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가운데 주님의 뜻 찾기
죠셉 엠 에스퍼 신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우리가 천국과 직접 연결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전화가 연결되어 직접 전화를 걸어 하느님께 물어 볼 수 있다면…, “주님 제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혹은 “아버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 상황을 참아야 하는 건가요?” 혹은 “정말 당신이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는데, 좀 알려주시겠어요? ”
이와 같은 기록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구약의 모세는 하느님과 직접 이야기 하곤 했다. Face-face.123 (123 출애굽기 33:11)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언제든지 예수님께 여쭤볼 수 있었다. 많은 신비가나 목격증인들은 수 세기를 걸쳐 예수님이나 혹은 성인들 중 한사람과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수백, 아니 수천명의 사람들이 천상과 연결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안내와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고서 직접 그분으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다면 인생은 너무도 쉬울 것 같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강력한 바람으로, 지진으로 혹은 불이 타오르 듯 들려오길 바라며 귀를 기울이지만, 대신 아주 작은 속삭임만이 들려올 뿐이다. (열왕기 1 19:11-13)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로 희미하던지 혼란스럽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야 하고 어떤 길을 따르길 원하시는지 알아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과정을 우리는 ‘식별’ 이라고 부른다. 식별은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중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죄는 확실히 피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 식별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거나, 최소한 평범한 두가지 혹은 여러가지 방향 중에 한가지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성인들도 자주 우리들과 같이 많은 식별을 하여야 했다.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한 성인들도 있다. 12세기 경, 베르셀리의 성 윌리엄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려 하였지만, 그의 친구 마테라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서 다른 계획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말렸다. 친구 요한의 말을 무시하고 윌리엄은 길을 떠났지만 도중에 강도를 만났다. 요한이 옳았다는 것을 싸인으로 받아들이고 윌리엄은 진정한 부르심을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 그는 한동안 은수자로 지내다가 후에 수도원장이 되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때로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그러나 대개는 매우 단순하고 희미한 방법으로서 알게 된다. 15세기 주교 알레스의 성 힐러리의 예를 보자. 그는 잘 쌓아온 세상적으로 성공한 커리어와, 그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성 호노라투스가 강력하게 제안하는 종교적 부르심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의 삶 중에 이 시기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적 유혹이 나를 가로 막았다. 나의 의지는 앞 뒤로 흔들리며 때로는 부르심에 응하다가 때로는 거절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승리하였다.” 성 힐러리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를 받아들여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친구 호노라투스를 따라 종교적인 삶으로 들어간다.
많은 성인들도 여러 길 중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 성인들의 거룩함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식별을 하고 난 후에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완전히 자신을 여는 것에 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불리워졌다. 성 암브로시오는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을 가늠합니다.” 라고 말하였고 성 바실은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하느님께 묻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갈망하는 사람의 의무이다.” 라고 하였다.
리마의 성 로즈는 “하느님께 진지하게 의견을 물을 때, 그분은 명쾌한 답을 주신다.” 라고 하였다. – 그러나 어떤 형태로 주시는가? 성 요한 비얀네는 “하느님은 선한 영감으로 쉬지 않고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명확한 빛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하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 많은 기도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고, 많은 묵상을 통해 조언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십자가의 요한은 말한다. 또한 성 테오판 베나르도가 동생에게 “단순하게 기도하라.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도록 기도하여라. 그러면 너의 길이 명확해질 것이다. 그때 거룩한 자비에 의해 너의 마음에 채워지는 영감을 따라야 한다.” 라고 말했듯이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위대한 천재적인 영성가 중 한사람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주요 관심사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적 식별의 법칙”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매우 단순한 것으로서,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오차 없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면 우리는 완전하게, 할 수 있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드러냄은 상대적으로 흔치 않다. 우리는 대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은총을 사용하여 적절한 행동 방향을 식별할 것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선과 악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에 있어 좋은 방향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두가지 혹은 그 이상 중에 선택하는 것을 말하며, 이 직업에 머물러 있는가 혹은 다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느냐 같은 것들이다.)
이 선택에 있어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지성, 감정, 상상력등을 이용할 수 있다.
지성: 상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라. 각 행동 방향에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불이익인지? 이익에 있어, 한쪽의 선택이 다른 선택들을 능가하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결정이 최선으로 보이는가?
감정: 각 가능성을 고려할 때 어떤 감정이 생기는가? 거기에 강한 바램같은 느낌이나 흥분이 어떤 한 곳(어쩌면 선택될 가능성이 많은 곳)에 느껴지는가? 아니면 메마르고 기쁘지 않은 감정이 다른 것들(이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에게 드는가?
상상력: 누군가가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당신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다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충고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죽음의 침상에서 지난날 하였던 행동과 선택을 되돌이켜 본다면, 그리고 곧 하느님과 함께 그것을 보게 될 것을 상상한다면 어떤 결정 –그런 관점에서– 을 하겠는가?
성 이냐시오는 이 과정을 하나 둘 지나면서, 한가지 행동 방향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깊은 기도와 묵상을 하고 난 후에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성 이냐시오는, 기도로서 한번 결정을 한 후에 하느님께 그것을 봉헌하고 그 결과에 대해 내적 평화를 느끼고 나서도 우리는 두번째 생각을 하게 될 경우가 있다고 경고한다. – 특히 의심, 불안, 걱정, 유혹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을 그는 메마름이라고 부른다. 꽤 많은 경우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감정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결정을 하고 나면 우리로 하여금 화가 나고 단념하게 만드려고 시도한다. 성 이냐시오는 이 메마름을 느끼는 동안은 우리의 마음을 결코 바꾸지 말 것을 강조한다. (혹은 처음부터 다시 결정하는것) 어떤 의심이나 재고하려는 생각에 대해 우리의 반응은 “주님, 이 결정을 바꾸기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 그러나 지금 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의 현존에서 완전히 평화를 느낄 때 만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겸손하고 솔직하게 따른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뻐하실 것이고 그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확신할 수 있다.
CATHOLIC EXCHANGE 에서
http://catholicexchange.com/177649
(역: WISDOM)
http://blog.daum.net/sophiay/69
첫댓글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하느님께 묻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갈망하는 사람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