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막지하게 재미있는 소설 좀 읽어보자!
커트 보네거트는 한국에서 마니아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마크 트웨인 이후 가장 웃기는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웃기기도 하지만 미국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과 같은 반열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커트 보네거트는 본질적으로 유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갈라파고스 Galapagos》를 비롯해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은 읽다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엄청나게 웃긴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작가 특유의 지독한 블랙 유머와 고도의 풍자적 묘사가 한데 어울려 풍성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커트 보네거트가 오로지 유머 감각 하나만으로 승부하는 작가였다면 오늘날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분명 커트 보네거트의 강렬한 개성은 유머에 기반하고 있지만, 유머는 작가가 독자와 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주 효과적인 화법일 뿐이지 그 자체가 대화의 목적이나 주제가 될 수는 없다.
이제 《갈라파고스》를 시작으로 《고양이 요람》, 《제5도살장》, 《타임퀘이크》 등 커트 보네거트의 배꼽 빠지는, 그러나 인류에게 준엄한 경고가 담긴 유쾌한 소설들을 읽어보자.
갈라파고스, 다윈, 보네커트 ― 소설을 읽기 전에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연구로 유명해진 에콰도르의 섬. 다윈은 1835년 비글호를 타고 남미 여러 곳을 방문하던 중 갈라파고스에서 거북과 새 등을 관찰하고 진화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다윈의 관심을 끈 것은 핀치새. 다른 세계와 격리된 이곳에서 핀치새는 단계적 유전적 변형에 의해 새로운 종이 나왔다는 것이다. 현재 이 섬에는 다윈의 업적을 기리는 연구소가 있으며 진화론 발상지라는 유명세로 관광지가 되었다. 커트 보네거트는 "다윈이 이 섬들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이 섬들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보네커트는 1981년 부인과 함께 이 섬을 방문한 후 "갈라파고스 제도의 물개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즐겁게 살고 있으며 영리하다"고 말한 바 있다.
줄거리
이 책은 한 마디로 SF와 순문학의 경계에 있는 작품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주요 키워드로 삼아 1백만 년 후 인류의 미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품격 있는 블랙 유머와 고도의 풍자적 묘사, 포스트모던한 문체 등 그 문학성 또한 대단히 빼어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결말부터 말하면, 자연 선택의 법칙에 의해 인류는 그 커다란, 그리고 대단한 뇌가 퇴화하고 마는데, 생존해 나가는 데 그다지 쓸모가 없었기 때문. 그래서 엄격하고도 자비로운 대자연은 인류를 다른 방향으로 진화시키고 만다.
1백만 년 후의 한 유령(레온 트라우트)이 1백만 년 전(1986년)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백만 년 전, 그러니까 1986년 11월 27일 에콰도르의 해안도시 구아킬에는 '세기의 자연 유람'이라는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이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인하여 갈라파고스 제도의 한 섬에 좌초되는데, 결국 그들은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되고 만다. 엄청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덮치고, 급기야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마지막 생존자들을 제외한 전인류가 멸망하고 말기 때문이다.
어떻게 읽을까
이 책은 제1부 '아주아주 먼 옛날'과 제2부 '그 뒷이야기'로 아주 단순한 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사실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제1부는 '세기의 자연 유람'을 떠나기 위해 모이는 과정과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한다. 제2부는 1986년부터 30년이 흐르는 동안의 변화와 2016년 마리아 헵번과 선장이 죽은 시점까지를 그린다. 화자는 백만 년 후의 인물로, 백만 년 전인 1986년이 시간을 구분하는 분기점임과 동시에 중요 시점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 동안이 인간 진화(혹은 퇴보)의 전환점이며 거기 등장하는 12명의 인물의 역할을 주목하면 화자(작가)의 의도를 엿보며 즐겁게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웃기는 본문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백만 년 전에는 성인이 된 거의 모든 인간들이 약 3kg이나 나가는 커다란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지나치게 큰 그 사고(思考) 기계는 사악한 계략을 꾸미고 실행하는 면에서도 자기 한계를 몰랐던 것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3kg짜리 두뇌란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었을까?"
"다른 원천은 없었다. 지구는 아주 천진난만한 행성이었다. 그 잘나빠진 인간의 커다란 두뇌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통렬한 풍자
인간 사회의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룬 블랙 유머
커트 보네거트는 불가해한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상사의 모순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꿰뚫어보면서, 유머의 힘을 빌려 이것을 한 편의 소설로 형상화한다. 더글라스 애덤스나 수 타운센드 같은 영국 작가들의 영국식 유머가 어쩐지 능글능글한 구석이 있고, 독일의 에리히 케스트너의 유머가 순박하고 천진하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유머는 우크라이나의 미하일 불가코프를 연상케 한다. 현대 사회를 우울하고 비극적인 공간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실제로 가슴 아픈 이야기를 주된 테마로 하고 있지만, 이를 유쾌한 웃음 속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 괴리감과 당혹감을 던져준다.
《제5도살장 Slaughterhouse-Five》은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고, 《고양이 요람 Cat's Cradle》과 《갈라파고스》는 인류의 전멸을 다루고 있으며,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Breakfast of Champions》와 《제일버드 Jailbird》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자동 피아노 Player Piano》와 〈해리슨 버거론 Harrison Bergeron〉, 〈원숭이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Monkey House〉와 같은 작품은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세계가 무대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은 이렇게 반갑잖은 이야기를 태연한 얼굴로 신나고 즐겁게 늘어놓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작품 속에 내재된 이런 상반된 기질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작품이 갖는 설득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의 유머는 개그라기보다 해학이고, 웃고 즐기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애수와 눈물이 있다.
♧ 저자 소개 커트 보네거트 Kurt Vonnegut 1922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출생. 코넬 대학, 카네기 대학, 시카고 대학 등에서 수학하고 1965년부터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연합군 폭격에 의한 드레스덴의 파멸을 목격하기도 했다. 100여 편의 단편과 《고양이 요람》 《제5도살장》 《타임퀘이크》 등의 장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