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이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정확히 깨닫게 해주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보입니까? 내 죄를 위해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비로소 해결 받을 수 있는 내 큰 죄가 보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말해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
예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베드로의 이 고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순간, 영의 눈이 뜨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이 열려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표중입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깨달은 성도가 경험하는 첫 번째 은혜는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인지 전율에 휩싸일 만큼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게 되면 통회 자복하는 역사부터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만나주시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 죄악이 내눈에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한번 진단해보십시오. 당신은 진짜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다음 질문에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당신 주변에서 당신보다 더 악질인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 터질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다들 그럴싸하고 멀쩡하게 보여도 그 사람의 과거를 들추고 파헤쳐보면 정말 기막힐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대 앞에서 그 죄들이 낱낱이 공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악과 허물이 다 씻음을 받아 깨끗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죄 사함의 은혜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 믿었어도 받은 복은 별로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신다면 어떤 심정이실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입니다. 결국 죄의 문제가 모든 문제의 해결 입니다. 저주가 해결되었고, 지옥의 두려움이 사라졌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그 죄가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성도는 이제 십자가의 또 다른 능력을 경험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용납하기 힘든 나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죄는 분명히 내가 지었는데 죄값을 자신의 아들에게 담당 시키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시다니 이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5,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아십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죄를 용납하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지금 철저하게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늘 승리와 풍성한 축복으로 가득하리라 기대하건만, 우리는 이런 난감한 사태나 결핍의 상황이 삶의 한가운데 벌어지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분명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먼저 가나혼인 잔칫집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잔칫집에 초청을 받아 가셨지만 그곳에서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저 초대받은 자리에 앉아 내오는 음식을 대접받으며 계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하인들에게는 "이분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항아리에 물을 떠다 날랐더니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닷가에 계신 것도 모른 채 자기 생각대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따랐을 때 고기가 153마리나 잡혀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에게 명령하신 분이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예수님을 단지 손님으로 모셨다면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처럼 우리 삶의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우리에게 명하시는 위치가 되고 우리가 순종하기 시작할 때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멀리 바닷가에 세워두지 말고, 예수님을 내 인생 한가운데서 직접 명령하시는 자리로 모시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을 경험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열심 있는 교인이라는 분들이 오히려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개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2)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둘 다 빌립보교회의 살림을 도맡아 했던 충성스러운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고 화해의 특별 당부를 남겼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서로 자기의 충성만이 옳다고 믿고 자기 방식만 선하다고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모든 일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상대를 용납하거나 양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뜻마저 꺾고 마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나, 자아가 펄펄 살아 있다는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사기 21장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자아'가 벌이는 일입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태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이 소신 있고 줏대 있는 당당한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죄'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생각을 옳다고 여기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지금쯤은 당신도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만큼밖에 살지 못한 것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이고,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몇 번 되지 않지만 주께 순종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주님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나는 분명히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실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자기 소리를 낮추고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옳다 생각한 그것이 정말 성령님의 역사라면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옳다고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겸손히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교회 중직이 되어야 그 교회가 주님이 다스릴 수 있는 교회가 됩니다.
어떤 원로목사님 한분이 은퇴하신 다음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이 평생 목회하면서 자신의 집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고, 자기 땅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지만 자기 성질 뽑아 바친 교인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웃으며 가볍게 하신 말씀이지만 참으로 새겨들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바쳐야 할 것은 나의 자아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분명히 예수님이 계신데도 아무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생각, 내 고집, 내 성질에 예수님이 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내 안에 주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고 무감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6.7)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못 박혔다고, 죽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 생명 안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와 나를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곧 나요, 내가 곧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온갖 불의함과 악함과 음란함과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강한 마음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내 힘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자아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노력으로 죽으려 하는 사람은 죽은 척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곁에 와서 건드려보면, 화들짝 일어나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몇 번은 참습니다. 그러다가 폭발하니까 더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도(道)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죽으려고 하니까 속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믿음으로 취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어야 비로소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나 자신의 감정, 생각, 계획, 판단이 죽으면 거기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은 표시가 납니다. 지금 내 옆에 시체가 누워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가 시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는 코로 숨을 쉬지 않고 가슴에 손을 대보아도 심장이 뛰지 않습니다. 주위의 어떤 자극과 변화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아가 죽은 사람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어떤 말이나 평가에도 죽었고, 칭찬에도 죽은 사람이 진짜 죽은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실히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믿음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믿음으로 사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염려에 대처하는 태도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입니다.
우리는 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염려는 노력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염려보다 더 큰 것을 믿게 될 때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면 염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듯이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이를 가리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갖고 싶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지고 싶어 하면서도 이미 자신 안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시고 믿음을 완성시키시는 분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돈, 명예, 권력, 건강, 일 등을 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고 절대적인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죽음 앞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마땅히 소망해왔던 것이어야 합니다.
*이분은 좋은 직장과 직위를 유지하며 열심히 살고 있으며, 모든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명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도래할 주님의 나라를 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전(vision)을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이란 곧 주님의 나라를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마디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의 대전제입니다. 이 대전제에 이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도래할 주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세의 징조들을 설명해주시며 걱정하신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성도가 ‘준비되지 않은 채'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입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사람들은 마치 먹고 마시고, 학교 가고, 취업하고, 집 사고, 차 사고, 시집 장가 가려고 태어난 것처럼 삽니다. 이 일로 염려하고 애쓰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삽니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때'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흉악한 죄를 짓지 않고 비교적 정직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도덕적으로 살고 있을지 몰라도 어쩌면 세상에 푹 빠져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더 심각하게 염려하고 계십니다.
소망이 있는 삶이란 주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그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며 사는 삶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대해 눈뜨지 못한 사람은 그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 대해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참된 소망인 셈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4)
우리는 흔히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조건을 믿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조건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값없이 받는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구원 받는 데 있어서 믿음은 필수이지만 사랑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믿어지지 않아!" 하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큰일이네, 어떻게 저런 목사가 있을까?" 하고 아마 큰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 미워 죽겠어, 용서가 안돼, 반드시 갚아줄 거야!" 하면 "아휴, 얼마나 힘들어요? 하지만 용서하려고 노력해보세요" 하고 넘어갑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 용서하고 다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천국은 들어가게 되어 있고, 사랑하지 못한 것은 천국 들어갈 때, 책망만 좀 듣는다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랑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이 미워지고 싫어져도 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자녀로 살아주신 주님의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사랑 때문에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요한은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라는 말을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라고 바꿔 표현한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동의어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는 이를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눈이 생겼지만 이로써 그들은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판단력과 분별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지 우리는 아주 잘 분석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명석하더라도 그것을 사랑으로 감싸고 소화하지 못하면 오히려 교회를 망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똑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옳고 그른 것만 잘 따지는 것은 죄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안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조차 사랑하고 받아주셨지만, 당시에 가장 경건하고 의롭게 산다는 바리새인은 저주하고 버리신 까닭은, 그들이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만 할 뿐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