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변인 중인, 중심에 서다.
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사이 종로구 옥인동 일대 서촌. 조선시대 서촌 지역은 중인(中人) 문화의 중심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했던 계층, 중인. 조선시대에는 주로 기술직에 종사한 역관, 의관, 율관이나 양반의 소생이지만 첩의 아들인 서얼, 중앙관청의 서리나 지방의 향리 등을 총칭하여 중인이라 불렀다. 양반은 아니면서 상민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 이었던 중인. 이들 중 역관이나 의관 율관은 외교관, 의사, 변호사에 해당하는 사람들로서 요즈음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로 잘 나가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분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이들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사회의 주변부를 떠돌았다.
그러나 조선후기, 특히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인층을 중심으로 신분상승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중인층의 신분상승 운동의 모델은 양반이었다. 중인들은 무엇보다 양반을 닮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지금의 문학 동호회쯤 되는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그들이 지은 시와 문장을 발표하였다. 대개 중앙관청의 하급 관리로 일했던 중인들은 인왕산 아래 옥계천이 흐르는 곳에 주로 밀집해 살았다. 따라서 이들의 시사 활동은 인왕산과 옥류천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고, ‘옥류천 계곡’에서 따온 ‘옥계’라는 말을 따서 ‘옥계시사’라 하였다. 인왕산 자락에는 필운대와, 옛 송석원 터 등 중인문화의 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다.
인왕산은 대대로 경치가 좋은 명승지로 손꼽혀왔고, 그 자락에는 한양의 5대 명승지인 인왕동과 백운동이 있었다. 경복궁과 가까운 주택지이기도 해서 예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양반과 중인들이 터를 물려가며 살았다. 청풍계(淸風溪) 일대에는 양반들이 인왕산에서 발원하는 옥류천(玉流洞) 일대에는 중인들이 모였다. 원래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집을 지으면 안 되지만, 임진왜란 중 경복궁이 타버려 서리들이 관아와 거리가 가까운 인왕산 중턱에 모여든 것이다. 중인들은 안왕산과 옥류천을 중심 무대로 하여 점차 그들의 목소리를 높여 갔다.
2. 위항문학 운동의 현장들
중인들의 문학 운동을 위항(委巷)문학 운동이라 한다. ‘위항’이란 누추한 거리를 뜻하는 말로서 중인층 이하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뜻하였지만, 대체로 중인들의 문학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중인들의 시사(詩社) 활동은 단순히 모여서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인들은 그들의 공동 시문집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1712년 홍세태가 편찬한 [해동유주 海東遺珠]를 시작으로 하여 [소대풍요 昭代風謠](1737년), [풍요속선 風謠續選](1797년), [풍요삼선(風謠三選)](1857년)으로 이어졌다. 1791년에는 옥계시사 동인들의 시와 옥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옥계사시첩 玉溪社詩帖]을 만들기도 하였다. 중인들은 시문집 발간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양반 못지않은 학문적 수준이 있음을 널리 과시하였다. [소대풍요]에서 [풍요삼선]까지 60년 마다 공동시집을 내자고 한 약속을 120년간 지킨 것에서 이들의 공동의식을 느껴볼 수가 있다.

옥계시사의 주 활동무대였던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고 안에 위치하고 있다. 필운대는 원래 명장 권율의 집터로, 사위인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필운대에는 이항복이 새겼다는 ‘필운대(弼雲臺)’ 석 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필운대 옆에는 1873년(고종 10)에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이 찾아와 이항복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필운이라는 이름은 사실 별로 쓰이지 않고 잊혀졌지만 이항복의 필운이라는 호, 그리고 그가 바위에 남긴 ‘弼雲臺’ 석자 때문에 필운이라는 이름이 훗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옛 사람들은 필운대 꽃구경을 한양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꼽고,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바위를 타고 오르면 인왕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가까이 우뚝 솟은 북악이 보이고, 그 뒤로 북한산의 비봉, 문수봉, 보현봉과 백운대 까지 훤히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필운대 앞쪽은 높은 건물로 인해 시야가 완전히 막혀버렸고 초라하게 축대바위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변은 쓰레기장에 가려져 옹색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는 것도 안타깝다.
옥계시사의 동인이었던 천수경의 집인 송석원(松石園)은 현재 옥인동 47번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개인 주택 안에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한 때는 추사 김정희가 쓴 ‘송석원’이라는 글씨가 195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송석원은 훗날 윤덕영의 별장으로도 유명하였다는데 그 흔적은 사라져버리고 터만 알 수 있는 비석하나가 길가에 세워져 있다. 이곳 송석원에서 사람들이 모여 시사를 결성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주최된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전날부터 달려와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조선후기 중인들은 시회(詩會)를 결성하여 시와 문장을 짓은 한편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18세기 중인문화의 중심지였던 인왕산 아래 송석원에서 봄과 가을에 열린 백일장에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이 백일장은 무기 없이 맨 손으로 종이 위에에 벌이는 싸움이란 뜻으로 ‘백전(白戰)’이라 하였으며, 참가하는 것 자체를 영광을 여길 정도였다. 당시 치안을 맡았던 순라꾼도 백전에 참가한다면 잡지 않았다고 하며, 시상(詩想)을 떠올리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위한 경쟁도 치열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쓴 시축(詩軸:시를 쓴 두루마리 종이)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양반들도 중인들의 백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대의 최고 문장가들이 백일장의 심사를 맡아볼 정도였다.
조선후기 중인들은 시사를 결성하고 공동 문집을 발간하면서 자신들도 양반 못지않은 교양을 소지했다고 자부하였다. 백전이 벌어지는 날 인왕산과 옥류천 일대에는 중인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위에서 인왕산 일대 서촌 지역 중인문화의 현장들을 소개했지만,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양반가를 대표하는 북촌 지역이 최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신분 차별의 벽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느낌도 든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버스로 2~3 정거장의 거리에 위치하지만, 도심과는 전혀 다른 풍광을 지니고 있는 곳. 인왕산 일대에 산재한 중인 문화의 현장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글 : 사진 = 신병주/현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출처] 본 게시물은 문화유산채널(www.k-heritage.tv) 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