렷한 과시적 낭비에 있다 할지라도 그 효용에는 유용한 목적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유용한 생산물은 그 자체의 가치에 있어서 낭비의 요소와는 직접 또는 간접적인 관계도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만 그 위험성이 보다 적다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