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 바다에 봄은 연한 피리를 불다
남도 땅은 벌써 천지(天地)에 봄이 스며들고 있다. 햇살을 붙잡고
있는 개펄은 고개를 돌려야 할 정도로 눈부시다. 들녘에선 마늘이나 양파, 보리가 푸른 빛을 더해간다. 남녘 어디나 춘색을 느낄 수 있지만 전남
무안의 해제반도처럼 들과 바다의 봄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하늘을 이고 있는 마늘밭 너머 개펄이 펼쳐지고, 양파밭 너머엔 파도가 들이친다.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 들판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모습 자체가 인상적이다. 들판에 서있는 굽은 소나무 몇 그루도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전남 무안 해제반도에서
무안 해제반도는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육지가 마치 사슴뿔 모양을 하고 있다. 밀물이 들면 뭍의 폭이
겨우 500m밖에 안되는 곳도 있다. 양쪽에 바다를 끼고 있어 동쪽도 바다이고, 서쪽도 바다이다.
뭍은 산다운 산이 없는 비산비야의 구릉지대. 가장 높다는 봉대산이 겨우 192m이다. 새벽녘이면 무안의 구릉밭에는 안개가 밀물처럼
밀어닥친다. 땅이 풀어지면서 만들어낸 안개는 봄이 왔다는 증거. 들판에 서면 바닷바람은 새털처럼 가볍고, 솜처럼 푸근하며, 막 새순을 낸
봄동처럼 싱싱하다.
무안 들녘은 황토땅이다. 겨울을 지낸 밭고랑은 검은 빛을 띠고 있지만 한 삽만 떠올리면 속흙이 붉다. 봄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트랙터로
갈아엎어 놓은 밭고랑은 황토(黃土)라기보단 적토(赤土)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장이모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에 나오는 붉은 대지를
연상시킨다.
황토 들판 옆으로 푸른 양파와 마늘밭이 대조를 이룬다. 무안은 양파와 마늘의 주산지. 지난 겨울 심은 양파는 5~6월 수확하는데 언 땅을
뚫고 이미 한 뼘 이상 자랐다. 하늘보다 더 푸른 빛을 띠고 있는 밭고랑은 여름 들녘처럼 보인다.
양파 재배면적은 7백56만6천평. 전국의 17.3%, 전남의 44.5%나 된다. 한 해 생산량이 15만1천3백20t. 마늘밭은
6백69만3천평이다. 전국의 7%, 전남의 20.4%인 2만6천7백72t의 마늘을 생산한다. 양파는 ‘황토랑’이란 고유 브랜드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늘이나 바다보다 짙고 푸른 구릉밭은 파도처럼 이어지다가 바다로 연결된다. 예전에는 무안이 고구마와 유채산지였다. 30여년
전 무안땅은 붉은 황토에서 피어난 노란 유채꽃이 어지럼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찾기 힘들다.
올해는 월동배추밭도 많다. 월동배추는 10월에 심어 다음해 2월부터 출하하는 겨울배추. 원래는 해남이 주산지다. 한겨울에도 쉽게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황토에서 자라는 월동배추는 다른 배추보다 작지만 당도가 높아 배추 속잎은 설탕물에 절인 것처럼 달다. 겨울농사는 풍년이라도 배추
농사꾼들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지난 겨울만 해도 한 마지기(200평)에 2백만원을 호가하던 배추 값이 요즘은 80만원까지 폭락했다고 한다.
무안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고장. 뭍이 끝나는 골짜기마다 자그마한 어촌들이 숨어 있다. 무안의 포구 중에서 가장 이름난 포구는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이다. 도리포는 해양수산부가 ‘2월의 아름다운 어촌마을’로 선정했다.
포구는 작아도 바다는 기름지다. 도리포 앞바다는 함평, 영광, 신안, 무안 등 4개 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빗물에 씻긴 황토가 많이
유입되는 근해는 기름진 개펄. 깊은 바다는 모래와 자갈이 알맞게 섞여 있다. 먹이사슬의 바탕이 되는 새우가 많이 살아 어류들이 산란을 위해
몰려든다. 고급어종으로 꼽히는 민어와 농어, 돔, 숭어, 황가오리가 알을 낳는 곳. 젊은이들이 떠난 다른 어촌과 달리 청년들도 많이 산다.
서울 생활을 접고 돌아왔다는 김성채 어촌계장(53)은 “지난 20년 동안 영산강유역 개발 계획지로 묶여 있는데다 4개군에서 폐수 한 줄기도
흘러들어 가지 않는 청정해역”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도리포 숭어는 유명하다. 요즘은 숭어가 광어나 우럭 같은 어종보다 고급어종 서열에서 밀려났지만 정약전의 ‘현산어보’에는 ‘고기 맛이
달고 깊어 물고기 중에는 최고’라고 기록돼 있다. 그래서 옛사람은 으뜸이란 뜻의 수어(秀魚)라고도 했다. 지역마다 숭어철이 따로 있지만 도리포
숭어는 2월말까지가 제철이다.
토박이들이 붙여놓은 숭어에 대한 이름도 동해안 명태만큼이나 많다. 10㎝ 이하의 새끼는 모치, 20㎝ 급은 모뎅이, 30㎝ 급은 괴사리,
40㎝ 급은 참동어, 50㎝ 급은 누거리, 60㎝ 급은 댕가리와 눈부릅뜨기라고 부른다. 참동어는 겨울에 참맛이 나는 고기란 뜻이다. 눈부릅뜨기란
사람들이 숭어 대접을 안해주자 숭어가 눈을 부릅떴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옛날 도리포는 서해안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포구였다. 1995년에는 도리포 앞바다에서 649점의 고려청자가 인양됐다. 강진에서
청자를 싣고 인천항으로 가던 배가 침몰한 흔적이다.
도리포는 서해안이면서도 수평선 너머에서 뜨는 일출이 아름다워 일출 명소로도 소문이 나 있다. 도리포 앞 염전은 요즘 소금농사를 준비
중이다. 소금밭을 손질하고 물을 끌어들여 볕이 더 좋아지는 5월부터 소금을 낸다.
현경면 월두포구도 아름답다. 월두는 반달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 우리말로는 달머리라고 했단다. 썰물 때에는 바다 앞에 떠있는
도당도까지 바다가 갈라진다. 바다는 기름진 굴 양식장이지만 요즘은 굴이 끝물이다. 3월부터는 감태와 낙지가 많이 잡힌다. 바닷가 끝머리에 서있는
수령 300년의 곰솔이 인상적이다.
땅과 바다가 풀리는 봄. 파도가 아무리 높고 바람이 매서워도 밀려오는 봄기운을 막을 순 없다. 붉은 황토밭을 물고 있는 푸른 바다에 봄색이
찬란하다.
◇여행 길잡이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톨게이트에서 빠져 무안읍 방면으로 달린다. 읍내 못미쳐 오른쪽 60번
지방도를 탄다. 검문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해제반도로 이어진다. 국도 24호선을 타고 달리면 현경면 농협이 나온다. 농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끝까지 달리면 월두. 도리포는 국도 24호선을 타고 해제·지도 방면으로 달린다. 해제면 삼거리 못미쳐 ‘도리포’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으로 빠지면 도리포가 나온다.
무안엔 먹거리가 많다. 몽탄면 사창리는 돼지 짚불구이가 유명하다. 제1회 남도음식축제에서
대상을 받은 별미음식. 무안읍에서 무안종합병원 쪽 811번 지방도를 탄다. 20분쯤 달리면 삼거리. 왼쪽의 비행기 전시장을 지나면
두암식당(061-452-3775)이 있다. 10여년째 짚불구이를 내놓고 있다. 암퇘지의 삼겹살과 목살 및 목등심을 석쇠에 얹고 볏짚에 구워낸다.
양파김치와 게를 통째로 갈아 만든 젓갈에 찍어먹는데 맛이 담백하다. 석쇠구이 한판(300g)에 6,000원. 누룽지(1,000원)도 맛있다.
무안읍사무소 옆에 있는 무안식당(453-1919)에서는 양파 한우고기를 맛볼 수 있다. 하루 3.6㎏씩 6개월 동안 무안 황토들에서 나온
양파를 먹여 키운 한우는 육질이 부드럽다. 육회와 생고기, 등심구이, 비빔밥 등을 내놓는다.
도리포 숭어회도 별미다. 갯마을식당(454-7448)이 유명하다. 1㎏ 3만5천원선. 무안읍 공용터미널 뒤편에는 기절낙지집들이 몰려 있다.
산낙지를 대소금에 비벼 잠시 기절시킨 뒤 먹는 무안의 별미 중 하나. 하남횟집(453-5805), 청계수산(453-5256) 등이 잘 한다.
해제반도엔 숙박업소들이 많지 않아 무안읍내에서 묵는 것이 좋다.
성남리 초당대 앞의 동남관광호텔(453-5511)과 무안읍내엔 대림장(453-1122), 백제장(453-8080),
은하장(453-3301)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