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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준의 출구전략이 시행되면서 신흥국시장이 몸살을 앓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경제의 성장동력으로 부상했던 신흥국들의 금융시장이 흔들리는 등 여지없이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자원특수와 재정지출로 성장동력을 유지해왔으나 경상수지 적자와 개혁개방 정체 등 구조적 걸림 돌들이 해결되지 못한 데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신흥국 경제의 구조적 난제들은 2000년대 초반 브릭스 국가를 위시한 신흥시장 열풍이 불기 전부터 오랫동안 해당국 경제의 비상을 막았던 것들이었다. 신흥시장의 이 같은 해묵은 난제가 외자유입이나 몇 년 간의 고도성장으로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면 큰 착각일 수 있다.
신흥시장의 기회와 위험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사업목적 및 범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금융투자의 위험성이야 즉각적인 시장지표를 놓고 판단해야겠지만, 중장기적인 내수시장의 성장성은 리스크 진단을 넘어 미래에 대한 투자 의지와 능력까지 따져야 판단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특수를 가장 크게 누렸던 한국 경제로선, 중국 경제가 식고 있는 상황에서 Post-China 시장을 찾는 작업을 결코 피할 수 없다.
154개 신흥시장 중 Post-China로 보다 유망한 시장이라면 1차적으로 어느정도의 시장규모를 가진 국가여야 할 것이다. 인구 5천만명 이상, 구매력평가 기준으로 소득 2천달러 이상으로 추려보면 16개국이다. 이들 국가를 한국 경제와의 관련성, 인구구조, 도시화 정도 등의 기준으로 7, 8개의 국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물론 유망하다고 ‘노다지’를 캐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망했던 중국 시장이 G2급 거대시장으로 떠올랐지만, 성공한 한국기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신흥시장에서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지속적으로 현지 경쟁력을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 국가마다 특징이 있지만 시장의 잠재력을 재보고, 세밀하게 접근해 기회를 활용하는 노하우는 중국이나 Post-China 신흥시장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리스크 진단’과 ‘잠재성 판단’ 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시장을 통해 얻은 신흥시장 접근 노하우를 6가지로 정리했다.
(14.01.14)중국시장이 가르쳐 준 Post-China 시장 접근법[LG]_박래정 외.pdf
< 목 차 >
1. 신흥보다 부흥이 어울리는 경제대국들
2. 신흥시장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3. 중국시장이 가르쳐준 신흥시장 접근하기
4. 신흥시장, 생산기지보다 시장으로 봐야
국제통화기금(IMF)이 신흥국으로 분류한 나라는 모두 154개국이다. 정작 신흥(新興)시장 사람들 대부분은 ‘신흥’이란 말도 모르고 지낼 것이지만 바깥 세상에서 부르는 호칭은 후진국(under-developed)에서 개도국(developing)으로, 이제 신흥국(emerging)으로 바뀌었다. 대부분 신흥국의 국민들은 바깥 세상이 자기들 필요에 따라 값어치를 이리저리 달리 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저 외국사람들이 10년 새 더 자주 눈에 띄고, 전보다 살림살이가 부산해지고 있다는 느낌 정도 아닐까.
이들과 달리 글로벌 이슈메이커로 부상한, 명실공히 신흥한 나라들 중엔 ‘신흥’이란 단어에 성이 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중국 브라질 인도 러시아 등 브릭스(BRICs)국가들을 보자. 브릭스는 2001년 미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가 “The World Needs Better Economic BRICs”라는 보고서를 통해 향후 세계경제 지각변동을 몰고 올 나라로 4개국을 지목하면서 유명해졌다.
1. 신흥보다 부흥이 어울리는 경제대국들
중국과 인도는 서구 세계가 경제적으로 잘 살았다는 기원 후 ‘팍스 로마나’의 황금기에도 동방에선 최대 경제국 지위를 다퉜던 강국이었다. 인도산 향료에 정신이 팔려 금붙이를 긁어서 보내는 ‘교역조건의 악화’를 한탄한 로마 위정자의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도 시황제의 천하통일에 뒤이어 들어선 한나라가 중동까지 뻗어나간 실크로드를 비롯, 사통팔달의 황금상권을 누렸다. 두 나라의 최대 경제국이란 위상은 서구세계가 과학기술의 혁명이란 토대 위에서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경영을 거쳐 막대한 생산력을 쌓기 전까지 지속됐다.
냉전기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퉜던 러시아도 소련연방 시절 미국 GDP의 60%까지 근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질 역시 한국경제보다 서구화와 산업화 역사가 빠르다. 전자는 체제의 한계가 분명해지면서, 후자는 군부독재와 인플레이션 탓에 각각 경제강국 초입에서 미끄러졌을 뿐이다. 브릭스 국가 모두 어느 면으로 봐도 신흥보다는 ‘부흥(復興)’이란 말이 더 합당하게 들린다.
브릭스 용어 창안자인 골드만 삭스의 짐 오닐(Jim O’Niell) 당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생산요소의 규모 및 특성과 함께 총요소생산성(TFP)의 개선을 좌우할 거시경제 및 정치적 안정성, 정보통신 역량, 인적 자본 등에도 주목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풍부한 생산요소들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계발하고 효율화시키는 사회 정치적 조건들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제들은 역사적으로 이들 신흥국 경제가 서구 선진국 반열에 오르지 못했던 결정적 걸림돌이기도 하다. 골드만 삭스의 주장은 ‘경제강국이 될 수 없었던 구조적 원인들이 해결돼야 잠재력이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논지를 편 셈이 됐다. 그렇지만 국제 투자시장은 브릭스 열풍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전제조건보다 미래 모습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브릭스의 GDP 규모는 2조3천억 달러(명목 기준)였다. 그러나 2003년부터 브릭스 투자 붐이 일면서 2007년엔 3배 이상 커진 7조4천억 달러에 이르렀고 2012년에는 14조 달러에 이르렀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1999년 7.3%에서 2012년에는 19.8%(구매력평가 기준으로는 26.2%)에 달했다. 소비시장 규모도 1999년 1조6천억 달러에서 2007년 4조5천억 달러로, 2012년에는 8조6천억 달러를 찍어 무려 5배 이상 커졌다. 1999년~2012년 사이 연평균 13% 이상씩 몸집이 불어왔던 것이다.
출구전략 발표로 드러난 신흥경제의 취약성
그렇지만 2012년 하반기부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신흥국의 수출증가율과 성장률이 곤두박질쳤다. 이런 상황에서 2013년 여름 미 연준의 출구전략 발표는 신흥국 경제의 취약성을 더욱 부각시킨 데 이어 위기론까지 확산시켰다. 언젠가는 다시 미 연준이 달러를 빨아들일 것이란 사실은 시기만 문제였을 뿐 누구나 예상하고 있던 터였지만 이러한 당연한 수순도 이미 구조적 취약성이 도마에 올랐던 신흥국 시장엔 악재로 부각됐다. 휘발성이 강한 포트폴리오 투자가 빠져나가면, 자산시장이 충격을 받고, 이는 소비와 공급섹터에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였다.
직접투자를 제외한 포트폴리오 투자의 경우, 브릭스 4개국만 집계하더라도 2005년부터 2012년까지 4,273억 달러(순투자 기준)에 달한다. 같은 기간 신흥국 전체에 유입된 순 투자금액은 1조 2,611억달러로 2012년 한해 인도가 만들어낸 부가가치 총합(GDP, 1조 8,420억 달러)의 3분의 2가 넘는 막대한 규모다. 포트폴리오 자금인 글로벌기업 본지사간 자금이전까지 합친다면, 엄청난 규모가 될 것이다. 출구전략 예고발언이 나온 뒤 금융시장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2013년 최저치로 볼 때 5월초 대비 인도네시아 주가지수가 21.6% 폭락한 것을 비롯, 브라질 18.6%, 인도 9.3%, 멕시코 10.9%나 떨어졌다. 주식 등 자산시장에서 빠져 나온 외국자본들이 외환시장으로 몰리며 환율도 급등(통화가치 하락)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저점을 기준으로 5월초 대비 21.7% 하락한 것을 비롯, 인도(20.8%), 브라질(18.4%), 터키(16.2%) 등의 통화가치 하락이 이어졌다. 이젠 내수경기마저 식어 당장 경기하강을 걱정해야 하는 신흥국이 적지 않다. 실제로 새로운 수장(재닛 옐런 의장)을 맞이한 미 연준이 달러회수를 본격화하면, 신흥국 자금사정은 전반적으로 어려워질 공산이 크고, 선진국 수입수요가 극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향후 수년 간 실물경제의 성장세는 이전보다 2~3% 포인트 정도 내려가는 저성장 국면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다 10여년 만에 신흥시장의 매력이 사라진 걸까. 그 동안 찬사를 받았던 잠재력 포인트들은 국제 투자자본의 유입이 만들어낸 거품 같은 것이었을까.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선 개별 신흥국 시장에만 국한된 특징을 배제하고, 현재 거론되는 신흥 각국의 거시경제적 취약점들을 일반화해 보자. 크게 ①빈약한 제조기반 ②과도한 외자의존 ③곤궁한 재정형편 ④(자원배분 등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과정의 비효율성 등이 공통적으로 지적된다. 그런데, 이중 ①③④는 브릭스 이슈 등 신흥국 경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커지기 전부터 ‘태생적으로’ 안고 있던 취약점들이다. ②는 2000년대 후반에야 불거진 것으로서, 국제 투자자본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취약성의 하나로 거론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임을 따진다면, 국제 투자자금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2. 신흥시장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현재 제기되는 신흥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과거부터 있었던 고질적 문제를 다시 들춰 지적하는 것이라면, 2000년대 브릭스 찬양론은 결국 ‘외눈박이 주장’이었던 셈이 된다. 따라서 최근의 비판은 ‘2000년대 호경기에 그런 문제점과 취약성을 왜 해결 못했느냐’로 모아져야 합리적이다. 10년의 세월을 허송한 데 대한 선진국 투자자본의 실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신흥경제가 과거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이런 구조적 난제로 고통을 겪어왔음을 감안할 때 ‘10년만의 해결’은 솔직히 기대난망이다.
단기적 차익을 추구하는 포트폴리오 투자자 입장에서 10년은 말도 안 되는 긴 시간이다. 신흥시장의 투자기회와 위험은 가장 최근 공개된 여러 거시경제 및 시장지표를 가지고 판단하고 대응할 수밖에 없다. 신흥시장 내 구조개혁과 같은 이슈는 단기 투자자들에겐 최근 거시지표에 파급이 미칠 때에만 들여다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반면 신흥시장에 직접 진출한 투자기업은 한층 장기적 안목에서 잠재력을 판단해야 한다. 생산 및 판매거점을 세우고 현지인력을 고용해 연구개발, 마케팅까지 펼치는 과정에 무수한 위험이 도사리지만, 그 위험은 피하기보다 극복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인 경우가 많다. 리스크 중에는 기업의 국적을 가리지 않는 경우도 많고, 어쩔 땐 외국 국적기업이 더 유리한 사업환경도 적지 않다. 따라서 신흥국 경제의 잠재력을 평가할 때 포트폴리오 투자자완 척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금융 부문의 리스크가 제법 크더라도 중장기적 안목에서 경제가 안정되고 시장이 커간다는 확신이 선다면 적기에 진입해 선발 진입자로서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브릭스가 국제적 주목을 받기 10여년 전부터 신흥시장에 진출해 ‘국민기업’으로 발돋음한 힌두스탄 유니레버(인도), 상하이 GM(중국), 브라질 월풀, 아지모토(인도네시아) 등 글로벌 기업들의 성공사례는 매우 많다.
신흥국 경제가 ‘위험하다’는 뜻
단기투자자로서는 신흥시장이 위태롭다면 수익은 차치하고 원금 회수마저도 어려울 수 있다. 적기 대응이 중요한 만큼 되도록 최근 데이터를 토대로 평가와 판단이 이뤄진다. 지난해 LG경제연구원의 분석(LG 비즈니스 인사이트 1265호, <통화축소 시험대 앞에 선 신흥국, 펀더멘탈로 본 취약성>)에서는 거시경제 데이터를 입수할 수 있는 세계 150여개 국을 대상으로, 매월 발표되는 10개의 거시지표를 골라 위험성을 평가했다. 10개의 지표에는 대내적인 경기상황을 보여주는 5가지 지표인 ▲통화승수(M2/M1 비율) ▲실질이자율 ▲산업생산 ▲주가 ▲물가상승률 등과, 대외 여건을 보여주는 ▲수출 ▲수입 ▲실질환율 ▲교역조건 ▲미국과의 이자율 차이 등 5가지 지표가 포함됐다. 기본적으로 해당 거시경제 지표의 2012년 1월~2013년 9월 사이 변화율이 과거에 비해 높고, 극단적 수치가 자주 나타날수록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물론 이 분석을 통해 신흥국 경제의 잠재력이나 구조적 특성이 드러나진 않는다. 거시경제 상 대내외적 조건이 서로 맞물려 나타나는 가격변수 등이 과거 추세에서 얼마나 동 떨어져 있는가를 파악해 위험도를 평가하게 된다. 국제 투자은행들의 위험평가도 살펴보는 지표의 범위와 가중치가 다를 뿐 이와 유사한 방식일 것이다.
2013년 하반기 시점에서 거시경제 지표 분석 결과로 보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신흥시장 중에서는 브라질이 가장 위험한 나라로 나타났다. 2012년부터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물가상승 압력이 세지고, 부동산 값도 들먹거릴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산업생산 증가율은 하강기간이 길었고, 수출증가율도 약세, 수출단가도 떨어지는 등 실물부문이 급격하게 악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브라질 정부는 수출동력이 약화되자, 내수를 진작시키려 했으나 물가만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가 흔들리니, 주가는 약세로 돌고 환율도 급등했다. 브라질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우려는 근거가 상당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남미경제에선 브라질 외 칠레의 위험도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주력 수출품인 구리의 국제시세 하락 탓이다.
인도 경제도 금융부문에서 위험 징후가 포착되었다. 돈이 많이 풀리지만 적재적소로 흘러가지 않아서 산업생산이나 수출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외려 물가만 올렸다. 주가가 떨어지고 환율이 상승하는 것까지도 브라질과 대동소이하다. 인도에서 2013년 중반 단기자금이 빠져나간 것은 이 같은 배경을 깔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수출물량이 줄면서 수출단가도 떨어지는 이중악재가 나타났다. 실질이자율이 낮은 것 외엔 다른 지표에 문제는 없었지만, 경상수지 악화를 우려한 금융시장의 반응으로 주가 환율에서 위험도가 커졌다. 베트남 역시 시중자금을 푸는 데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동일한 분석에서는 위험 징후가 현저히 낮은 신흥시장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멕시코는 2013년 초 수출단가가 떨어지고 실질이자율이 내려간 것 외엔 위험의 징후를 찾기 힘들었다. 터키도 수출증가율이 낮고, 돈이 많이 풀려 자산가치에 거품이 끼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다른 실물부문이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폴란드 경제는 양호한 편에 속했다. 수출시장인 EU가 경기가 부진해 덩달아 수출이 줄어드는 것 외엔 실물부문에 위험한 징후가 없었다. 그런데도, 경상수지 적자 우려가 제기되면서 주가하락과 환율상승이 나타났다.
종합적으로 브라질 인도네시아 인도경제 등은 거시경제 지표로 볼 때 위험한 편이어서, 국제 금융시장의 반응은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반면 터키, 멕시코, 폴란드, 베트남의 경우, 경상수지 적자가 커진 것을 빼고는 거시경제 전체의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터키처럼 상당한 규모의 외화자산을 가지고 있거나, 폴란드와 같이 EU의 자금 및 정책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나라까지 위험한 경제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보였다. 국제 금융시장이 최근 개별 신흥시장에서 보였던 반응을 총평하면, 적당한 근거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 ‘일단 소나기를 피하고 보는’ 자금시장 특유의 대응양식에 따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위험했던’ 한국경제도 10대 경제대국으로 부상
만약 위와 같은 위험도 평가 척도를 1997년 한국 경제에 적용하면 어떨까. IMF에 손을 벌린 것은 그 해 12월이었으나, 외국 투자은행들이 경고등을 켜기 시작한 것은 기아자동차가 도산한 7월경부터다. 1996년 1월~1997년 7월 사이를 분석기간으로 정해 거시경제 10개의 지표를 통해 위험을 평가해봤다. 통화증가율은 이미 1996년 초부터 높아졌다. 과잉유동성의 징후다. 그리고 1996년 중반부터는 환율과 수출에서 경고음이 커졌다. 환율상승 속도는 10년 새 가장 빨랐지만 수출증가율은 마이너스를 기록하여 10년새 가장 저조한 축에 속했다. 수입품 가격 대비 수출품 가격도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가격 하락에 따라 크게 떨어졌다. 이와 같은 경제 전반의 혼란을 반영하여 주가지수는 1996년 말 한 해 전보다 20% 이상 떨어졌다. 10개 거시경제 지표의 흐름은 2013년 브라질 경제와 비슷하게 위험한 수준이었다. 거시경제적 위험이 커지는 가운데 1997년 8월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서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달러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환율 급상승과 주가 대폭락이 잇따랐다. 국제 단기 투자자 입장에선 빨리 빠져 나오는 게 현명했다.
국제 투자은행들은 ‘물 새는 배에서 탈출하듯’ 원화 자산을 팔아 치우고 한국 금융시장에서 손을 털었지만, 몇몇 글로벌 기업들은 오히려 한국 제조업을 지탱해온 유수의 대형기업들 지분을 사들였다. 달러 한 푼이 아쉬웠던 한국 정부와 금융기관들은 대대적인 혜택을 약속하기 바빴다. 글로벌시장을 염두에 두고 조성된 생산능력과 우수한 기술인력, 중국경제와의 강한 분업구조 등 한국경제의 잠재력을 간파했던 몇몇 글로벌 기업들에겐 외환위기가 오히려 한국 산업구조에 편입될 수 있는 적기였다. 과연 국제 투자자본이 대 탈출했던 한국 경제는 불과 3년여만에 IMF에 빌린 빚을 다 갚고, 제조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시경제 데이터를 통한 분석은 비교적 단기적 관점에서의 리스크 분석에서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롤러코스터를 탔던 한국 경제의 사례는 신흥시장의 옥석 가리기가 1~2년의 거시경제 지표에만 의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만약 2013년 하반기의 경제지표만을 가지고 신흥국을 평가한다면 현상적으로 드러난 위험성에 가려 지표의 이면에 숨어있는 구조적 특성은 간과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거시경제적으로 안정됐더라도, 사회정치적 걸림돌이 심각해 잠재력을 발현시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 결론적으로 신흥시장의 가치는 진출하는 외국자본이나 기업의 비전과 목적, 사업성격 등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는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투자활력도 가라앉고, 인구구조는 급격히 늙어가고 있다. 경제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각종 규제 제거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성장잠재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3% 중반으로 떨어졌다는 진단이다. 사실상 성장동력은 해외시장인데, 수출의 4분의 1이나 소화해온 중국 경제가 10%대 성장에서 7%대로 하향 안정되면서 경고등이 켜졌다. 2000년대 한국 GDP 성장의 6분의 1을 기여해온 중국이 과거 중국이 아니라면, 한국경제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물 속 개구리’와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중국 특수를 가장 크게 누렸던 한국이었던 만큼 ‘Post China’ 시장을 찾는 작업도 가장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ost-China 관점으로 본 신흥시장들
이제, 한국의 미래를 담보할 신흥시장을 찾아보자. 가장 우선적으로 시장 잠재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인구 크기를 따져보려 한다. 한 나라의 인구가 많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인구가 많을 경우 향후 소득수준 상승에 따라 내수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질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IMF가 신흥국 경제로 분류한 154개국 중 적어도 한국 정도의 인구 (5,000만 명)를 가진 나라를 골라내면 모두 19개국이 나온다.
19개국이 모두 유망할까. 소득이 지나치게 낮은 나라들은 정부가 재정을 통해 산업기반을 조성할 힘도 없고, 외국자본이나 기업의 관심도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한국 경제의 미래시장이 되려면, 일정한 수준 이상의 제조기반은 갖춰야 할 터인데, 소비여력이 제조업 육성조차 논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따라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인당 GDP가 2,000달러 미만인 나라를 제외해보자. 미얀마 콩고 에티오피아 등 3개국이 빠져나가 16개국이 남았다. 최근에 부각된 미얀마도 제외되었다. 미얀마의 투자가치는 자원분야에 국한돼있고, 부(富)가 군부 등 일부 계층과 일부 도시에 집중돼 있는 등 내수시장의 성장성은 아직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고령화 정도를 살펴보자. 65세 인구 비중이 높을수록 정부 살림살이에서 연금지급 부담이 커지게 되는데, 이는 미래 성장기반을 다질 재원을 낭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면 생산활동인구 중 15~30세 인구비중이 높을수록 수년 내 노동시장에 진입할 인력자원이 풍부해진다. 16개국 중 러시아는 고령자 비중이 13%로 가장 높고(2012년 기준), 젊은 층 비중(2010년 기준, 23%)은 두 번째로 적었다. 특히 유일하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생산거점을 육성하기엔 기후조건도 좋지 않은 곳으로 꼽힌다.
도시화 비율이 높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한 데 모여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제조업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해선 인력의 집중이 필요한 만큼 제조업이 일정 궤도에 올라섰음을 말한다. 집단거주에 필요한 내구재 수요도 상대적으로 큰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반면 이 비율이 낮은 나라들은 농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개 높아, 향후 산업화 과정에서 저임노동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할 수 있다. 16개국 중 도시화 율이 높은 순서는 브라질 멕시코 러시아 터키 이란 등이었고, 방글라데시 베트남 인도 순으로 낮았다.
신흥시장의 산업구조가 한국경제와 서로 보완적일수록 좋을 것이다. 또 보완적인 교역구조를 가지고 있더라도,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거나 무역흐름을 가로막는 다른 장벽이 있다면 교역실적은 저조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16개국의 ‘무역보완성’과 ‘수출유사성’, 수출입 비중 등을 분석했다(2012년 기준). 특정 신흥국이 한국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이 한국의 주요 수입품목이 될수록 보완성은 커지고, 이 나라의 전세계 대상 수출품 구성내역이 한국의 전체 수출품 구성과 비슷할수록 유사하다고 판단한다. 16개국 중 베트남과 필리핀, 방글라데시는 UN 무역위원회에 품목별 무역 데이터를 내지 않아 수출입 비중만 분석했다.
무역상품 구조로 볼 때 한국 경제와 가장 잘 들어맞는 나라는 중국이다. 교역비중도 당연히 1위다. 그러나 ‘Post China’ 신흥경제를 찾는 취지 상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는 멕시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순으로 보완성이 높다. 이중 인도네시아는 중국 다음으로 현재 교역비중이 높은 신흥경제다.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16개국 중 무역보완성이 각각 5위와 7위로 높을 뿐 아니라 한국과의 교역 비중 역시 6위와 9위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세계시장에서의 수출경합도 역시 3위, 2위로 높아 미래 신흥시장으로서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방글라데시와 나이지리아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한국의 총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4% 미만이다. 베트남의 경우, 한국의 수출 측면에서의 비중은 중국에 이어 2위를 기록한 반면, 수입 비중은 17개국 중 8위에 불과해 교역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이란은 한국의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위를, 수출 비중은 10위를 기록해 대조적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신흥시장 16개국을 개략적으로 살펴봤다. 선별기준에 가중치를 둬 16개국의 유망 순서를 매길 수도 있겠으나 자의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다. 하위 랭킹이라고 해서, 한국경제가 소홀히 접근해도 되는 시장도 아닐 것이다. Post-China를 바라보는 앞서의 기준으로 좀더 압축해 본다면 최근 평가절하 분위기가 완연한 브라질 인도를 비롯, 인도네시아 멕시코 베트남 이란 터키 등이 상대적으로 유망해 보인다. 16개 유망 시장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2004년 EU에 함께 가입한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인접국과 경제연계가 커지고 있는 폴란드를 포함시킬 만하다. 4개국의 인구를 합치면 6,400만 명에 이르고, GDP도 한국의 78%에 달하는 큰 시장이 된다. 폴란드는 무역보완성도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높게 나타났다.
3. 중국시장이 가르쳐준 신흥시장 접근하기
“지하철 노선 한 구획만 맡아주면, 골프장도 호텔사업도 허가해주겠다.”
1994년 1월 중국을 대표하는 경제특구인 광둥성의 선전시. 외자유치국(引進局)을 찾은 국내 A기업 시장조사 팀에게 B국장은 이권사업을 당근으로 제시했다. 토지를 국가가 독점하는 중국에서 골프장이나 호텔과 같은 부동산 레저사업은 권력층과 끈끈한 연이 없으면 꿈도 꾸기 어려운 사업. 게다가 호텔 같은 비즈니스 인프라는, 외국투자가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던 당시 중국에선 누가 봐도 황금알을 낳을 사업이었다. 선진 중심가엔 변변한 고층빌딩도 별로 없던 시절, 시 당국은 지하철을 놓을 돈도 기술도 부족해 A사에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으면 입찰서류가 수북이 쌓일, 귀가 솔깃한 제안을 들었지만 조사 팀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A기업의 당시 국내 주력사업과는 거리가 있었던 탓이다.
신흥국이 저마다 중국과 같은 폭발적인 성장과 변화를 겪지는 않을 것이다. 30년동안 연평균 10% 가깝게 고성장을 유지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며, 앞으로도 이 기록을 깰 신흥시장은 나타나지 않을 성 싶다. 경제운영이나, 시장질서 등에서도 차이가 많다. 그럼에도 중국 개혁개방 초창기 한국 기업들의 착근기(着根記)를 정리해보면 다른 신흥시장을 접근할 때 참고할 만한 교훈이 적지 않다. ‘13억 인구에 콜라 한 병씩만 팔아도…’ 류의 엉성한 시장 낙관주의도 문제지만, ‘천안문 사태가 또 일어날 것’이라는 황화론(黃禍論)도 현실감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위의 사례 A기업 조사 팀은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南巡講話) 2년째를 맞은 중국의 개혁 약속을 신뢰했지만, 그 결과 선전 시내에서 천지개벽이 벌어질 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만약 이 팀이 중국 관리들과 기업들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인 ‘필요한 것을 서로 주고 받는’ 스타일의 신규 사업을 구상했다면 향후 A사의 주력사업은 바뀌었을 것이다. 신흥시장의 잠재력을 재보고, 세밀하게 접근해 기회를 활용하는 노하우는 중국이나 Post China 신흥시장이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같고, 달라져야 할지 하나씩 생각해보자.
① 신흥시장이 절실해하는 분야가 리스크가 가장 적다
한국의 많은 대기업들이 1990년대 중반 중국 연해지역의 수출공단에 생산거점을 만들어 중국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PVC ABS수지와 디스플레이 등은 최근까지도 중국 내 시장점유율 1위를 지켰던 분야다. 이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수출 제조업 주도 성장과정에서 이 분야 시장공급이 턱없이 달릴 것이란 예상이 맞아 떨어진 결과다. 중국경제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공급애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절실한 분야에 일찌감치 편입된 셈이다. 하지만 이 때에도 중국에 진입한 외자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돈 벌기 어려운 시장”이란 답변이 낙관적인 응답보다 훨씬 많았다. 리스크 없는 신흥시장이란 없다.
다른 신흥시장에서 이 같은 기회를 찾아낼 수 있을까.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고 시장이 커갈수록 그 기반을 담당하는 B2B 사업은 기회가 크고 경쟁도 덜 치열하다. 다만 기업고객의 시장수요를 중장기적으로 파악해 투자시점을 조절하는 신중함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 합성수지 시장에서는 해당 중간재의 원료를 산유국 등에서 들여와야 하는 한국기업의 입장에서 전체 가치사슬을 어떻게 연결하는 것이 원가경쟁에서 유리할 지 따져야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 초창기를 연상시키는 현재의 인도경제에 한국 기업들이 대형 투자거점을 쉽게 마련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슈를 종합적으로 살펴본 결과이다. 선발진입의 이점이 크지 않다면 판매법인만으로 위험을 줄이며 수익성을 올릴 수도 있다. 생산요소의 가격추이와 정부의 힘, 시장경쟁 양상도 예상해야 한다. 여러 관점을 고려하다 보면, 신흥시장의 기회라는 게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활용할 수 없음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흥시장이 가장 절실해하는’ 사업 아이템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처 예상치 못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신흥국 정부나 현지 합작 파트너의 협조를 기대할 수 있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② 신흥시장 사업에 ‘대가 없는’ 특혜는 없다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 전자업체 마쓰시타(松下)전기는 1987년 베이징 도심과 공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옆 요지에 중국 최초의 칼라TV 공장을 세웠다. ‘전자입국’의 기치를 내걸었던 실력자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해 직접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자에게 투자를 요청한지 9년만의 결실이었다. 천혜의 입지를 제공받은 이 공장은 이후 덩의 후계자가 국가주석이 될 때마다 찾는 일중 우호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나, 평면 TV 시대가 등장하고 원가부담이 커지면서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마쓰시타 입장에선 공장 부지 사용권을 팔아 목돈을 마련할 법도 했지만, TV 생산라인이 멈추자 베이징 시 당국은 가차없이 회수를 추진했다. 싸게 받은 땅이니 용도전환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 공장이 안고 있던 각종 부채를 털고 나니 단돈 1위안에 부지 매각이 성사됐다. 한국계 D기업도 선양에 투자할 때 시세보다 70%나 싸게 땅을 받았지만, 철수할 때는 할인 폭만큼 그대로 되갚아야 했다. 반면 상하이GM은 초창기 투자할 때 싸게 부지를 주겠다는 현지 정부의 제안을 뿌리치고 시세대로 부지를 사들였다고 한다. ‘공짜의 무서움’을 간파했던 것이다.
유사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산둥성 칭다오(靑島)의 한국기업들은 2000년대 중반 경쟁력을 잃어 야반도주한 경우가 속출했다. 세금도 깎아주고, 땅도 싸게 준다고 해서 둥지를 틀었지만 경쟁력을 잃어 가동을 중단한 순간 지방정부는 계산서를 들고 나타난다. 뺄 것 빼고 나면, 빈손으로 돌아가거나 오히려 빚을 지게 된다. 외국기업에 공짜 특혜는 없는 것이다. 신흥국 정부가 죄다 중국처럼 강력한 파워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외국기업을 유치할 때는 다 기대하는 바가 있고 이 기대가 좌절되면 주판알을 튕기게 마련이다. 대개 일자리와 세금이다. 한국기업들은 신흥시장의 싼 인건비와 법인세 감면 등에 혹해 투자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동집약적 사업일수록 경쟁력이 빨리 닳는다. 일자리를 줄이기 시작하는 순간 현지 정부의 안색은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흥시장 투자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제시하는 당근을 일단 제쳐두고 순수한 사업성을 따지는 것이다. 사업성과를 내지 못하는 순간 특혜는 굴레로 바뀐다. 사법부에 제소해도 무소용이다. 대개 정부 행정력이나 종교적 가치관, 현지 정서가 법 규범을 앞서는 곳이 신흥시장이기 때문이다.
③ 보고서는 참고자료로 활용하자
2000년대 초 중반 중국 은행부문이 안고 있던 과도한 부실채권은 국제 투자은행 보고서의 단골 메뉴였다. 당시 중국경제는 중후장대형 산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능력을 확충하는 일종의 투자 붐이 일었던 탓에 돈줄이었던 대형 국유상업은행들의 부실채권(NPL) 비율이 15% 안팎까지 상승하는 듯 문제가 심각했다. 다만 2003년부터 4대 부실채권정리회사를 세워 구조조정에 착수했고, 무엇보다 부실을 청소할 재정여력이 탄탄했기에 치명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과다할 정도로 부실채권과 중국경제의 위기를 연결시켰던 국제 보고서들은 2005~2006년 무렵 이뤄진 국유상업은행들의 해외상장 등을 거치며 톤이 순화된다. 이들 중 상당수 은행이 지분투자에 참여했기에 더 이상 NPL 우려를 확산시키는 게 불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은행부문의 NPL 비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4분기부터의 일이었다.
중국 NPL 논란은 신흥시장을 평가하는 데 있어 주요 투자은행들의 보고서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물론 신흥시장의 자금시장에 직접 참여해 거래를 하는 투자은행 전문가들은 현지 시장동향과 정책정보 등에 가깝기 때문에 시장의 기회와 위험에 정통하다. 그러나 거래 당사자일 경우 중요한 분석결과를 공개하는 데 있어 자사 이기주의가 개입될 여지가 크다. 또한 신흥시장의 중장기 잠재력을 평가하는 데 단기 거시지표만으론 한계가 분명하다. 게다가 기본적인 성장률 추이나 시장 데이터가 한 분기, 심지어 반 년이나 지나 공개되기도 하고, 통계조사 역량이 딸려 외국기관에 의뢰하는 신흥국 정부도 적지 않다. 객관적, 정량적 분석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정보와 분석의 엄밀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연구 컨설팅 기관의 보고서는 대개 긍정적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신흥시장의 잠재력이란 것은 ‘언젠가는’ 현실화될 것이지만, 기업이 경영자원을 투입하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시일 내에’란 관점을 가지고 보고서를 살펴야 마땅하다. 경우에 따라선 정반대 결론이 도출된 보고서를 대조해보는 게 효율적일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신흥시장을 들여다볼 때 국제투자기관 보고서와 자사 조사분석 팀의 보고에 의존한다. 이 때 오류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탐색단계를 지나, 자원을 투입하기 전 단계에서 최고경영자가 직접 시장을 눈과 귀로 확인하는 것이다. 과거 김우중 대우회장이 신흥시장을 엮는 세계경영의 전도사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왕성한 출장과 직관 덕택이었다고 측근들이 회고하고 있다. 최고경영자나 대기업 오너경영자들은 10년 뒤 시장잠재력을 고민하는 반면, 위임 받은 현지 책임자들은 3년 임기 내에 성과를 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④ 정부의 역할과 한계를 알아야 한다
신흥시장치고 정부의 경제성장 의욕이 왕성하지 않은 곳은 없다. 유권자들의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수준을 높일 수 있는 경제성장이야말로 장기집권을 여는 지름길이다. 장밋빛 청사진 한 장 갖고 있지 않은 신흥국 정부는 없을 것이다. 실현성을 따지는 것은 시장에 돈을 묻어야 하는 외국 기업의 책무다.
정부 청사진의 현실성을 높이는 것은 바로 정부의 리더십이다. 정부 리더십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현실성 있고 서로 모순되지 않는 발전계획을 세워 내국인들과 외국 투자자 등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해나가는 기획 및 소통능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재정의 힘이다. 중국은 두 가지 모두 갖춘 드문 사례로 볼 수 있는데,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사회주의적 공유제를 가능케 했던 사회주의시장경제란 시스템 덕택이었다.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하지만 의회민주주의 전통이 깊은 인도에서는 중앙 따로, 지방 따로인 경우가 많아 개혁개방 스케줄에 많은 혼선이 초래되고 있다. 정부가 약속한 인프라시설 투자는 계획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토지권리가 복잡해 제조업 육성에 필수적인 용지확보가 매우 어려운 것도 문제다. 브라질 정부도 룰라 정부 집권 2기부터 수년 째 제조업 융성을 외치고 있지만, 재정의 힘이 미약해 답보상태다. 사실 대형 신흥국 경제의 잠재력은 제조업 기반확충과 이를 지원하는 교육 및 인프라시설의 토대 위에서 발현될 수 있다. 이런 중장기 전제조건은 정부가 ‘마중물’ 투자에 나서 신뢰를 얻고 더 큰 외자나 민간투자를 이끌어낼 때 충족될 수 있다. 외국 투자가로선 신흥국 정부가 발표하는 장밋빛 구상의 적절성과 일관성에 더해 직접 자금을 보탤 재정형편이 충분한 지도 따져야 한다.
⑤ 정치개혁이 경제 잠재력을 되살리는 데 중요하다
신흥국 경제가 잠재력을 발현하는 데 있어 정치개혁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학적으로 신흥국의 정치란, 한정된 자원을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산업간 배분하는 데 개입함으로써 경제성장 동력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신흥국 경제에 종종 나타나는 포퓰리즘이 경제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당대 유권자들의 요구에 따르다 보면 미래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미래 세대가 얻게 될 소득흐름을 줄여 당대로 가져오는 결과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이게 심하면, 성장의 지속성에 합리적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몇몇 신흥국에서처럼 정치권력을 장악한 계층이 부가가치 배분을 독점하는 착취구조에선 미래투자는 물론, 당대의 소비경제도 활성화되지 못한다. 따라서 신흥시장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 정치구조와 정치문화가 미래지향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지난 10여년 사이 신흥국 경제에서 정치개혁은 느리게나마 중요한 화두로 부상했다. 자신들의 삶과 정치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유권자들이 늘어나고, 기성 정치권을 압박한 결과다. 주요국별로 살펴보자. ▲브라질의 빈부격차는 상당부분 교육재정 부족과 부실운용 탓에 개선될 조짐이 없었다. 현 지우마 정부는 ‘석유유전에서 나오는 로열티의 10%를 교육지출로 써야 한다’는 법안을 내놓았는데, 이례적으로 여야가 합의로 통과시키기로 한 것은 대규모 시위의 덕이다. ▲인도네시아 공교육 투자는 10년째 GDP의 2% 후반으로 국제적으로도 최저 수준이다. 인프라 투자도 GDP의 3~4% 수준에 그치고 있어, 제조업 입국은 멀고 먼 길이 아닐 수 없다. 내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자카르타 현 시장은 과감한 인프라 및 교육투자를 공언하고 있어 희망을 준다. 다만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 그가 당선되더라도 획기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토지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인도에서는 2013년 1월 내각 직속의 투자위원회가 발족해 투자안건의 신속처리에 나선 데 이어 9월 의회가 토지수용법도 통과시켰다. 대규모 제조업 투자를 방해했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정치개혁의 일환이다. 그렇지만, 땅이 전재산인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 산업구조 전환이 순탄하진 않을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유럽 등지 외국자본을 슬기롭게 활용했던 터키는 현 총리의 친이슬람 행보가 두드러져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이란 경제를 옥죄었던 미국의 제재는 최근 대통령이 바뀌고 핵 협상이 진전되면서 풀릴 것이란 낙관적 기대가 커지는 중이다. 이란 경제의 지속성장은 석유수출과 그에 따른 투자활성화 없인 불가능하다. 미국과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경제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종교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이처럼 정치는 신흥국 경제의 생사여탈을 쥐고 흔드는 가장 강력한 상부구조다. 잠재력의 발현 여부를 가늠하는 데 있어 변곡점이 될 정치 개혁안은 중요한 분석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⑥ 시장질서와 개방성이 자리를 잡아가는 경제가 잠재력을 빨리 키워나간다
두 가지 모두 신흥경제가 부족한 자원을 최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 인프라’다. 이란처럼 석유 수출대금으로 서민 생필품의 보조금을 준다고 생각해보자. 가격체계가 국제 상대가격과 동떨어질수록 이란 산업의 경쟁력은 엇나가게 된다. 경제적 효율성이 신정(神政)의 지배구조에 억눌려 있다면, 더욱 문제다. 내수시장은 크지만, 광범위한 지하경제나 기간산업 분야의 독과점 구조 탓에 고비용 경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브라질이나 인도네시아의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이런 신흥국 경제일수록 문을 열어 외국기업과 상품을 들여놓길 꺼린다. 내수시장의 독과점을 유지하기 위해 수입장벽을 높게 세워놓으면, 애매한 소비자들만 착취를 당하는 셈이 된다. 이런 구조하에선 제조업 육성은 공염불이다. 부정부패 역시 문제다.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을 왜곡시켜 사회 전체적 비용을 높이는 요인이다. 신흥시장 내 정치적 투명성이 올라가고 사법체계가 공정해질수록 경제효율도 개선되고 시장의 파이도 커질 수 있다. 신흥시장의 붐이 일었던 지난 10여 년, 이 분야에도 개선은 이뤄졌지만, 여전히 잠재력 발현을 억누르는 수준으로 판단된다.
브라질 의회는 2007년부터 OECD가 요구했던 부패방지법을 2013년 여름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적 비난여론 덕택이었다. 이와 함께 의원들의 비리범죄에 대한 인신구속이 가능해진 것도 소득이다. 그러나 좌파진영의 대표적 아이콘이었던 룰라 전 대통령이 불법 정치자금 거래에 연루되는 등 정계 재계의 부정부패 관행은 광범위하다. 수하르토 체제가 무너진 뒤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인도네시아 부정부패 관행은 여전하다. 1999년 부패방지법 제정에 이어 처벌수위도 높였지만, 청렴수준을 나타내는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 2013년)는 세계 114위로 최하위권이다. 중앙정부가 의욕적으로 유치한 외국투자 사업도 현장에 가면 각종 뇌물 요구에 시달린다. 사법시스템을 개혁하면 투자 활력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인도는 사법부가 중심이 돼 부패와의 전쟁에 나섰지만, 행정부는 경제위축을 우려하는 양상이다. GDP 대비 23~26% 수준으로 추정되는 지하경제도 여전하다. 중앙정부는 멀티브랜드 외국 유통업체의 시장진입을 허용했으나, 지방정부가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영업을 막는 혼란상도 연출된다. 이란은 미국 경제제재가 풀려 석유 수출대금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해도, 종교단체와 혁명수비대가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 경영부터 자율화시켜야 한다. 이들이 장악하는 시장분야에서 대외개방은 꿈꾸기 어렵다.
4. 신흥시장, 생산기지보다 시장으로 봐야
신흥시장의 잠재력이 크고 빨리 발현될수록,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지혜는 아쉬워진다. 중국경제의 고도성장과 시장확대에 부응해 그만한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는 한국기업이 흔치 않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중국처럼 오랜 경제성장으로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고도화된다는 것은 그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로컬기업도 많아지고, 계산서를 내미는 현지 정부의 셈법도 복잡해진다는 뜻이 된다. 소비자들이나 기업고객들의 반응도 예전과 달라진다. 한마디로 게임의 룰이 바뀌는 것이다.
최근 들어 신흥시장이 전반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신흥시장의 잠재력도 한층 세밀하게 따지기 시작하고, 시장의 기회보다 위험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가 완연하다. 또한 중국의 사례를 볼 때, 한국 기업들이 향후 잠재력이 커질 몇몇 신흥시장에서 반드시 승승장구한다는 보장도 없어 보인다. 전략적 선구안도 키워나가야 할 과제이지만, 시장에 접근해 성공적으로 착근하는 글로벌 역량도 충분하다고 볼 수도 없다는 얘기다.
글로벌기업들은 이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과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의 장점을 통합한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의 필요성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글로벌 수요를 겨냥한 대규모 생산 스케일에서 나오는 원가경쟁력과, 현지 시장의 고객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현지화 역량을 결합해야 한다는 취지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의 활발한 해외투자를 통해 글로벌 생산거점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구축해놓았다. 자금력이 상대적으로 딸리는 중소기업들 중에도 2000년대 초 중국에 원가경쟁력이 뛰어난 생산거점을 마련해놓은 곳이 적지 않다. 중국과 일본기업의 틈바구니 속에서 딱 중간급이랄 수 있는 기술역량과 원가경쟁력을 확보한 것은 이러한 역동성 덕택이다. 이제는 이런 원가경쟁력과 현지화 역량을 결합시켜야 할 때가 왔다. 그렇지만 신흥시장은 오랜 기간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저마다의 장애요인을 안고 있다. 종교적 가치관부터 정치적 억압체제에 이르기까지 ‘장애’의 범주도 다양하다. 세계 경제의 통합추세는 멈출 수 없는 대세이지만, 신흥국 시장의 이런 독특함은 원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쉽게 무시해도 되는 특성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한국기업들의 중국 진출역사는 20년이 넘었다. 한국기업들은 한자문화권에서 성장한 탓인지 중국어 구사능력도 대개 더 뛰어나고 중화문명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다. 그런데도 중국 대학생들은 한국과 일본기업들보다 구미 기업들의 ‘중국 현지화’에 더 후한 점수를 준다. 그 이유는 구미기업들이 시장으로 중국을 접근한 반면, 한국 일본기업들은 공장으로서 중국을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으로서 중국을 바라본다면, 고객 연구가 필수적이다. 중국시장과 사회에 대한 분석에 목이 마를수록 우수한 현지인 스태프를 중용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대학생들의 외국기업 고용브랜드 랭킹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몇 예외는 있지만, 한국기업들의 취업선호도는 금융기관, 구미기업에 이어, 중국 국유기업보다도 떨어진다. 이 정도 현지화 역량과 고객평판으로 고객가치를 높일 수 없음을 자명하다. 신흥시장도 다르지 않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초창기 성장시장에선 수익창출의 기회가 넘치지만, 곧 시장참여자가 늘게 되고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만약 로컬기업이 시장의 핵심 참여자라면, 게임의 양상은 급격히 고객가치가 최우선시되는 수요자 시장으로 변해간다. 신흥시장이 커가고 고도화될수록 현지화 역량은 중요한 성공요소가 되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선진시장에 대해선 고객가치를 따지며 현지 스태프를 존중하는 반면, 신흥시장에선 원가경쟁과 비용절감에 주력하는 패턴이 일반화돼 있다. 신흥시장의 저임 매력이 사라지면, 생존전략 차원에서 다른 신흥시장으로 옮겨가는 ‘천수답’ 경영에 머무르는 기업이 여전히 많다. 이런 방식으로 신흥시장 정부와 고객들의 마음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임금이 낮은 곳으로 끝없이 이곳 저곳으로 공장을 옮길 수도 없지 않은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