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9일 (마11 평생학교).hwp
2017년 2월 19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졸업예배 * 홍지훈 목사
마태복음 11:28-30
평생 학교
오늘은 교회학교 졸업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부모님들과 자녀들 모두 끝까지 함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각급학교들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졸업하면 좋은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졸업식이 끝나면, 입학할 때까지 아무 학교를 안 다니고 집에서 놀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그때 집에 있으니까 참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입학하기 몇 년 전에 시험 치르는 입시제도가 사라져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갈 때는 지역에 따라 배정을 받았습니다. 선배들 중에는 좋은 중학교 간다고 재수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지요. 중학교 가면 좋은 것이 교복을 입는다는 겁니다. 지금은 사라진 일제시대 교복형태인데, 앞가슴 주머니에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가득 꽂고 머리에 모자를 쓰고 다녔습니다. 형편이 따라 중학교에 못 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한 가지 싫은 것은 머리를 빡빡 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하고는 매우 다릅니다.
이번 우리 교회에서는 동주가 중학교에 갑니다. 그리고 지현, 하은, 선영, 문아가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제 곧이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복을 안 입어도 됩니다. 대학에 가든 아니면, 자기의 직업을 가지던 자기의 하루 일과표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생깁니다. 하지만 모두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곧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졸업식이라는 것을 했지만, 결국 새로 또 입학해야합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사회에 다시 편입합니다.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는 형준군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대부분 대학생활 내내 걱정은 취업입니다. 그래서 졸업을 미루고 또 미루는 대학생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계신 어른들도, 그리고 저도 모두 다 경험했던 것들인데, 지나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나는 과연 일하기 위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살기 위해서 일했는지?”하는 질문 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며 보람 있게 사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월급을 제때에 원하는 만큼 받고, 정해진 나이까지 근무하다 정년퇴임하면, 그것이 행복한 삶이 분명할까요? 정년퇴임하면 마치 직장을 졸업하고, 다시 새로운 세상에 입학하는 느낌이 들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한지 34년이 되었는데, 이제 동창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외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졸업을 하고 진학을 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원래는 “네 꿈을 펼쳐라!”,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을 먼저 해줘야하는데, 한 40년 뒤에나 벌어질 일을 이야기해서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을 너무 한 방향으로만 몰아대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꿈을 꾸고 길을 찾을 기회와 시간은 주지도 않고, 그저 시험 잘 보라고 다그쳐 놓고, “네 꿈을 펼치라!”고 하면, 꿈이 없는데 무엇을 펼치겠습니까? 교과서와 학원 문제집에 치여 사는 동안, 읽고 싶은 소설도 못보고, 만화책도 못보고, 영화도 못보고, 여행도 못하고, 취미생활도 못했는데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 것이 행복한지 어떻게 알까요?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 세대 가운데,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정말 열심히 살다가 그만 오십대 중반에 회사에서 퇴임을 한 가장은 아직 자녀를 독립시키지도 못했기에 퇴직금으로 덜컥 장사를 시작합니다. 해본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는 데 시작한 장사나 사업은 필히 망합니다. 그렇게 가진 퇴직금을 모두 까먹지요. 그런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나머지 삶은 낙담하고 비관하면서 겨우 살게 됩니다. 슬프고 불행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노장사상으로 유명한 장자는 “무위자연”을 주장합니다. 사전에 보면 무위자연이라, ⓵ 자연에 맡겨 덧없는 행동은 하지 않음. ②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자연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무기력한 삶일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힘들여 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고 받아들이는 것을 칭송하니까요. 그런 장자의 글에 내편과 외편이 있는데, 외편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을에 홍수가 났습니다. 이것을 추수(秋水)라고 합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엄청난 물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서 말해도 소용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자기가 사는 우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우물 속 개구리에게 하늘의 크기는 우물 크기와 같습니다. 뛰쳐나와 봐야 하늘의 크기를 알지요.
그 장자가 어느 날 혜자라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혜자는 재상의 벼슬을 가졌고, 장자는 무위자연 그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강가를 함께 산책하다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라네.”하고 장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혜자가 “자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가?”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가 이를 받아서 다시 말합니다. “허, 그러는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그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가 되면, 물가에 서서도 물고기의 즐거움을 느끼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秋水라는 단어에는 “맑은 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맑고 깨끗한 사람의 얼굴빛”이라는 뜻도 있지요. 제가 장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린 것은 장자처럼 자기 인생에는 <인생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인생철학을 가지고 살기도 어려웠습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兩班과 상놈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근대로 급격하게 변화되던 시기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해방과 함께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세대의 철학이 있다면 “살아남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양반이란 원 의미가 文班과 武班을 합하여 양반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벼슬을 하는 것이지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외무고시 나아가서는 모든 공무원 시험 등등 모두가 국가의 녹을 먹는 반열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여기에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도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이고 교육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온 세계와 소통이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은 배와 비행기 아니면 대륙으로 직접 갈 수 없지만, 언젠가 통일이 되면 목포에서부터 열차나 승용차를 타고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달려갈 날도 올 것입니다. 넓고 큰 물 秋水를 바라보면서, 내가 아닌 물고기의 마음까지도 헤아려 볼 줄 아는 안목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마태복음 11장에서 주님은 당신에게 오라고 부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불러 모읍니다. 이들은 자기의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대학가면 이제부터는 인생이 쉬울 것 같지만, 취직만 잘하면 인생이 다 펼 것 같지만,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모두 끝난 것 같지만, 인생은 죽는 날까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며 인도합니다. 때로는 후회하며, 때로는 염려하면서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하루하루를 새롭게 맞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불러서 쉬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자신 있게 세상 속에서 인생을 살다가 지치면 와서 기대어 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이 숨겨있습니다. 인생살이에서 지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삶에 지칠까요?
영국의 소설가인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tler, 1835-1902)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무지의 특징은 허영과 자만과 교만이다.” 세 단어를 그런대로 묶으면 <교만>으로 정리되는데, 즉 무지는 교만을 낳는다는 뜻이고, 교만한 사람은 사실 무지해서 그렇다는 뜻이 됩니다. 인생에서 지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 이렇게 살고 모르면서, 마냥 자신감에 넘쳐 스스로 교만한 줄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중에는 지치지 않지요. 앞만 보고 달려가니까요. 하지만 반드시 끝은 있습니다. 그때 한꺼번에 닥쳐오는 피로감과 상실감은 매우 큽니다.
사실 사람은 살면서 깨달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신중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자신의 무지를 벗겨가고 더 밝아진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자기의 인생을 더울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먼 욕망이 스스로를 함정(trap)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Name Trap인데, 자기 이름 날리려는 공명심의 함정이지요.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닭과 개를 잃으면 찾을 줄 알면서도 마음을 잃어버리면 찾을 줄 모른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사람이 배우는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는 것은 학력을 쌓으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에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내면을 가꾸기 위함입니다. <지식>을 쌓아 출세하려는 공부만 하는 것은 사람을 결국 <교만>에 이르게 하고, 이것은 또 다른 이름의 <무지>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학교에서는 쉼을 얻도록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승이신 주님께서 내세우시는 덕목이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는 영어로 gentle이고, 겸손은 영어로 humble입니다. 주님이 말합니다.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나는 마음이 매우 부드럽고 낮아질 줄 아는 마음이란다!”라는 듯입니다. 주님의 학교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온유하고 매우 겸손하여서 우리에게 쉼을 준다고 했는데, 음악의 쉼표 아시죠? 숨 쉬라는 표시입니다. 쉼은 바로 숨 쉬는 것입니다.
숨도 안 쉬고 달려가는 우리의 인생길의 상급여정에 우리 졸업생들은 이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축하합니다. 하지만 점점 더 숨쉬기 힘든 일들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학교의 평생교육원 학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교회학교 졸업예배를 빌어서 드리는 말이지만, 저와 우리 어른 교우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마음이 매우 부드럽고 자신을 낮추어 맞아주시는 선생님 품에서 숨고르기를 하며 평안을 느끼러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평생교육원 학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학교에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나면, 배울 것이 바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우리를 교만과 무지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그렇게 해방되고 나면 행복합니다. 그러면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고, 내 마음이 가출해서 방황하면 도로 찾아다 제자리에 둘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졸업예배를 드리는 청춘들, 공부하기 바빠도, 또 놀기 바빠도, 숨을 쉬러 평화목 마을을 찾아오십시오. 점점 더 무거워지는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다시 제자리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학교에는 졸업식이 없습니다. 언제나 반갑게 다시 맞아주시는 주님을 만나러 평생 우리는 찾아옵니다. 그렇게 힘을 얻어 여러분이 꾼 꿈을 펼쳐보십시오. 언제나 주님이 동행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