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착찹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앞에서 절대 울면 안된다고 다짐 또 다짐하면서도 벌써 눈물이 난다.
외국에 사는 딸을 둔 죄로 늘 딸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안고 사셨던 엄마는
딸이 오기도 전에 임종하시고 말았다.
그리고 처음 맞이하는 엄마의 생신
지난해에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좋아하는 망고랑 여름옷 그리고 케익을 사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엄마 놀래켜 드리려고 전화도 안하고 당진으로 달려 가서
엄마~~ 나 왔어~~~~하고 거실문을 열고 들어갔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정말 빨리 한국에 가고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던지....,
늘계시던 엄마가 거실과 방에서 보이지 않았을때
그때 얼마나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었는지.....,
엄마가 다시 입원하셨다고 해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으셨다.
가족들이 염원에도 불구하고 올해 엄마는 하늘나라로 홀연 떠나셨다.
당신 가실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걸 아셨는지 아버지한테 잘 하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정작 해외에서 생활하다보니 그게 쉽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서 아버지한테 전화했더니 집에 안계시단다.
시골의 작은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위암이라는데 수술할 만한 큰 병원은 병실이
없어서 두 세달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서 그냥 병원에 입원해 있었단다.
병원 소견서만 받아들고 중앙보훈병원으로 갔다.
아버지 소견서를 보신 외과 과장님은 빨리 모시고 와서 수술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외과 접수 창구에서는 병실이 없으니 3~4주 후에 전화 줄테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한다. 하루라도 더 빨리하면 임파선에 퍼지지 않을 수 있고 하루 더
늦게 수술해서 임파선에 퍼지면 수술 후에도 2차 치료를 해야하고 그로인해 몸이
나빠질수 있는게 암이라고 한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 후 고통스러워 하시던
엄마를 지켜보면서 그 후유증을 알고 있었던 가족은 팔순이 넘은 아버지 몸으로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는 무리일것 같아 그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다음날 일찍 시골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퇴원시켜 서울 중앙보훈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빨리 검사 마치고
수술하셨다. 중환자실에 며칠 계시면서 회복해서 일반 병동으로 옮기자고 하시면서
연세가 있으신데도 결과가 좋아서 빨리 회복 하실거라고 말씀하셔서 우리 가족은
진심으로 의사선생님께 "우리 아버지 다시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중환자실 앞에는 보호자 대기실이 있고 환자의 안정을 위해 면회는 30분씩 하루에
세번 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보호자는 의자에 앉아서 몇날 며칠을 대기하고 있다가
안에서 환자 보호자를 찾으면 중환자실로 들어가 면담을 하거나 환자 면회를 할 수 있다.
삼일째 아버지 앞에 계시던 환자가 운명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걱정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가려는데 간호사가 문을 막으며 "시신 수습중입니다. 들어오지 마세요."
하고 말한다.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30분쯤 후에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어디 갔다 이제 왔니~~" 하시더니 정신을
놓으셨는지, 앞에 여자가 죽었어, 집에 가자~~, 집에 가자 하면서 침대에서 일어서고
80으로 안정적이던 호흡이 205까지 올라가서 과장님이 달려왔다.
쇼크가 왔단다. 이상태가 세 시간 이상 지속되면 심근경색이 올 수 있단다.
내가 아버지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곁에 있고 싶다고 했더니
간호사들한테 환자의 안정을 위해 딸이 중환자실에 있도록 하라고 허락하셨다.
아버지는 자식과 먼길 달려온 친척들 모두 못알아보고 정신을 놓으셨다.
본인 정신이 아닌데 일어났다가 다칠까봐 중환자실 침대에 눕히고 손 발을 묶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고 주일이 되었다.
나는 병원내에 있는 성당에 주일미사 보러 갔다가 맨 뒤에 앉아서 계속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뒤에 서 있던 신도들에게
수녀님께서 성체 분배를 해주셨는데 성체를 모시고 수녀님한테 사정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대세 받아야한다고 했더니 "김해화 안젤라"수녀님께서
엄마 이야기도 들으시고 아버지께 "요셉"성인 세례명을 주겠다고 하셨다.
수녀님은 중환자실에 들어오자 마자 아버지 손을 잡으시며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하며 물으니 신기하게도 "수녀님이요." 하신다. 수녀님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시니 아버지도 "아멘"하고 대답 하신다.
세례수로 세 번 씻겨주시고 세례식을 마치고 수녀님이 가신 후 아버지는 다시 정신이
희미하신지 이렇게 했다면서 계속 성호를 그으시기도 하고, 아이처럼 웃으시며
갑자기 내 어깨를 주물러주셔서 왜그러나 했더니 앞의 젊은 환자가 부인 어깨
주물러주는 것을 보고 따라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조금 나아지신 후 수녀님을 만나러 성당에 몇 번 갔지만 주일 새벽에 부
산에서 오셨다는 수녀님은 주일 미사 후 중환자실 아버님께 세례 주시고 그 후 연수
가셔서 뵐 수 없었다. 입싱하는 날 아버지 뵈러 병원 갔다가 너무 아쉬워서 잠깐
성당에 갔지만 못 뵙고 봉사자 자매님들만 아버지 병실에서 기도해주시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 병실에 찾아오셔서 기도해주셨단다.
중환자실에서 쇼크 이후의 일을 기억 못하시는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당신이
세례 받은 기억은 또렷하게 생각 난다고 하셨다.
싱가폴에서는 신부님과 레지오단원들 구역식구들 및 성당식구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는지 감사하고 미안하고 정말 감동 받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랑 받고 있으니 더 힘내서 열심히 살면서 갚아야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많은 분들의 기도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세례주신 안젤라수녀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신 주님 찬미드립니다.
창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새로지은 중앙보훈병원 환자들이 너무 많아 치과 예약을 하려고
했더니 3개월 이상 입원은 1달 이상 걸린단다.
국가 유공자들의 공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우여곡절 끝에 일단 병원에 입원하니 마음이 편하다 하신다.
수술하기 전 토요일과 주일에 외출 받았다.
가까운 한강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유람선 타고, 짧은 시간이나마 집에 모시고
가서 맛 있는 음식도 해드려고 집 침대에서 편히 주무시라고 모시고 나왔다
거울 덕분에 아버지와 함께 사진 찍을 수 있었다
외출을 마치고 남은 검사와 수술을 위해 다시 병원으로 입원했다.
발을 뗄 수 없었던 장면이였습니다. 고엽제로 고생하시는 듯 보이는 뼈만 앙상한 환자와
전우인듯 보이는 분이 그 앞에서 안타까워 어쩔줄 몰라 하며 한참을 이야을 힘내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저렇게 고통스러 하는 사람들한테 주님의 손으로 평화를 주소서
마취에서 깨면서 엄마 이름을 계속 부르십니다.
엄마가 왼쪽 발치에 서서 내려다 보고 가셨다고 말하던 아버지,
오늘도 또 꿈속에 오려나 기다리십니다. 엄마가 직접 병간호도
못해주고 미안해서 오셨다 가셨답니다.
중앙보훈병원 내에 있는 성당 그곳에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가슴에 따듯한 사랑을 품으신 성모님은 성당에서 늘 자녀를 맞이하십니다
해가 저물어갑니다. 성모님 오늘은 특별히 이곳에 있는 고통 받는 환우들의
병이 하루 빨리 완쾌되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첫댓글 네~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기도로 다시 태어난 아버지..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대세 주신 수녀님과
모두 모두 행복하세요
아버지 입원하신 병실에 오셔서
기도로 힘과 용기를 주신 봉사자님들께
꼭 감사 인사 전하고싶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좋은 인연 만들어 주시니
찬미와 영광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