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1절에서 사도의 의미를 말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인데 보냄을 받은 자에겐 보내는 주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습니다.
그러므로 교단이 중요하고 신학교의 과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외적인
조건일 뿐입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사도가 속사도로, 속사도가 교부, 교부가
교황으로 전래되었습니다. 당시의 초대교회는 족보와 전통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림을 받은 이후에 오는 것입니다(약1:18)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거듭남 곧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부활 이후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 아버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땅에
있는 자들이 아비가 아닌 겁니다. 육신의 부모는 부정모혈로 태어난 육신의 부모일
뿐일 뿐입니다. 사실 육신의 아버지와 관계는 옛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걸로
끝이 나는 겁니다. 섭섭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불교도 출가를 하면 속세의 인연이
끝나는데 하물며 땅에서 난 자가 하늘로부터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오죽 할까요? 주기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올 때는 거듭남이나 부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제 자리에서 불러야죠.
유대인의 믿음의 첫째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는 겁니다. 마침 지금 이 시간 이스라엘은 가을 절기로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죄일부터 리허설의 축제일 뿐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실상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죽었지만 가나안 땅에 자기 뼈를
묻어 달라고 한 말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십자가의 사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 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실재가 됩니다. 이미 새 생명을 얻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난 자들이므로 절기의 리허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절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1절은 하늘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2절은 하늘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형제들은 한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바울과 그 형제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편지를 쓰는 자격은 같은 형제지만
사도의 직분을 맡은 바울입니다.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합니다.
사실은 바울이 평생 사도의 직분에 대해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것이 주관적인 사건이므로
다른 사도들과 같은 객관적이고 외적인 소명보다 내적 소명 곧 주관적인 체험을
가진 분이기 때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객관적인 조건인 신학교의 과정이
있고 또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주관적인 체험을 통해 사역자의 자격지심을 얻습니다.
신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지만 진리를 통한 영성은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3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낳아 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이십니다.
자신의 피를 속전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사신 우리의 구원의 주인이십니다.
사1장 '소도 그 임자를 알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제일보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겁니다(고후13:5)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나라의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하나가 된 상태로 아무런 대적의 침입이 없으니
하나님의 평강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평강을 얻게 됩니다.
평강은 죄와 사망의 전쟁에서 이겨야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솔로몬에 이르러서 완성이 되었으므로 평강(살롬)이라는 뜻의 솔로몬이 된 겁니다.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드리셨으니’라고 번역되었던 부분을 ‘주셨으니’(gave)로 바꾼 것은
정말 잘 된 것입니다. 원문에도 ‘주셨으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갈2:20절은 주셨으니(gave himself)를 '버리셨으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을 기념할 때에 장사된 것만 기념하고 그 몸과 연합이 되어 다시 살아나는
성령세례의 체험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4절은 3절의 주를 설명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모심은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자신에게 계시면 계시는 것,
안 계시면 안 계시는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천지의 주재이시지만
그 분이 그를 믿는 자에게 오시고 그 분을 모신 자에게 구주가 되시는 겁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몸을 주신 목적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하는 겁니다.
세대(겐네하)는 인간의 한 평생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X세대, 쉰 세대 등등으로 말합니다.
그 다음은 계속되는 시대의 흐름의 한 토막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테면 삼국시대,
일제시대, 인터넷 시대 AI 시대 등등입니다. 갈라디아 시대는 각종서신이 난무하던
때입니다. 복음이 질서가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목적은 율법으로부터 탈출입니다.
이게 바로 ‘건지시려고’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지금도 교육만능시대여서 가르치면
인간이 변화가 될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열심히 행위의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의 때나 지금이나 자신을 악한 세대에서 출애굽시켜 건져내어야 합니다.
지금도 정통복음과 변질된 복음이 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소위
인문학의 지성적인 교양주의는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다음엔 감성적인 열광주의입니다. 신사도운동이나 관상의 기도 같은 것 등입니다.
미신적이며 신비주의입니다. 진리를 좇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의식적인 예배형태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천주교나 그리스정교회 수도원 중심 신앙들입니다. 이와 비슷한 명상센터를 운영하는
곳이 한국에도 여러 곳이 있습니다. 가보면 풍광도 좋고 분위기도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진리의 지식을 전하는 곳이 아니라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5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아버지 하나님만 나오면 바울은 무조건 엎드려 경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70인역 집필자들이 ‘여호와 하나님’만 나오면 목욕을 하고 다시 ‘아도나이나
퀴리오스’라고 썼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 당시 수도원의 각방에는 목욕탕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 역시 유대교의 누룩의 율법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고 또 천주교가 남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의 모습의 이미지가 남아
있어 예수그리스도를 장차 만나려는 리허설을 할 뿐 진리의 성령에 의해
지금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주 역사하시는 실존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의 십자가를 통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한 데로 돌아오는 경건이 결여되었습니다. 신부단장을 한다고 떠드는 것이
바로 혼인잔치 리허설이 아닙니까? 이미 주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는 그 몸과 피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먹으므로 한 몸이 된 것을 기념합니다.
말씀과 세례와 성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것을 기념하는 게 과연 리허설일까요?
기독교가 아버지 하나님도 먼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 장차 뵐 분으로 설정하여 놓아
지금 당장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경외감이 없는 겁니다.
입으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자고 하지만 그마저 자기 미화일 경우가 많습니다.
주를 경외함이 지식과 지혜의 기본인데 성령이 아니고는 경외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첫댓글 "지금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주 역사하시는 실존이
되어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의 십자가를 통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여 경건에 이릅니다.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의 몸과 피를 한 성령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먹으므로 한 몸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