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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許浚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허준(許浚. 1539~1615)은 신묘한 의술로 박애(博愛)를 실천한 의성(醫聖)이 되고, 신분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신화(神話)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의 일생을 추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허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소설과 드라마의 상상력(想像力)일 뿐이다.
허준(許浚)이 왜 의학(醫學)을 선택하였고, 어떤 과정을 밟으며 공부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왔던 '유의태'라는 스승도 허구(虛構)의 인물이고, 허준(許浚)이 '유의태'의 시신(屍身)을 해부(解剖)하여 놀랄만한 깨달음을 얻는 드라마틱한 사건도 작가의 상상력(想像力)일 뿐이다.
허준(許浚)이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선조(宣祖) 때 유학자인 ' 유희춘(柳希春)'의 문집이 유일(唯一)하다. 그 문집에 남아있는 허준의 모습은, 유희춘(柳希春) 일가의 병 치료에 참여하기도 하고, 유희춘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살림살이가 궁색하지 않았고, 의술(醫術)이 제법 높은 평가를 받았으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출생과 성장
허준 (許浚... 1539~1615)의 본관은 양천(陽川), 字는 청원(淸源), 號는 구암(龜岩)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관(武官)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허론(許論) 역시 무관(武官)으로 용천부사를 지냈고, 생모 '영광김씨'는 아버지의 소실(小室)이었으므로 허준은 서자(庶子)이었다. 어머니가 첩(妾)이기는 했으나, 천출(賤出)은 아니었다. 양반 가문의 서녀(庶女)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법 권세있는 가문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자란 허준(許浚)은 '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고 전한다.
허준은 어린 시절 경상도 산청(山淸)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준은 이 곳에서 어렸을 때부터 의사(醫師) 수업을 시작하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을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中人)이나 서얼(庶孼)들의 업(業)으로 생각되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은 부단한 노력 끝에 이미 20대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된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에 당시 부제학(副提學)이었던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柳希春)의 얼굴에 생긴 종기(腫氣)를 완치한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서울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유희춘(柳希春)의 신임을 얻었다.
유희춘(柳希春)은 이조판서(吏曺判書)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덕분인지 몇 년 뒤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 (內醫院 僉正) '의 자리에 오른다. 31세에서 33세 사이의 일인 듯하다. 당시 의과(醫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1등으로 합격해서 얻을 수있는 관직이 '종8품'이었다고 하니 '허준'이 얼마나 파격적(破格的)인 승진을 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허준(許浚)은 의과(醫科)도 통과하지 않았고 서자(庶子) 출신이었다. 의원으로서 크게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허준 묘소 가는 길
허준 묘의 발견
1992년 경기도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된 허준(許浚)의 묘(墓)가 확인되기까지에는 고난(苦難)에 찬 그의 생애 못지않은 곡절이 숨어있다. 당시 한의학계에서는 " 동양의 의성(醫聖) "으로 추앙받는그의 묘소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불가능할 것 같았던 실전(失傳)의 묘 찾기가 사소한 단서 하나로 단숨에 해결되었다.
재미(在美) 고문헌(古文獻) 연구가 '이양재' 등의 집요한 추적으로 '양천허씨' 족보에서 " 하포리엄동손좌쌍문 (下浦里嚴洞巽坐雙墳) "이라는 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이 기록은 근거로 군부대의 협조 하에 1991년 9월 30일, 이곳 현장에서 두동간 난 비석(碑石)을 발굴한 것이다. 마모된 비문(碑文)의 내용 중에서 " 陽平 00聖功臣0浚 "이라는 글자를 판독하였다. 허준은 양평공(陽平公) 허씨로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피란지까지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는 칭호를 받은 허준이었다. 참으로 절묘하게도 허준의 묘(墓)임을 입증할 필요한 글자만 남아 있었다.
내의원(內醫院) 생활의 시작
부인과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허준을 신뢰하게 된 유희춘(柳希春)은 허준을 내의원에 추천하게 된다. 유희춘의 " 미암일기 (眉巖日記) "에 의하면 1569년(선조2)에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하여 주도록 부탁하였다는 기록과 1573년에 허준이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즈음에 내의원에 들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유희춘(柳希春)이 선조(宣祖) 원년(元年)인 1568년부터 10년 동안에 걸쳐 쓴 일기(日記)이다. 개인의 일기 가운데 가장 방대한 것으로, 자신의 일상생활과 당시 국정의 대요(大要), 인물의 진퇴(進退)에 이르기까지 공사(公私)의 사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하지만 " 양천허씨 세보(陽川許氏 世譜) "에는 1574년 등과(登科)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두가지 설(說) 모두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여튼 내의원에 들어 간 허준은 명나라 출신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선조(宣祖)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왕의 신망을 받게 되었다. 1587년에는 선조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御醫)들이 모두 포상을 받게 되었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 (太醫 楊禮壽)등과 함께 녹피(鹿皮) 1령(令)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당시 세자(世子)로 있던 광해군(光海君)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낫게 하였으므로 허준은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벼슬)에 가자(加資)받았는데, 그러나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한 일인데, 비록 공(功)이 있다하더라도 의관에게 당상관의 가자(加資)를 내린다는 것은 부당하다 "고 선조(宣祖)에게 상소를 올리나 선조(宣祖)는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허준과 유희춘
허준이 왜 의학을 선택하였고, 어떤 과정을 밟으며 공부하였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는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왔던 '유의태'라는 스승도 허구의 인물이고, 허준이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해 놀란 만한 깨달음을 얻는 드라마틱한 사건도 작가의 상상력일 뿐이다.
허준의 내의원에 들어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선조 시절 유학자인 유희춘(柳希春)의 문집이 유일하다. 그 문집에 남아 있는 허준의 모습은 유희춘이나 일가의 병 치료에 참여하기도 하고, 유희춘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는 압ㅎ았지만 살림살이가 궁색하지 않았고 의술이 제법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569년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유희춘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유희춘은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덕분인지 몇 년 뒤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의 자리에 오른다. 31살에서 34살 사이의 일인 듯하다. 당시 의과의 초시와 복시를 1등으로 합격해서 얻을 수 있는 관직이 종8품이었다고 하니, 허준이 얼마나 파격적인 승진을 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허준은 의과도 통과하지 않았고 서자(庶子) 출신이었다. 의원으로서 크게 인정 받았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파격적인 승진으로 내의원에 들어왔으나, 한동안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든 듯하다. 1575년 어의를 보조하여 왕의 맥을 진찰하였고, 1581년 선조의 명으로 " 찬도방론맥결집성 "이라는 진맥학 책의 오류를 바로잡아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1587년 다른 여러 어의와 함께 왕의 진료에 참여하여 병의 쾌유에 대한 상으로 사슴 가죽을 받았다는 등 몇 년에 한 번씩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왕명으로 진맥학 책을 진술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학술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광해군의 병을 치료하다
그러던 중 허준은 1590년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면서 비로소 남다른 의술을 인정받는다. 당시 왕자의 신분이었던 광해군은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병이 깊었다. 다른 의원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허준이 과감히 나서 병을 고치자, 선조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리며 그 공을 치하하였다.
서얼 출신의 기술관이었던 허준에게 당시의 신분 구조상 허용되었던 벼슬은 정3품의 당하관이 최대이었다. 그런데 그 한계를 뛰어 넘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다시 한 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동반(東班)에 올라, 신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동반(東班)이란 양반 중 하나인 문관을 뜻하는 것으로, 동반에 올랐다는 것은 곧 완전한 양반이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또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을 끝까지 따른 문무관이 17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던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 한 공을 인정하여 허준을 공신으로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다. 품계로만 따진다면 좌찬성, 우찬성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조는 허준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리려 하였다. 1606년 오랫동안 차도가 없던 병세가 호전되자 관직의 최고 단계인 정1품 벼슬을 내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신분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고 맹렬하게 반대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조선 왕조가 개국된 이후 의관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에 올랐지만, 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다.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 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를 죽게 하였다 "는 죄로 유배길에 올라야 하였다. 허준의 의술로 목숨을 구한 적이 있던 광해군은 " 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 선조를 살리지 못하였을 뿐 고의가 아니니 처벌할 수 없다 "면서 허준을 감쌌지만, 신분을 뛰어넘은 그의 입지에 문관들의 질시와 견제가 만만치 않았던 상황이다 보니 광해군도 어찌 할 수 없었다. 귀양살이는 1년 8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임진왜란과 호성공신(扈聖功臣) 그리고 동의보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의주(義州)까지 피난가야 될 형편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러운 말이 퍼지자...명망 진신(縉神)들은 자신의 보신(保身)에만 뜻을 두고..... 의주(義州)에 이르기 까지 문,무관(文,武官)이 17명에 불과하였고.... 어의(御醫) 허준(許浚)을 비롯한 몇몇이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있듯이 허준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선조(宣祖)의 건강을 곁에서 돌보았고, 이 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功臣)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1596년 선조(宣祖)는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의 의서(醫書)를 찬집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허준이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령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고 , 의관들이 흩어지게 되어 편찬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宣祖)가 다시 허준을 불러 許浚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醫書)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관련 내장방서 500권을 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하였다. 1600년 수의 (首醫 ..내의원책임자) 양예수가 사망하자, 허준이 수의(首醫)가 되었다.
그 무렵 명(明)나라의 새로운 의학이 적지 않게 조선에 수입되어, 조선 전기의 의학전통과 섞이는 바람에 이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전란(戰亂)을 겪으면서 기근(飢饉)과 역병(疫病)이 발생하여 제대로 된 의서(醫書)가 시급히 요구되던 시점이었다.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하면서, 선조(宣祖)는 그 책의 성격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첫째, 사람의 질병이 조섭을 잘못하여 생기므로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할 것. 둘째, 처방이 너무 많고 번잡하므로 요점을 추리는 데 힘쓸 것. 셋째, 국산 약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1604년 선조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표하며,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綠)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었다. 1606년에는 왕의 병을 치료한 공(功)으로 양평군 보국숭록대부(報國崇綠大夫)로 승급하게 되는데, 이는 벼슬로서는 최고의 품계(品階)인 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加資)를 보류하게 되었다.
宣祖의 탁월한 안목
동의보감의 서문(序文)은 선조의 명령으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인 이정구(李廷龜)가 썼다. 이는 당대에 '동의보감'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당대 최고의 책에 어울리는 당대 최고 문장가의 서문이 실린 것이다.
동의보감의 서문(序文)은 장대한 의학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구구절절 역사를 읊어대는 것이 아니라 두세 줄로 그 핵심을 지적하는데 그친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황제와 기백에서 시작된 훌륭한 의학의 전통이 후대로 오면서 의사라는 자들이 저마다 학파를 만들어, 부분적인 것을 전체인 양 침소봉대하여 의학이 발달할수록 임상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는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宣祖)는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결심하게 된다. 1596년의 일이다.
그러나 선조가 의서(醫書) 편찬을 결심한 것은 단순한 의학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문에서는 동의보감 편찬의 일차적인 목적이 " 몸을 다스리는 법으로 백성을 구제하려는 " 의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용후생(利用厚生)하고, 중화위육(中和爲育)하는 정치적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이란 만물의 이용을 편리하게 하여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물은 주로 의학을 가리킨다. 의학을 백성들이 쉽게 접하여 이용할 수 있게 하여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근대로 들어오기 전까지 의학은 사적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자원의 하나이었다. 그런만큼 으료 자원의 국가적 차원에서 분배는 한 나라의 존폐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항목이었다.
중화위육(中和爲育)이란, 중용(中庸)에서 온 말로, 만물이 제자리에 만족하면서 잘 자라나는 것을 말한다. 정치 차원에서 말하자면,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나 빈부의 차이를 막론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고 지키면서 잘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사회질서가 잘 유지되는 상태인 것이다. 선조의 입장에서는 의료 자원을 잘 배분하여 사회질서가 잘 유지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동의보감의 편찬은 단순한 의학적 사건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安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국책사업이었던 것이다.
1607년, 선조(宣祖)의 병이 위중하여 치료가 되지 못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藥)을 잘못 처방(處方)하였기 때문이라고 허준의 죄(罪)를 논하는 자리가 매일 벌어진다. 그러나 선조(宣祖)는 벌을 주기보다는 의술을 다하게 하여야 한다고 허준을 보호한다.
1608년 마침내 선조(宣祖)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 사망하였다. 선조(宣祖)의 병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즉위한 광해군도 거듭된 신하들의 요구에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허준의 직책을 거두고, 거처(居處)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하였다.
그러나 그 해가 지나기 전에 광해군은 허준에게 내린 죄(罪)를 모두 해제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에 드디어 완성하였다. 이후 허준은 어의(어醫)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허준의 사후(死後) 광해군(光海君)은 그동안 보류되었던 보국숭록대부(報國崇綠大夫)를 추증하였다.
동의보감 東醫寶鑑 .. 보물 제 1085 호
1608년 선조(宣祖)가 죽자, 책임 어의(責任 御醫)로서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난 허준은 광해군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 시절 허준은 주로 의서(醫書)를 편찬한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동의보감'이다.
1610년에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측 의서(醫書)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모든 병(病)의 증상을 5가지로 나누어서 항목(項目)에 따라 치료방법을 기록하고, 치료 근거가 되는 여러가지 문헌을 제시하였다. 치료 방법을 제시함에 있어 의서에 근거를 둔 기록만을 추린 것이 아니라, 병에 따라서는 민간에 전해지는 이른바 속방(俗方)의 치료방법과 허준이 스스로 경험한 비방(秘方)까지 덧붙였다. 이렇게 의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활용하기 쉽도록 편찬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 천하(天下)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 한 것 "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秘級) "이라고 평가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1613년 동의보감 처음 출간되고 115년 뒤에 일본에서 완질이 출판된 것을 비롯하여 1763년 중국에서도 출판되었으며,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모두 7번 출판을 거듭하였다.
동의보감은 1613년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木活字)로 인쇄되었는데, 이 때의 초판본 완질 25권은 남아있지 않고, 후에 전주와 대구에서 목판본(木板本)으로 출판된 것이 완전하게 전승되고 있다. 후일 19세기에는 백성들이 더욱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한글본이 출판되었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 구급방(救急方)을 언해(諺解)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창진집(諺解瘡疹集)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벽역신방(癖疫神方), 맥결집성(脈訣集成) 등의 저술을 남겼다. 즉 백성들을 위하여 전문적인 의서(醫書)들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조선왕조가 개국된 이후 의관(醫官)으로서는 최고(最高)의 벼슬에 올랐지만, 그 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다. 1608년 선조(宣祖)가 세상을 떠나자 . 망령되어 약(藥)을 써서 선조(宣祖)를 죽게 하였다 '는 죄(罪)로 유배(流配) 길에 올라야 했다.
허준(許浚)의 의술로 목숨을 구한 적이 있던 광해군(光海君)은 ' 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 ' 선조(宣祖)를 살리지 못했을 뿐 고의(故意)가 아니니 처벌할 수 없다며 허준을 감쌌지만, 신분을 뛰어넘는 그의 입지(立地)에 문관(文官)들의 질시와 견제가 만만치 않았던 상황이다 보니 광해군도 어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귀양살이는 1년 8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커다란 시련이었던 이 기간을 허준(許浚)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되는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 작업에 바쳤다. 정(精), 기(氣), 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道家)의 양생학적(養生學的) 신체관(身體觀)과 구체적인 질병의증상(증상)과 치료법 위주로 한 의학적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통합했다 '는 평가를 받는이 동의보감은 이후 조선 의학사(醫學史)의 독보적인 존재로, 오늘날까지도 한의학도에게 널리 읽히는 명저이다.
1609년 사간원(司諫院)의 극심한 반대에도 광해군은 당시 71살의 허준을 내의원(內醫院)에 복귀시켜 자신의 병(病)을 돌보게 하였다. 한양에 돌아온 그는 마침내 완성한 ' 동의보감 '을 광해군에게 바쳤고, 이후 역병(疫病)에 관해 저술한 '신찬벽온방(新纂僻瘟方)'과 '벽역신방(僻疫신방)'을 편찬하였다. 글다 1615년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 뒤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작위가 추증(追贈)되었다.
허준(許浚)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 허준(許浚)은 제서(諸書)에 널리 통달하여 약(藥)을 쓰는 데에 노련하다 '는 선조(宣祖)의 평(評)과, ' 허준이 저미고라는 약으로 많은사람의 두창을 고쳤다. 근래에 오직 박제가), 손사명, 양예수, 허준등이 의원으로 이름이 나 있다 '는 이수광(李粹光)의 평이 있을 뿐이다.
신화(신화)가 된 의사(의사)
18세기 중엽에 나온 ' 약파만록(藥坡漫錄) '이라는 책에는 허준(許浚)이 코끼리를 고쳐주어 명성이 자자해졌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이 이야기에 살이 붙어. 아픈 호랑이를 고쳐주고 금침(金針)을 얻은 허준(許浚)이 그 '금침'으로 중국 천자(천자)의 벼을 고쳐준 뒤 천자(天子)의 병을 고치지 못한 죄로 옥(獄)에 갇힌 중국 의원(醫員) 등을을 풀어주자, 그 의원들이 자신들이 아는 것을 모두 책에 적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의보감'이라는 설화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사실 이러한 신화(神話)의 옷을 다 벗기더라도 그는 뛰어난 의학자이었다.
조선, 국가적 프로젝트
동의보감...하면 허준(許浚)을 연상한다. 하지만 허준이라는 명의(名醫) 만의 힘으로 빛을 본 것은 결코 아니다. 허준은 선조(宣祖)의 명에 의하여 편찬을 시작한다. 편찬 작업은 광해군(光海君)시절인 1613년, 전 25권의 초간본이 나오기까지 장장 17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정유재란 등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중단(中斷) 기간을 빼고도 편찬에만 7년 이상, 판각과 인쇄에 3년 가량의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사이 투입된 인력과 재료는 물론 , 이후 보급을 위하여 들어간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목활자로 만들어진 초간본은 2질씩 8도감영으로 보내졌고, 다시 일반 백성을 위한 보급용 판본이 만들어졌다.
선조(宣祖)는 허준에게 " 중국의 그 것은 번잡하기만 하고 별로 효과가 없다 "라고 말하며 허준에게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지시하지만, 한편 의학에 식견을 갖춘 여러 유학자들을 편찬팀에게 붙여 주었다. 정작(鄭斫),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明源), 정예남(鄭禮男) 등이 그들인데, 비록 정유재란으로 편찬이 중단된 후에는 허준이 거의 단독으로 집필하였지만, 동의보감의 기본 골격을 세우는 일에는 이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한 세종(世宗)때 만들어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85권과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 등의 선행(先行) 연구가 없었다면 동의보감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계 기록문화유산. MEMORY OF THE WORLD
2009년 동의보감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승정원일기, 고려대장경, 조선왕조의괘(儀掛)에 이어 7번째이며,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 193건만 인정받은 보물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하면서 유네스코는 두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바로 동의보감의 가치(價値)와 철학(哲學)을 압축하여 잘 정리하고 있다.
informed the evolution of medicine in East Asia and above ... 즉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하였고, developed the principles of preventive medicine and public health care by the State,which were virtually unprecedented ideas up to the 19th century .... 즉 19세기까지도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예방의학(豫防醫學)과 국가(國家) 공중보건( 公衆保健)의 원칙들을 발전시켰다. 치료보다는 예방에 역점을 둔 그리고 국가차원에서 공중보건을 중요시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인데, 바로 이 점이 동의보감의 진정한 가치이고 철학일 것이다.
1610년 8월 6일 광해군일기 ... 동의보감에 대한 기록
동의보감은 중국 醫書의 짜깁기 ???
동의보감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가장 큰 논거는... 동의보감은 중국 의서(醫書)들의 짜깁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동의보감 내용의 90%가 중국의 의서(醫書)를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90%의 인용은 사실이고,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함에 있어 모든 항목에 인용한 문헌(文獻)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는 다음과 같다. 똑같은 레고(LEGO) 조각이라도 어떤 밑그림을 가지고 조립하느냐에 따라서 최종 작품은 전연 다를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의보감에서 허준이 일일이 인용된 중국 의서(醫書)를 언급한 것은 ...
당시 술이부작(述而不作 ... 孔子가 옛 사람의 설(說)을 저술하였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라고 자신의 글을 겸손하게 표현한 일)식 글쓰기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허준이 언급한 중국의 문헌들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처방법이나 약재 등을 그대로 인용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 풍토(風土)나 체질(體質)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여 바꾸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의 가장 우수한 점의 하나는 체계적인 항목 선정과 논리의 전개이다. 동의보감은 " 인간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선천적, 후천적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 나간다 "라는 도교적(道敎的) 인간관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인체(人體)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의서보다 탁월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신을 보낼 때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구해 가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직접 수 십차례 판본을 만들었던 사실도 그 때문인 것이다. 중국의 강희제(康熙帝)가 애독하던 동의보감이 중국 황실(皇室)에 비장(秘藏)되어 있다 발견된 사실도 있다
허준의 묘(墓)발굴 작업 중에 발견한 비석의 내용으로 허준의 묘임을 확인했다고한다. 물론 발견 당시에는 반듯한 봉분은 아니었지만, 다시 복원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허준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곳에는 여러 곳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 파주가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동의보감의 잡병편(雜病編)에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색적(異色的)인 비기(秘技)들이 소개되어 있다. 양의학(洋醫學)에서 한의학을 비난하는 소재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히포크라테스의 의서(醫書)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유치한 밥그릇 싸움일 뿐 ..동의보감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것일뿐..
은형법 (隱形法 .. 투명인간이 되는 방법) 몇년 전 방송국에서 실제로 실험해 보았지만 실패하였던 방법이다. 흰개의 쓸개와 통초(通草 .. 말린 등칡의 줄기), 계심(桂心 ... 계피의 노란 속 부분)을 섞어 가루로 만든 뒤, 꿀에 반죽하여 알약으로 먹으면 자신의 몸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가리워 진다. 푸른 개의 쓸개가 더 좋다.
견귀방 (見鬼方 ... 귀신을 보는 방법) 생마자(生麻子 .. 역삼씨 생 것)와 석창포, 귀구(풀 이름)를 각각 같은 量으로 꿀에 반죽하고 달걀 노른자 크기의 알약을 만들어 한번에 1알씩 매일 아침에 해를 향하고 먹는데 10일이 지나면 귀신을 볼 수 있다. 인신작량 (人身作兩 ... 幽體離脫 또는 分身 등 몸이 두개로 보이는 방법) 자기 몸이 2개로 되어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이 느껴지면서 어느 것이 정말 자기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알아 볼 수가 없을 때가 있는데 이는 혼(魂)이 나가서 생기는 일이다. 주자, 인삼, 백복령을 진하게 달여서 먹으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가짜 몸뚱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영부부상애 (令夫婦相愛 ... 부부가 사랑하는 방법) 부부간에 의가 좋지 못 할 경우에는 원앙새 고기로 국을 끓여서 알지 못하게 먹이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음력 5월5일에 뻐꾸기를 잡아 다리와 대가리뼈를 차고 다니게 된다. 거투방 (去妬方 .. 질투하지 않게 하는 방법) 율무쌀, 천문동(풀 이름), 붉은 기장쌀을 각각 같은 양으로 하여 가루로 만든 뒤 꿀에 반죽해서 알약을 만들어 남녀가 먹으면 서로 질투하지 않는다. 꾀꼬리 고기를 먹어도 그렇게 된다.
전녀위남법 (轉女爲男法 .. 여자를 납자로 바꾸는 방법) 임신 3개월이 되었을 때는 남녀가 구별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성별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석웅황(石雄黃 .. 천연 비소화합물) 한 냥을 비단주머니에 넣어 임신부의 왼쪽허리에 두르고 있게 하고, 활 줄 한 개를 비단주머니에 넣어 임신부의 왼팔에 차게 하고, 수탉의 긴꼬리 3개를 뽑아서 누워있는 임신부의 자리에 넣고 알려주지 않는다.
흉년에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사는 방법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일 때에는 입을 다물고 혀로 아래 위의 이빨을 핣으면서 침을 모아 하루에 360번 삼키면 좋다. 이런 방법을 점차로 연습해 1,000여번 삼키면 저절로 배가 고프지 않게 되는데 3~5일 동안은 좀 피곤하지만 이때가 지나면 점차 몸이 가벼워지고 든든해진다.
허가 바위
'허가바위'는 탑산 아래 절벽 및 강서구 가양동 산 1~2번지에 구멍 뚫린 바위가 있는데, 이르 허가바위, 허가바위굴 또는 공암(孔巖)이라고 부른다. 허가바위라 부르는 까닭은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구멍 뚫린 바위 즉 공암(孔巖)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전해오므로 주민들은 이곳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읍지(京畿邑誌)에 따르면 허선문(許宣文)은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인 공암촌(孔巖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정벌하러 지나가면서 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미(軍糧米)를제공한 공(功)으로 후일 공암촌주(孔巖村主)로 임명하였다.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허선문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러 가기 위하여 한강에 도착하였으나, 미땅히 건널만한 배가 없어 당황할 때에 허선문이 자신과 마을사람들의 배를 추렴하여 태조 왕건에게 기꺼이 바쳤으며, 군량미까지 거두어 군사들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 후 승리한 태조 왕건은 고마움을 갚기 위하여 허선문을 삼한공신 양천촌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조선 세조시절 북병사(北兵使)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허종(許琮) 이외에 허준, 허옹, 허침(許琛), 허균, 허난설헌 등 많은 인물이 이 바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굴의 크기는 가로 약 6m, 세로 약 2m, 높이 약 5m로 10여명이 들어 갈 수있는 커다란 구멍이 있기 때문에 공암(孔巖)이라고도 부른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허준이 이곳에서 동의보감을 저술하였으며, 후에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