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015년7월1~2일
제주도 서귀포다녀와서!
한라산3(漢拏山三)
동물상은 분포 구계상 구북구(舊北區) 중 북부중국아계의 한국구(韓國區)
에 속한다. 제주도는 대륙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대성과
열대성이 섞여 서식한다. 예를 들면, 평지에는 아열대성의 맹꽁이와 난대
성의 청개구리가 서식하며, 중복 삼림지대에는 북방산개구리가 살고 있고
산정의 백록담 연안에는 무당개구리가 있다. 북방산개구리와 무당개구리는
모두 북방분자이며, 특히 무당개구리는 중국 윈난성(雲南省)의 고지와 한
라산 지대가 분포상 남한계선을 형성한다. 곤충류에서도 한대성인 산굴뚝나
비와 아열대성인 암붉은오색나비·남방공작나비 등이 함께 서식한다. 제주도
의 동물상은 곤충류 1,602종(제주도 특산 12종 포함), 양서·파충류 17종
, 조류 240종, 포유류 19종 등이다. 특산종으로는 모주둥이노린재·제주양
코스커딱정벌레·제주풍뎅이·제주은주둥이벌참위영벌 등이 있다. 포유류로는
맹수는 없으나 노루가 많고 제주족제비가 서식한다. 조류로는 팔색조가 번식
하고 제주딱다구리·꿩 등이 많다. 산지 동물들 가운데 멧돼지·대륙사슴은 전
멸하였고 큰노루·살쾡이·원앙기러기·두루미·흑두루미·재두루미·무당개구리
등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빌레못동굴유적에서 긁개·첨기·홈날
석기·돌날 등의 타제석기와 갈색곰·순록 등의 화석과 뼈가 발견되었고, 조천읍
북촌리유적에서 삼각형 점렬(點列)무늬토기와 원형 점렬무늬토기가 발견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기시대의 무문토기는
전역에서 발견되며, 고인돌·옹관묘·석곽묘·공렬토기(孔列土器) 등도 발견된다.
제주도의 삼성신화(三姓神話)에 의하면 고(高)·양(良)·부(夫) 3신이 모흥혈
(毛興穴, 삼성혈, 사적 제134호)에서 나와 자손을 번창하게 하였으며, 그 뒤
고을나(高乙那)의 15세 손이 신라에 내조(來朝)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는 삼별초(三別抄)가 여몽연합군에 밀려 들어와 분전하다가 항파두리(缸坡頭里)
에서 패하였다. 그 뒤 원나라는 1276년(충렬왕 2)에 몽고말 160필을 들여와
성산읍 수산평(水山坪)에 방목하였고, 말 사육의 전문가인 목호(牧胡)를 파견
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제주도의 목장은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성종 때에
100개로 정리되었다. 이 지역은 자연경관과 식물에 관련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
은 많으나 사적문화재는 빈약하다. 사찰로는 관음사(觀音寺)·천왕사(天王寺)·
산방산사(山房山寺) 등이 있고, 성읍(城邑)에는 향교와 성지(城址)·현청사·돌
하루방 등이 있다. 제주도민들은 11세기 초에 두 차례 있었던 한라산의 화산 폭발
로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러한 한라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화산 폭발이 있을 때마다 동굴에 숨거나 잠시 테우(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하였을
지언정 그들 스스로 이곳에서의 삶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바람 많고 재난 많은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기는 하였으나 한라산이 곧 삶의
터전으로 한라산없는 섬 생활이란 생각지도 못하였다. 더욱이 태풍과 가뭄과
풍랑은 제주도민들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는 재해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여건에 의해서도 끊일 줄 몰랐다. 몽고
의 야만적인 지배생활이 그랬으며, 근세에는 일부 파견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림
을 받았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이 처하였던 이러한 악조건은 오히려 이들에게 내핍
과 인고의 정신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타고난 강인함과 근면성
앞에는 어떤 도전도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산(靈山)인 한라산은 척박한 땅
을 주었지만, 정직하고 순박하며 의롭게 살면 마음이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
쳐 주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삼무정신(三無精神)이다. 삼무란 도둑이 없고
(盜無), 대문이 없으며(大門無), 거지가 없다(乞無)는 것을 의미한다. 도무는
정의의 정신을 일컫는 말이고, 대문무는 상호 신뢰의 정신을 의미하며, 걸무는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근면 정신을 가리
키는 말이다. 이렇게 제주도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켜져 온 미풍양속인 삼무정신,
즉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은 새마을정신의 모체가 되어 국민 모두의 정신으로 승화
되는 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한라산이 준 인고의 정신은 오늘의 풍요로운 제주를
일구는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우리나라 서남쪽의 태평양에 자리한 화산도인 제주도와 한라산은 빼어난 자연경관
과 독특한 풍물을 빚어냄으로써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관광지로 부상하였다.
한라산은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에 솟아나 삼라만상이 명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태풍과 전쟁 및 굶주림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원나라가 고려에 침입하
였을 때 삼별초를 이끌고 온 김통정(金通精)은 항파두리 전투에서 패하고 붉은오름
의 싸움에서 전우들을 모두 잃자 산 위로 올라가 비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에는 유난히도 민란이 많았다. 1168년(의종 22)의 양수
(良守)의 난을 비롯하여 모두 20여 차례의 민란이 있었으며, 왜구의 침입도
빈번하였다. 이처럼 한라산은 영광보다는 분노를 더 많이 먹고 살았으면서도,
천지의 대주재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고 민족의 산으로서 민족과 함께 숨결을
같이 해왔다.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은 내륙 지방에 대한 바람막이 구실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영남과 호남의 곡창지대는 한라산이 태풍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한라산이 없다면 이 지역의 벼농사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한라산은 이처럼 태풍의 길목에 우뚝 서서 내륙 지방을
지켜주는 수문장 구실까지 해오고 있다.
문학에 투영된 한라산의 모습은 다양하다. 흔히 신비로움과 인고(忍苦)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하나, 희망·평화·사랑의 상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한라산은 이미 제주특별자치도 사람들만의 산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한 민족의 산으로 정착되었다. 한라산은 일찍이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꼽힐 만큼 명산이다. 예로부터 많은 선인
(先人)들이 힘든 산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며, 산의 신비경을
기행문 등을 통하여 스스럼없이 찬미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닌 듯
하다. 더욱이 백록과 선인(仙人) 한라산옹의 전설을 지닌 이 산의 신비경
은 오늘날에도 시·소설 등을 통하여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한라산을 기술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로 김상헌(金尙憲)의 『남항일지(南航日誌)』
를 꼽는다. 그는 1601년 (선조 34) 9월 한라산에 올라 산신에게 치제
(致祭)를 올리면서 “병이 없고 곡식이 잘 자라며 축산이 번창하고 읍(邑)이
편안한 것은 곧 한라산신의 덕”이라고 말하였다. 특히, 그는 “금강산과
묘향산은 이름만 높을 뿐, 한라산의 기이하고 수려함에는 따라오지 못하리라.
”고 하여 영산으로서뿐만 아니라 장엄함에서도 백두산 다음
가는 명산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서귀포 소식
정월산:작사김종유:작곡최정자:노래
칠십리 서귀포에 동백꽃 피어도
떠나간 그 사람은 오신단 소식 없네
부풀은 가슴에 상처 안은 채 기다려 봐도
온다던 그 날짜는 멀리만 하네
♥
*은물결 출렁이는 외로운 서귀포
떠나간 그 사람을 손꼽아 기다리며
부두에 연락선 닿을 때마다 나가보건만
무정한 그 사람은 오시지 않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