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이씨 시조 비문
공의 휘는 양길이요
자는 의노(義老) 호는 여남(麗南)
시호(諡號)는 충원(忠元)이며 청안군(淸安君)이다
공(公)이 청안이씨(凊安李氏)의 시조다
공(公)은 고려 충선왕 4년, 임자년(壬子年), 1312년 충청도 도안에서 태어나시었다
고려 충혜왕 원년, 신미년(辛未年), 1331년 19세에 충혜왕
문과 급제후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시다 공민왕(恭
愍王)에게 직언불용(直諫不容)하여 공민왕의 노여움으로
병신년10월 강등되어 제주판관으로 전출 되었다
1350년 고려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명나라가 고려에 탐라 말
2,000필을 요구함에 따라 목호세력이 집단으로 저항하든 시대였다
제주도 동쪽의 수산평에서 제주에 도탐라만호부 소속 목호들이
기철 일파와 같이 역란에 가담한 혐의를 조사하기위해 1356년(공민왕5년) 6월 도순문사 윤시우를 제주로 보냈다.
공민왕5년 1356년 10월20일 기철세력인 가을적 홀고탁 목호들이 난을 일의키자 이를 진압하든 제주목사 장천년 도순문사
윤시우 제주판관 이양길이 분전 하다 순절하시었다
공의 사후 공민왕은 증검교태보이부시랑(贈檢校太保吏部侍郞)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 녹훈(錄勳) 일등봉(一等封) 청안군(淸安君) 시(諡)를 충원(忠元)이라 명했다
공민왕이 연일 대잠에 식읍을 하사하시어 2세 이종주 후손들이 정착하였다
배(配)는 대부인 동주최씨 최원직의
따님이고 증벽상삼한삼중대광판문하부사(贈壁上三韓三重大匡 判門下府事) 상호군겸판예문춘추관사(上護軍兼判藝文春秋館事)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 최영(崔瑩)의 매(妹)이다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예부시랑(禮部侍郎)의 정철의 따님이다
2세 종주(1338-@)
시호 정원 호 자
고려(13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선대부(고려관직)로 장기현에 근무하시었다
1392년 10월 계품사및 사은사로 정도전 최부 정춘등과 함께 북경을 다녀 오셨다1393년 장기현에 근무 하시었다
김해부사(1394년)로 도임 하시었다
1396년 경주부에서 절제사로 하륜과 같이 근무하시다가
정종(定宗)1년 1399년 1월 통정대부 지울주사겸권농병마단련사울주철장관으로 발령받았다
공이 부임하기 2년전에는 왜구가 침범하여 울주사 이은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끌고 가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동해의 왜구침범과 백성의 피해가 극심하여 백성이 바닷가에 살지못하여 내륙으로 숨어버리자
태조는 1398년12월 전국의 감사로부터 유능한인물을 추천하라고 지시하였다
하륜의 추천으로 경주절제사로 재임중이든 공이 울주사로 발령 받았다 조선초기 달전철장은 철장이 1기이며 농소면 달천리의 달천산에 있었다 백동철, 수철 생철을 생산 세공하여 생철 11만2천5백근을 생산하든 조선의 국력을 뒷받침해주는 근간이었다 왜적으로부터 조선의 해안선을 보호하고 조선의 근간인 철을 생산하라는 막대한 임무를 수여받아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시기였다
경주 절제사 시절
권근의 원사기문과 문충공 하륜의 혜리원기에 의하면 정축년(1397) 봄에 내가 부윤이 되어 이르니 상인이 말하기를, ‘내가 전번에 말한 그 길의 반쯤 되는 곳에서 옛 사람들이 이른바 덕방동이라고 하던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앞뒤가 다 산이며 초목이 무성하고 시냇물이 그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방을 만들수도있고 서늘한 마루를 만들 수도 있었으며, 곁에는 노는 땅이 있어서 또 채소나 과일을 심을수도 있었습니다 원사를 두어 나그네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정주 남득온과 절제사 이종주가 함께 그 비용을 도와주어서 거의 낙성하였다
권근의 덕방원기에 보면 덕방리길 북쪽에 터를 살피니, 앞에는 큰 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대숲이 있으며, 산이 둘러섰고 그 지역은 평탄하였다. 연공이 좋게 여겨서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구워 짓기 시작하였는데, 갑술년(1394) 겨울에 시작하여 정축년(1397) 가을에 마쳤다. 서늘한 곳과 따뜻한 장소를 따로 하였고 신분에 따라서 처소를 달리하였으며, 밥짓는 부엌과 마소의 마구 등 갖추지 않은것이 없었다. 또 그무리중에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선행을 좋아하는 자에게 살면서 관리하게하고, 여름에 채소를심고 섶과 꼴을 오래 쌓아 불편함이 없도록하였다
공은 관찰사를 끝으로 봉직을 마무리하고
연일에 정착 하시었다
배는 오천정씨 오성군 삼중대광 정후의 따님이다
공의 일생을 보면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농사에도 열과 정성을 다했으며 성을 쌓고 보수하고 조선의 근간인 철의 생산에도 매진 하였으며 길손이 이용하는 혜리원을 짓는데 사비를 털어 솔선수범하는 당대에 보기드문 훌륭한 공직자 였음을 후손들은 기억해야 함이다
통정대부지울주사 왕지(李從周通政大夫知蔚州事)는
정종(定宗)1년(1399) 1월 26일에 조선초에 지방관을 지낸 이종주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지울주사겸권농병마단련사울주철장관(知蔚州事兼勸農兵馬團練使蔚州鐵場官)의 관직을 제수하는 사령왕지(辭令王旨)이다.
총 4행(行)에 초서체(草書體)로 쓰여졌고,
연월 위에 조선왕보(朝鮮王寶)란 새보(璽寶)가 찍혀 있다.이종주와 이임의 교지는 보물 제 1006으로 지정되어 현재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는 연일대잠산에 있었으나 실존이다
배는 오천정씨이며 묘는 연일에 대잠에 있었으나
직계장자들 후손이 임진란에 9가구가 잔부 절멸하시어서
산과 재산이 전부 안동권씨 권수해 후손들이 차지해 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후 포항제철 주거단지로 바뀌는 바람에 우리선조들의 묘소는 실존되어 버렸다
선조묘소도 잃고 재산도 잃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3세 이선 (1365-1435 )
장기읍지에 기록에 공은
1390년 장기읍성을 축조하는 만호로 도임 하셨다
장기를 비롯한 동해안은 왜구들의 약탈에 의하여 바닷가의 땅은 소모되고 백성들은 피하고 숨고 하여 폐허가 된지 100여년이 되었다 왜구의 환란을 만나 점점 쇠퇴하다가 1380년 장기는 화란을 입고 함락되고 불태워져 백성들이 죽음과 약탈을 당하여 거의 전멸하였다. 그 중에서 겨우 벗어난 자도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나니, 마을과 거리가 폐허가되고 가시덩굴이 길을덮어 인적이 없었다 수령이 임지에 도착하면 먼마을로 가서 머리를 움츠리고 감히 읍내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 여러 해 되었다 산골짜기 속에 토굴을 파고 살면서 백성들은 자취를 감추려 애썼고 때때로 나와서 농사 짓고 고기잡이하다가 도적이 오면 서로들 구원하지 않고 숨기에 급급 했다
공이 앞장서서 성을 쌓고 돌을 모으자 조금씩 백성들이 모여들어 도우기 시작했다 차츰 본업에 안정을 이루게 되며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 푸른 들판으로 만들어지고 백성들이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짓고 뽕나무와 삼을 재배 하면서 점차 안정을 찿았다 백성들이 공을 높이 세우며 기뻐하지않은 사람이없었다.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축조하고 포구에 방어진지 구축공사를 마무리지은후 병선을 제조하여 포에 배치하였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해지자
한양으로 올라가서 군기감과 군기판윤이 되었다
연일 대잠산에 묘가 있었으나 실존이다
배는 김해김씨 여주목사 김적의 딸이다
4세 이등(李登)은 (1385-1419 )
한양에서 제공으로 근무 하시다가
34세에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세종 즉위 원년(1419) 전국에 교서를 내리어 효자 절부 의부 순손
이 있는 곳을 찾아 실적을 조정에 보고하라고 하셨다
세종2년(1420) 조선왕조실록에 등(登)의 배 해주오씨는 18세에 출가하였다 27살에 등(登)이 서울에서 돌아 가시자 해주오씨는 그의 유해를 모시고 와서 연일 집 북쪽 대잠산에 안장 하였고 보름에 한번식 제사를 모시었다 그리고 시조모 조모를 하늘 같이모셔서 세종이 효행을 칭찬하여 그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그집의 요역을 면제하게 하였다
공의 장자 유미는 용천부사를 지냈다
사위는 단종(1452)의 이모부 권수해(안동권씨 연일 입향조) 이다
용천부사를 지내시다 단종의 사건에 휘말려 사위는 연일로 100년추방당하고 용천부사직을 그만두고 대잠으로 낙향하시었다
장자 유미의 후손들은 12대 임진왜란(1592)시 형산강포구 연일 대잠에서 일족을 이루어서 살고있다가 왜적들에 의해 9가구 일족이 절멸하여 원통과 분노가 하늘에 이러렀다
4세 이임(李臨) (1388-1456 )
현재 청안이씨는 이임의 후손들이다
태종14년 1414년 2월10일
26세에 성균관 갑오식년 생원시(1414년)에 합격하여
태종14년 호서읍 결성현(홍산) 성지읍성(형산)에서 겸훈도관 장사랑지내시었다
사예 김숙자(1389~1456)는 성균관 생원동기였다 아들은 점필재 김종직이다 이존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17년(1435) 4월20일 무과3등 제8인으로 급제를 하였다
세종23년(1441) 7월29일 칠원현감 부임전 어전에 하직인사를하니 말씀하시기를 무릇 수령 된 자는 직책이 권농에 있다. 누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인 줄 모르겠는가. 절기의 이르고 늦음을 살펴서 백성에게 농상을 권장하는 것이 너희들의 당무이다. 또 의창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나누어 주는 것도 역시 진휼의 근본이니 거두어 들일 때에 침노하고 독려하지 말게하라 이제 들으니 하삼도는 농사가 좀 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함길도에 입거하는 것으로 하여 혹 소요한것 같으니, 너희들은 가서 마음을 다하여 곡진히 조처하여 나의 마음에 합하게 하라 하였다.
어명을 받고 칠원현감(1441년)에 부임하였다
현감재직후 호서 양길마을에 정착하시었다
묘소는 실묘이다 묘소는 호서 홍산에 있을것으로 추측된다
세종17년(1435)
이임(李臨)에게 발급된 무과급제
홍패왕지(紅牌王旨)가 보물 제1006호로 지정되어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배는 밀양 최씨이다
이지의 아들 3형제는
김종직의 무오사화(1498)에 연루되어 호서에서 안강 흥해 외동으로 이주하여 각입향조가 되었다
첫째아들 이지는 세조즉위(1455)년 부사직으로 참여하여 원종공신3등에 봉록 되었으며 금성현령을 지냈고 안강으로 이주하였다
둘째아들 이육은 성균관 진사에 급제하여 흥해로 이주하여 흥해 입향조가 되었다
셋째아들 이기는 세조즉위(1455)년 난에 권지참군으로 참여하여 원종공신3등에 봉록되었으며 장기현감을 지냈다 경주 외동 입향조가 되었다
이자화가 태어난곳은 도안이다
◉ 씨족통보 도안청안 시조 이자화
◉ 덕수이씨 3대 이소 배 도안이씨(덕수이씨 족보5판)
◉ 강원도 정선 1280년 판관(강원읍지 선생안)
이양길은 홍주목에서 태어났다
호서읍지 홍주목읍 신남면 거관문 80리 에는 양길 리가 있다
공민왕7년 이양길이 순직한 2년후 호서에 지명을 개편할 때 이양길이 태어난곳
지명을 양길리 라고 명명 하였다
현재는 지명이 사라지고 없다
충의록 족보현황
◉일문13의사 의사록1800년 이수인
◉1933년 계사 충의록 단 족보없음 운협
◉1834년16의사충의록권지2 단 운협 동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