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이 나를 부른다
하희경
날이 환하게 밝았는데 식구들은 아직 한밤중이다. 어젯밤 늦게까지 맥주 파티를 하더니 피곤한가 보다. 조용히 일어나 앞문을 열고 나간다. 오토바이 한 대가 저만치서 달려온다. 한눈에 봐도 낡은 오토바이가 쿨럭 지친 숨을 남기고 스쳐 간다. 앞집 마당에서 내 또래 여자가 순하게 웃는다. 같이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한 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원주민이 하는 작은 가게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진열된 물건을 보았다. 불량식품처럼 조악한 포장의 과자 몇 개, 두 개는 끓여야 양이 찰 것 같은 라면이 작은 탑을 쌓고, 이름 모를 푸성귀 두어 가지, 마늘, 생강, 바나나, 한 입 채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귤 몇 알이 먼지를 뽀얗게 이고, 놓여 있다. 갖춰져 있는 물건보다 모여 있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일 만큼 작은 가게이다. 동네 사랑방인지 여자들이 아이를 한 명씩 데리고 나와 햇살바라기를 하고 있다. 어떤 여자는 엄마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게 젊고, 어떤 여자는 할머니라고 공공연하게 얼굴에 씌어 있다. 그들의 수다가 귓전을 파고들며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공연히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뭔가 하나 구입하고 싶은 데 필요한 것도 살만한 것도 없다. 망설이다가 마늘에 손을 뻗었다. 마늘 두 통을 손에 들고 앞뒤 잘라 먹은 영어로 서툴게 물었다. ‘How much?' 묻기는 했는데 돌아오는 건 영어가 아니다. 게다가 말이 어찌나 빠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결국 페소가 들어 있는 지갑을 열어 그들 앞에 내밀었다. 가게 주인은 안에서 웃기만 하고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지갑에서 20페소짜리 지폐를 두 장 꺼내 주인에게 건넨다. 주인이 1페소짜리 동전 하나와 5페소 동전 하나를 거슬러준다. 마늘 두 통에 34페소, 우리 돈으로 800원 정도이니 괜찮은 거래지 싶다. ’Salamat po'라고 감사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할머니 품을 파고든다.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Do you take a picture?' 내 영어 표현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발음이 엉망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손짓으로 핸드폰과 아이를 가리키면서 사진 찍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그녀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할머니 품에 더 찰싹 달라붙는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찍는데 다른 아이가 앞으로 쑥 나선다. 결국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젊은 엄마와 아이, 할머니와 수줍은 손자, 가게 주인까지 한 장씩 찍고 작별 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걷는데 그들의 웃음이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집에 들어서자 커피 향기가 흘러나온다. 그새 아들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일찌감치 어디 갔다 오냐는 아들에게 마늘을 보여줬다. ‘마늘 있는데 어디서 났어요?’ ‘앞에 산책 나갔다가 가게가 보여서 그냥 샀어. 원주민들 사진도 찍고’ 라고 대답했다. 아들이 웃으며 커피를 내민다. 저는 마시지도 않으면서 눈만 뜨면 커피부터 내리는 아들을 쳐다보았다. 입속에 든 혀처럼 이렇게 마음에 드는 아들을 멀리 두고 살아야 하는 아쉬움이 또다시 고개를 내민다.
커피 잔을 들고 해변으로 향했다. 뒷문 앞에 신을 벗어 놓고 검은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부드러운 모래가 발을 감싼다.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모래가 기분을 좋게 한다. 잠시 파도를 바라보며 걷는데 저만치서 꾸야가 손짓을 한다. 그제야 어제 꾸야에게 부탁했던 일이 생각났다. 아침에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아 오면 사고 싶다고 했었다. 꾸야가 잊지 않고 어부에게 말을 했나보다. 꾸야와 어부들 몇이 플라스틱 통을 가운데 두고 모여 있었다. 서둘러 그들 곁으로 다가가 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작은 크기의 물고기만 몇 마리 파닥거린다.
‘꾸야’를 향해 내가 손짓을 보태어 말했다. ‘small fish, No.' 'I want big fish.' 어부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꾸야를 쳐다본다. 꾸야는 그들에게 타갈로그어로 빠르게 말을 전한다. 잠시 후 그들이 두 손을 작게 모았다가 넓게 펼치면서 ’big fish?' 하며 웃는다. 난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 그들과 꾸야가 다시 말을 주고받는 걸 보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파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꾸야가 달려와 뭐라고 말하는 데 타갈로그어다.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했더니 영어로 말을 하는데 꾸야 역시 영어가 서툰 사람이다. 결국, 몇 가지 단어를 가지고 유추해 본 결과 오늘은 큰 물고기가 안 잡혀서 내일 보자는 말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꾸야를 뒤로 하고 바닷가를 걸었다.
난 이곳이 참 마음에 든다. 앞문으로 나가면 동네 주민들이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바닷가다. 해변은 검은 모래이고 평탄한 데다 조개껍질 외에는 발에 걸리는 것도 없다. 여기 와서 며칠 지내는 동안 밤이나 낮이나 틈만 나면 해변을 걸었다. 파도가 밀려와 몸을 적셔도 상관없었다. 해변을 걸으면서 이 집, 아니 이 마을을 한 삽 푹 떠서 한국으로 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앞문으로 연결된 소박한 집들과 주민 그리고 뒷문으로 나가는 검은 모래사장과 하얀 포말을 내뿜는 파도치는 바다를 가져가고 싶다.
집에 들어오니 아떼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른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곳에서 살려면 얼마나 드는지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생각보다 싼 가격이다. 내가 반색을 하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그럼 엄마 이곳에 집 살까?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 아들이 웃으면서 자기 집하고 너무 멀어서 안 된다고 단칼에 자른다. 그 말에 기가 죽어 ‘그러니? 아깝다. 엄마는 이런 집에서 사는 게 소원인데, 몇 년 전에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글로 쓴 적도 있어.’ 그 말을 들은 아들이 ‘엄마, 여기 말고도 좋은 곳 많아. 엄마가 결정만 하면 돼.’ 그 말을 끝으로 집 얘기는 더이상 하지 않았다.
바닷가 집에서 나와 아들 집에서 며칠 더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오자마자 겨울 바다를 보러 갔다. 더운 나라에서 보는 바다와 어떻게 다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겨울바다는 추웠다. 그래도 말이 통하고 대중교통이 잘 연결되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내가 나고 자란 나라가 좋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필리핀에서 만난 바닷가 집이 나를 부르는 것 같다. 검은 모래밭에 하얗게 밀려들던 파도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아들이 필리핀에 간 뒤로 늘 보고 싶었는데 보고 싶은 게 하나 더 늘었다. 아들 생각만 하면 마치 한 몸인 양 아들이 사는 그 집이 나를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