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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p.198
위에 인용한 '한 물건'과 매우 유사한 물건이 있으니 眞我(참나)이다. 참나는 본래 존재하는가. 아니면 만들어진 것인가. 緣起法(연기법)에 따르면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 따라서 참나는 (만약 존재한다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참나는 常住不滅(상주불멸)ㆍ不生不滅(불생불멸)ㆍ永生不滅(영생불멸)의 실체가 된다. 이것이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다. 부처님이 극렬하게 비판하는 아트만이다. 부처님이 아트만을 부정한 것은 因果論(인과론) 때문이다. 힌두교의 아트만은 因果를 초월한 존재이므로, 우리가 아트만이라면 수행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참나가 바로 인과를 초월한 아트만과 같은 존재이다.
모든 존재가 참나라면 도대체 수행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리 끔찍한 짓을 해도, 당신은 참나가 아닌가? (洪州宗(홍주종)은 바로 이런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당나라 스님 馬祖道一(마조도일)이 강서성 홍주에서 창시한, 홍주종에 따르면 모든 행위는 佛性(불성)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살인, 강도, 강간 등의 악행도 불성의 작용이냐?"라고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이 스스로 참나라는 것을 몰라서'라고 대답한다면, 모르는 것은 참나가 아닐 터이니 '모르는' 제삼의 다른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 당신에게는 적어도 두 개의 존재가 있다. 참나와, 참나가 아닌 그 무엇. 그리고 '완벽한 참나가 수행할 리는 만무하므로, 수행하는 것은 非-참나이고, 非-참나는 수행의 완성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참나론은 이원론(二元論)이다.
그런데 非-참나가 겪은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참나이다. 왜냐하면 이미 非-참나는 (성불하던 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나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중생의 무한 번의 윤회전생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면서도, 지금은 사라져 존재하지도 않는, 쓸데없는 짓만 하던, 자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非-참나의 삶과 행위를 다 기억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전생은 무한하므로 참나의 메모리 용량은 무한이다! (모든 생물의) 참나는 '무한 바이트' USB이다.
(번뇌ㆍ망상을 하는 어리석은) 非-참나는 처음부터 존재했는가? 아니면 중간에 생긴 것인가? 만약 처음부터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인과론에 위배된다. 아무도 因을 만들지 않았는데, 어찌 非-참나라는 果가 있는가? 非-참나로 대표되는, 처음부터 존재한, 즉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존재한, 어리석음과 번뇌ㆍ망상이 어찌 우리 책임이란 말인가? 중간에 생겼다 하더라도, 인과론을 위배하는 건 변함이 없다. 인과를 벗어난 참나에게 어떻게 非-참나가 생긴단 말인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무수히 윤회를 해온 당신에게 있는 無明(어리석음)은, 당신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있던 것인가? '처음부터 있었다.'라고 한다면, 당신이 어리석은 것은 결코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의 원죄 개념과 같다. 사실은 훨씬 더 고약하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은 최소한 처음 창조될 당시에는 청정했으나 나중에 타락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 무명이 있었다'라는 주장은 '인간은 무한한 기간의 과거에 단 한 번도 청정한 적이 없는 존재'라는 저주이다.)
'중간에 생겼다'라고 하면, '무명이 없는 존재에게 갑자기 무명이 생겼다.'라는 말인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참나인 이 우주에 어떻게 중간에 非-참나가 무명ㆍ번뇌ㆍ망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문제를 그냥 덮는다 하더라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 중간에 非-참나가 생길 수 있다면, 설사 혹독한 수행을 통해 非-참나를 없애더라도 언제 다시 非-참나가 생길지 누가 아는가? 이런 문제들은 참나ㆍ非-참나 二元構圖(이원구도)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이 '참나ㆍ非참나' 문제는 뒤에 다시 거론한다.)
만약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즉 태초부터 참나가 있다면, 개미나 아메바에게도 참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개미의 참나는 인간의 참나와 (최소한 그 기능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에 의하면, 지금의 고등 생물인 인간은 과거의 미개한 아메바ㆍ어류ㆍ파충류 단계로부터 진화한 것이므로, 아메바 시절부터 참나를 가지고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즉 모든 생물의 참나는 서로 동일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육신은 진화에 따라 변했어도, 참나는 변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암 전 조계 종정, 혜국 스님, 경봉 스님 주장처럼) 참나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개미의 참나도 보고 듣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과 동일하게 똑똑한 생각을 하고, 인간처럼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참나는 만들어지거나 진화하고 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因果에 의해 지배되는 緣起世界(연기 세계)를 벗어난 존재이다. 즉 초월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개미의 참나는 색깔을 못 본다. 생각도 못 한다.
만약 참나가 (개미 몸이라는) 육신의 영향으로 본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참나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수감자이다. 개미의 참나는 개미라는 육신에 갇힌 죄인이다. 그런데 참나는 번뇌ㆍ망상이 없는 존재이므로 악행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참나가 육신에 갇히는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뿐만 아니라, 因果世界(인과 세계)인 현상계를 초월한 참나가 어떻게 한 평도 안 되는 조그만 육신에 갇힐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참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생물이 본래 참나라면, 그래서 사자가 참나라면 무고한 누를 잡아먹는 것은 누구인가? 染病(염병-장티푸스)이 참나라면 수많은 사람을 공격하여 살해하는 것은 누구인가?
만약 사람이 본래 참나라면 번뇌와 망상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수행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참나를 찾는 것은 누구인가? 참나가 참나를 찾는 것인가?
만약 참나가 번뇌ㆍ망상을 한다면 참나가 아니므로, 참나가 번뇌ㆍ망상을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참나가 아닌 다른 나'가 우리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非-참나'는 부처가 되면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만약 부처에게도 非-참나와 참나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모든 중생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부처로 하여금 모든 身ㆍ口ㆍ意(신구의) 三行을 옳게 하도록 만드는 힘은 참나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非-참나에 있는 것일까. 왜 부처의 非-참나는 전혀 힘이 없고, 중생의 非-참나는 무지막지하게 힘이 센 것일까.
만약 부처에게는 非-참나가 없다면, 예전의 중생 시절의 非-참나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참나가 "아! 괴롭다. 수행하자"하고 마음을 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참나는 '常樂我淨(상락아정)'의 '樂'이므로 괴로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자고 결심한 것은 非-참나이다. 어떻게 부처가 "부처가 되자." 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떻게 이미 '참나'인 '참나'가 "참나가 되자" 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참나는 정신이상자이거나 중증 치매 환자이다.
그런데 막상 부처가 되자 非-참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신축건물이 준공되자 공사장 인부들이 지구상에서(공사장이 아니다.) 홀연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는 UFO, Big Foot, 외계인 납치 사건, 연예계 가십 등을 다루는 미국의 황색 주간지 『인콰이러러(The National Enquirer)』에나 나올듯한 괴이한 일이다.
사노라면 즐거운 순간들도 있는데, 이는 참나가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非-참나가 느끼는 것인가? 만약 보고 듣고 아픈 줄 아는 것이 참나이고 참識(식)이라면 (서암 스님, 혜국 스님, 경봉 스님은 바로 이렇게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처도 상한 버섯요리를 먹고 극심한 고통을 느꼈으며, 여럿 성문 아라한들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점을 보면, 그리고 부처와 아라한이 참나인 점을 보면, 보고 듣고 아픈 줄 아는 것은 참나이다). 우리가 겪는 일체의 감정은 참나가 겪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인 분노ㆍ시기ㆍ질투ㆍ殺意(살의)ㆍ미움ㆍ증오ㆍ낙담ㆍ절망ㆍ우울증도 모두 참나가 겪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참나의 특성인 常樂我淨(상락아정)의 '樂'을 위배한다.
만약 보고, 듣고, 꼬집으면 아픈 줄 아는 것이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참나는 생각도 없고 느끼지도 않아야 한다. 즉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非-참나'이며,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도 '非-참나'이다. (참나 이원론에 의하면 '非-참나'는 悲慘(비참)한 나이다. 전혀 가치가 없는 해롭기만 한 존재이다.)
반면에 참나는, 존재한다고 해도, 일체의 '생각'도 '느낌'도 없다. 마치 無情物'같은 존재이다. 당신은 이런 존재가 되고 싶으신가?
결론적으로 참나는 존재해도 常樂我淨(상락아정)에서 '樂'과 '我'는 없다. 왜냐하면 느끼는 기능이 없으므로 樂이 불가능하며, 생각이 없으므로 我도 불가능하다. (생각이 없는 重力이나 電磁氣力(전자기력)에 '我'가 있다고 주장할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참나는 돌멩이 같은 無情物, 무생물이므로 淨(정)은 인정해 줄 수 있다. 돌멩이에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실은 '常'도 불가능하다. 참나에는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데, 참나가 '常(변치 않고 영원히 존재함)'이라는 것은 누가 발견했다는 말인가? 설마 非-참나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주장하지 않으리라. 일상적인 물체의 '常ㆍ非常'은 非-참나도 목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주 끝까지 영원히 존재할 참나의 常을 잠시 존재하는 '하루살이 같은 非-참나'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참나가 常이라면, 그 사실을 아는 것은 非-참나가 아니다.
그런데 참나에게는 일체의 '생각하고 아는 작용'이 없으므로, 참나가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골수 참나주의자라 할지라도 설마 참나가 全知全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참나가 존재한다면) 참나에게 남은 유일한 특성은 淨(번뇌가 없음)뿐이며, 이는 모든 無情物, 무생물이 가지고 있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특성이다. 따라서 참나가 되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정물이 되자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斷滅論(단멸론)'이다 !
한마디로 참나(眞我)는 힌두교 아트만의 변형이거나 아류(亞流)인 환ㆍ망ㆍ공ㆍ상(幻想ㆍ妄想ㆍ空想ㆍ想像)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뭔가'를 '실체'로 인정하면, 즉 '시공을 통해서 불변하며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를 인정하면, 온갖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離一切諸相(리일체제상) 卽名諸佛(즉명제불)'이라 한 이유이며, 용수보살이 中論에서 일체의 '실체론적인 주장'을 論破(논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처란, 깨달음이란, 시공을 통해서 발생하는 '연기(緣起)적인 현상'이지 실체가 아니다. 긴 매서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어 매화가 피면, 그 향기와 美態(미태)를 즐길 일이지만, 같은 매화가 이듬해 봄까지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부활하는 것도 아니다. 매 순간 새로운 세상이 벌어지니 日日是好日(일일시호일)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계의 신비이다.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을 매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불교인이 참나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중세유럽이 1,000년 동안 맹목적으로 기독교(기독교 창조신과 기독교 경전)를 믿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 흄, 스피노자 등의 깨인 철학자들이 나타나 기독교를 맹렬히 비판한 것이다. 이미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미개한 신앙이라고 비웃었지만, 일단 로마제국과 중세유럽의 國敎(국교)가 되자 권력의 힘으로 기독교사상이 모든 사람을 狂的(광적)으로 구속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제정신을 찾는 데는 자그마치 2,000년 가까이 걸렸다.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는 힌두교 아트만론(有我論)을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비판하였건만, 불교인들이 다시 유아론(有我論)의 무지(無知)와 망상(妄想) 속으로 굴러떨어진 지 벌써 2,000년 가까이 된다. 이제 불교인들도 깨어날 때가 되었다. 힌두교 창조신과 서양 유일신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오래 묵은 幻想ㆍ妄想ㆍ空想ㆍ想像도 비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환상(幻想)ㆍ망상(妄想)ㆍ공상(空想)ㆍ상상(想像)이 인류역사상 모든 신(神)과 망상적인 종교와 철학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착각한다. 자기(我)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끝없이 변한다. 몸은 아메바에서 물고기로, 파충류로, 포유류로, 영장류로, 마침내 인간으로 자그마치 35억 년 동안 끝없이 변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변한 몸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최신형의 하드웨어(고성능 컴퓨터의 몸체)를 낡은 소프트웨어로 어떻게 돌릴 수 있을까? 남이 뛰니 나도 뛰지 않을 수 없는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남이 뛸 때 나는 뛰지 않으려면, 큰 돌, 큰 강, 큰 바다, 큰 나무, 하늘, 땅, 바람, 불, 태양, 석신(石神), 山神, 龍神(용신), 木神, 天神, 地神, 風神, 火神, 태양신을 믿고 살면 된다. 도망가던 타조가 흙에 머리를 묻는 것처럼, 미개한 신앙에 마음을 묻고 살면 된다.
잊지 마시기 바란다. 나(我)(몸과 마음, 心身複合體, physio-mental composite)란 끝없이 진화한다. 그래서 無我(무아)이다. 지평선 너머에는 지평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지평선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我를 넘어선 我를 찾으려 해도, 또 다른 我일 뿐이다. 미개한 유심론(참나론, 眞我論, atman론)은 유물론이다. 오히려 진화한 유물론이 유심론이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류과학ㆍ문명의 역사는 무수한 과거의 미개한 唯心論(유심론)들과 有神論(유신론)들의 공동묘지이다.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첫댓글
좋은 아침 입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시며
즐거움 넘치는 멋진 날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반야심경의 色卽是空, 空卽是色에 있는 空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諸比丘!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 不實而生, 生已盡滅, 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 除俗數法. 耳・鼻・舌・身・意亦如是說, 除俗數法."
비구들이여, 보는 나(眼)는 나타날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오. 이와 같이 보는 나(眼)는 부실(不實)하게 나타나며, 나타나면 흔적 없이 사라져서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다른 온(陰)이 이어질 뿐이지, 어떤 고정된 자아가 옮겨 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간의 통속적 명칭에 의거해서 말할 뿐이다. 귀・코・혀・몸・의(意)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이며, 이것 역시 세속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ChatGPT의 한문 문장 설명입니다.
此陰(차음): “이 음(陰)”
여기서는 어떤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오온(五蘊)적 현상 덩어리, 또는 감각기관에 관련된 조건적 집합을 말합니다.
滅已(멸이): 멸하고 나서
異陰相續(이음상속): 다른 음이 이어진다, 즉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닌 조건적 연속
除俗數法: 직역하면 세속의 수(數)・명목(名目)・관습적(慣習的) 표현을 제외하면 뜻으로, 세간의 편의적 이름을 빼고 엄밀히 말하면 입니다.
여기서 俗數法(속수법)은 보통 “세속의 이름 붙임”, “관습적 언어”, “편의상 하는 말”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눈이 있다, 귀가 있다,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의 편의적 표현일 뿐이고, 엄밀히 말하면 순간순간 조건 따라 생멸하는 온(蘊=陰=무더기, 집합)의 상속만 있을 뿐, 그 뒤에 따로 “변치 않는 ‘나’나 ‘작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경에서는 ‘업보(業報-업에 따라 받는 결과)는 있으나, 행위자(作者)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는 것이, 空의 제일의적(第一義的=근본적, 궁극적)인 의미(意味=뜻)라고 이야기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찰해 보면 보고 듣는 業報만 있을 뿐, 보고 듣는 行爲者로서의 自我는 없다는 것을, 즉 自我의 공성(空性)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空은 ‘自我의 없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業報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의 無我說(무아설)이 곧 불교의 업설(業說)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空과 無我는 이와 같이 自我는 없고 業報만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無我와 空은 業報를 의미한다.
한쪽에 앉은 바라문 청년 쑤바 또데야뿟따가 세존께 말씀드렸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람들 가운데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 고따마 존자여, 사람들 가운데는 수명이 짧은 사람도 있고, 장수하는 사람도 있으며, 병이 많은 사람도 있고, 병이 없는 사람도 있으며, 추한 사람도 있고, 예쁜 사람도 있으며, 힘이 없는 사람도 있고, 큰 힘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재산이 없는 사람도 있고,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천한 가문의 사람도 있고, 귀한 가문의 사람도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현명한 사람도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이와 같이 사람들 가운데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라문 청년이여, 어떤 여자나 남자는 생명에 대하여 자비심 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잔인하게 살생을 일삼는다오. 그 업으로 인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실행했기 때문에,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지옥과 같은 악취(惡趣-나쁜 곳)에 태어난다오. 만약에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지옥과 같은 악취에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돌아온다면, 어느 곳에 태어나더라도 수명이 짧다오. 바라문 청년이여, 생명에 대하여 자비심 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잔인하게 살생을 일삼는 것이 짧은 수명으로 가는 길이라오. 바라문 청년이여,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살생을 하지 않고, 살생을 삼가고, 몽둥이와 칼을 내려놓고, 자비롭게 모든 생명을 애민(哀愍)하며 사는 것이 장수로 가는 길이라오.
바라문 청년이여,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찾아가서 ‘존자여, 무엇이 善(선)이고, 무엇이 不善(불선)입니까? 어떤 것이 비난받을 일이고, 어떤 것이 비난받지 않을 일입니까? 어떤 게 해야 할 일이고, 어떤 것이 해서는 안 될 일입니까? 나에게 오랫동안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고, 나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고, 나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는다오. 그 업(業)으로 인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실행했기 때문에,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지옥과 같은 악취(惡趣)에 태어난다오. 만약에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지옥과 같은 악취에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돌아온다면, 어느 곳에 태어나더라도 어리석다오.
바라문 청년이여, 사문이나 바라문을 찾아가서 ‘존자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불선입니까? 어떤 게 비난받을 일이고, 어떤 게 비난받지 않을 일입니까? 어떤 게 해야 할 일이고, 어떤 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까? 나에게 오랫동안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건 무엇이고, 나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는 것이 어리석게 되는 길이라오.
바라문 청년이여,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찾아가서 ‘존자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불선입니까? 어떤 게 비난받을 일이고, 어떤 것이 비난받지 않을 일입니까? 어떤 게 해야 할 일이고, 어떤 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까? 나에게 오랫동안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고, 나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오. 그 업(業)으로 인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실행했기 때문에,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행복한 천상에 태어난다오. 만약에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행복한 천상에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돌아온다면 어느 곳에 태어나더라도 현명하다오. 바라문 청년이여, 사문이나 바라문을 찾아가서 ‘존자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불선입니까? 어떤 것이 비난받을 일이고, 어떤 것이 비난받지 않을 일입니까? 나에게 오랫동안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고, 나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게 현명하게 되는 길이라오.
바라문 청년이여, 이처럼 짧은 수명으로 가는 길을 가면 수명이 짧게 되고, 긴 수명으로 가는 길을 가면 장수하게 되고, 많은 병으로 가는 길을 가면 병이 많게 되고, 무병으로 가는 길을 가면 무병하게 되고, 추한 모습으로 가는 길을 가면 추한 모습이 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가는 길을 가면 사랑스러운 모습이 되고, 무력하게 되는 길을 가면 무력하게 되고, 세력을 갖게 되는 길을 가면 세력을 갖게 되고, 가난하게 되는 길을 가면 가난하게 되고, 부유하게 되는 길을 가면 부유하게 되고, 천한 가문에 태어나는 길을 가면 천한 가문에 태어나고, 귀한 가문에 태어나는 길을 가면 귀한 가문에 태어나고, 어리석게 되는 길을 각면 어리석게 되고, 현명하게 되는 길을 가면 현명하게 된다오.
바라문 청년이여, 이와 같이 중생은 업(業)의 소유자(所有者)이며, 업(業)의 상속자(相續者)이며, 업(業)을 모태(母胎)로 하며, 업(業)의 친척(親戚)이며, 업(業)에 의지(依支)한다오. 업(業)이 중생(衆生)을 이와 같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으로 나눈다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업(業)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칭하셨다.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을 모태로 하며, 업의 친척이며, 업에 의지하며, 업이 중생을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한마디로 말해서 업설(業說)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업설이 무아설(無我說)이나 연기설(緣起說)과 모순(矛盾)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의 업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無我說은 ‘行爲者로서의 自我는 없고 오직 業報만 있을 뿐’이라는 業說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와 같이 공이 ‘업보만 있음’을 의미한다면,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샤리뿌뜨라여! 형색(形色)을 지닌 몸(色)은 자아(自我)로서의 행위자(行爲者)가 아니라 삶의 결과로 나타난 업보(業報)이고, 그와 같은 업보가 실로 형색을 지닌 몸이다. 그러므로 형색을 지닌 몸은 삶의 결과인 업보와 다르지 않고, 업보는 형색을 지닌 몸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형색을 지닌 몸은 업보이고, 업보가 형색을 지닌 몸이다. 느끼는 마음(受), 생각하는 마음(想), 조작하는 마음(行), 분별하는 마음(識)도 실로 이와 같다.
『般若心經』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몸이 내가 아니라고 해서 몸을 없애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내가 아니라고 해서 이들을 없애버리면 남는 것은 허무(虛無)일 뿐이다. 문제는 몸이나 느낌 등의 실상(實相 )을 알지 못하고 이들을 잘못 보고 있는 데 있다. 오온(五蘊)의 실상을 알고 보면, 오온이 곧 그대로 참나(眞我)인 것이다.
이상 출처 : 이중표 교수 지음. 니까야로 보는 반야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