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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불교연구총회 대승사와 관징 법사
Molly Chen(미국 뉴욕 美東佛敎會 大乘寺 佛堂办公室)
1) 미동불교연구총회와 대승사
미동불교연구총회는 잉싱쥬와 그 부인 진위탕이 1962년 설립한 단체로 미국 동부지역에서 으뜸가는 중국 불교사원이다. 잉싱쥬(1914~2001)는 중국 저쟝성 출신이고 부인 진위탕은 쟝수성 우시 출신으로 1942년 상하이에서 결혼한 뒤 쥬화기업을 설립하여 자동차와 화학공업 공장을 차렸다. 194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2차대전 이후 소수민족을 환영하지 않아 정착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내전 상태이기 때문에 홍콩을 거쳐 타이완으로 가서 톈이우모 공장을 설립하였다. 1955년 전 가족이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욕에 정착하게 되었다. 다음 해 먼저 홍원기업을 세운 뒤 이어서 다른 회사들을 세워 사업을 한다. 그 뒤 사업이 번창하여 플로리다주 월트디즈니월드 안에 중국관을 세우고 아울러 해운 . 관광 . 부동산 등을 통해 미국의 중견 그룹으로 성장한다. 1979년에는 미국 화상총회 평생 총고문이 되고 뉴욕 중국인 사회 상공업계에서 명성이 높은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처럼 사업에 성공한 부부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아직 불교의 불모지였던 미국에 절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Broadway가 1544호에서 문을 열었으나 머지않아 뉴욕 Mott거리 64호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0년 뒤 이어서 미국 동해안에 절을 하나 지어 불교도가 근무를 했지만 규모가 작아 신도들은 그곳 가까운 곳의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도들이 규모가 크고 조용히 수행할 수 있는 곳을 바랐기 때문에 잉싱쥬 선생과 부인은 뉴욕South Cairo에 114에이커를 구입하여 수년간에 걸쳐 수행센타를 지어 대승사 상원을 세웠다.
이렇게 시작한 불사는 40년 가까이 지나며 뉴욕에 불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지만 큰 불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춘 절이 없었다. 그래서 잉싱쥬 회장이 Canal Street 133호에 있던 극장 건물을 인수하여 대승사 하원을 세워 1997년 자신의 83살 생일을 맞아 부인에게 이바지하였다.
2) 대승사 대표단의 중국 본토 방문과 관징 스님의 초청
19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은 수교를 맺음으로써 30년간 단절되었던 외교 관계를 정식으로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중국불교협회 회장인 자오푸추 회장이 이끄는 중국 종교대표단이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열린 3차 세계 종교인 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 뉴욕에 도착한 대표단은 미국 화교총상회 이사장인 잉싱쥬 선생을 찾았고, 함께했던 진위탕 등이 열렬히 환영하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이 자리에서 자오푸추 회장이 미동불교 연구 총회가 조국방문단을 꾸려 중국을 방문할 것을 초청하였다.
다음 해인 1980년 4월 미동불교연구총회는 조국방문단을 꾸리고, 잉싱쥬 회장을 비롯한 10명이 4월 5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7일 동안 5개 성과 12개 시를 방문하고 많은 절을 다니면서 무려 873명의 스님들을 만나보았다.
미동불교연구총회와 대승사가 제법 큰 규모의 사찰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처럼 많은 스님들이 있어 모든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동불교연구총회라는 단체에서 운영하고 실질적으로는 잉싱쥬 가족이 이끌어가는 사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체와 절에서는 자체에서 승려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고 홍콩이나 대만에서 이름난 고승들을 모셔서 계도 받고 법회도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대만이나 홍콩에서 모셔온 여러 고승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1962년 11월 먀오펑 스님을 모셔 점안법회를 가졌다.
⚹ 1963년 우밍 스님을 초청하여 잠시 미동불교연구총회 주지를 맡았다.
⚹ 1964년 샌프란시스코의 고승인 러두 스님과 다종 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 1965년 홍콩의 휘광, 다인 비구니 스님이 6년 계약으로 와 있었다.
⚹ 1969년 홍콩의 파원 스님, 타이완의 하오린 스님을 모셨다.
⚹ 1970년 홍콩의 소우예 노화상이 주지를 맡아 대승사 건립 불사. 미얀마에서
초청한 시천 스님도 함께 활동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미동불교연구총회와 대승사는 스님들이 창립한 절이 아니기 때문에 홍콩, 대만, 미얀마 같은 곳에서 계약제로 고승들을 모셔와 절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사에서는 중국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중국에 있는 고승을 파견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37일 동안 5개 성과 12개 시를 방문하고 많은 절을 다니면서 무려 873명의 스님을 만나보았지만 대부분의 스님들은 나이가 많고, 15년 동안 절을 떠났다 방금 돌아온 노스님들이나 이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스님들뿐이었다. 15년 동안이나 절과 수행을 떠났던 노스님들은 눈앞에 닥친 시급한 문제가 무너진 절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수행을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고 새로 출가한 젊은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종교 자유화가 시행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중국에서 미국에 파견할만한 고승대덕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 고위층에 특별히 파견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푸졘성에 일주일간 선정에 들 수 있는 놀라운 도력을 가진 스님이 있다며 추천해 와서 대승사는 주저하지 않고 그 스님을 초청하기로 했다. 그 스님이 바로 관징 스님인데, 당시 미동불교연구총회 잡지기사(1982)에 발표된 내용을 보면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큰마음을 내는 이는 반드시 크게 이룬다.
우밍
위탕 거사에게
이번 미국에 가서 때마침 귀사의 천수천안 최고 법신 관세음보살 점안법회를 하고, 방생을 맡아 할 수 있게 된 뛰어난 인연에 대해 뭐라고 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두 번 미국 가서 얻은 모든 수확은 다 거사가 마련해 준 것으로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점안식 이틀 전 내가 대승사에 간 날 저녁 꿈에 다섯 분의 화상이 절에 와서 머무셨는데 이는 아주 좋은 징조로, 앞으로 반드시 고승이 귀사에 가서 모든 법무를 맡게 될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 몇몇 불교 절이나 불당이 있지만 대승사처럼 장엄하고 큰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釋悟明 합장 7월 21일
우밍 스님의 이 편지는 1972년에 쓴 것으로 꿈속에 나타난 예언을 가지고 대승사에 앞으로 고승이 불법을 펼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씀은 이미 10년이 지난 것이지만 마침내 푸졘성 관징 스님이 정토법문을 펴게 되었다. 관징 스님은 법화경을 모두 외울 수 있고 7일간 선정에 들어갈 수 있는 현대에는 아주 드믄 고승이다.
간단히 현몽을 언급하여 수승한 인연을 나타내려 함이로다!
우샤 삼가 씀
이 글에서 우리는 뉴욕 대승사에서 관징 스님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잡지에 난 기사 다음 쪽 아래를 보면 관징 스님의 사진이 나와 있다. 그리고 그 사진 아래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대승사 안거, 선정을 깊이 닦은 관징 스님
이 기사는 1982년에 발행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징 스님이 미국에 도착한 바로 그 해에 난 기사이다.
3) 미동불교연구총회와 대승사에서 남은 관징 스님의 발자취
(1) 1982년 미동불교연구총회 20주년 기념 휘호
관징 스님이 미국에 다다랐을 때는 마침 미동불교연구총회가 창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20주년을 기리기 위해 관징 스님이 휘호를 남겼다.
미국 동녘 불교총회 20주년을 기리며
동녘 사하 세계서 다짐하노니
극락의 맑고 깨끗한 연꽃씨앗 널리 뿌려
그지없는 중생들 끝없는 바람
대비선 함께 탈 것 기약하네
관징
예서체로 또박또박 쓴 휘호에는 정토법문이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2) 2012년 50주년 기념 특짐에 나온 1982년 사진
2012년은 바로 미동불교연구총회가 창립된 지 50주년이 된 해다. 그때 「미동불교연구총회 50주년기념특간」이란 책이 나왔는데, 이 기념책자에 관징 스님이 소개되었다. 관징 스님이 20주년인 1982년에 뉴욕에 왔으니 그 뒤로 이미 30년이 지난 것이다.
이 책에는 10년 단위로 장을 나누어 그 동안 있었던 중요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53쪽 1972~1982년의 사진첩에 관징 스님의 사진이 들어 있다. 이 사진은 앞에서 본 잡지에서도 나온 것인데, 아마 미국에 다다라 처음 찍은 사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30년이 지난 뒤에 실은 이 사진에도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대승사 안거 선정을 깊이 닦은 관징 스님
(3) 박물관에 기증한 쉬윈 화상의 사리와 비로모
미동불교연구총회가 불사 시작한 지 40년 가까이 지나며 뉴욕에 불교가 뿌리 내리기 시작하였지만 큰 행사를 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춘 절이 없었다. 그래서 1997년 Canal Street 133호에 있던 극장 건물을 인수하여 대승사 하원을 세웠다. 이 절 2층에는 연꽃집이라는 ’대승 책방과 박물관 상점‘이 있다. 그곳은 불교용품 파는 상점이고 벽에는 모두 지금까지 이 절에 기증한 선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래서 박물관 상점이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는 관징 스님이 대승사에 기증한 두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⓵ 쉬윈 화상 비로모
Thousand Blossom Kasaya Left by Great Master Hsu Yun
Offered by. Dharma master Kuan Ching
쉬윈 대화상 유품 ‘Thousand Blossom Kasaya’
관징 스님 기증
쉬윈 화상이 남긴 모자를 기증한 것인데 중국 스님들은 비로모라고 한다. 비로모는 선종의 한 파인 황벽종이 쓰던 모자로 모자에 비로자나 불이 있어 비로모라고 했다고 한다. 7월 우란분절 법회 때 수좌승이 비로자나불로 분장하여 경을 읽고 시식을 할 때 머리에 미로모를 쓴다고 한다.
② 쉬윈 화상 사리
Sarira of the Mast Rev. Hsu Yun
Offered by. Dharma Kuan Ching. Kuan Fu.
쉬윈 대화상 사리
관징 관푸 스님 기증
관징 스님이 자기 스승인 쉬윈 화상의 사리를 기증하여 이곳에 전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관징 스님이 뉴욕 미동불교연구총회와 대승사에서 머물었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관징 스님은 중국 본토에서 초청한 첫 번째 스님으로 선과 정토를 겸비한 고승이었다. 관징 스님이 이곳에 머무신 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고 이미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으며, 당시 초청하셨던 분들이 모두 타계하여 현재 안 계시기 때문에 그 발자취를 제대로 찾는 데는 큰 한계가 있었다. 대만과 홍콩에서 온 다른 스님들은 주지를 맡아 불사를 하고, 그 경험을 살려 미국의 1번지 뉴욕에서 불법을 펴는 재단이나 절을 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관징 스님은 미동불교연구총회와 대승사에 머물며 열심히 불법을 폈으나 1년 뒤 서부로 떠나고 뉴욕에서는 더 이상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점은 다른 스님들과 다른 관징 스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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