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年 木版本으로 刊行된 李瑀 著 玉山詩稿 (單)
卷頭에 ‘崇禎甲寅(1674)...宋時烈序’ 序文, 卷末에 ‘庚申(1680)...東溟謹識’ 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우(1542-1609)는 조선 중기 『설중매죽도』, 『수과초충도』, 『포도도』 등을 그린 서화가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 신사임당의 막내아들로 율곡 이이의 아우이다.
■ 옥산시고 서(玉山詩稿書)
창작연대 : 1680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옥산(玉山) 이공(李公,1542~1609)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노선생(老先生)의 막내 아우[季弟]로 휘(諱)는 우(瑀)이고 자는 계헌(季獻)이다. 율곡 선생이 예(禮)로 집안을 다스림으로써 공(公)이 그의 영향을 받아 어른들을 받들어 아랫사람을 어솔(御率)하는 데 있어 매우 화락하여 집안을 평온하게 잘 다스렸는데, 문(文)과 질(質)이 다 갖추어져서 장공예(張公藝)와 양춘(楊椿)ㆍ양진(楊津)의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율곡 선생은 매양 한가할 때마다 위로 서모(庶母) 및 백씨(伯氏 큰형)와 중씨(仲氏 둘째 형)를 모시고 자질(子姪)들이 빙 둘러 시좌(侍坐)하고 있는 가운데 반드시 공에게 거문고를 타면서 영가(詠歌)하도록 명하는데, 절주(節族 음악의 곡절(曲節)과 변화)가 아름답고 음조(音調)가 맑고 씩씩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저절로 심기(心氣)가 화평해져서 원망과 욕심이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율곡 선생은 항상, 계헌(季獻)의 기질(氣質)은 나와는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도하였다.
그리고 필법(筆法)이 또 정밀하고 호건(豪健)하여 마치 용사(龍蛇)가 날아 움직이는 듯하였으므로 그의 작품을 얻은 사람 들은 마치수주(隋珠)나 화벽(和璧)보다 더 귀중하게 여겼다. 이로 인해 마침내 선조(宣祖)의 권장(勸奬)을 받았었는데, 시(詩)로 말하면 공 스스로도 그리 자신을 갖지 않았고 또한 세상에 그리 칭도되지도 않았다. 대체로 그가 죽고 나서 이리저리 흩어져 없어진 것이 십중팔구나 되어 버렸다.
지금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있는 동명(東溟) 이백종(李百宗)이 바로 공의 증손(曾孫)인데, 공의 시를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약간편(若干篇)을 얻어서 장차 간행(刊行)하려고 한다. 내가 일찍이 그의 시를 읽어 보았는데, 뜻이 조용하고 한가하며, 말의 운치(韻致)가 금옥(金玉)의 소리처럼 아름다워서 가끔 훌륭한 시가(詩家)들의 경지에 이른 것들도 있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부스러진 한 조각의 금(金)이나 옥(玉)과 같은 것으로 적을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대체로 논하건대, 공이 세상에 칭도되지 않은 것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그 세상에 칭도된 필법(筆法)이야말로 반드시 깊은 경지(境地)에 이르렀을 것이며, 노선생(老先生 이이를 가리킴)께서 칭도한 기질(氣質)은 또 필법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이 시고(詩稿)를 보는 사람들이 차례로 소급해 보면 또한 공의 인품의 대개를 거의 알 수 있을 것이다. 숭정 갑인년 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