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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에 나타난 12지상의 얼굴 방향
한국의 십이지신은 땅을 지키는 열두 가지 짐승들의 신으로, 그 시간과 그 방향에서 오는 사악한 기(氣)를 막아주는 시간신과 방위신의 역할을 하는 수호신이다.
12방위(方位)에 맞추어서 호랑이·토끼·용·뱀·말·소·원숭이·닭·돼지·개·쥐·양 등의 얼굴 모습을 가지며 몸은 사람으로 나타나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12지신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서 그 성격이 변모하였으며, 조형예술로서 십이지신상이 등장하는 것은, 김유신장군이 호국사찰로 지은 경주 입실 원원사지(遠願寺址)의 삼층석탑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것이 그 효시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탑에 사천왕(四天王)·십이지신상 등을 부조(浮彫)하는 기법이 성행하였으나 이후 능묘(陵墓)의 둘레돌(護石)에도 영향을 주어 무덤 밑부분을 원형으로 돌리고 각각 십이지신상을 안치하게 되었으니 8세기 중반 경덕왕 때부터 일이다.
처음으로 12지상이 나타난 성덕왕릉
신라왕릉에서 12지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8세기 중엽 33대 성덕왕릉부터이며, 이후 55대 경애왕릉까지 23기의 왕릉 중에서 12지상이 발견된 왕릉급의 고분은 9기로서,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경덕왕릉, 진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김유신장군묘, 구정동 방형분, 능지탑이 있다.
이들 12지상은 모두 입상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착용하고 있는 복장을 살펴보면 대부분 무복 갑옷을 착용하고 있고 손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있다. 이는 사천왕四天王)의 권속인 팔부신중八部神衆)에 속한 권속으로서 외부에서 오는 마귀를 물리치고 불법을 호위하면서 동시에 방위方位)를 가리키는 십이지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에 제작된 성덕왕릉의 경우에는 이러한 갑옷을 착용한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예외로 김유신묘와 헌덕왕릉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능지탑지에 배치된 쥐子)상의 경우에도 평복을 착용하고 있다.
12지상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방향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으나 이 규칙은 각 능마다 서로 일정하지 는 않다.
신라 왕릉에 나타난 12지상이 바라보고 있는 얼굴의 방향을 살펴보면 대개 6가지로 구분이 된다
▶ 모두가 정면을 바라보는 경우
성덕왕릉(부조가 아닌 환조의 입상)
▶ 정면을 바라보는 말(午)을 기준으로 양쪽에서 다른 상들이 모두 말(午)쪽을 향해서 바라봄
원성왕릉(괘릉), 진덕왕릉, 구정리방형분
▶ 정면을 바라보는 쥐(子), 토끼(卯), 말(午), 닭(酉)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2상이 서로 얼굴을 바라봄
흥덕왕릉(십이지신상 배치 형식의 완성)
▶ 모든 상이 머리를 오른쪽을 향하고 바라보면서 호석을 일주하는 모습
김유신묘. 헌덕왕릉
▶ 정면을 바라보는 말(午), 개(戌)를 두고 서로 양쪽에서 얼굴을 바라봄
능지탑(후대의 교란으로 십이지신상의 배치가 원 모습인지는 확인할 수 없음)
▶ 정면을 바라보는 쥐(子), 토끼(卯), (말午)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지만 원숭이(申)와
개(戌)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음.
경덕왕릉
1. 정면을 바라보는 형태
◈ 성덕왕릉
성덕왕릉은 경주시 조양동의 구릉 송림 속에 위치하고 있다.
둘레돌(護石)의 제도가 크게 발전했고, 4곳의 능 모퉁이에는 돌사자를, 앞쪽에는 석인(石人)을 배치했으며, 앞쪽 왼편에는 능비를 세워놓아 신라 최초의 완비된 형식을 갖춘 왕릉이다.
성덕왕(701년-737년)은 신라 제 33대 왕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36년에 이른 재위 기간에 신라는 정치적 안정을 누리며 제도의 정비와 문물의 발달을 이루었다. 당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였으며 능의 석조물 배치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왕릉은 지름 약 14.5m, 높이 4.5m의 원형 봉토분으로 능의 아랫쪽 둘레돌은 약 90cm의 판석을 면석으로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주를 끼워 고정시켰다. 탱주 바깥쪽으로 삼각형의 받침돌을 세워 보강을 하였다.
이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환조의 12지상이 세워져 있는데 신라왕릉으로는 최초로 12지상을 배치한 것으로 이 12지상은 왕릉의 축성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덕왕의 둘째 아들인 35대경덕왕때에 추가로 조성된 것이다. 12지상은 사람의 몸에 동물의 얼굴이며 갑옷을 입은 채 무기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조각의 수법이 매우 사실적이다.
호석 앞에는 박석을 깔고 박석의 둘레에 수십 개의 석주를 세우고, 석주 사이에는 상하 2개의 관석(貫石)을 끼워 출입을 못하게 했다.
12지상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들고있는 무기
완전한 형태의 원숭이상(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머리가 남아있는 닭(酉)상
성덕왕릉의 12지상
12지상은 모두 네모난 모양의 석조기단 위에 무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동안 방치되어 온 까닭에 닭과 원숭이상 2기만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머리가 잘라져 사라져 버리고 신체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상태가 완전한 원숭이상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원숭이상과 닭상,그리고 남아있는 12지상 신체의 형태로 미루어 얼굴은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디
※ 관련자료
<성덕왕릉의 12지상은 왜 위치를 벗어나 있을까?http://blog.daum.net/kinhj4801/15961309>
2. 정면을 바라보는 말(午)을 기준으로 양쪽에서 다른 상들이 모두 말(午)쪽을 향해서 바라보는 형태
◈ 원성왕릉
원성왕릉(괘릉)
원성왕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물 속에 장사하고 관을 돌 위에 걸어놓고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기 때문에 '괘릉'으로 부른다는 전설에 의해 흔히 괘릉이라고 부르는 능이다.
능묘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세부수법은 신라인들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주고 있다.
왕릉은 지름이 약 22m, 높이 7.7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아래의 호석은 높이 약 95cm, 너비 약90cm의 면석을 둘렸으며 면석 사이에는 탱석을 세웠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12지상을 부조로 조각하였는데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 조각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의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통일신라 왕릉의 대표격인 이 괘릉의 능묘제도는 당나라와의 문물교류를 통하여 그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나,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하는 것은 신라인의 창안이며, 각종 석조물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당시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능묘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따로 조각해 호석 앞에 별도로 세웠던 성덕왕릉식에서 탱석에 직접 조각하는 형식으로 발전된 것으로 판단된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정면을 보고있는 말(午)상
말(午)을 향하여 바라보는 다른 12지상들
12지상의 얼굴방향은, 정면을 바라보는 말(午)을 기준으로 양쪽에서 다른 상들이 모두 말(午)쪽을 향해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말(午)은 항상 정남쪽에 위치하게 되므로 12지상이 있는 왕릉에서 말(午)을 찾으면 방향을 쉽게 알 수 있다
◈ 진덕여왕릉
진덕여왕릉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산자락 구릉에 있다. 진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승만(勝曼)으로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의 두 번째 여왕이며, 어머니는 박씨로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647년에 왕이 되어 654년에 승하하여 7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국력을 길러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해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죽은 뒤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는데 사량부는 지금의 흥륜사지 일대로 추정되므로 왕릉의 위치와는 일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라 제 28대 진덕여왕(647년-654년)의 릉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릉의 위치와 맞지 않으며 릉의 형태가 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어서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이 많다. 특히 조선 후기 영조때 박씨문중과 김씨문중이 합의하여 왕릉으로 지정할 때에 이름 붙여진 능이어서 신빙성이 적으며 역사적인 사실과도 다른 점이 많아 학계에서는 잘못 붙여진 이름으로 인정하고 있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쥐(子)상
가운데 말(午)쪽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는 12지상
왕릉은 지름이 14.4m, 높이 4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아랫쪽에 판석으로 된 호석을 병풍처럼 돌렸으며 호석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무덤 및 둘레를 따라 깐돌(敷石)을 놓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웠는데 지금은 난간부재가 거의 없어졌다. 호석과 호석 사이사이에는 12개의 탱석(橕石)을 끼워 넣고 방향에 따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다.
12지상은 무장(武將)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남쪽면에 있는 말(午)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나머지 상들은 말(午)상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이외에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1975년에 만든 통로와 축대가 있다.
무덤 형식은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며 둘레를 에워싸고 있는 12지상은 다른 왕릉의 12지상과 비교해 볼 때 조각의 수법이 가장 뒤떨어지는 것으로, 조각이 얕고 평면화 된 양식은 9세기 후반의 능묘 양식과 일치하고 있다.
◈ 구정리 방형분
경주시 구정동 불국사역앞의 광장 북쪽 구릉 아래에 있으며 신라릉으로는 유일하게 네모난 형태의 무덤이다.
네모지게 쌓은 둘레석 위에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방추형의 봉토분이다. 봉토 아래에는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호석을 둘렸으며 네 귀퉁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다. 모서리에 세웠던 돌기둥에는 무인상과 사자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것이 1점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능의 각 면에는 3개의 탱석(撑石)을 같은 간격으로 세워 탱주(撑柱)로 삼고, 탱주 외면에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12지상을 새겨져 있다.
남쪽면 가운데 탱주에 새겨져 있는 말(午)상의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나머지 상들은 말상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말(午)상
말(午)상이 있는 탱석 오른쪽에 널방(石室)으로 들어가는 널길(연도)가 있으며 현재 입구가 개방되어 있어 내부로 들어가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신라 무덤이다.
석실의 크기는 남북 2.7m, 동서 2.4m이며 남쪽으로 널길이 나 있고 그 안에 쌍여닫이 돌문이 있는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이다. 석실 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된 시상대(屍床帶)가 놓여 있다
무덤이 방형(네모모양)으로 신라에서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도 특이하지만, 무덤 안의 석실을 들여다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무덤 주위에 십이지상이 조각된 호석이 있어, 지위가 높은 사람의 무덤으로 생각되나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 관련자료
<경주, 신라인의 무덤 중에는 사각형도 있다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489>
3. 정면을 바라보는 쥐(子), 토끼(卯), 말(午), 닭(酉)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2상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형태
◈ 흥덕왕릉
흥덕왕릉
경주 북쪽의 안강읍 육통리 구릉에 있는 신라 제42대 흥덕왕릉이다.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 왕릉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비와 합장한 것으로 되어 있어, 봉분(封墳)의 규모가 비교적 크다
흥덕왕은 제41대 헌덕왕의 친동생으로 즉위 후 당나라 문종(文宗)으로부터 신라왕에 봉해졌다. 흥덕왕은,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왕'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서해의 해적을 퇴치하고 방어를 하게 하였으며, 사신 대렴을 시켜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께 한 왕이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고분 중에서 신라왕의 이름이 붙어있는 릉은 모두 38기이나 이 가운데 무덤 주인이 정확하게 밝혀 진 것은 단 2기뿐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이다.
1977년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에서 실시한 흥덕왕릉 주변 발굴조사시 상당수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었는데 비편 중에서 '흥덕'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했다(陵在安康北比火壤與妃昌花合葬)'라는 기록과 일치하여 왕릉의 주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 왕릉이다.
따라서 흥덕왕릉은 당시의 능묘제도의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상을 보여 줄 수 있는 기준이 된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토끼
소 쥐 돼지
양 말 뱀
흥덕왕릉 12지의 탁본
봉분의 크기는 직경 22.2m, 높이 6.4m의 원형봉토분으로, 규모가 비교적 큰편이다
봉분(封墳) 아래쪽으로 1.3m 높이로 판석(板石)을 세워 둘레돌(護石)을 삼고, 판석과 판석 사이에 탱주(伸即)를 세워 판석을 고정하였다. 탱석에는 각각의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는데, 12지상은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다.
동서남북의 정 위치에 있는 쥐(子), 토끼(卯), 말(午), 닭(酉)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좌,우에 있는 상들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상(像)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이러한 형태는 그동안 여러 형태가 진행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면을 기준으로 다른 상들이 둘러싸는 모습으로 그 공간배치와 자세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관련자료
<죽어서도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흥덕왕릉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633>
4. 모든 상이 머리를 오른쪽을 향하고 바라보면서 호석을 일주하는 모습
◈ 김유신장군묘
김유신장군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구릉에 있으며 삼국통일의 주역인 흥무왕 김유신장군의 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조선 숙종때 세운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비'와 1934년에 세운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비'가 세워져 있으나 묘의 주인공을 놓고는 학자들간에 시비가 계속없이 계속되고 있다.
봉분의 지름은 약 18m이고 높이는 5m에 이르는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아래 둘레석에는 높이가 약 95cm 되는 둘레돌(護石)을 세워 한 칸 건너 하나씩 평복(平服)에 무기(武器)를 들고 있는 12지상이 새겨져 있다.
12지상의 얼굴 방향은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둘레돌(護石)의 바깥쪽으로 바닥에 깐돌(박석敷石)을 깔았으며, 돌난간을 둘렀다.
능묘의 구조와 양식이 흥덕왕릉의 봉분과 비슷하여 김유신이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추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뱀 말
원숭이 양
모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김유신장군묘의 12지
이 십이지신상은 다른 왕릉이 갑주무장상(甲胄武裝像)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평복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몸은 ‘을(乙)’자형으로 틀었다.
새김은 대체로 엷게 새긴 느낌을 주나 그 수법은 세련되고 능숙하다. 그러나 장군의 무덤에 평복을 입고 있는 12지상을 새겨넣은 것이 조금은 의아스럽다.
한편 이곳 묘역에서 납석제(蠟石製) 십이지신상인 토끼상과 말상, 돼지상, 얼굴부분이 파손되어 알 수 없는 상 등 4개가 발견되었다. 높이가 30㎝인 소상(小像)들이고 무복을 하고 있어 툴레석(호석)의 평복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또한 봉분표식으로서의 십이지신상을 새기고 다시 중국처럼 12지상을 땅에 묻어 중복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박고 있다.
평복(平服)인 둘렛돌의 12지와 무복(武服)인 땅에 묻은 12지상(돼지)
납석제의 말상과 토끼상, 얼굴을 알 수 없는 상(무복에 무기를 들고 있다)
◈ 헌덕왕릉
헌덕왕릉
헌덕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북천북로에서 약 100 미터 북쪽으로 들어간 지점, 들판 가운데에 있는데, 산지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 후기의 일반 능과는 달리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능의 크기는 지름 27m, 높이 5.7m의 원형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를 따라 잘 다듬은 판석(板石)을 사용해 병풍처럼 돌려 무덤의 보호석을 마련하였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는 두 판석을 맞물리게 하는 탱석(撐石)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켰는데, 판석을 지탱하는 탱석(돌못)은 모두 48개로, 3개 건너 하나씩 12지상을 새겼다. 그러나 현재 많은 부분이 없어지고 남아있는 12지상은 북쪽의 쥐(子), 북동의 소(丑), 동북의 범(寅), 동쪽의 토끼(卯), 북서쪽의 돼지(亥)상 이렇게 5상만 남아있다.
이 능의 앞쪽에 흐르는 북천(알천)이 자주 범람하여 능의 일부가 유실되면서 함께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의 몸에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복장은 김유신 장군묘의 십이지상과 같은 평복(平服)이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으며, 얼굴의 방향 역시 김유신장군묘의 12지와 같이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쥐 소
범 돼지 토끼
모든 12지상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원래는 신라 제42대 흥덕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의 전면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갖추고 무덤의 둘레를 따라 돌난간을 마련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석인상들은 아마 홍수로 인하여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묘와 헌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은 모두 평복을 입고 있으며, 머리를 오른쪽을 바라보면서 호석을 일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배치 형식면에서 볼 때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관련자료
<도래솔에 둘러쌓인 강변의 평지왕릉 - 헌덕왕릉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038>
5. 정면을 바라보는 말(午), 개(戌)를 두고 서로 양쪽에서 얼굴을 바라보는 형태
◈ 능지탑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 7호선의 동쪽, 낭산에 있는 토탑(흙으로 쌓은 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5층 이상의 방형(네모형태)탑으로 생각된다.
능지탑의 현재 크기는 한변의 길이가 23.3m, 높이는 약 4.5m로 옛부터 능시탑(陵示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 불렸다.
1979년 발굴조사시 이 탑 안에 소조불상(흙으로 만든 불상)을 안치하였음이 밝혀졌으며 따라서 당초에는 사방에 소조대불(塑造大佛)을 모시고 감실(龕室)을 세웠을 가능성도 높으며, 기단 사방에 12지상(十二支像)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 올린 오층석탑으로 추정된다.
복원 정비하면서 기단부와 2층만을 복원을 하였고 나머지 석재들은 뒷편에 쌓아두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이내에 고문(庫門)밖 뜰에서 화장하라. 상례(喪禮)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 유언에 따라 문무왕을 화장(火葬)한 장소였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기단부는 각면에 3개의 탱석을 세우고 탱석에 12지상을 새겼다. 12지중 범(寅), 용(辰), 뱀(巳)상은 없고 9개상만 남아있는데 돌의 재질이나 신상(神像)의 모양과 조각수법 등으로 볼 때, 원래 같이 만들어진 한 조가 아니고 여러 조의 십이지상이 한데 섞인 것으로 추정된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양 말 토끼
소나 돼지상에 비해 크기가 더 큰 가운데 쥐상
특히 쥐(子)은 다른 12지상에 비해 길이가 14cm 정도나 길어서 상 아래에 받침석이 없으며 좌우에 있는 소(丑)상이나 돼지(亥)상은 정방형에 가까우나 쥐상은 세로가 긴 장방형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8기의 12지상들은 모두 섬세한 조각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나 쥐상은 평복(平服)을 입고 있으며 다른 상들이 높은 돋을새김인데 비하여 새김이 얕다.
얼굴의 방향은 다른 곳에 사용된 것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쥐(子)상을 제외하고 살펴보면, 말(午)과 개(戌)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좌우 상들이 말과 개을 향하여 바라보는 형태로 보이나 다른 동물들의 얼굴형태는 일정한 규칙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 관련자료
<능지탑 12지의 쥐상은 왜 다른 모습일까?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785>
6. 정면을 바라보는 쥐(子), 토끼(卯), (말午)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지만 원숭이(申)와 개(戌)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형태
◈ 경덕왕릉
경덕왕릉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야산 기슭에 있으며, 찬란한 신라 석조예술을 꽃피웠던 제 35대 경덕왕의 무덤이다.
무덤의 둘레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능 앞에는 안상문을 새긴 석상이 남아 있으나 부친의 능인 성덕왕릉이나 원성왕릉에 있는 것과 같은 석인상이나 석사자는 없다.
왕릉은 지름이 약 22m, 높이가 6m인 원형봉토분으로 능의 아래부분에 호석을 둘렸다. 호석은 목조건물의 석조기단과 같은 형태로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높이 90cm, 너비120cm의 면석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을 세웠는데 탱석에는 2칸 건너 하나씩 12지상을 새겼다. 12지상은 무복을 입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형상이다
12지의 시선방향(화살표방향)과 무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쥐, 토끼, 말
원칙이 지켜지지않은 원숭이, 닭, 개
정면을 바라보는 쥐(子), 토끼(卯), (말午)을 사이에 두고 좌우의 신상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지만 원숭이(申)와 개(戌)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김유신묘의 용(辰)상
신라왕릉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그 배치형태에 있어서 초기에는 입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얼굴의 방향이 모두 정면을 향했지만, 점차 둘렛석(호석護石)을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표현되면서 구정리방형분, 괘릉, 진덕왕릉처럼 남쪽에 위치한 말(午)을 기준으로 다른 상들이 서로 바라보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유신묘와 헌덕왕릉 처럼 얼굴방향이 한 방향으로 바라보는 형태로 배치되거나, 동서남북 네 방향에 기준이 되는 쥐(子), 토끼(卯), 말(午), 닭(酉)상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상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도상으로 배치되어 완성을 이룬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들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은 신라흥덕왕릉에 나타난 형태처럼 네방향에 정면을 바라보는 상을 배치하고 다른 상들이 서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가장 기준이 되는 모습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석탑에 나타나는 12지상
♣ 원원사지 삼층석탑의 12지상
원원사지 삼층석탑 상층기단의 12지상
경주시 외동면 입실리에 있는 원원사지의 동 서삼층석탑의 상층기단 각면에 3구씩 12지상이 새겨져 있다.
신라왕릉의 12지상들은 모두가 입상(立像)인데 비하여, 이 석탑의 12지상은 동 서 양탑 모두 좌상이며 쥐상을 제외한 9구(2구는 남아있지 않음)의 12지상이 연화대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복장(服裝)은 모두 평복(平服)에 천의를 날리고 있으며, 일반 왕릉의 12지상은 모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나 이곳의 12지상은 무기가 없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얼굴의 방향은 소(丑)만 왼쪽을 향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을 보고 있는 소(축)상
닭 토끼
탑의 북쪽면/소(丑)만 왼쪽을 향하고 있으며 나머지 상들은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 관련자료
<김유신이 세운 신라의 호국사찰 - 원원사지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369>
♣ 황복사지의 12지상
황복사지 삼층석탑
황복사지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은 황복사지 삼층석탑(皇福寺址 三層石塔-국보 제37호)의 동쪽에 위치한 과수원 안에 소재하는데, 일부는 논으로 개간되었으며 동쪽 잔여부분에만 감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십이지신상은 논과 과수원사이 경계지점에 위치하며 현재 둑을 따라서 모두 3기가 확인되나 모두 땅 속에 묻혀있어 그 형상을 볼 수는 없다.
이들 십이지신상은 지난 1940년대에 처음 발견된 이후 별다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1968년 5월에 신라삼산오악학술조사단(新羅三山五嶽學術調査團)에 의하여 조사된 바 있다. 이때 실시한 시굴 조사 결과 땅 속에서 모두 8구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시의 황복사 12지상(소)
양 (未) 말(午) 뱀(巳)
당시 조사는 1968. 4. 22∼5. 14일까지 실시되었으며, 조사는 홍사준(洪思俊), 황수영(黃壽永), 신영훈(申永勳), 김동현(金東賢)교수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건물 기단 전면(建物 基壇 前面)에 대한 조사결과 기단은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면석과 잡석을 섞어서 축조했음이 밝혀졌으며, 기단 하부에서는 삼국시대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십이지신상의 배치는 북쪽면에 돼지(亥), 쥐(子), 소(丑)像 외에도 上部가 파손된 상이 1개있고, 동쪽면에는 닭(卯), 뱀(巳), 말(午), 양(未)像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82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는 모두 6구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재확인된 바 있는데 돼지(亥), 쥐(子), 소(丑)는 동향을 하고 있고 뱀(巳), 말(午), 양(未)은 남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1985,『新羅狼山遺蹟調査』동국대박물관)
그러나 12지상은 지표조사 후 원래대로 땅 속에 묻어두었으므로 이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전체의 규칙성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헌덕왕릉의 12지와 같이 평복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시선은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십이지신상의 서있는 범위는 동서길이 8m, 남북길이 12,7m이다.
황복사지의 십이지신상은 皇福寺 경내에 포함된 지역으로 건물기단에 사용된 특이한 경우이다. 통상적으로 석탑의 기단부에 사용된 사례는 다수 알려져 있지만, 황복사(皇福寺)의 경우 매우 드문 사례로 원래부터 건물기단에 사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12지신(十二支神)은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권속이니 약사전의 건물과 관련하여 실재로 건물기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황복사지 동쪽 논바닥에 있는 폐왕릉
그러나 현재 황복사지 삼층석탑 동쪽 약 80m 떨어진 지점에 왕릉(王陵)으로 추정되는 폐고분(廢古墳)이 존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왕릉이 '三國史記'에 기록된 경명왕릉(景明王陵-皇福寺 北에서 장사지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이 왕릉에서 옮겨왔거나 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왕릉에서 옮겨왔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들 12지신상(十二支神像)과 황복사(皇福寺)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유적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황복사지 유물배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