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704년,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 낸 명연 스님 극락 가셨나?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
「대미타참 약초요람 보권염불문 머리말
(大彌陀懺畧抄要覽普勸念佛門序)」
살펴보건대,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아니하고 가르침은 이치를 달리함이 없도다. 비록 만물의 모습이 각기 다르나 깨달음(靈覺)의 본성은 같으며, 중생의 이름이 다르나 심성의 이치는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성인으로부터 멀어지자 도 닦는 마음이 드디어 희미해져 사람들이 모두 본래 지니고 있던 불성을 알지 못하고, 뜬구름 같은 허깨비 몸을 아껴 5가지 길에서 괴로움을 겪고 4가지 태어남(四生)을 겪는다. 이에 오직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정반왕 태자로서 만승의 보위를 버리고 출가 수도하여 중생을 49년 동안 널리 구제하셨고, 부처 입멸 후 1,000년에 불법이 중하中夏에 전파되니 대승의 가르침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부터 지금까지 천하에 여러 나라 황제나 현명한 임금이나 이름난 재상, 고관들이 모두 불법을 숭상하였고, 이태백, 백낙천, 소동파, 황산곡黃山谷 같은 지혜롭고 통달한 선비들이 모두 저 아미따불을 높이고 찬양할 줄 알아 스스로 발원문을 지었다. 고금 승속에 이름난 이로써 염불하고 도를 행하여 이미 서녘으로 돌아가 붇다가 된 이들은 문헌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金나라) 극락거사 왕자성王子成은 본디 유가儒家의 명상明相이고 군자다. 유가의 백가가 쓴 책과 불교의 여러 경전을 꿰뚫어 알고 그것을 간추려 염불 참죄懺罪 13문을 지어 널리 여러 사람에게 염불을 권하여 모두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게 하였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글이 넓고 뜻이 깊어 말세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적고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 잘 알지 못하고, 또한 염불이 주는 큰 이익을 모르고 세간의 물욕에 탐착하고 있다. 저의 작은 소견에 따라 여러 경전의 말씀을 간추려 염불문을 만들고 언문으로 해석하여 선남선녀들이 쉽게 통하고 쉽게 알 수 있도록 잎 따고 뿌리를 찾아 거친 것을 정밀하게 하였다. 경에 “나모아미따불(南無阿彌陀佛)‘ 한 번 염하면 생사의 고해를 면하고 바로 서녘 극락에 가서 모두 불도를 이루게 된다”라고 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염불을 권하면 스스로 염불하지 않아도 함께 극락에 태어난다”라고 하였으니,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널리 염불을 권하여 모두 함께 서녘 정토에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 적은 좁은 견해는 모두 명아주 잎과 콩잎 같아서 배부른 이는 기꺼이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니, 이에 양식 떨어진 무리를 기다리며 감히 작은 정성을 다하여 삼가 짧은 글을 올린다.
강희 갑신년(1704) 봄, 경상좌도 예천 용문사 청허淸虛 후예 명연明衍 모음
卍 보정의 꼬리말
『염불보권문』, 1704년 경상좌도 예천 용문사 비구 명연明衍이 지었는데, 명연 스님에 대한 행장이 없어 자세한 개인사나 수행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염불보권문』에 짧은 소개 글이 있다.
“용문산은 영남의 큰 땅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명산이다. 이 산에 대사가 계시니 법명이 명연明衍인데, 이 세상에 드문 스님이다. 일찍이 정성으로 감로의 문으로 드시고 유유히 스스로 제호의 본성을 증득하셨으니, 선원禪苑의 목탁이고 교해敎海의 빈랑檳榔이시다. 여래가 말씀하시되 ’이천오백 년 해가 지나 수마참법須摩懺法이 세상에 성행한다‘ 하셨더니, 지금이 바로 그때로구나. 미타참경이 글이 넓고 뜻이 깊어 얕은 소견으로는 보기가 어려워 배우는 이가 아프게 여기더니, 대사가 이에 요람을 초록해서 한 권으로 모으고 ’미타참절요‘라 이름하니, 시방에서 선풍을 보게 되고 삼세의 권선들이 같은 배를 타게 되고, 진서와 언문이 함께 쓰였으니 칠부 대중이 모두 보게 되어 배우는 이에게 크게 공이 있게 되었으니, 비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말이 많은 것은 대사가 취하는 바가 아니요, 다만 비상한 말만 책 끝에 기록하여 비상한 일을 보이셨으니, 오! 가상한 일이로다.” <경기도 지평 용문산 해월당 상봉 정원대사 참경절요 발>
이처럼 구체적인 행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엮은이는 스님을 ’극락 간 사람들‘에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보아 스님이 쓴 책의 서문을 실었다. 서문에 보면 『선가귀감 禪家龜鑑』을 지은 청허淸虛의 후예라고 하였다. 앞에서 보았지만, 서산대사 휴정은 우리나라 불교를 선문, 교문, 염불문 삼문으로 통합하였고, 제자들은 제각기 한 문을 택해 수행해 왔다. 앞에서 보았듯이 서산대사 법맥을 이은 많은 선승과 교학승들이 활동하였으나 염불문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후에는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명연이 서산대사의 정토문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어려운 한문을 훈민정음으로 옮겨 책을 내게 된 것이다.
서문에서 언급했지만 조선 전기 염불문을 대표한 것은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이었다. 『예념미타도량참법』은 미타도량참법의 의식내용과 절차를 서술한 책인데, 1213년 금나라 왕자성王子成이 편찬한 것으로, ① 귀의 서방 삼보歸依西方三寶 ② 결의생신決疑生信 ③ 인교비증引敎比證 ④ 왕생전록往生傳錄 ⑤ 극락장엄極樂莊嚴 ⑥ 예참죄장禮懺罪障 ⑦ 발보디심發菩提心 ⑧ 발원왕생發願往生 ⑨ 구생행문 求生行門 ⑩ 총위예불總為禮佛 ⑪ 자경自慶 ⑫ 보개회향普皆迴向 ⑬ 촉루유통囑累流通 같은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남희숙이 정리한 조선조 발행된 관계 서적은 다음과 같다.
① 『예념미타도량참법』 해인사본 (1503, 연산군 9년)
② 『예념미타도량참법』 전라도 청룡산사 (1533, 중종 28년)
③ 『예념미타도량참법』 황해도 석두사 (1542, 중종 37년)
④ 『예념미타도량참법』 경상도 비로사 (1572, 선조 4년)
⑤ 『예념미타도량참법』 전라도 송광사 (1607, 선조 40년)
⑥ 『예념미타도량참법』 경상도 장수불당 (1610, 광해군 2년)
그러나 미타참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스님들이 의식집으로 쓸 수 있었지만, 일반에 보급되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 숙종 30년(1704) 봄에 여러 경전에서 염불에 관한 좋은 글들을 뽑아 모아서 『명연집明衍集』을 내고, 다시 염불의 대중화를 위하여 훈민정으로 번역하여 유포시킨 것이 명연의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이다.
『염불보권문』 출판은 많은 불자가 쉽게 정토와 염불을 접하고 수행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엮은이는 한국 정토사에서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본다. 실제 이 염불보권문은 많은 절에서 찍어내 일반화되었다.
① 용문사본(1704) -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 영인(1) (1996)
② 동화사본(1764) -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 영인(2)
③ 흥률사본(1765) - 국립중앙도서관(온라인 열람 가능), 홍문각 영인(1978).
④ 용문사본(1765) - 염불보권문의 국어학적 연구 영인(3)
⑤ 해인사본(1776) - 동화사본의 본각본이다.
⑥ 선운사본(1787) - 홍문각 영인(1978).
이 책이 나온 뒤 염불 수행자는 물론 일반 법회 의식에도 큰 영향을 주어 현재 천수경의 원류라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염불을 일반화시킨 명연 스님은 스스로 염불 수행을 열심히 했을 것이고, 그리고 수많은 염불인들을 극락으로 가서 태어나게 했으니 당연히 극락에 갔을 것이다. 엮은이가 스님의 행장을 모르고도 『극락 간 사람들(韓國往生傳)』에 주저 없이 넣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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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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