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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5 - 카롤링거(카롤루스) 왕조의 서프랑크 왕국이 프랑스로 발전할 토대가 되다!
게르만 민족의 프랑크족은 살리족· 리부아리족· 상프랑크족의 3부족으로 그 중에 살리족의
메로비스는 481년에 프랑크왕국을 세우니 메로빙거 왕조인데, 게르만족의 균분제에
따라 왕국을 아들이 분할상속해 서로 내전을 치루며 약화되자..... 귀족 중에 궁재의
세력이 강해져서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는 전 프랑크의 궁재 직위를 독차지 합니다.
751년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새 왕이 되니 카롤링거
(카롤루스) 왕조 프랑크인데.... 영지는 이탈리아 북쪽 (롬바르디아주), 브르타뉴 반도를
제외한 프랑스지역, 저지대 국가, 스위스 그리고 현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상속과 전쟁으로 동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으로 나뉩니다.
피핀 3세가 세우고 아들 카롤루스 대제가 확장한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은 이후 한 세대인
루트비히(루이 1세) 경건왕 까지만 유지되었으니.... 840년 루트비히 1세가 죽자
맏아들인 신성 로마제국 3대 황제 로타르 1세는 형제들의 왕국과 조카 피핀 2세의
아키텐까지 상속을 주장하고 나서니, 형제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둘째인 독일왕
루트비히 2세는 막내 서프랑크의 샤를(카를) 2세와 손잡고 큰형인 로타르 1세를 공격합니다.
니타르트 등도 대머리 샤를(카를) 2세를 도와 로타르 1세를 공격하니 로타르는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841년 6월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했고, 독일왕 루트비히 2세와
대머리 샤를 2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협정을 맺고 3대 황제 로타르에 대항하였으므로
로타르 1세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각 형제들은 왕국을 갖고 있었으니
로타르는 이탈리아를,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을, 대머리왕 샤를은 "프랑스" 를 소유했습니다.
843년 8월 11일 베르됭 조약(영어: Treaty of Verdun, 프랑스어: Traité de Verdun)은 프랑스
북부 베르됭에서 형제들이 만나 로타르는 제국의 중앙 부분인 로타링기아, 알사스,
부르군트(부르고뉴), 프로방스, 북부 이탈리아를 통합하여 중 프랑크 왕국으로 불리며
또한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직함을 가지되 형제들의 왕국은 오직 명목상으로 지배할 뿐입니다.
루트비히 2세 독일왕은 동쪽 부분을 차지하니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게르만 지역
의 왕위를 가지며 이를 동 프랑크 왕국(독일)으로 칭하고 대머리왕 샤를 2세(카를, 카롤루스)는
제국의 서쪽 지역(론강, 손강, 세르트트강 서쪽)을 차지하니 이 지역은 서 프랑크 왕국(프랑스)
으로 칭하며 피핀 2세는 프랑스 서남부 아키텐의 왕국을 차지하지만 샤를(카를) 2세의 지배아래 둔다.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3년간의 전쟁 중에 무려 10만명의 프랑크인 남성 군인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로타르(로타리우스) 1세는 이탈리아로 철수하였고 아들 루트비히(루도비코) 2세
를 공동 황제로 삼았으며,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왕국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세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맏아들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4대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위를, 둘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막내 샤를은 부르고뉴를 물려받았습니다.
루트비히 2세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자신에게 더 많은 영토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반발하였으니,
그는 삼촌인 루트비히 2세 독일왕과 연합하여 858년에 동생들과 또 다른 삼촌 대머리 샤를
2세의 영토를 공격했는데...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이혼을 도와주는 대가로 영토를 루트비히
2세에게 넘겼지만...... 프로방스의 샤를은 저항했고 삼촌 대머리 샤를 2세의 침입을 물리칩니다.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이혼 문제로 교황에다가 삼촌들과도 대립했고 863년 프로방스의 샤를이 죽자
영토는 독일왕 루트비히 2세에게로 넘어갔으며, 869년 로타르 2세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영토는 유일한 아들인 서자 위그를 제치고 다시 삼촌들에게 넘어갔는데 870년 독일
루트비히 2세와 서프랑크(프랑스) 샤를 2세는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를 나누어 가집니다.
메르센 조약으로 카를(샤를 마뉴) 대제가 세운 프랑크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으니 오늘날 서유럽
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모태가 탄생하였으며, 870년에 중프랑크의 루트비히(루도비코)
2세와 서프랑크의 샤를(카를) 2세는 메르센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분리됩니다.
샤를 2세 Charles II(대머리 카를)는 823년 루트비히 1세(루도비쿠스)와 둘째 부인 쥐디트 사이에 태어
났으니 모후 쥐디트가 왕국의 분할 상속을 요구했고 이는 다른 왕자들과의 심각한 내전으로 이어
졌는데, 840년에 루트비히(루이) 1세가 사망하자 샤를 2세는 루트비히 2세와 손을 잡고 로타르
1세를 압박해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분할해 서프랑키아(서프랑크, 프랑스) 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중프랑키아(이탈리아)의 분열과 왕위 계승 단절이 발생하자 그는 870년 동프랑크(독일)의
루트비히 2세와 메르센 조약을 맺고 로타링기아를 분할·점령하는데.... 876년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그를 계승해 신성로마제국 5대
황제에 오르기도 했으니 그의 서프랑키아(서프랑크) 왕국은 현재 프랑스의 원형을 이룹니다.
샤를 2세가 823년에 태어났을 때 루트비히(루이) 1세에게는 세명의 장성한 아들 로타르, 페팽,
루트비히 2세가 있었고 817년 7월에 반포한‘황제칙령’을 통해 이들에 대한 왕위 및 상속지
를 규정해 놓은 상태였는데, 이 당시 루트비히 1세의 기본적인 상속 기준은 로타르의 제위계승
과 다른 두 동생에 대한 종속적인 왕위 부여를 통해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쥐디트는 페팽과 루트비히 2세를 선동해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른 제국의 동등한 분할을 요구했고
이는 쥐디트와 로타르(로테르)를 두 축으로 한 내전으로 이어졌으니... 루트비히(루이) 1세는
넷째인 샤를 2세에게 영토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세 아들중 하나에게 약속된 영토를 건드릴
수 밖에 없었고 내전으로 비화되었으니..... 838년 둘째 아들 페팽이 사망하자 839년
샤를 2세는 비로소 페팽에게 약속된 제국 서부 서프랑크의 상속권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840년 6월 루트비히(루이) 1세가 사망하자 내전은 재개되는데 제국 전체를 상속받은 로타르
1세와 서부를 장악한 샤를 2세, 바바리아를 중심으로 동부를 장악한 루트비히 2세
사이의 삼파전으로 이어졌으니... 이때 루트비히 2세는 이복동생 샤를 2세와 동맹을
맺었으니 이는 로마 전통에 따라 제국의 통일적 계승을 주장하는 로타르 1세와 프랑크
전통에 따라 제국의 대등한 분할을 요구하는 루트비히 2세-샤를 2세 사이의 대립이 됩니다.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의 동맹군은 841년 부르고뉴를 손에 넣었고 842년 2월 14일 스트라스부르
에서 만나 각 지역의 언어로 상호불가침과 협력의 서약을 맹세하는데, 동프랑키아를 장악한
루트비히 2세는 동생 샤를 2세와 지지자들을 위해 고프랑스어(로망스어)로, 서프랑키아를
장악한 샤를 2세는 형 루트비히와 지지자들을 위해 고독일어로(튜튼어)로 동일 내용을
선언하니‘스트라스부르 서약’은 고프랑스어와 고독일어를 확인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문헌 입니다!
843년 로타르 1세는 무릎을 꿇으니 베르됭에서 만난 세 왕은 서프랑키아, 중프랑키아, 동프랑키아로
분할하기로 협의하였는데 루트비히 2세가 획득한 동프랑키아는 새롭게 프랑크 왕국에 편입된
곳이었고, 로타르 1세가 차지한 중프랑키아는 아헨과 로마를 포함하는 상징을 지녔으나
거주자의 내적 통합력이 취약한 곳이었으니... 중프랑키아는 언어적으로 고프랑스어와 고독일어로
나뉘고 역사적으로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롬바르디아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지역들 입니다.
이에 비해 샤를 2세가 획득한 서프랑키아(서프랑크)는 5세기말 클로비스 이래로 프랑크 왕국에
통합되어 동질화된 네우스트리아-아키텐 지역이었는데... 샤를 2세는 공식적으로 서프랑키아
왕위를 획득했고 그의 왕국은 현재 프랑스의 기원을 이루니, 848년 6월 오를레앙에서는 왕국
의 모든 대귀족들로 부터 서프랑키아의 왕으로 환호를 받음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왕위에 오른 치세 초기에 샤를 2세는 브르타뉴인 및 노르만인의 침입으로 한동안 큰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먼저 843년 부터 지속된 브르타뉴인(영국에서 엘글로~색슨족을 피해
집단으로 이주)들과의 전쟁은 결국 샤를마뉴(카를 대제, 초대 황제) 당시에 획득한
일부 영토를 되돌려 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콩피에뉴 조약(867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856년 부터 861년까지 서프랑키아 북부 및 서부 해안가는 ‘비킹가르’ 라고 불리는 무장한
노르만인(바이킹)의 산발적인 약탈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이러한 계속되는 침입에
대해 샤를 2세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무능력한 모습에 많은 수의 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동프랑키아(독일)의 루트비히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갑작스러운 루트비히 2세의 침공에 샤를 2세는 부르고뉴 지역으로 피신해 군대를 소집했으니
이때 샤를 2세의 가장 큰 원군이 된 이들은 성직자들이었는데, 샤를 2세는 어렸을 때
부터 성직자들로 부터 교회 교리와 시, 성서 등에 걸쳐 문자문화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으니
선생님은 최고 지식인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제자 발라프리드 스트라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샤를 2세는 샤를마뉴와 같은 전사왕으로서의 성격 보다는 루트비히(루이) 1세와 같이 사제~왕으로서
의 성격을 더 많이 지니고 있었으니... 랭스 대주교 앵크마르는 샤를 2세를 위해 루트비히 2세에게
침입의 부당성을 설득했고, 이에 루트비히 2세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발길을 되돌렸으며 이후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몇차례 충돌의 위기가 있었으나 전쟁으로 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855년에는 베르됭 조약의 주역인 중프랑크(이탈리아)의 로타르(로테르) 1세가 사망하자 중프랑키아
왕국은 세 아들에 의해서 다시 한번 더 분할되었으니... 855년 맺어진 프륌 조약에서 첫째인
루도비쿠스(루트비히) 2세는 남쪽의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을, 둘째인 로타리우스 2세는
북쪽의 로타링기아 지역을, 셋째인 샤를(카롤루스)는 현재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을 차지합니다.
막내였던 샤를(카롤루스)이 863년에 사망하면서 프로방스 지역은 맏이로서 명목상 황제직위를
유지하던 북부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 2세에게 돌아갔지만, 869년 둘째 로타리우스 2세가
사망하자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로타링기아 상속권을 주장하며 대립했으니... 870년 8월
루트비히 2세의 제안으로 분할한 메르센 조약을 통해 서프랑키아와 동프랑키아는 모젤강을
중심으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으니 현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세 나라 경계의 원형을 이룹니다.
875년에 이탈리아 왕이자 명목상 황제 직위를 유지하고 있던 루도비쿠스 2세가 사망하자 동프랑키아
루트비히 2세가 왕국을 계승하고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게 되지만... 876년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샤를 2세는 동프랑키아를 침공했으나 루트비히 2세의 세 아들 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의
저항으로 패배했고 877년에 동프랑키아왕 카를로만이 공격해 오자 샤를 2세는 늑막염으로 죽습니다.
샤를 2세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루이 2세 외에 카를로만, 로테르이니 카를로만은
869년 샤를 2세에 대해 반란을 주도했으나 결국 파문을 당해 죽었으며 로테르는 절름발이
로 태어나 일찍이 수도원에 들어간지라... 샤를 2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자는
장남 루이 2세였는데 문제는 그 또한 몸이 허약한 데다가 말까지 더듬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샤를 2세의 별칭은‘대머리왕’으로 전해지는데 하나는 경건한 신앙심과 관련된 설로서 867년에 왕실
수도원인 생드니 수도원의 보호자로서 준 성직자 대우를 받게 되자 교회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자신의 머리를 수도사처럼 깎았다는 것인데... 왕은 머리를 길게 기른다는 프랑크족의 전통에서는
샤를 2세의 삭발은 교회에 대한 신실함을 표현하는 매우 적극적이고도 충격적인 방법 이었습니다.
또‘대머리’ 라는 별칭이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루트비히(루이) 1세 당시 그의 처지를 표현
하는 것이라는데... 아버지 루이 1세는 막내(넷째)인 샤를 2세에게 물려줄 영토를 물색했으나
기득권을 지닌 다른 왕자들과의 충돌 속에서 그에게 상속지를 물려주는데 번번이 실패했으니
상속지가 없는 상황을 불모의 대머리에 비유하여 그에게 이러한 별칭이 붙었다고 이야기 됩니다.
프랑크 4대왕이자 서프랑크 2대왕 루이 2세 Louis II 는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키아
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876년 부터 부왕을 도와 아키텐 왕으로 활동했지만 말더듬이어서
권위를 확보하지 못한 그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왕국의 귀족들로 부터 많은 불신을
받았으니, 결국 귀족들에 대해 무력한 모습만 보이다가 879년 반란군 진압 준비 도중 사망합니다.
샤를 2세 당시인 862년 부르고뉴의 앙스가르드와 결혼한 루이 2세는 863년과 867년에 루이
3세와 카를로만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고... 그 이후로도 지젤, 일드가르드, 에르망
트뤼드라는 이름의 세 딸을 낳았지만 둘의 결혼은 부왕인 샤를 2세의 환영을 받지못한
것으로 전해지니, 5명의 자식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875년 샤를 2세는 며느리
앙스가르드를 내치고 파리 백작 아달라르의 딸 아델라이드를 루이 2세와 결혼시킵니다.
루이 2세는 23세 되던 867년에 세자로 아키텐의 왕에 임명됐는데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했을때
귀족들과 계모 리실드는 루이 2세의 계승에 반대했으니, 말을 더듬는 습관은 공적인 자리에서
대화하거나 연설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왕의 자질을 의심하는 것으로 권위를 실추시켰으니
루이 2세는 귀족들에게 선물을 선사하고 대가를 약속하고서야 877년 12월에 축성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878년 9월 7일에는 트루아 공의회에서 요하네스 8세로 부터 두번째로 축성식을 받아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했지만... 유력 귀족들을 압도하는 권위나 카리스마를 보여
주지 못한 채 이들에게 끌려다니다가 결국 879년 오툉 및 마콩 백작 베르나르
플랑트블뤼가 일으킨 반란에 진압을 준비하던중 재위 2년 만인 33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루이 3세는 879년 부왕 루이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6세의 나이에 동생 카를로만
2세와 함께 공동으로 서프랑키아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동프랑키아와의
충돌을 피하면서 노르만인 바이킹의 침략을 방어하는 한편 프로방스
지역에서 봉기한 보종 5세를 진압했지만 882년 낙마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루이 3세가 동생과 함께 왕위를 계승하자 귀족들은 두 왕의 축성식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루이 2세 부터 시작된 왕권의 약화는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 시대에도 진행되었으니.....
이듬해인 880년 3월, 루이 2세는 아미앙에서 동생 카를로만과 통치 지역을 분할했는데 루이
3세는 왕국 북부 네우스트리아를, 동생 카를로만 2세는 아키텐과 서부 부르고뉴를 관할합니다.
루이 3세의 통치에 있어 문젯거리는 샤를 2세 부터 등장한 노르만인 바이킹들의 침입이었는데....
이들을 막는데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동프랑키아로 부터의 위협 요소부터 제거하는 것이
었으니 결국 그는 동프랑키아의 루트비히 3세에게 로타링기아 영토 일부를 양도해야만 했습니다.
루이 3세에게 있어 큰 위기는 조부 샤를 2세가 프로방스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던 보종이 왕권이 취약
해진 틈을 타서 일으킨 반란이었으니.... 보종은 스스로를 부르고뉴 왕이라 칭하며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자 분할되었던 카롤링거(카롤루스) 가문의 후손들은 보종 5세를 진압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습니다.
서프랑키아의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 군대는 이탈리아를 장악한 동프랑키아 출신의 카를(샤를) 3세
지원을 받아 880년 말 보종의 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는데... 다른 한편 루이 3세는 서프랑키아
전역을 노략질하는 노르만인들의 침입을 방어하느라 모든 힘을 쏟았으며, 881년 8월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의 군대는 북부 프랑스지역에서 노르만인들 8천 명을 제거하는 대승을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승리의 영광도 한순간이었으니 불과 18세 밖에 안 된 루이 3세는 882년 8월 5일 말을
달리다가 낙마하게 되었고 운이 없게도 두개골이 깨져 즉사하고 말았으니... 이제 그의
어린 동생 16살인 카를로만 2세가 홀로 서프랑키아를 이끌게 되었는데, 왕권은 노르만인
들의 침략 속에 더욱 약화되어 갔으며 그 또한 884년 사냥터에서의 사고로 요절하고 맙니다.
형이 없는 카를로만 2세의 통치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니 883년 왕국 북동부를 침입한 노르만인
들에게 대패했고,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는데 노르만인 바이킹들은 끊임없이 침입과
약탈을 반복했지만 중앙권력은 적절하게 대응을 하지 못했으니... 결국 각 지방 스스로
약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해 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지방분권화를 강화시키게 됩니다.
884년 카를로만 2세는 사냥에서 입은 상처로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는데 루이 3세나 카를로만
2세나 모두 어린지라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결국
서프랑키아 왕위는 이탈리아와 동프랑키아를 장악한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카를 3세이 차지합니다.
카를 3세는 동프랑키아왕 루트비히 2세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879년에는 이탈리아의 왕위
를, 882년에는 동프랑키아의 왕위를, 884년에는 서프랑키아의 왕위를 모두 이어받았으며
마지막에는 프랑크제국 전역을 지배한 카롤링거 황제로 거듭났지만 서프랑키아에서
노르만인들을 방어하는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으며,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 상황에서 887년 11월 조카 아르눌프의 반란으로 퇴위당하고 다음해 1월에 죽습니다.
그 전인 863년 동프랑키아 왕 루트비히 2세는 분할 상속을 요구하는 왕자들(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의 반란에 직면했으니..... 이에따라 865년 장자 카를로만에게는 바바리아를,
둘째 루트비히 3세에게는 작센을, 막내 카를 3세는 알레마니아를 분할 상속하기로 결정합니다.
875년 이탈리아의 왕이자 명목상의 황제 직위를 지니고 있던 루도비코(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키아왕 샤를 2세는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대관식을 올리고 프랑크
신성로머제국의 5대 황제에 올랐으니.... 동프랑키아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들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채 샤를 2세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876년 동프랑키아 왕 루트비히 2세가, 877년에 서프랑키아 왕 샤를 2세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바뀌었으니
서프랑키아왕 샤를 2세의 뒤를 이은 루이 2세는 취약한 왕권으로 인해 루트비히 2세의 장자 카를로만
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넘겨주었고, 노르만족 침입에 정신없던 루이 2세는 동프랑키아의 침공을 우려하여
루트비히 3세와 카를 3세에게 로타링기아 지역 일부를 증여했으니 무게 중심의 추는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879년 카를 3세의 큰형인 카를로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두 동생에게 자신의
영토를 분할 상속하니... 둘째 루트비히 3세는 작센과 이어진 바바리아를, 셋째 카를
3세는 알레마니아와 이어진 이탈리아를 물려받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카를 3세는
이탈리아에서 보내게 되며 동프랑키아 왕위를 물려받은 형 루트비히 3세를 지원합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키아와 동프랑키아, 이탈리아로 분할되었으며 서프랑키아는
루이 3세와 카를로만, 동프랑키아는 루트비히 3세와 카를 3세에 의해 분할되었지만,
카롤링거(카롤루스) 가문이 이끄는 프랑크제국은 공통의 적들에 대해서는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첫번째 적은 유럽 전역을 끊임없이 약탈하던 노르만인 바이킹들
이었고 두 번째 적은 프로방스에서 부르고뉴 왕국을 제창하며 독립하려는 보종의 봉기입니다.
882년 동프랑키아왕 루트비히가 죽자 이탈리아왕 카를 3세는 동프랑키아를 물려받고 884년 서프랑키아
의 카를로만 2세가 사망하자 그는 서프랑키아 귀족들의 동의 아래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 루이 2세의
막내아들 샤를 3세의 섭정이 되었는데, 샤를 3세가 다섯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분권화 되어
가는 서프랑키아의 제후들은 샤를 3세의 대관식을 미루었고 왕권은 동프랑키아의 카를 3세가 장악합니다.
이렇게 해서 카를 3세는 후대 프랑스 왕조사에서 공식적인 프랑스왕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당대에는 왕령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왕으로 활동하는데 결국 카를 3세는 동프랑키아
와 이탈리아, 서프랑키아를 아우르는 프랑크제국 전체를 모두 자신의 지배하에 두게
되어 실질적인 6대 황제의 권력을 쥐었지만 이는 프랑크제국 통합의 마지막 모습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서프랑키아와 동프랑키아 곳곳을 노략질하던 노르만인
바이킹들의 산발적이고도 가공할만한 침략들이었으니.... 내륙 지역 및 이탈리아
와 같이 비교적 안정적인 지역을 다스리던 그는 제국 북부와 서부 전역을 노략질
하던 노르만인들을 형 루트비히 3세 처럼 효과적으로 방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합니다.
885년 가을 부터 롤로를 수장으로 하는 노르만인 바이킹들이 네우스트리아를 침략하여 파리까지
포위하니 카를 3세는 적을 격퇴시키기 보다는 반기를 들고있던 부르고뉴로 향하도록 회유
하였고... 약탈을 하지 않는 대신 은화 700리브르를 주기로 약속하니 위신은 크게 추락하였으니
서프랑키아의 제후들은 노르만인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할수 있는 사람을 왕으로 고려합니다.
동프랑키아에서도 통치는 순탄치 않았으니 서자 베른하르트는 어머니 신분이 낮은지라 고위 성직자와
제후들이 베른하르트의 동프랑키아 왕위 계승을 격렬히 반대했고, 887년에는 측근들과 왕비
리카르디스 사이에 불륜에 대한 소문이 돌자... 리카르디스는 신명 재판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갔으니 측근들 사이 암투와 정쟁으로 제후들은 카를 3세의 정치적 무능력을 확인합니다.
887년 11월 큰형 카를로만의 아들 아르눌프가 봉기해 대제후 동의아래 카를 3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지만 서프랑키아로 확산되지는 않았고, 여전히 카를 3세는 서프랑키아의 왕으로서 직위를 유지
했는데... 하지만 동프랑키아에서 이루어진 폐위의 충격은 얼마 후인 888년 1월 그를 죽게 만들
었으니 서프랑키아의 대귀족들은 같은 해 2월 “로베르 가문의 외드” 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합니다.
이탈리아-독일-프랑스의 왕 카를 3세의 인장에는 그를 ’카를(샤를) 대왕‘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이는 샤를 마뉴(카를 마르텔 대제)의 라틴어 이름과 동일하지만... 그가
치세 동안 보여준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은 그의 별칭을 그의 신체적 특징과
쉽게 연관짓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이미지를 뚱뚱한 모습으로 표현하게끔 하였습니다.
서프랑키아(프랑스) 왕위에 오를 샤를 3세는 루이 2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아델라이드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는데, 884년 이복형인 카를로만 2세가 사망할 당시
아직 5살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서프랑키아의 왕위는 동프랑키아의 왕 카를 3세
그리고 9살인 888년에는 네우스트리아 후작인 로베르 가문의 외드에게 돌아갔습니다.
샤를 3세는 2번이나 왕위에서 배제되었지만 13살이 되던 892년 부터 그의 지지 세력들인 랭스
대주교 풀크와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2세, 아키텐 백작 기욤 1세 등은 외드의 왕위 정당성에
끊임없이 도전해 대결하였으니... 기어이 893년에 랭스 대주교는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3세의 축성식을 거행했는데.... 교황이 아닌 랭스 대주교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축성식 입니다.
게다가 왕위를 둘러싼 외드와 샤를 3세 두 세력의 경쟁은 대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독립
적인 세력을 확보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니.... 892년부터 무력 투쟁이 지속되었고,
동프랑키아왕 아르눌프의 지원을 받은 외드는 샤를 3세의 세력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으니 이에 샤를 3세는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2세에게 피신을 합니다.
외드는 우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샤를 3세가 있는 한 로베르 가문에 의한 왕위 계승은 명분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왕국을 다스리기에 매우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897년 샤를 3세
와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이에 따르면 외드는 자신의 사후 왕위 계승권을 샤를 3세에게 보장
하는 대신에 당시 로베르 가문의 수장이었던 동생 로베르에게는 새로운 영지를 확보해 주기로 합니다.
898년 1월 로베르 가문의 외드는 사망하기 전에 샤를 3세를 계승자로 지목하고 죽으니 19살
샤를 3세는 751년 피핀 3세 초대 프랑크왕 부터 계산하면 6대 왕위에 오르는데... 911년
바이킹들의 노르망디 공작령의 탄생으로 평화가 시작되고 로타링기아 귀족들의 충성에
힘입어 강력한 왕권을 추진하였으나, 지방 분권적인 귀족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922년에
패배하여 폐위되었으며 923년 베르망두아 백작의 포로로 잡혀있다가 929년에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