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보월성인
만공스님과 염화미소 나눈 ‘첫 전법제자’
경허스님 법맥을 이은 만공스님의 첫 법제자인 보월성인(寶月性印,1884~1924)스님은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입적한 탓에 뚜렷한 행장이 남아있지 않다. 보월스님 법맥은 금오태전(金烏太田,1896~1968)스님과 동산혜일(東山慧日)스님으로 이어져 한국불교 중흥의 꽃을 피웠다. 동산(덕숭총림 수덕사). 설정(덕숭총림 수좌).월서(금오사상연구소 이사장) 스님의 증언과 각종 자료를 중심으로 보월스님 행장과 수행일화를 조명했다.
<사진설명> 보월스님 진영.
속리산 복천암 월성스님은 “보월스님에 대해 아는 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셨다”면서 “큰스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 여러 사람의 자문을 구해 진영을 모시게 됐다”고 말했다. 사진제공=월성스님
만공스님과 염화미소 나눈 ‘첫 전법제자’
예산 보덕사 조실로 주석하며 납자 지도
금오태전.동산혜일 스님에게 법맥 계승
○…만공스님의 속가 형님으로 출가한 대은스님이 있었다. 대은스님은 충남 홍성에 있는 월산암(지금의 산혜암)에서 보월스님을 만났다. 이 무렵 보월스님은 발길 닿는대로 마을을 떠돌며 걸식(乞食)하는 탁발승(托鉢僧)으로 지내고 있었다. 대은스님은 보월스님에게 “동냥중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구나. 출가했으면 공부하고 참선해야 한다”며 따끔하게 경책을 했다. 그 말은 듣고 그동안의 탁발 생활을 돌아 본 보월스님은 대은스님의 권유로 덕숭산 정혜사에 주석하고 있는 만공스님을 찾아갔다.
○…만공스님 회상에 들어간 보월스님은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 수행을 하면서 동시에 절 입구에 있는 보리방아를 찧는 소임을 맡았다. 치열하게 정진하기를 거듭한 보월스님은 마침내 만공스님에게 법을 인가받고 법제자가 됐다. 만공스님이 보월스님에게 전법한 것은 세존응화(世尊應化) 2940년 12월로 서기로 치면 1913년 이었다. 이때 보월스님의 세수는 29세였다.
○…만공스님 문하에서 정진하던 무렵, 당시는 제방의 수좌들이 서신을 통해 선문답을 주고 받는 전통이 있었다. 수좌들이 정혜사로 보내온 질문이나 정진의 내용에 대해 만공스님이 답을 하기도했다.
<사진설명> 만공스님이 보월스님에게 준 전법게.
그러던 어느해 그날도 만공스님이 보월스님에게 서신을 건네며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스승의 편지를 받아든 보월스님은 밖으로 나와 아무말 없이 서신을 태워버렸다. 그 모습을 본 만공스님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자네가 나를 살렸네”라며 칭찬을 했다고 한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 염화미소를 나누었던 것이다.
○…만공스님에게 ‘법의 인가’를 받았지만, 보월스님은 법상(法床)에는 단 한차례도 오르지 않았다. 당신의 경지가 스승을 따라 갈수 없다는 겸손함과 함께 법은사 만공스님이 계신데 법상에 오를 수 없다는 효심(孝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같은 뜻을 알게 된 만공스님은 제자가 마음껏 법을 펼 수 있도록 예산 보덕사 ‘조실’로 납자들을 맞이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보월스님은 보덕사에서도 오로지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실천하며 더욱 치열하게 공부했다. 금오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이 무렵이다. 금오스님 행장을 살피면 1923년 3월 보덕사에서 보월스님 회상에 들었다고 되어 있다.
○…<한암일발록>에는 ‘보월화상에게 보낸 답서’가 실려있다. 언제 보낸 것인지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지만 보월스님이 법숙(法叔, 사숙과 같은 말)인 한암스님에게 법에 대해 질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월스님은 한암스님에게 “옛날 발징화상(發徵和尙)은 아미타불을 염(念)하야 31인(人)이 육신보살(肉身菩薩)로 하늘에 올라갔는데, 올 동안거엔 무슨 상서가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이같은 질문에 한암스님은 “오늘 여기의 상서(祥瑞)는 지혜없는 이와는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 만일 스님이 물어주지 않았었던들 하마터면 묻힐 뻔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느해 여름 점심공양을 마치고 수좌들이 잠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다른해에 비해 유난히 매미소리가 시끄러웠다. 소리를 듣고 있던 만공스님이 수좌들에게 한마디 일렀다. “지금 매미소리가 나고 있는데, 저 소리를 잡아오면 수박 값을 받지 않고, 못 잡아 오면 수박 값 3전을 받겠다.” 수좌들이 저 마다 매미소리를 잡겠다고 나섰다.
<사진설명> 보덕사 전경
어떤 스님은 매미잡는 흉내를 하기고 하고, 다른 스님은 일원상을 그려 놓기도 했다. 선문답이 오고간 것이다. 하지만 만공스님이 원하는 답을 아무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보월스님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만공스님은 보월스님에게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 한뒤 “자네는 어떻게 매미소리를 잡아오겠는가”라고 했다. 보월스님은 그 자리에서 돈 3전을 만공스님께 꺼내 드렸다. 만공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자네가 내 뜻을 알았네”라고 했다. 보월스님과 만공스님이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근세의 대선지식 만공스님은 평생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은사 경허스님의 법구를 수습할 때와 제자 보월스님이 너무 일찍 세연(世緣)을 다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한 마음을 대중에게 보였다고 한다. 만공스님은 당시 3일간이나 공양을 들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보월스님을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만공스님은 보월스님의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제자를 대신하여 금오스님과 동산스님에게 전법게를 주었다. 이는 매우 드문 일로 만공스님이 보월스님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만공스님이 1925년 2월 보월스님을 대신하여 금오스님에게 내린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德崇山脈下(덕숭산맥하) 今付無文印(금부무문인)
寶月下桂樹(보월하계수) 金烏徹天飛(금오철천비)”
“덕숭산맥 아래 / 무늬없는 인(印)을 지금 전하노라 /
보월은 계수나무에서 내리고 /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날으네.”
만공스님이 보월스님을 대신하여 1945년 3월 동산스님게 내린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心法本如如(심법본여여) 化心無非法(화심무비법)
非法非心法(비법비심법) 爲付東山子(위부동산자)”
예산=이성수 기자
■ 서응스님 문집에 실린 한시 ■
“좋은 도반을 만났다”
초대 감찰원장을 지낸 문성스님의 은사 서응동호스님이 남긴 문집에 보월스님과 관련된 시 한편이 들어있다. ‘노상봉 보월사’라는 제목으로, 만행길에 나섰던 서응스님이 우연히 보월스님을 만난 기쁨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서응스님과 보월스님은 6세 차이로 두분의 관계는 좀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 서응스님은 보월스님을 양우(良友, 좋은 도반)라고 표현하고 있어 두 스님이 각별한 관계였음을 짐작케 한다. 다음은 서응스님 문집에 실린 노상봉보월사(路上逢寶月師)라는 제목의 시이다.〈사진〉
“峽程逢良友(협정봉양우) 相携訪□衆(상휴방□중)
足識秋來矣(족식추래의) 達前己菊花(달전기국화)”
서응스님은 이 시에서
“좋은 도반을 길에서 만났으며, 그를 만나니
마치 깊어가는 가을에 뜰앞에 국화를 보는 듯 하다”고 했다.
■ 행장 ■
보월스님의 행장은 뚜렷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구전되는 일화 등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1884년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보월스님의 속명과 구체적인 가족관계는 전하지 않는다. 스님은 충남 서산 운산면 태동리의 문수사 주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이때 법명이 성인(性印)이다.
호서 지방을 주유하며 탁발승으로 지내던 스님은 만공스님의 속가 형님인 대은스님을 만나 정혜사에 머물게 된다. 이때 보리방아 찧는 일을 하며 만공스님에게 선의 진수를 전해 받았고, 1913년 만공스님의 ‘첫번째 법제자’가 됐다. 당시 정혜사 방함록에도 보월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보월스님은 사리가 밝았으며, 점잖고 매우 신중했던 스님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정혜사에서 머물던 보월스님은 만공스님 권유로 예산 보덕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금오스님을 제자로 맞았다. 이때가 1923년이다. 따라서 스님은 191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보덕사에 주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월스님은 갑자기 입적하고 말았다. 이때 세수 40세에 불과했다.
만공스님은 애제자의 갑작스런 입적을 애통해 하며 3일간 공양을 끊었다고 한다.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덕숭산 전통에 따라 스님의 사리는 산하에 고루 나투었다. 보월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의 뜻에 따라 금오스님과 동산스님에게 이어졌다.스님의 진영은 그동안 법주사 진영각에 모셨는데, 진영을 직접 본 이가 없어 둥그런 원으로 표현해왔다. 최근 금오스님 제자인 월성스님(속리산 복천암)이 보월스님의 진영을 새롭게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