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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자료실 스크랩 또다른 모심과 개벽
야무 추천 0 조회 84 14.02.26 09: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출판사 서평 중에서 -

 

이 책의 연구 과정을 저자의 이력과 더불어 살펴보면,

 

저자 박맹수는, 이 책의 ‘서장(序章)’에서, ‘원불교의 교무’이면서도, 지난 30년 동안 “동학 연구”와 “동학 공부”에 매달려 온 이력의 배경과 그 연구/공부의 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80년 ‘5월 광주’ 당시에 육군본부에 근무한 인연으로 스스로, ‘역사의 짐’을 떠안으면서 저자는 원불교의 교사와 교리, 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대한 접근 끝에,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서의 패배”야 말로 ‘5월 광주’를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의 시발점이 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동학 공부에 접근하게 된다.


특히 저자는 동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80년 당시에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회경제사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상사적/종교사적인 관점에서 동학에 접근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해월 최시형’의 생애와 사상에 집중하게 되어, “38년 동안 수배자의 신분으로 전국을 떠돌며 피신 생활을 하느라 자료를 거의 남기지 못한 해월 선생의 은신처를 일일이 찾아다니고, 흩어져 방치된 1차 사료를 한땀 한땀 발굴하고 취합하여 가면서

‘싸우다시피 공부’한 결과로 <해월 최시형 연구>(박사논문)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87년 6월 항쟁을 비롯한 ‘오늘의 역사 현장’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 ‘이론과 실천’, ‘연구와 공부’를 병행하는 길을 걸어왔다. 한마디로 동학 연구와 사회 참여 그 자체가 ‘자기 수행으로서의 동학 공부’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1994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의 국내 송환 실무를 맡게 되면서, 동학 연구의 방향 또한 일대 전환을 가져 오게 되었으니, 바로 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과 진압에 나섰던 일본군의 역할을 주목하게 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인 의미’와 ‘제국 일본이 그때 그 자리에서 무엇을 했던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일본에 4년 동안이나 체류하면서, 그때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1차 사료를 발굴하게 되었고, 동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새롭게 심화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동학은 단지 혁명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뭇 생명을 살려 내기 위한 생명사상의 발현 내지 생명운동의 또 다른 모습”이었음을 발견하고, 자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발견과 자각 또한 이념적, 이론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한살림 운동의 실천과 무위당, 표영삼 선생 등과의 만남과 사숙, “모심과 살림 연구소” 운영위원장으로서의 생명 평화 운동에 대한 접근 등의 실천과 병행하는 과정에서 성숙된 것임은 물론이다. 또한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나카츠카 아키라(中塚 明) 교수 등 일본의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매년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답사하는 등 활발한 한일 풀뿌리교류를 통해 동아시아와의 평화와 공생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지난한 30년 간의 역정(歷程)의 결과물들이 담겨 있으며,

저자는 이를 “동아시아의 발견,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각성과 실천”이라고 결론 짓고 있다.

 

 

 

박맹수 朴孟洙

 

한국근대사 및 일본근대사 전공, 문학박사

 

1955년 전남 벌교 生.

1979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졸.

199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역사학과 박사과정 졸.

2001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졸.

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사단법인 한살림 모심과 살림연구소 운영위원장.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나카츠카 아키라(中家明) 교수 등 일본의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매년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답사하는 등 활발한 한일 풀뿌리 교류르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2009, 모시는 사람들) 『동경대전』(2009, 지만지총서)

『이단의 민중반란』(역서, 2008, 역사비평사). 『개정판 한국 근대사강의』(공저, 2007, 한울아카데미)

『원불교학 워크북』(2006, 원광대출판국). 『한국사상사입문』(공저, 2006, 서문문화사).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역서, 2002, 푸른 역사) 외 다수.

 

주요 논문으로는

동학의 실천운동 - 최제우. 최시형(전봉준), 손병희를 중심으로」(2009).

「김낙철계 동학농민군 활동과 갑오 이후의 동향」(2009).

「동학농민혁명기 전라도 지식인의 삶과 향촌사회 - 강진유생 박기현의 일사를 중심으로」(2008).

「한국근대 미중종교와 비서구적 근대의 길 - 동학과 원불교를 중심으로 -」(2006).

「동학군 유골과 식민지적 실험-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동학군 유골방치사건-」(2004)외 다수.

 

 

 

 

 

서장 동학, 농민혁명, 동아시아 생명평화
제1부동학 사상의 안과 밖
동아시아의 고유한 생명 사상
범부 김정설의 동학관
동학과 한말불교계의 교섭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동학의 역할
한국 근대 민중종교와 비서구적 근대의 길
2부동학의 포덕과 교조신원운동
강원도 지방의 동학 비밀 포교지 연구
동학 교조신원운동
교조신원운동기 삼례 집회에 대한 재검토
보은 취회와 해월 최시형의 역할
금구 원평 취회와 그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기 해월 최시형의 활동
전라도 무장 동학 대접주 손화중 연구
제3부동학농민혁명의 새로운 이해
동학의 남·북접 대립설에 대한 재검토
동학농민혁명과 전주성 전투
동학농민혁명과 우금티 전투
진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기 전라도 지식인의 삶과 향촌 사회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의 성립
제4부동학농민혁명과 제국 일본
『시사신보』의 조선문제인식
동학농민혁명기 일본군의 정보 수집 활동
동학농민혁명기 재조 일본인의 전쟁 협력 실태와 그 성격
동학농민군 유골과 제국 일본의 식민지적 실험
19세기 말 동아시아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왜곡된 기억
동학농민군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머릿말 중에서 -

 

- 중략 -

 

주지하듯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세계사에서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아래로부터의 대혁명'이었다.동학농민혁명은 '시천주' 侍天主와 '보국안민' 國安民, '다시 개벽' 開闢 과  '유무상자' 有無相資, '제폭구민' 際暴救民과 '광제창생' 廣濟蒼生으로 대표되는 혁명이념을 기치旗幟로 내걸고, 연원제淵源制근간으로 하는 동학의 접포接包 조직 안으로 수백 만 민중을 끌어안은 가운데, 1860년부터 1894년까지 무려 35년에 걸친 포덕布德의 토대위에서, 그리고 1892년에서 1893년까지 2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전개한  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라는 합법 운동 단계를 거쳐, 1894년 봄에 충창도 청산靑山,

전라무장茂長, 경상도 진주晉州 등지에서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봉기한 수백만 명의 농민군은 안으로는 전근대적 왕조 체제를 타파하여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탈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조선 왕조 군대와 일본군에 맞서 1년 이상을 치열하게 싸웠다. 동학농민혁명은 5백년 넘게 지속되어 온 '조선 왕조 지배 체제의 종결'을 알리는 혁명인 동시에 한국 근현대 민족 민중 운동의 정점頂点을 이루는 운동이며, 동아시아 삼국의역사를 포함한 19세기 세계사에서 최고이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민중 대혁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같은 자랑스러운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그 역사는 1세기 이상을 철저히 외면당하고 왜곡되어 왔다.예컨데, 동학은 '사람은 모두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거룩한 존재' 侍天主라는 가르침과, '천지만물은 저마다 하늘님을 모시지 않은 존재가 없다' 라는 가르침을 핵심으로 하는 보편적 생명사상生命思想인데도,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동학은 그저 서학西學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잔 대항 이데올로기라는 식으로 오랜 세월 동안 폄훼하여 왔다. 또한 혁명의 배경에는 동학東學이라는 파천황破天荒적 새 사상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이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30년 이상의 오랜 포덕 활동이 있었음에도 해월의 역할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않은 점, 이른바 남접의 전봉준과 북접의 최시형 선생이 혁명 초기부터 동일한 지향을 가지고 함께 싸운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도 전술적 차이에 지나지 않은 양자兩者 간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크게 부풀림으로써 그것이 마치 혁명의 실패 원인인 것처럼 강조해 온 것,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군에 의한 농민 학살이 불법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는데도 100년 이상 그 진실을 규명하지 못했던 것 등은 동학사상과 역사를 왜곡한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책은 '5월 광주'의 상흔을 치유하고자 했던 필자가 지난 30년간 피와 땀과 눈물로 쓴 우리 땅과 우리 선조의역사인 동시에, 혁명의 역사가 깃든 곳이라면 우리 땅은 물론이려니와 이웃 일본 각지까지도 직접 답사하여 쓴'발로 쓴 혁명사'이다. 또한 1세기 이상 외면당하고 왜곡되어 온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이 땅 모든 민초들의 비원悲願을 대변하여 쓴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연구실 안에 틀어 박혀 남이 쓴 책을 참고하여 쓴 글이 결코 아니다. 비록 정치精緻한 논리는부족할지 몰라도 선행 연구에서 전혀 다루지 못했던 인물, 사건, 현장 등을 직접 발굴하고 찾아 내고 답사하여 생동감 있게 묘사하려고 애쓴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실증'實證한 동시에, 국내 및 일본 각지를 누비면서 필자가 처음으로 찾아 낸 1차 사료도 대단히 풍부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1894년 혁명 당시 제국주의 일본 정부와 군부軍部, 저널리즘, 재조 일본인在朝日本人 등의 동향에 대해 이 책이 처음으로 그 실상實相을 상세하게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쪼록 졸저가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조금이나마 부응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비는 바이다

 

 

 

 

 

-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

 

 

동학 다시 읽기

19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우리 학문, 우리 종교’로 등장한 동학(東學)의 핵심 경전 ≪동경대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동학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항하기 위해 성립한 일종의 대항 이데올로기라는 견해다.
동학이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대표적으로 현행(現行)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동학’ 항목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등장한 동학이 서학을 ‘깊이’ 의식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선생은 동학과 서학을 비교해 말하기를, ‘운즉일(運則一), 도즉동(道則同), 이즉비(理則非)’(≪동경대전≫ <논학문>)라 하여 동학과 서학은 하나의 시운(時運)을 타고 나왔으며 추구하는 길[道]도 같지만, 다만 그 ‘이(理)’, 즉 이치는 서로 다르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理)란 도(道)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말한다. 이처럼 수운 선생은 서학을 무조건 배척하고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서학이 지닌 근대성과 보편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학을 그저 서학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 성립된 사상이라고 보는 세간의 이해는 온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학이 지닌 근대성과 보편성을 두루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지닌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함으로써 조선 사람에게 알맞으면서 조선의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고자 했던 민초들의 열화와 같은 소망을 집대성한 사상적 창조의 결과물이 바로 동학이며, 그것을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수운 선생이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둘째, 동학은 기존의 유불선(儒佛仙) 삼교 사상에서 장점만을 따온 혼합 사상이지, 그 자체로 독창적인 요소가 별로 없는 사이비 사상이라는 견해다.
이 같은 견해는 유학[儒學: 성리학(性理學)]이나 불교, 도교 등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주장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학은 유불선 삼교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포함삼교(包含三敎)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유불선만 포함하지는 않았다. 서학(西學)도 포함했다. 서학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감록 사상을 비롯한 민간신앙 요소도 두루 포함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19세기 중엽 이 땅에서 유행하던 모든 사상을 다 포함해 성립된 사상이 바로 동학이다. 그런데 동학은 기존 사상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저 포함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즉 ‘접화군생(接化群生)’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포함했다. 바로 이것이 동학의 독창적 측면이다. 봉건적 굴레와 외세의 침탈 때문에 죽어가는 뭇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서학, 더 나아가 민간신앙마저 포함해 이 땅의 새로운 생명 사상으로 정립해 낸 것이 바로 동학이다. 그러므로 동학이 기존 사상을 포함한 것만 주목하고, 새롭게 창조해 낸 독창적 요소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동학을 이해하는 온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하겠다.

셋째, 동학을 단순히 서양의 ‘Religion[종교(宗敎)]’으로 이해하는 견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학은 결코 서양의 ‘Religion’이 아니다.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동학은 ‘Religion’이라는 용어, 즉 그것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용어가 이 땅에서 대중화되기 이전에 성립했다. 우리나라에서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라는 용어가 대중화된 것은 대체로 1900년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같은 근대적 신문, ‘대한학회’와 ‘기호흥학회’ 등과 같이 근대문화운동을 펼치던 각종 학회들이 잡지들을 속속 발간해 내면서 비로소 ‘종교’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철학(哲學)’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용어 역시 일본을 통해서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동학이 ‘종교’, 즉 ‘Religion’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인가. 수운 선생 말씀을 빌리자면, 동학은 ‘도(道)로서 말한다면 하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천도(天道)요, 학(學)으로서 말한다면 동쪽, 즉 조선 땅에서 받았기 때문에 동학(東學)’(≪동경대전≫ <논학문>)이라 했다. 이를 풀어 말하면, 수운 선생께서 창시한 가르침은 서학(西學)이 아니라, 도라는 관점에서는 천도, 즉 하늘의 길이라 할 수 있고, 학이라는 관점에서는 동학, 즉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운 선생께서 말씀하는 ‘천도’와 ‘동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도란 사람이 마땅히 밟아가야 할 길이요, 학이란 사람이 마땅히 배우고 익혀서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필자가 동학 공부를 하면서 동학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 교단의 원로(元老) 어른들께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일찍이 동학의 선배들은 동학을 ‘믿는다’ 하지 않고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학이 ‘Religion’이 아닌 까닭이 숨어 있다. ‘동학을 한다’는 말은 동학이야말로 어디까지나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길이요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는 뜻이겠고, 이른바 유일신(唯一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요약하자면, 동학은 그저 믿기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도(道)이자 학(學), 즉 도학(道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서학의 장점을 두루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극복해 가장 자주적(自主的)이고 주체적(主體的)인 ‘조선의 학문, 조선의 사상’을 지향하고자 했던 동학! 포함삼교뿐 아니라 서학과 민간신앙마저 널리 포함해 뭇 생명을 다 살리기 위한 새로운 생명 사상으로 등장했던 동학! 그리고 서양식 종교가 아닌 조선 땅 도학의 새로운 전개로서 경상도 경주 땅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동학!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동학을 온당하게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이런 동학은 어떤 시공간을 배경으로 창도된 것일까?

1894년 이른 봄(정확히는 1894년 음력 1월 10일)부터 1895년 봄(1895년 양력 3월 말)까지 1년 이상 조선(朝鮮) 팔도를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민중 혁명의 소용돌이로, 다시 말해 후천(後天) 5만 년을 향한 동세개벽(動世開闢)의 대(大)혁명 속으로 진보적인 일부 양반 지식인을 포함한 전 조선 민중을 휘몰아간 그 바람! 그 바람은 과연 어디로부터 불어왔던 것인가?

1894년의 동학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혁명 과정에서 동학이 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중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역할이 이른바 종교 외피적(外皮的) 역할이었든, 주도적 역할이었든 간에 동학이야말로 갑오동학혁명의 이념적 기반이요, 조직적 기반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의 견해가 일치한다. 이것은 곧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삼남 지방을 포함한 조선 팔도를 휘감고 돌았던 갑오년 동학혁명 바람의 근원지가 바로 동학이 창도된 경상도 경주 땅이요, 그 바람의 단초를 제공한 주인공이 바로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라는 데에 우리 모두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동학혁명이 있기 30여 년 전인 1860년에 경상도 경주 땅 용담(龍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1860년 음력 4월 5일, 경주 구미산 아래 용담정(龍潭亭)에서는 37세의 이름 없는 선비가 하늘님과 묻고 답하는 기이한 체험 ‘천사문답(天師問答)을 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바로 서자(庶子)와 다름없는 불우한 신분으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 선생이었다. 이 기이한 체험에 대해, 일찍이 ‘하늘 밑에서는 제일로 밝은 머리’로 불리던 범부 김정설(凡父 金鼎卨, 1897∼1966) 선생은 4ㆍ19혁명이 있던 해이자 동학 창도 백 주년이 되던 1960년에 이렇게 말했다.

“금년으로서 백 년 전, 경신(庚申) 4월 5일(음)에 정말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 경주(慶州) 일우(一隅)인 현곡면(見谷面) 마룡동(馬龍洞)이란 소조(蕭條)한 산협(山峽)에서 발생했다. (중략) 37세 되던 경신년 4월 5일에 수운 최제우는 천계(天啓)를 받았다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역사도 왕왕 기적적 약동이 있는 모양인지라 혼수(昏睡)에 취몽(醉夢)으로 지리(支離)한 천년의 적막을 깨뜨리고 하늘에서 외우는 소리는 웬 셈인지 마룡동 최제우를 놀래 깨운 것이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歷史的) 대강령(大降靈)’이며 동시에 신도성시정신(神道盛時精神)의 ‘기적적 부활’이라 할 것이다. ‘국풍(國風)의 재생’이라 할 것이며, ‘사태(史態)의 경이(驚異)’라 할 것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풍류정신(정음사, 1986)≫ <최제우론>(1960)

1958년부터 건국대학교 부설 동방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당대의 석학들에게 동양사상을 가르치고, 불자를 만나면 선(禪)과 교(敎)와 수행에 관해 말씀을 나누고, 유자를 만나면 그 유자에 맞는 경전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가톨릭 신부와 만나면 스콜라철학이나 사회윤리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목사를 만나면 실천적인 애긍이나 종말론, 사회정의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는 등, 동서양 종교와 철학에 무불통지(無不通知)였던 범부 선생이 최고의 찬사를 동원해 경탄한, 1860년 4월 5일의 천계(天啓), 즉 하늘님과의 문답을 통해 수운 선생은 마침내 동학을 창도하기에 이른다.
대해장강(大海長江)도 그 근원이 있게 마련이듯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종교가 등장할 때에도 반드시 뿌리가 되는 사상이나 종교가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불교의 경우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기타, 요가 철학 등으로부터 사상적 은혜를 적지 않게 받았다. 중국 송나라 때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한 성리학(性理學) 역시 원시 유학(原始儒學)은 물론,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선불교(禪佛敎)로부터 커다란 영향과 자극을 받은 가운데 성립되었다.
그렇다면 범부 선생이 ‘국풍의 재생이요, 사태의 경이라’ 찬탄한 동학 탄생의 사상적 배경은 어떤 것일까? 중요 내용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동학은 첫째, 우리의 고유 사상인 풍류도(風流道=國風)를 뿌리로 삼아 성립되었다. 풍류도는 ‘포함삼교 접화군생(包含三敎 接化群生)’을 지향한다. 모든 사상과 두루 소통하면서 뭇 생명을 다 살려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상이다. 동학은 이 같은 풍류도를 후천시대의 개벽(開闢) 상황에 맞게 재정립해 부활시킨 것이다. 범부 선생이 말한 ‘국풍의 재생’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

동학을 낳은 둘째 사상적 원천은, 신라 천년 역사를 지탱해 온 대승불교(大乘佛敎)라 하겠다. 그 가운데서도 원효(元曉, 617∼686) 스님의 화쟁사상(和諍思想) 및 실천적 불교운동은 수운의 사상적 고뇌 및 실천과 통하는 바가 많다. 삼국 간의 정복 전쟁 시대, 즉 피로 날이 새고 피로 날이 지던 전쟁 시대를 산 원효와 ‘백성이 단 한때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民無四時之安)’ 조선말 대격동기를 살았던 수운은 모두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새로운 사상가로 우뚝 섰다.

셋째, 동학이 나오게 된 근원에는 수운의 부친 근암 최옥(近庵 崔?, 1762∼1840)으로 이어져 내려온 퇴계학(退溪學)이라는 학문적 전통이 있다. 수운은 어릴 때 부친을 스승 삼아 유학을 깊이 공부했는데, 부친 근암 공은 경주 일대 선비 4백여 명과 교류하던 유명한 학자이자 퇴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선비였다. 이런 사실은 ≪도올심득 동경대전≫(김용옥 지음, 2004, 177쪽)에서 상세하게 밝혀진 바 있다.

넷째, 동학 성립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사상은 서학(西學)이다. 흔히 서학을 천주교, 즉 종교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오해다. 서학은 서양 학문 또는 서양 문명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비롯해 서양 학문, 서양의 정치경제, 서양의 과학기술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개념이 바로 서학이었다. 이 같은 서학이 동학을 창도하는 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수운은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과 교류한 흔적이 있고, 지식인 사이에서 유통되던 다양한 서학 서적을 탐독했다.
다섯째, 동학은 또한 민간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던 샤머니즘[巫敎]은 물론 ≪정감록≫ 같은 비기도참(秘記圖讖) 사상도 수용했다. 동학은 그냥 저절로 솟아난 것이 아니었다. 유불선 삼교 사상을 사상적 창조의 기반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당시 가장 첨단 사상이던 서학마저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조선 후기 민중 사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정감록≫ 사상도 포용했다. 이런 사실은 동학의 사상적 기반이 매우 깊고도 다양하며, 수운 선생의 학문적 축적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동학은 ‘우리 민족 특유의 민중적인 생명 사상을 확고한 중심으로 하여 그 기초 위에서 유교, 불교, 노장(老莊)사상과 도교와 기독교 등 제 사상의 핵심적인 생명 사상을 통일하되, 특히 민중적인 생명 사상, 민중적인 유교, 민중적 불교, 민중적 도교와 민중적 차원에서 새로 조명된 노장사상과 선 사상(禪思想), 민중적 기독교 사상 등의 핵심적인 생명 원리를 창조적으로 통일한 보편적 생명 사상’(김지하, ≪남녘땅 뱃노래≫, 두레, 1985, 110쪽)으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학 창시자 수운 선생은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선생은 1824년에 경주 양반 최옥에게 재가(再嫁)한 과부 한씨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당시 과부의 자식은 아무리 재주가 출중해도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경국대전≫ <형전> 참조). 따라서 선생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에서도 따돌림을 당해야 했고, 문중에서도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다. 기록에 의하면, 동네 아이들이 “저 복술(수운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이 놈의 눈깔은 역적질할 눈깔이라”고 손가락질하자, “오냐! 나는 역적이 되겠으니 너희는 착한 사람이나 돼라”고 되받아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적 차별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과부의 자식이긴 했지만 선생은 근암 공의 두터운 사랑과 후광 덕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선생은 퇴계 선생으로부터 근암 공으로 이어져 내려온 정통 퇴계학(退溪學)의 학풍을 충실히 계승하는 학문적 수련을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 경제적 학문적 후원자였던 아버지 근암 공이 1840년(수운의 나이 17세 때)에 사거(死去)하자 수운 선생은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신세가 되었다. 버팀목 같았던 아버지가 떠나자 수운 선생은 더 이상 한가롭게 학문이나 하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했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이에 선생은 무과(武科)에 응시할까 하다가 그만두었고, 경상도 남부 지방에서 나는 원철(原鐵) 도매상(경상도 남부 지방은 가야시대 이래 철 생산지로 유명했다)을 열어 생계를 도모하려다 쫄딱 망하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가산은 거듭된 사업 실패로 다 날려버렸으며 물려받은 집마저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수운 선생은 이제 그 어디에도 안접(安接)할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20세 이후부터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전국을 방랑하며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절치부심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났다. 선생은 1859년 36세 되던 해에 오랜 처가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마침내 경주 용담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신세로! 소업교위(所業交違)!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이것이 바로 동학 창도 이전, 수운 선생의 모습이었다. 41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다 간 수운 선생의 삶을 간략한 연표로 제시한다.

1824년 10월(1세)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 마룡동에서 출생.
1833년(10세) 모친상.
1840년(17세) 부친상.
1842년(19세) 울산 박씨와 결혼.
1843년(20세) 화재로 가정리 생가 전소.
1844년(21세) 길을 떠남, 가족들은 처가에 맡김.
1859년 (36세) 경주 용담으로 돌아옴.
1860년 4월(37세) 상제와의 문답[강령 체험(降靈體驗)]을 통해 득도. 득도 후에도 1년간 수련 계속.
1861년 6월(38세) <포덕문(布德文)> 지음. 포덕 시작. 해월 최시형 동학 입도.
1861년 11월 경주 일대 유림들의 박해로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으로 피신. <논학문(論學文)>[일명 동학론(東學論)]을 지음.
1862년 3월 (39세) 은적암에서 경상도 흥해 손봉조의 집으로 돌아옴.
1862년 12월 손봉조의 집에서 접주제(接主制) 실시.
1863년 7월 (40세)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경상도 북부 지방 포덕책임자)’에 임명.
1863년 12월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 정운구에게 체포됨.
1864년 3월 (41세) ‘좌도난정(左道亂正: 그릇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힘)’의 죄목으로 효수형(梟首刑)을 받고 순교.

1860년 음력 4월 5일에 수운 선생은 경주 용담정에서 이상한 체험을 한다. 몸이 몹시 떨리고 한기(寒氣)를 느끼는 가운데, 공중에서 무슨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 하여[수심정기(修心正氣)] 말씀의 주인공을 찾아 문답을 나누기 시작한다. 아무런 형체도 없이 공중에서 말씀하는 그 주인공은 바로 단군 이래 이 땅의 민중이 늘 마음으로 모시고 받들어온 ‘하늘님[상제(上帝), 천주(天主)]’이었다. 수운 선생이 이날 하늘님과 문답을 나누며 ‘내림, 즉 강령(降靈)’을 체험한 과정은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림(천사문답)’ 체험을 통해 수운은 ’하늘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 즉 천도(天道)를 받았다. 또 21자 주문(呪文)과 영부(靈符: 신령한 부적)도 함께 받았다. 하늘님은 특히 주문과 영부를 가지고 민중을 가르치면 스스로 장생할 뿐만 아니라, 천하에 널리 덕을 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수운에게 포덕(布德: 포교와 같은 뜻)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수운은 아무리 믿으려 해도 ‘내림’ 체험 과정에서 나타난 하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림’ 체험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하늘님이 말씀하신 내용대로 실행해 보면서 그 효과를 검증해 보기에 이른다. 내림 체험 후 1년여에 걸친 수련 결과, 과연 하늘님 말씀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이에 1861년 6월부터 본격적인 포덕 활동을 시작한다. 동학 교단 최초의 역사책에는 수운의 포덕 활동 개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유년(辛酉年, 1861) 봄에 이르러 포덕문1)을 지었다. 때는 마침 6월이 되어 덕을 널리 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어진 선비들을 얻고자 했다. 자연히 소문2)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강시원, ≪최선생문집도원기서≫, 1879

1861년 6월에 수운 선생이 포덕을 시작하자마자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재해, 콜레라와 같은 괴질의 주기적 유행, 이양선(異樣船) 출몰과 천주교의 전파에서 오는 위기의식 등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민중은 ‘용담에서 신인이 났다’며 다투어 선생을 찾아와 나아갈 길을 묻기 시작했다. 용담으로 물밀듯 찾아오던 민중의 모습을 실감나게 전하는 기록이 있다.

물음: 그러니 말씀이지, 그때에 대신사3)를 찾아오는 사람이 과연 많기는 많았습니까?
대답: 많고말고. 많아도 여간 많았나. 마룡동4) 일판이 대신사 찾아오는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 아침에도 찾아오고 낮에도 오고 밤에도 오고. 그래서 왔다 가는 사람, 하룻밤 자는 사람, 여러 날 체류하는 사람. 그의 부인하고 나하고는 그 손님 밥쌀 일기에 손목이 떨어져 왔었다. 낮에 생각할 때에는 저 사람들이 밤에는 어디서 다 잘꼬 했으나 밤이 되면 어떻게든지 다들 끼여 잤었다. 그때 용담정 집은 기와집에 안방이 네 칸, 부엌이 한 칸, 사랑이 두 칸 반, 마루가 한 칸, 곳간이 한 칸이었는데, 안방 한 칸을 내놓고는 모두 다 손님의 방이 되고 말았었다.
그리고 이것을 보시오. 그때 찾아오는 제자들이 건시5)와 꿀 같은 것을 가지고 오는데 그 건시가 어찌나 들여 쌓였던지 그 건시를 나눠 먹고 내버린 싸릿가지가 산같이 쌓여서 그 밑에서 나무하러 오던 일꾼들이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그 싸릿가지를 한 짐씩 가지고 가곤 했었다.

소춘(김기전) <대신사 수양녀인 팔십 노인과의 문답>
<<신인간>>16, 1927년 9월호, 16∼17쪽 및 <<소춘 김기전 전집>> 2, 국학자료원, 55쪽

위에 인용한 내용은 수운 선생이 득도한 직후에 ‘노비 해방’을 해서 수양딸로 삼은 주씨 노인이 1927년에 증언한 내용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곶감을 들고 찾아왔기에 지나가던 나무꾼들이 곶감 먹고 나서 버린 싸릿가지를 한 짐씩 지고 갔을까? 다음의 기록을 보면, 주씨 할머니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경 새재로부터 경주까지는 4백 리 남짓 되고 고을은 10여 개 정도 되는데 날마다 동학에 대한 말이 들려오지 않은 적이 없었고, 경주 근처의 여러 고을에서는 그 말이 더욱 심하여 저잣거리의 아낙네와 산골짜기 어린아이들까지도 동학의 글을 외며 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말하기를 ‘위천주(爲天主)’ 또는 ‘시천지(侍天地)’6)라고 하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한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정운구 서계>, ≪비변사등록≫
1863(癸亥)년 12월 20일조

정운구는 1863년 12월, 조정에서 수운을 체포하기 위해 파견한 선전관(宣傳官)이었다. 그는 한양에서 문경새재를 거쳐 경주로 내려가 수운을 체포하는 전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서계(書啓)를 남겼는데, 위 내용은 그 서계에 있는 내용이다. 동학을 탄압한 관리가 남긴 기록에서조차 동학에 대한 민중의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도대체 당시 민중은 왜 그렇게 다투어 경주 용담으로 몰려갔을까? 그 대답은 아래에 있다.

귀천과 등위를 차별하지 않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유박(?薄)7)을 설치하니 홀아비와 과부들이 모여들고, 돈과 재물을 좋아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우니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기뻐했다(好財貨而有無相資 卽貧窮者悅焉)
<동학배척통문>, 1863

위에 인용한 내용은 동학을 배척한 보수 유생들이 남긴 통문 속에 있는 내용이다. 보수 유생의 눈에 비친 동학을 보면, 첫째 동학은 귀천과 등위에 차별이 없는 신분 평등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둘째 동학은 남녀차별이 없는 양성평등의 조직이라는 것이며, 셋째 동학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돕고 도움을 받은 생활공동체 성격이 강한 조직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초기 동학의 성격은 신분제의 억압, 무서운 괴질과 자연재해, 그리고 기근으로 한 해에 수만 명이 죽어가는 시대에 민중의 귀의처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만했던 것이다.
1861년 6월 이후 민중은 동학으로 다투어 들어갔다. 그 결과 수운 선생이 도를 펴고 있던 경주 용담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던’ 세상을 안타깝게 여기는 민중의 귀의처가 되었고, 수운은 그런 민중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신인(神人)이자 진인(眞人)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이 같은 민중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도리어 수운을 체포해 처형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수운은 그렇게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3월 10일에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 장대(將臺: 경상감영의 훈련장)에서 삿된 도로 민중을 현혹했다는 이른바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효수되고 말았다. 참으로 때 이른 죽음이자 가슴 아픈 죽음이었다. 그 죽음을 시인 김지하는 이렇게 읊고 있다.

 

아아 꽃 한 송이
이슬처럼 지네
매운 눈보라 속
철 이른 꽃 한 송이
이슬처럼 지네
비바람 눈보라 거듭 지나면
영원한 봄 오리라 말씀하신 분
오만 년 후천개벽 때가 찼으니
이 땅이 먼저리라 말씀하신 분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 섬기되
한울같이 섬기라 말씀하신 분
수운 수운
우주의 꽃 한 송이
지네 지네
아득한 고향 돌아가네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음 없는 고향
온 세상 꽃 피어날
영원한 봄의 시작
죽음이여
수운의 죽음
아아
이슬처럼
철 이른 꽃 한 송이
눈 속에 지네
김지하, ≪이 가문 날에 비구름≫

(동광출판사, 1988, 92∼93쪽)

 

이로써 선생은 득도한 지 4년 만에, 그리고 1861년 6월부터 정식으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공적(公的) 생애를 죽음으로써 마감한다. 그런데 왜 수운 선생은 갑자년인 1864년에 순교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필자는 그 대답을 선생이 그토록 절절하게 외친 ‘다시 개벽’의 사상, 즉 후천개벽사상에서 찾고자 한다.
수운 선생은 한국의 근대 종교가 가운데 처음으로 개벽 사상을 강조했다. 원래 개벽이란 말은 주역(周易)에서 유래하지만, 그것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수운 선생 덕분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개벽을 말하되 ‘다시 개벽’, 즉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말했다. 왜 후천개벽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선생은 일찍이 20세를 전후해 10여 년 이상 전국을 방랑하며 세태 변화와 인심 풍속의 해이 현상을 목격했다. 선생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마디로 요순(堯舜)의 정치로도 부족하며 공맹(孔孟)의 말씀으로도 부족한 시대였다.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과 같은 기존 윤리가 있긴 있었지만,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한, 그야말로 인심 풍속이 괴이하기 그지없는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상해(傷害)의 운수로 가득 차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 간에 크게 다치고 해로움을 당하는 시대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잦은 민란(民亂)과 자연재해, 가뭄과 흉년, 횡포한 관리들의 가렴주구 등으로 풀뿌리 민중이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없던 시대였다. 십이제국(온 세상이라는 뜻)에는 괴질(怪疾: 콜레라 또는 장티푸스)이 대유행해 한 해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여기에 더하여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동점(東漸)해 오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와 싸워서 이기는 바람에 우리나라에 언제 순망치한8)의 민족적 위기가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대 그 자체였다.


민중은 혼란하기 그지없는 시대 상황 속에서 막지소향(莫知所向), 즉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기대야 할지 이리저리 헤매고만 있었다. 어떤 이들은 곧 일어날지도 모를 난리를 피하기 위해 십승지(十勝地)를 찾기에 바빴고, 어떤 이들은 괴질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부와 선약(仙藥)을 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으며, 또 어떤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정감록≫을 비롯한 온갖 비결(秘訣)을 구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여기에 생각이 좀 있는 지식인들은 자신을 진인이나 신인, 이인(異人)이라 가탁함으로써 민중을 끌어 모아 썩어 문드러져 가는 세상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민심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면서 요동쳤고, 무엇인가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야말로 폭풍 전야의 고요랄까, 한 점 불씨를 기다리는 마르고 마른 대평원이랄까, 민심은 천지가 개벽되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변화, 이른바 대개벽(大開闢)의 계기가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전국을 방랑하면서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시대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개벽이 어서 빨리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민심을 읽었던 선생은 마침내 1860년 4월 5일에 득도를 하고 나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라 하여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이 오고 있음을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이제 역사는 하원갑(下元甲)의 시대, 즉 낡고 병들고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선천시대는 가고, 상원갑(上元甲), 즉 새롭고 생명이 넘치고 모든 모순이 다 해결되는 후천시대가 오고 있으며, 상원갑 호시절에는 가난하고 천한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되고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주지하듯이, 동양에는 고대부터 갑자(甲子) 간지(干支)가 들어가는 해에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사상이 있었다. 이 같은 사상을 구체적으로 체계화해 제시한 이가 중국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이다. 그는 ≪황극경세서(黃極經世書)≫에서 우주의 역사는 춘하추동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따라 원회운세(元會運世)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주 1년, 즉 1원(元)은 12만 9600년이요, 그 1원에는 다시 12회(會)가 있으니 1회인 1만 800년마다 소개벽(小開闢)이 일어난다고 했다. 또한 1회에는 30운(運)이 있으며, 1운은 360년이고, 1운에는 12세(世)가 있으니, 1세는 30년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1원은 12회, 360운, 4320세, 12만 9600년이 된다. 소강절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첫 회(會)인 자회(子會)에서 시작되어 6회째인 사회(巳會)까지 성장하며, 후반부 첫 회인 오회(午會)부터 해회(亥會)까지는 줄어드는데, 우주의 가을에 해당하는 미회(未會)에서는 우주의 시간대가 새로운 질서로 접어드는 후천개벽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소강절은 또한 우주의 1원(元) 12만 9600년 가운데 인류 문명의 생존 기간은 건운(乾運)의 선천 5만 년과 곤운(坤運)의 후천 5만 년이며, 나머지 2만 9600년은 빙하기로 천지의 재충전을 위한 휴식기라고 보았다. 요컨대 소강절에 따르면 우주의 가을이 되면 우주의 봄과 여름인 선천 5만 년이 끝나고, 후천개벽의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수운 선생이 득도 이전에 소강절의 사상을 깊이 공부했는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구석구석에 소강절의 원회운세론(元會運世論)과 서로 통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수운 선생의 ‘다시 개벽’ 사상은 소강절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수운 선생의 ‘다시 개벽’ 사상은 소강절의 원회운세론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란 수운의 ‘다시 개벽’ 가르침이 그저 말로만 외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수운 선생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경주 용담으로 찾아오는 모든 제자에게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모두 평등한 존재, 거룩한 하늘님과 같은 존재로 대할 것을 가르쳤다.

이처럼 수운 선생은 경신년(1860)에 하늘님으로부터 받았던 ‘무극대도, 그 무엇에 비길 바 없는 가장 크고 위대한 가르침’을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천하도록 했고, 이 같은 가르침은 민중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다시 개벽의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남보다 먼저 알았을 뿐 아니라, 천지개벽과도 같은 근본적 변화를 갈망하는 민심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던 전례 없는 가르침(귀천과 남녀 등의 차별이 없는 평등사상)이 당시 민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없는 자와 있는 자, 지식이 많은 자와 지식이 없는 자, 어떤 특별한 재주가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이 서로 베풀고 나누도록 가르치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동학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민중은 수운을 신인 또는 진인이라 생각하면서 다투어 모여들여 끈끈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경주와 경상도의 보수 유생, 나아가 조선 왕조 지배층은 다시 개벽을 말하고 사람을 하늘처럼 모시라고 말하는 수운 선생 밑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민중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갑자년에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생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수운의 ‘다시 개벽’ 사상은 불온하기 그지없는 사상이었다. 이것이 바로 갑자년에 수운 선생이 처형당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집약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동경대전≫의 일명 <동학론(東學論)>으로 불리는 <논학문(論學文)>에 잘 집약되어 있다. <논학문>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제정한 21자 주문(二十一字呪文)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있는데, 21자 주문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 주문(十三字呪文)으로 집약되며, 그것은 다시 ‘시천주(侍天主)’ 석 자, 마지막에는 ‘시(侍)’ 한 자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학사상의 핵심은 바로 시(侍) 한 글자, 즉 ‘모심’이란 말에 다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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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은 동학혁명의 중요한 지역이며,

동시에 상생과 화해를 근간으로 하는 동학의 정신이

혁명과정에서 매우 잘 나타난 지역이 아닐 수 없다.

부안은 곧 혁명이라는 실천과 정신이 한데 어우러진

동학의 중요한 지역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 경주에서 일어난 동학,

동학의 정신이 이곳 전라도 부안에서

그 실천으로써 꽃 핀 것이라고 하겠다.

 

- 본문 中 -

 

 

 

김낙철 역사(金洛喆 歷史)

 

부안 대접주 김낙철(1858~1917)이 1890년 동학에 입도한 이래

1917년 천도교 성도사를 지내기까지의 일대기를 국한문으로 기록한 자전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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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계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보국報國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갓 벼슬자리만 탐내며 국왕의 총명을 가린 채 아첨을 일삼아

충성스러운 선비의 간언을 요언妖言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일컫는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우리들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곡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잇으니 국가의 위망危亡을 좌시坐視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이 순의詢議하여

지금 의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 1894년 3월 20일 「무장포고문」 中

 

 

 

손화중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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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8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개벽의 꿈』

 

 우선 내 구미를 당기는 대목 위주로 훑어내리는데도 며칠이 걸렸다.

시력과 이해력이 정비례 한다는 사실을 감안 한다 해도

나름 아직까지는 속독파라 우기고 싶은데 말이다.

 

이내 사고와 코드가 맞는다 싶은 대목은

아예 통째로 들어내어 머리에 각인 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

당연히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는 말씀.

 

박맹수 교수.

년 초, 경주 용담수도원에서 그가 얼마나 멋진 학자인지 알아 보긴 했었다.

『개벽의 꿈』으로 '오월 역사의 짐'을 내려놓겠다는 필자의 외침에  큰 박수를 보낸다.

 

그가 걸어온 가시밭길 이력을 그저 두 눈으로만 훑기가 미안하여

'머릿말' 일부나마 자판에 두드려 보았다.

 

박교수의 오월 광주 상흔과

내가 겪었던 오월 트라우마에 대한 또다른 모심이자 개벽이라는 생각에서다.

 

 

 

 오로지 심고(心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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