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옛 가르침을 창조적 계승, 유교 창시 논어, 도덕경과 함께 성전으로 추앙 과 대신 현재에 충실 강조 유교는 일반적으로 공자,551479년 BC가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유교 전통은 공자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공자 자신도 겸손하게 술이부작이라 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고 했다. 요와 순 임금들로부터 문왕과 주공을 통해 내려오는 가르침을 전수하는 사람일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 공자는 창조적 전수자creative transmitter였다.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이 공자에 의해 집대성되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공자를 영어로 Confucius라고 하는데, 공부자의 라틴어식 표기다. 이 이름을 따서 서양에서는 유교를 Confucianism이라고 한다. 초대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사상가의 이름을 모두 라틴어식으로 옮겼는데, 그 후 모두 중국 발음으로 다시 바꾸었지만 공자와 맹자Mencius만은 라틴어식의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공자의 본래 이름은 구이다. 구는 언덕이라는 뜻인데, 이마가 언덕처럼 튀어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자라는 이름에 들어간 자는 공자, 노자, 맹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공자의 자는 중니이다. 논어에 보면 내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삼십에 일어서고, 사십에 흔들림이 없어지고,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육십에 하늘의 뜻을 쉽게 따를 수 있게 되고, 칠십에 내가 하고 싶은 바를 해도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의 삶을 집약하는 말인 셈이다. 한대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 47장과 기타 문헌에 따르면 공자는 춘추전국 시대 노나라, 지금의 산동성 곡부, 중국 발음은 취푸에서 태어났다. 세 살쯤에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가 아들을 가난한 중에 홀로 키웠다. 19세 때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 둘을 얻었다. 딸은 공자보다 먼저 죽고, 아들은 대를 이어 지금 77대가 대만에 산다고 한다. 공자의 직계 손녀 중 하나가 2007년 유대인계 미국 영화감독과 결혼해서 공자도 서양 사위를 얻은 것인가 화제가 되었다. 현재 공자의 후손이 200여만 명 되는데, 한국에도 3만4천 명 정도 산다고 한다. 공자는 19세쯤 관리로 일했는데, 23세에 어머니가 죽어 3년 동안 곡을 하느라 관리직에서 물러났다. 26세쯤 다시 공직을 잡았지만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선생님으로 일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일설에 따르면 37세에 당시 주나라 수도에 가서 주나라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거기서 도서를 관장하던 노자를 만났는데, 노자가 공자를 보고 그대의 건방진 태도와 욕망을 버리고, 겉치레와 감각적 취미를 멀리하시오.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오. 라 하였다. 공자는 밖으로 나와 제자들에게 새는 날다가 화살을 맞고, 고기는 헤엄치다 낚시에 걸리고, 짐승은 달리다가 덫에 걸리지만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얼마나 위대한 용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노자의 꾸지람을 듣고도 그를 용으로 본 공자의 대인다운 풍모가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50세쯤에는 노나라에서 지금의 법무장관이나 수상 비슷한 벼슬에 올라 23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지만, 임금이 이웃 나라에서 보낸 미인계에 넘어가 공자의 간언을 듣지 않고 정사를 게을리 하므로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