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다리의 역습을 기대하며
사실, 지난 여름에 공부방 권진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수락하고는 바로 아차 했었다. ‘괜히 맡았어~ 괜히 맡았어~’를 몇 번 속으로 되뇌었다. 꼼짝하기를 싫어해서 무엇이든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하는, 그래서 누가 뭘 부탁하면 일단 거절부터하고 보는 나의 관성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낚인 것은 분명 그분의 뜻이라고 볼 수밖에 없겠다.
사실, 자백하건대 나는 일본어도 못하고 일본불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문외한이다. 불교학을 전공하면서 신수대장경과 몇 가지 사전을 참고해본 것만으로 일본에 대해 고맙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일본불교에 대한 내 태도의 전부다. 고작 이런 밑천으로 일본불교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권진을 맡았으니 ‘무식이 용맹’이란 말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또 하나 자백하자면 권진勸進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 봤다. 찾아보니 절 안에서 특정한 직책(行基같이 대단한 분이 동대사 권진을 맡은 적이 있다)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 전에 단어의 뜻은 (보살이) 행자, 또는 중생을 나아가도록 권한다는 뜻이란다. ‘악을 버리도록 권하여 열반의 도로 나아가게 한다.’는 등의 훌륭한 용례들이 눈에 띄었다. 권진의 뜻을 알고 나서 나를 돌아보니 그 무게에 짖눌려 부담이 백배가 되었다. ‘장님이 장님 끌고 간다.’는 말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아 참, 또 하나 누설하자면 나는 누구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다. 사실이 이런지라 누가 봐도, 아니 우선 내가 봐도 권진을 하기에는 골고루 부족한 사람이다. 이렇게 권진을 맡는다는 것이 내게는 일종의 모험이어서 시작하는 마음이 불안했다.
교재는 김호성 선생님과 상의하여 『삼국불법전통연기三国佛法傳統緣起』로 정했다. 14c초에 대저술가 응연凝然이 지은 것으로 인도·중국·일본에서의 불교 전래를 학파·종파·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한 일종의 불교통사이다. 이 책이 나오기 수 세기 전부터 각 종파에서 전래기를 만들었으므로 응연이 그것들을 참고해서 종합해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불교사개설로 쓰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불교의 역사를 대접하는 일본 사람들의 태도와 당시 응연 프로덕션의 규모에 경의를 표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완전 한문으로 되어 있고 문체도 딱딱한 편이라 이것을 공부하겠다고 오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정말로 없으면 발 빼기에 좋은 핑계가 되니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스터디 하기에 적당한 예닐곱 명이 모였다. 여름에 시작하여 겨울이 되는 동안 멤버가 바뀌고 줄고 하여 현재 권진을 포함해서 네 명이 공부한다. 오붓하고 화목하고 재미가 있다. 인원이 적을수록 발표할 기회가 많아지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무거나 묻고 답하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 유리하다.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발표하고, 권진이 구문을 설명하면서 틀린 곳을 바로잡고, 교학적 개념이나 역사적 사항을 설명해 준다.
멤버들의 한문실력은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초보 수준이다. 더듬더듬 새겨나가는 것을 보다 못해 바로 끊고 정정해주는 때가 더러 있다. 그러고는 또 아차 한다. 서당에 다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의 스승은 내가 더듬거릴 때, 틀린 해석을 스스로 고쳐 새길 때까지 하품을 참아가면서 기다려주셨다. 틀린채로 다음 대목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그때 잠깐, ‘그렇게 생각하냐?’ 질문 하나 던져놓고 또 기다리셨다. 참고로 나의 스승은, 명석함의 개인차는 차치하고라도 어린 시절부터 공자왈 맹자왈 하셨던, 뼈속에 한문 DNA를 장착하신 분이다. 버벅거리는 제자를 참고 기다려 주신 그 스승을, 내가 이제 권진을 하면서 돌아보면 대단한 산파라 아니할 수 없다. 仰之彌高 鑽之彌堅을 떠올리며 새삼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지난 시간에 한 멤버가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님, 이제까지는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였는데 가끔은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가 돼요.”라고. 그 말 듣고 세포 하나하나가 기쁨에 떨었다. 게다가 가장 더듬거리는 친구가 한 말이었기 때문에 기쁨이 더 컸다. ‘그래, 앞으로 짧은 다리의 역습을 기대한다.’
부족한 권진을 믿고 바쁜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러 오는 멤버들이 심하게 반갑다. 매번 향기로운 차와 떡과 고구마 등을 가져 와서 공양해주시는 멤버께도 감사를 드린다. 권진을 해보니 이 팀에서 가장 덕을 보는 사람은 권진이다. 조금이나마 게으름을 떨칠 수 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아는 것을 전달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고, 안 좋은 자신의 성질과 행동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사전에 권진이란, ‘(남에게) 권하면서 (자신이) 나아가는 자리’다.
삼국불법전통연기 권진 이 인 혜
첫댓글 선생님,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는 28일날은 못 오신다니, 한번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뇨, 아뇨, 인사드리러 오신다니요. 제가 가겠습니다. 졌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