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곡 집
발간사
우리 선조님의 문집인 상곡집을 한글 번역문으로 발간하게 되어
기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옛 문집은 순 한문으로 기록되어 현재의 후손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선조님의 위대하고 빛나는 업적을 알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2016년 진주 강씨 상곡파종중 정기총회때 문집 번역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참석 종원 만장일치 찬성으로 의결하여 번역문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공의 이름자는 유요 자는 공헌이요 호는 상곡 이시고
본관은 진주이시다.
통정공 회자 백자 선조께서 공의 8대조 이시고 원종공신에 오르시고
마전군수를 지내신 자자 신자 선조께서 공의 6대조 이시다.
공은 지금의 충북 제천시 두학동(옛 지명은검은돌) 상공 마을에서
아버지 은암공 천자 민자 어머니 평택임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 나셨다.
어려서 부터 용모가 준수 하고 총명하여 은암공께서
큰 희망을 갖고 공세에(지금의박약재)
서당에 입학 시켜 가르치니 뛰어난 재능으로 학문이 빠르게 높아졌다.
공께서는 태어나신 마을 곁의 지명을 사용하여 자호인 상곡을 지으셨다.
옛 지명이 은골인 은곡의 은은 중국 최초 왕조인 은나라
음과 같아서 원래 이름인 상으로 높여 상곡으로 하셨다.
공께서는 15세에 진사 초시장원을 하사고 16세에 상급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올라 중진지사에 오를정도로 학문적 재능이 탁월하셨다.
그러나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보고 공께서는
잠시 뜻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 10여년간 세상에 나서지 않으셨다.
그후 광해정란이 정리되자
인조2년 공28세때 증광갑과에 다시 오르시고 처음으로
예빈시직장 이라는 관직의 명을 받으셨다.
당시 만주의 강대한 세력으로 떠오른 후금 즉후의 청나라와 화의에 반대하고
항전할것을 주장하며 나라에 척화소를 올렸으나 그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께서는 여러관직을 거쳐 승정원좌우승지,
황해도, 충청도관찰사, 삼도통어사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등을 하시고
효종의 명으로 함경남도 병마사에 부임하여 여러성곽을 수축하고
병사를 훈련하셨는데,
호령은 명료하고 엄숙했다.
효종5년에 많은 군기를 준비하고 북벌에 대비하여 잘 숨겨두니
효종은 상으로 말을 하사 하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강유는 이시대에 진정한 장군의 재주가 있다.
라고 칭송하였다. 효종 9년 북벌을 위해사신으로 연경(베이징)을
다녀 오시고 우암 송시열 의 천거로 장수로 추대되어 북벌을 준비 하던중
효종께서 승하하시니‘ 하늘이 천하의 대의를 펼치지 말라는 것이니
나 스스로 세상에 뜻이 없다. 라고 탄식 하셨다.
행실이 이와 같아 공께서는 나라의 큰공을 인정받아 ‘금은대를 하사 받으셨고 그것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공께서는 인조18년 아버지 참진공의 병세가 위독하여 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도록 하였으나 운명하시자
슬픔과 효심으로 여묘 시묘 3년의 거상까지 마치셨다.
공의 효심은 참으로 지극하다 하지안을수 없다.
공께서는 서기1597년 11월26일 출생하여 1668년 7월7일 졸하시니 향년72세이셨다.
그해 10월 한양에서 지금의 충북 제천시 명지동 산45-1번지
선영건좌에(동남향으로) 정부인 전주이씨와 합장으로
옮겨 모셔져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왕명으로 병자호란당시 나라를 위해 순찰한 충신을추념하기 위해 존주록배신열전문집을 간행하였는 바.
1807년 순조 7년 9월 지역의 유생들과 예조의 많은 선비들이 상언에
의하여 공께서는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 되고 충목의 시호를 받으셨다.
왕이 내린 교지에는 충목의 시호를 설명하여 사군진절왈충이요
포닥집의왈목이라 하였으니 ‘절의를 다하여 임금을 섬겨서
충이라 말하고 덕을 널리 펴고 바른것을 지켜서 목이라‘
말하고 덕을 널리 펴고 바른것을 지켜서 목이라 말하므로
충목의 시호를 내렸다.
이러하시니 공께서는 척화명신에 오르시고 남당서원에
배향 되셨다.
남한보는 숙종 11년을 축년 1685년에 간행된
우리 진주강씨(박사공파)의 최초 목판본 족보인 대동보인 바,
이 귀중한 족보의 앞 서문을 쓰셨으니 공의 학식과 문중의 위치를 쉽게
가는할수 있다.
이와 같이 국가에는 충성을, 부모에게는 효를 다하시고 절의와
기개가 높으셨으니 시대의 진정한 군자 이셨다.
어찌 공의 훌륭하신 뜻을 기리고 우리 후손들이
본받아 실천 하고자 노력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2018년11월 일
상곡공 12대손 직헌 강 성국 삼가쓰다.
상곡(商谷)강 유 (姜瑜)지음
♡ 단도
오랑케는 믿기 어려운데
노순은 또한 쇠잔하지도 않네 .
전투복은 어느 날에나 벗을 것이며
임금의 침소는 언제나 편안할까 .
머리는 풍랑처럼 희고자 하고
마음 비우니 노쇠를 막는 단약이네 .
곤란이 와도 계책 하나 없으니
허탈하여 유관이 부끄럽네 .
♡ 변방에서 근심하다
우리 동국이 작다고 말하지 마라
일찍이 백만의 적병도 막아내었다네
기름진 땅은 물과 육지를 겸하였고
막아선 바위는 견고한 성이 되었네
장수는 신묘한 계책 없고
변방의 모래는 귀신 소리를 내네 .
군왕은 때늦은 식사를 하리니
큰 저택은 정녕 우뚝하네 .
♡ 근심스러운 변방
성군의 어진 신하 묘한 계책 실천하는데
변방 성곽의 북과 뿔피리 소리는 언제나 그칠까 .
사람에게는 동서남북이 정해짐 없지만
나라에는 춘하추동의 근심이 있도다 .
지세 기마대를 막기가 어렵지 않은데
천심은 어찌 전구를 돕는가 .
조정에서는 인의를 닦으면
한궐에 머리 조아림를 보리라 .
♡구월산 산승 도대에게 주다
사뿐 사뿐한 노승은
석장 날려 양산 언덕에 가네
구월성에 올 때면
붉은 나무에 가을이 늦을 것이네 .
♡ 추운 봄에 부질없이 짓다
2월 달 산성의 눈에
차가운 날씨가 병든 몸을 두렵게 하네 .
화로를 대하여 수탄을 더하고
침구에 기대다 검은 모자를 떨어트리네
버들은 일찍이 섣달 지나면서 제자리 지키고
꽃은 이미 봄이 왔는가 의심하네 .
근심이 생기가 녹주가 생각나지만
동자가 집이 가난하다고 말하네 .
♡ 조카 만영이 제천에서 왔다 .
추운 날씨에 잘도 왔구나
다만 마땅히 하학 에 힘쓸 것이니
어찌 중간치의 재목으로 한계를 지으랴 .
세상의 덕이 장차 쇠함을 근심하고
가풍은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네
시서 가 배에 가득하면
청운의 출세 길은 꾀하지 않아도 되리라 .
♡ 강계로 부임할때 어천독우 임한백에게 주다 .
1,
못난이가 육부의 부절 지님이 부♡ 서경에 머물다가 취애와 이별하다
해와 달이 거듭 밝음에 우주가 맑은데
안정된 때는 공훈과 업적이 유생에서 나오네 .
허리에 보배를 두른 데다 두 인끈을 찾고
손애는 구슬방울을 잡아 오병을 통솔하네 .
성벽 보루의 깃대는 항상 빛을 번쩍이고
관문 강에는 초목 또한 이름을 알리네 .
못난 자가 오래 등문객 을 욕 보였으니
이별하는 이날에 정이 곱절로 더해지네 .
♡ 을해년 12월에 18일 저녁
서북방에 우레가 있었다 .
산성의 섣달에 따뜻함이 먼저 돌아오는데
문에 기대어 은은한 우레 소리 듣고 놀라네
이것은 높은 하늘의 어진 뜻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히 성조에 재앙 일으킴 아니리라 .
음양이 뒤섞여 변화가 범상치 않으니
영대에 그 누가 길흉을 아뢰리오
미약한 신하가 갑절로 시국을 근심함은
다만 임금의 은혜 감히 잊시 어려워서이네 .
♡ 무인을 애도하다
장부가 끝내 칼을 배웠으니
일개의 더러운 선비 됨 부끄럽게 여겼네 .
몇 곳의 변방 성곽에서 싸웠던가
평생 동안 담기가 억세었네
공은 높지만 벼슬은 항상 낮았고
늙어서는 탄식을 일로 삼았네 .
죽은 뒤에 가업을 부탁하니
어찌 유무를 따지리오 .끄러운데
병조의 일이 어찌 책 읽는 선비에게 맞을까 .
삼추의 나그네 길에 한 쌍의 일산이 기울고
천리의 행진중에 같은 길을 함께 가네 .
우뚝한 묘향산은 옛 역참에 임하였고
출렁이는 적로강 은 허물어진 성곽 휘감네 .
원근의 영고 성쇠는 서로 비교하지 말 것이니
임금 은혜 보답하기 위해 각자 도모하기를 .
2,
은장이 교대로 옥린부를 비추니
척검을 담은 행장은 부패한 선비 다스리네 .
이미 임금의 특별한 은택 많이 입었으니
감히 백발이 진흙 속에 곤한하다고 아뢰랴
강변의 북과 뿔피리는 두 일산을 맞이하고
고개 너머의 풍설은 외로운 성곽 지키네.
담소하면서 요상한 기운이 고요해짐을 보니
남쪽바다 가는 대붕의 꾀 이룰수 있으리 .
♡ 강계를 지나가면서 앞의 운자를 쓰다 .
노년에 도리어 우리 조정의 부절을 차니
변방 요새에 못난 선비가 몸 붙였네.
속절없이 세상을 떠도는 행장은 정처가 없고
벼슬길 영욕과는 본래부터 길을 달리했네.
한 가을에 쌓인 눈은 주렴 앞 동굴에 있고
한밤의 슬픈 피리소리 물 위의 성곽에 울리네 .
9만리 높은 하늘에는 두 날개가 짧으니
이몸 어찌 붕새의 계획 펴기를 도모할까 .
♡ 종성부사 조윤지에게 보내다 .
한탄스러운 인간사요
아득한 세상의 정이로세.
다만 명리의 중요함만 따르고
시비는 도리어 가벼운 줄 깨닫네
차가운 눈은 봄 되어도 골짝에 남아있고
관문의 구름은 밤되어 성을 두르네
외롭게 읊다가 근심에 잠 못 자니
홀로 깨어 평안할 때를 간절히 추억하네 .
♡ 명천 집의 이만영 의 귀양지에 보내다 .
상곡 강 유 / 황해도 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
험한 바위의 두 고개 층층이 하늘에 솟았으니
푸른 바다는 아득하고 도로는 멀구나
홀로 앉아 그대를 보나 그대는 보이지 않으니
노년의 근심스러운 수염 쓸쓸히 희구나 .
♡ 원주 안창역
적적한 춘산에 어지러이 까마귀 우는데
낙조는 아득히 작은 시내 가득하네 .
말을 쉬게 하고 홀로 방초 길에서 잠자니
꿈의 혼은 서울 서쪽에 이르네 .
♡ 신림령 (원주 치악재)
바위고개 하늘에 솟아 섰으니
산길이 객의 걸음을 힘들게 하네 .
추풍은 낙엽을 채촉하고
석양은 무너진 성에 가득하네 .
늙은 말은 채찍을 때려도 되돌아가고
어리석은 동자는 꾸짖어도 놀라지 않네 .
골짝 문에서 고요히 읊조리며
고요히 시내 소리를 듣네 .
♡ 강원감사 이백주 에게 써서 보내다 .
듣자니 도백의 수레 원주에서 출발했다 하는데
이미 청허의 백척루에 이르렀으리라 .
중거는 서치의 걸상 매달았을 터이고
임종은 이응의 배에 오르지 않았네
모두 술 때문에 병이 더해졌고
비록 편지가 있으나 어찌 근심을 다 쏟으리오 .
멀리서도 부러워라 금강의 부절 옮기는 곳에
봄빛이 사구를 감싸는 경치 홀로 보리라 .
♡ 신림역에 도달하여 밤에 읊다 (원주시 신림면)
고개 넘어 깊은 협곡 지나
시내를 따라가니 역의 정자가 있네 .
밤이 늦으니 관솔불을 켜고
바람이 뚫고 오니 자리로 병풍을 만들었네 .
파리한 말은 삶은 콩을 생각하고
추워하는 어린 종은 참으면서 누워서 듣네 .
이번 행차 괴로운 상태에서
오직 친구가 따름을 허락하네 .
♡ 갑산의 정원루
붓 던지고 나온 해 기운이 가을 하늘에 찼는데
오늘날에야 정원루에 올라보네
십리의 긴 강은 성곽 밖으로 흐르는데
막부에서 술과 안주로 병법을 강구하네 .
♡ 혜산 괘궁정
땅은 흰 오랑케 산에 접했고
성곽은 푸른 압록강 물에 임했네 .
만리의 객은 가을을 슬퍼하는데
괘궁정에 달은 밝구나 .
♡ 서경으로 부터 장차 무산을 방문하려 하나 비에 막히어 출발하지 못하다
청양관 밖에 비가 줄줄 내리는데
해 저물때 나그네 근심 새롭네
지척의 무산도 천리처럼 막혀
옛 도읍에 머무니 너무나 지루하네 .
★ 강 유 장군 청나라 북벌
청나라 북벌 울 위해 사신으로 감
♡ 연행일기
( 청나라 연경에 다녀와 임금께 결과를 아뢰는 글 )
저들 내부의 허실 , 뭇 산천 과 길과 마을의 원근 , 돈과 곡식과 무기와 병사의 다소를 살피었으니 ,
비밀스러운 말이 많아 특명으로 불러 밤에 대면하였다 .
초본을 사택에 남겨두지 말라고 전교하셨다 .
효종 미완의 북벌
상곡(商谷)강 유 (姜瑜)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었다.
이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는 등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과거의 뜻을 버리고 10년 동안 고향에 칩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과거에 응시했고, 이듬해 증광 문과의 갑과로 급제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예빈시직장으로 임금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 화의를 반대하고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
즉, 도망자들을 돌려 보내달라는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화의를 주장하는 이귀(李貴) 등의 의견에 반대 상소를 했다. 1639년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병조좌랑이 되었고,
1642년에 지평이 되었으며, 1651년(효종 2)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이어 조정에서 문무를 겸한 장재(將才)로 천거돼 1553년 함경남도병사에 임명되었다.
성벽 수축과 병사의 훈련을 잘해 왕이 좋은 말을 내려 업적을 극찬하고,
이듬해 북병마사를 제수하였다.
1656년 승지를 거쳐 황해감사·경기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청감사를 역임했다.
165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왕의 북벌의 뜻을 받들어 적의 허실을 살피고 왔다.
그러나 이해 왕이 죽자 황해감사로서 북벌의 좌절을 크게 통곡했다.
1661년(현종 2) 수원부사에 가자(加資)되었으며, 1663년 우부승지·좌부승지·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강릉부사에 이어 호조참의가 되었다.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저서로는 『상곡집(商谷集)』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