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야, 우리 좁은 문, 좁은 길로만 가자!
2024.8.11. 주일오전예배
저는 청소년 때 방학이 되면 독후감을 쓰는 숙제가 있어서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할 때 문교부 추천 권장도서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좋은 책이거니 하고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이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좁은 문’이었어요. 그 책의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고 고상한 종교 소설이었다는 것만 생각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의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런 소설적인 이야기하고는 전혀 딴판이에요. 저는 오늘 ‘형제야, 우리 좁은 문, 좁은 길로만 가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문, 세상 사람이 많이 찾는 그 넓은 길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어떤 성공학에 대한 강의가 아니고 자기 계발, 자아 완성에 대한 행복론도 아니고, 이 땅에서 주의 백성이 어떻게 삶을 꾸려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길로 갈 것인지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지요. 요한복음 10장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자신을 지칭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자의 음성을 따르는 자가 양 된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좁은 문이 양의 문이며 목자의 음성이 좁은 길입니다. 양 된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내 스스로 판단하고 행하는 자가 아니고, 주님께 여쭈어서 허락을 받고 길을 간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허락 속에서 들어가서 주님과의 사귐을 이어갈 때 우리는 천국의 샘으로 주님의 생명의 꼴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섬기며 살아갈 때도 정말 생기 있는 마음으로 주님의 꼴을 전달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서 13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의 마지막 모습이 나옵니다. 엘리사는 죽을 병이 걸려서 그 골방에 계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울면서 하는 말이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엘리사를 귀중히 생각한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이 계셔야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고 당신의 기도가 이 나라를 지킵니다.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참 애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서도 마음에 요동함이 없고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조그만 골방에 있는 엘리사, 그는 좁은 문에 늘 출입하는 사람이었고 좁은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요아스는 좁은 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왕의 행사를 다하며 넓은 길로 다녔던 사람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왕의 그 안타까움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전달해주고자 합니다. “동쪽 창을 여십시오. 활을 쏘십시오. 화살로 땅을 내리치십시오” 그런데 몇 번 내리치라는 말씀은 안 하고 땅을 치라고 합니다. 요아스 왕은 세 번 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크게 노했습니다. “왕이 대여섯 번 쳤더라면 아람 군대를 진멸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세 번밖에 안 내리쳤습니까?” 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이제 세 번만 이기고 아람의 군대가 밀려오고 우리는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요아스가 했던 행위의 중심에는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님과 관계없는 넓은 문, 넓은 길로 살았던 요아스 자신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은밀한 기도의 골방,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요. 나이 많은 사무엘의 기도, 죽을 병에 걸렸던 이 엘리사의 기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고 이스라엘을 그들의 기도 때문에 지켜주셨습니다. 오늘날 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기도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이 안심하고 대한민국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좁은 문, 좁은 길로만 가는 저와 여러분이 그 기도자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계시록 3장에서 빌라델비아교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예수님이시지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다윗이 왕이었을 때뿐만 아니라 다윗이 청소년 시절 그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는 아무도 모르는 그 조용한 시간에도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삶을 꾸려가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은 그에게 관심을 두시고 열린 문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한 번 말씀한 적이 있었지만 더운 날이니까 겨울철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약 15년 전쯤으로 기억됩니다. 교회에서 휴가를 내주셔서 형님 목사님을 모시고 강원도 동해안으로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도 어느 한 귀한 일꾼님 집에 방문해서 사귐의 좋은 시간을 갖고 밤 10시가 넘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음 길이 급하다고 일어났는데 그 일꾼님은 저와 우리 목사님께 잘 가시라고 배웅을 해주셨습니다. 그때는 그럴 것이 아니라 “아니, 이 엄동설한에 어디를 가십니까? 목사님과 박목사님,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 머물고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바지 가랑이를 붙잡아야지요. 형님 목사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붙잡히면 머물고 그 다음날 새벽 기도회까지 인도하려고 작정하고 가셨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밤 이곳에서 머물겠다고 그런 말은 차마 못 하잖아요. 인격적인데 말입니다. 그것이 문입니다. 강도와 절도는 이 문으로 오지 않고 벽을 부수고 들어오지요. 인격을 무시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밤 10시에 추운 겨울날 거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민박집에서 혹시 쉴 곳이 있나 찾아보았는데 동해안은 여름 장사라 겨울에는 민박집을 안 연다는 사실을 저는 그때에서야 알았어요. 한 20분간 찾고 다니던 중 어느 한 민박집이라는 불빛이 보였습니다. 반가웠어요. “오늘은 저기서 머뭅시다” 그래서 들어갔어요. 그러나 정작 민박이라고 씌어 있었지만 안내해서 들어간 방은 냉골이었습니다. 그때 형님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우리, 정신 차려야겠다. 자칫하다가는 얼어죽게 생겼어” 우리는 주인한테 잠시 읍내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밤 10시가 넘으니까 시골의 가게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는데 우리가 찾는 한 전파사가 문을 열고 있었어요. 할렐루야! “전기장판 있습니까?” 있다고 해서 1인용 두 개를 사고 민박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방으로 들어간 후 딱 한 번 보일러를 가동하고 그 이후 소리가 안 나더라구요. 전기장판을 살 마음을 주님이 주셨는데 그것이 구원이었습니다. 로또에 당첨되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그만 삶까지 인도해주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일꾼님에 대한 원망도 없었고요, 그때 좀 붙잡지 그랬냐고 나중에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과 16장에 보면 사도들이 감옥에 갇힌 모습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2장에는 베드로 사도가 옥에 갇혔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감옥을 유유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형제들에게 찾아갔지요. 사도행전 16장에도 사도 바울 선생님과 형제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무슨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귀신 들린 소녀를 고쳐주고 주님의 사람으로 행한 것 때문에 옥에 갇혔지요. 거기서도 역시 사도 바울 선생님과 실라는 주님께 감사면서 기도하고 찬양을 올렸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들을 만큼 크게 기뻐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때 옥문들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선생님과 실라 형제는 그 옥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나갈 마음을 안 주시는 거예요. 오히려 그 감옥의 간수가 깜짝 놀라서 자결하려다가 사도 바울 선생님이 “우리 여기 있으니 스스로 해하지 마시오” 너무 놀라운 일이지요. 다 도망간 줄 알았더니 그 감옥 안에 있다니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들처럼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간수의 질문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그 빌립보 감옥의 열린 문은 사도 바울 선생님과 실라 형제가 나가는 문이 아니라 그 간수가 천국으로 들어오는 문입니다. 만약에 깨어 있지 못하고 사도 바울 선생님과 실라가 그 옥을 나갔다면 간수와 그 집안은 다 지옥에 갔을 것 아니에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작은 일이지만 항상 주님 앞에 헤아려보고 움직일 일입니다.
사무엘상 23장에도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는 형편에서도 블레셋 변방에 있는 그일라 사람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에 의해서 그일라가 곧 함락될 위기에 있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 여쭈어보았어요. “주님, 어떻게 할까요?” “그일라로 가라” 형제들에게 다윗이 말합니다. “그일라에 가서 그 형제들을 구원하자” 그러나 “우리가 유대에 있기도 어려운데 그일라까지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형제들은 주저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한번 주님께 여쭈어봅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그일라로 가서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라” 다시 주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형제들과 함께 전투하러 나가서 그일라를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다. 승리의 기쁨에 젖어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다윗과 형제들은 그일라 사람들의 배반에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은 다윗에게 그곳에서 속히 떠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승리감에 도취한 것도 아니고 주님이 베풀어주신 어제의 구원에 감사하지만 오늘 새롭게 또 정처 없는 길이지만 일어선 순례자로 나서는 다윗과 형제들을 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 비교되는 이야기인데요.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민족은 적게 잡아도 이 삼백만 명은 되었는데 그들은 어린 양의 피 발린 문을 통과해서 출애굽했잖아요. 그런데 광야에서 그들이 걸어가는 모습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 어찌 보면 우리 예수님이 목자 되셔서 인도하시는데 그들은 말 안 듣는 염소 떼 같아요. 지독히도 말 안 듣는 염소들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말씀에는 이들이 광야에서 우상숭배를 했고 성적으로 문란했고 주님을 시험했고 주님을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의 백성의 자세가 아니지요. 그래서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배고파서 죽은 것도 아니었고 아파서 죽은 것도 아니었고 전쟁으로 죽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불신앙 때문에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놓고요. 그런데 이에 비해서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고향 가나안으로 오는 모습은 목자를 따르는 양 떼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좁은 문을 통과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차, 2차, 3차 귀환! 오만명에서 백 세 명 부족한 1차 귀환 때는 고레스 왕의 허락하에 스룹바벨이 인도하여 그들은 돌아올 수 있었고, 이후 아닥사스다 1세의 허락하에 2차 에스라 학사를 통해 3차는 느헤미야를 통해 인도받았는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아주 많지도 않았어요. 많아 보았자 몇만 명에서 적어도 몇천 명, 3차 귀환은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데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홍해가 갈라졌고 요단강의 강물이 멈추어 일어섰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날마다 먹었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초자연적인 주님의 섭리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강퍅했습니다. 바벨론에서 가나안으로 온 이들은 바벨론에서 무슨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들 안정된 직장과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열렸을 때 그들은 기꺼이 일어서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무슨 표적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 언약의 뼈를 가지고 조용히 돌아오는 모습은 새 언약의 백성답습니다. 그에 비해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은 옛 언약의 한계가 있는 백성들이고요.
식구님들, 우리가 산다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주님께 여쭈어보고 허락 속에서 좁은 문으로 출발하고 주님께 여쭈어보는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면서 좁은 길, 생명의 길로만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것이 자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들이 하늘 보좌와 직결되는 좁은 문을 알아드리고 그 좁은 길을 걸어감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강하게 추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