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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계에서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재기하기는 쉽지않다. 더구나 건설경기 침체로 수주난이 심화되고 건설업체 난립으로 기존업체도 존립하기 힘든상황이다. 수십억원의 부도를 내고 파산일보직전까지 갔던 이 회사 사장은 고향 청주를 떠나 강원도에서 다시 기반을 닦은후 5년전 금의환향해 100억원에 달하는 화의채권을 모두 청산했다. 동영종합건설에서 출발해 반야건설을 거쳐 삼양건설로 사명을 바꾸는동안 롤러코스터같은 삶으로 회사를 중견건설업체로 성장시켰다. 다음달에 충북건설협회 도회장에 취임하는 윤현우(57)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건설불황이라지만 하기 나름이다. 평탄치못한 삶이 기업인으로서 사업에 대한 안목과 경영능력을 키워준것 같다"고 말했다. 윤 사장을 만나 사업과 삶을 들어보았다.
-다음달에 건설협회 충북도회 회장에 취임한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업계에서는 윤사장이 회장선거에 출마했을때 의외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언제부터 회장선거에 나서겠다는 뜻을 가졌나.
"내가 출마하자 의외라고 말한 사람이 많았다. 난 지역건설업계에선 비주류였다. 한때 회사가 부도를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화건설 이화련 사장이나 김용수 사장에 비해 인지도도 떨어졌다. 출마의사도 없었다, 하지만 협회 회원사 사장 10여명이 우리회사에 방문해서 서너번씩이나 출마를 권유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미력하지만 회원사들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했다"
-건설경기는 장기침체에 빠져있고 회원사의 경영난을 가중되고 있다. 협회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난해 선거에 출마할 당시 회원사들을 일일이 방문해 여론을 수렴하면서 요즘 죽을맛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공사수주가 힘들다는 하소연도 많았지만 발주처, 공제조합, 심지어 장비업체에 대한 불만도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발주처의 '갑질'횡포 뿐만 아니라 공제조합에서는 이자도 비싸고 회원사에 대한 신용평가도 제멋대로 차등을 두고 있었다. 또 장비업체는 공사를 한창 할시간인 오후 5시가 되면 일손을 놓았다. 이런 현안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나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건설업계에서는 제도적인 모순점도 업체의 경영난을 가중시킨다는 말도 나온다.
"제도가 현실과 맞지않는 사례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예를들어 일반건설업체는 기술자가 12명이 있어야 되지만 상시 보유한 업체는 많지않다. 또 연말만 되면 업체마다 자본금을 맞추기 위해 비상이 걸린다. 하지만 1억5천만원짜리 포크레인이 감가상각이돼 장부상에는 고철값에 불과하다. 매매가와 감가상각비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본금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것이다. 법적으로 기술자수를 줄이고 자본금도 완화시켜달라고 건의할 계획이다"
-회장에 취임하면 협회를 변화시키고 회원사의 권익을 향상시킬 자신이 있는가.
"아직 회장에 취임하지 않았지만 현 김경배 회장을 비롯한 회원사들로 부터 조언을 많이 듣고 있다. 또 협회의 현안문제에 대해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회사일도 바쁘지만 협회일에 매진할 생각이다. 회원사들의 작은목소리도 귀담아 듣고 이들을 대신해 발로 뛰는 회장이 되겠다"
-딱딱한 얘기는 그만하고 윤회장의 굴곡많은 개인사를 듣고 싶다. 언제부터 건설업을 시작했나.
"서른한살때인 1990년 종합건설면허를 취득했다. 그전에는 대전 한밭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삼화토건에 근무했다. 일찍 결혼한 아내는 슈퍼마켓을 운영했다. 우연치않게 삼화토건으로 실습나왔던 전신전화국 여직원의 귀뜸으로 기지국공사 몇곳을 따내면서 독립해 처음으로 목돈을 만졌다. 이 돈과 청주시 미원면 어암리에 있던 부친소유의 땅 세마지기를 팔아 당시 당시 일반건설면허가 개방될때 제 1호로 취득해 동영종합건설을 창업했다"
-비교적 젊은나이에 창업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없었나.
"어려움이 있었지만 젊음과 패기로 이겨냈다. 특히 외환위기가 시작됐던 1997년 청주시 분평동에 있는 농어촌공사충북본부 사옥 공사를 따낸것이 사세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농촌공사 조홍래사장이 참석한 착공식에서 조 사장이 인사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젊은혈기로 '사옥을 잘지으면 우수시공업체로 선정해 달라'고 말했다. 이후 준공식에는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옮긴 조사장 대신 신임 문동신 사장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착공식때 한 얘기를 전하자 본사차원에서 우수시공업체 표창장을 주었다. 이후 관급공사에서 가점을 받아 공사실적이 급격히 늘면서 기반을 닦았다"
-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잘나가다가 부도를 맞았다. 충격이 컸을것 같다.
"30대의 젊은나이에 건설업과 제조업(판넬) 공장 자산이 100억원에 육박해 내 인생이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다. 당시 충북은행, 농협, 동화은행으로 부터 신용등급도 높아 우리회사 어음은 보증수표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오면서 악재가 잇따라 발생했다. 모언론사 사주에게 빌려준 3억원짜리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고 개인적으로 빌려준 수억원의 돈도 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 사장실에 있는 현찰 8억원과 귀중한 도자기가 든 금고를 털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겪었다. 하지만 결정적인것은 한국레미콘과 악연이었다"
-한국레미콘과 어떤 악연이 있었나.
"레미콘으로 재력을 쌓은 윤석용 전회장이 대학(주성전문대·현 충북과학대)공사를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워낙 덩치가 커 망서렸으나 윤 사장의 지인이자 먼 친척이 '윤사장이 레미콘 공장만 3개나 있고 부동산도 많은 재력가인데 뭘 망서리느냐'며 공사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아들였으나 한국레미콘이 파산하면서 26억을 날리는 피해를 입었다. 30대의 나이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우리회사도 파산절차를 밟을뻔 했으나 청주산업단지에 현재 사옥으로 쓰고 있는 공장부지 때문에 법원으로부터 간신히 화의신청이 받아들여져 부도를 면했다"
-이후 충북을 떠나 강원도로 회사를 옮긴것으로 알고있다.
"회사 상태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실의에 빠져 있는데 2000년 당시 건설교통부에 근무하던 친구가 '평창 동계올림픽이 유치되면 정부에서 4조원의 공사가 발주되니 회사를 원주로 옮긴다면 기회가 올것'이라며 강원도행을 권유했다. 하지만 15년전엔 동계올림픽 유치가 좌절됐고 동해·삼척지역에 큰 수해가 났지만 수해공사도 따지 못했다. 이후 평소 시주를 해오던 용화사 주지인 월타스님이 '당신은 절대 망할 사람이 아니다'라며 회사이름을 반야건설로 바꾸라고 권했다. 이때문인지 경지정리, 도로, 교량공사등 잇따라 입찰을 따내면서 원주에서 7~8년간 매년 100억원 이상 수주를 했다. 이곳에서 돈을 벌어서 100억원에 달하는 채권을 모두 갚고 화의 졸업에 성공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그 좋은 '반야건설'이라는 회사명을 왜 또 삼양건설로 바꿨나.
"삼양건설로 바꾼것은 2008년도다. 당시 강릉시청에서 발주한 공사를 했는데 당시 시청 회계과장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회사이름에 불교적인 색채가 들어갔기 때문인지 기성금을 빨리 받아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밤 12시에 주는등 불편한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때문에 사명을 바꿀까 고민하던중 역시 친분이 있는 스님이 '당신은 죽을몸인데 기도를 많이 해서 살아났다"며 삼양건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윤 사장이 재기한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나를 믿고 따라준 직원들 때문이라고 본다. 회사가 부도가 난 이후 직원들이 똘똘 뭉쳐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헌신적으로 일했다. 특히 회사가 강원도 원주로 옮겼을때 청주사무실에 필수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도 함께 갔다. 또 우리회사는 공동도급사업을 주로 하는데 흑자공사 아니면 손을 대지 않았다. 이때문에 1군업체가 아무리 함께 하자고 해도 공사원가에도 못미치는 금액으로 응찰하면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정확히 알려면 정보력을 최대한 가동하고 1군업체와 유대관계를 가져야 한다.
정보력이 어두운 지역업체중에는 1군업체의 브랜드만 믿고 공동도급 참여했다가 수십억원씩 손해본 업체가 많다"
-큰 아들(윤해달 사장)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데 가업을 승계시킬 계획인가.(윤해달 사장이 경영하는 SY개발 사무실에는 '가업승계기업'이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삼양건설은 계열사로 아들이 경영하는 회사로 철근·콘크리트·상하수도등의 단종면허를 갖고 있는 전문건설업체 SY개발과 카크레인 제조업체인 삼양HT가 있다.
큰 아들은 충북대 건축학과를 나와 삼영건설 기획실장겸 SY개발 대표를 맡고있으며 둘째아들은 기업은행에 다니고 있다"
-기업인으로서 윤 사장의 목표는 무엇인가.
"회사를 성장시키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다. 김경배 회장이 기부를 많이 하라고 권유하는데 회사가 성장하고 때가 되면 좋은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사람때문에 회사가 거덜날뻔했고 사람때문에 기사회생했다. 젊은시절 경험이 일천해 믿었던 사람들에게 여러번 배신당했지만 좋은인연을 맺은 사람들 때문에 회사가 반석에 올랐다고 말했다. 그가 인생의 멘토로 꼽은 사람은 이재덕 법무사와 이은 전 충북대 토목과 교수였다. 특히 이 법무사는 그가 가진돈을 잃고 쩔쩔 맬때 늘 자신을 믿어주고 아이들의 고교와 대학 입학금을 대줄 만큼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윤현우 삼양건설 대표이사는.
충북 청주시 미원면이 고향으로 증평공고와 대전 한밭대 토목과를 졸업했다. 31살에 건설회사를 창업해 현재 삼양건설과 SY개발, 삼양HT등 3개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대한건설협회 충북도회장에 당선돼 다음달 취임식을 가질 예정이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집에서 기도할때마다 불상앞에 있는 불전함에 매일 1만원씩 집어넣고 연말이면 동사무소와 어린이재단, 소년소녀가장등에게 기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