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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나는 열흘 가까이 떨어지지 않는 밭은기침을 하며 책상 앞에 웅크려 앉아 있던 참이었다. 외풍이 센 방이어서, 유리창에 올록볼록한 비닐을 붙였고 커튼도 쳤지만 코끝이 찼다. 보일러 온도를 더 높여야 하나. 의자에 걸쳐둔 솜조끼를 스웨터 위에 겹쳐 입고 일어서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고 마른 몸피에 어울리지 않게 통이 넓은 연한 색 청바지에, 역시 지나치다 싶게 품이 큰 갈색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한 발을 방 안으로 막 들였고, 남은 한 발은 바깥에 엉거주춤 걸쳐놓았다.방문 너머 부엌의 어둠을 등진 그의 얼굴이 해쓱했다.
어쩐 일이세요?
반사적으로 나는 물었다. 그가 나에게 올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의 가족이 아니고 친구도 아니었다. 잠시라도 연인이거나 그 비슷한 무엇이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내 질문이 무례하고 무정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덧붙여 말했다.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턱을 마저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책상 앞 회전의자를 문 쪽으로 돌려놓았다.
여기 앉으실래요?
그는 망설이는 듯했다. 나는 재차 두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마지못한 듯 회전의자에 걸터앉은 그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뿔테안경 속의 장난기 어린 눈이 조금 웃는 것도 같았다.
차를 대접해야 할까? 하지만 죽은 사람이 차를 마시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차를 끓이는 동안 그를 혼자 두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그의 얼굴을 건너다봤다. 어쩐일이세요,라고 다시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뭐든 이유가 있겠지, 죽은 지 삼 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 올 때에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
여기가 k씨 집인가?
예.
혼자 살아요?
예.
내가 예전에 k씨 결혼식에 갔었는데, 그게 벌써.
십삼 년 전 이맘때예요. 십이월.
그렇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어. 그가 되풀이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차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렸다. 낯익은 모습이었다. 그는 외모에 무신경한 사람, 그래서 얼마간 촌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억양이나 표정, 손동작 같은 것은 대조적으로 서울 토박이 같았다. 사석에서도 사용하는 문어체 문장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로는 오지라 할 만한 강원도 군사지역에서 태어났고, 인근 마을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필사적으로 책을 탐식하는 그의 습관은 여섯 개 학년이 한 학급으로 운영되던 초등학교 분교의 도서실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십칠 년 전 첫 직장에서였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 많은 선배였으니 나에게 말을 놓아도 되었고 간혹 높여도 무방했다. 그는 질책할 일이 있거나 까다로운 일을 의논할 때마다 깍듯한 존댓말을 썼는데 갑자기 말을 높이는 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편안한 분위기에서도 다른 선배들처럼 분명한 하대를 하지는 않았다. 가벼운 경어 표현을 이따금씩 섞어 썼고, 뭔가 지적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글쎄, 그건 다음 기회로 넘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거리를 뒀다.
방금 중얼거린 말을 스스로 지우려는 듯 그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다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닌데… 지금 그가 내 사생활을 중언부언 캐묻거나 추궁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곧 알아차렸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단지 정확하고 싶은 것이다. 말로 오류를 범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때 선배님이 접시를 사주셨어요.
화제를 돌리려고 나는 밝게 말했다.
축의금 대신에요. 인사동 통인가게 거였는데, 두 개 한 벌짜리 분청사기 접시였어요.
내가 그랬나?
미소를 지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되물었다.
하나는 이사 다니면서 깨졌는데,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있어요.
나는 접시가 있는 부엌 쪽을 가리켰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가리킨 쪽의 어둠을 향해 그가 얼굴을 돌렸다.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내는 게 늘 싫긴 했어. 너무 편리한 방법이 잖아.
그가 또박또박 발음하며 다시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리 변하진 않는 거로구나, 나는 생각했다.
*
왜 여기로 왔는지는 나도 몰라요.
여전히 침착하게 그가 말했다.
꼭 가고 싶은 곳에 가게 되지도 않고, 꼭 보고 싶은 사람을 보게 되지도 않아.
책상의 스탠드 불빛을 옆으로 받은 그의 얼굴은 절반쯤 밝았고, 나머지 절반은 먹물을 끼얹은 것처럼 어두웠다.
선택할 수 있다면 매번 딸아이를 보러 가겠지. 그 애가 벌써 열아홉살이야.
순간 나는 사과하고 싶어졌다.
미안해요 선배. 저는 몰랐어요. 지난봄까지.
뭘 몰랐어요?
아무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경주 언니 그렇게 되고, 첫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들하곤 완전히 연락이 끊겼어요. 지난봄에 J사 사람을 우연히 만나 선배 안부를 물었는데, 대답이 믿기지 않았어요.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눈가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그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나쁘지 않은데.
그의 나이는 마흔여섯에서 멈췄고 나는 그 뒤로 삼 년 동안 나이를 먹어, 이제 그와 나는 다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여태 내가 함께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의 소식을 뒤늦게 들은 그 봄날 저녁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입력했었다. 이 년 칠 개월 전의 부고 기사가 가장 먼저 떴다. 방금처럼 눈가의 주름을 드러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 사진을 생소한 느낌으로 들여다보고, 지인들이 트위터에 올린 애통한 단상들을 여전히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읽어 내려간 뒤, 오래전 몇 차례 들러본 적 있던 그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그가 쓴 기사들과 생활의 단상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업데이트되던 그곳에는 정말로 삼 년여 전부터 새 글이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정색을 하면 커지는 검은 눈으로 안경알 너머에서 나를 응시하는 표정이 어쩐지 두렵게 느끼졌다. 내가 잘못된 화제를 꺼낸 게 분명했다.
선배, 차 드실래요?
다시 나는 밝게 물었다.
그럴까?
산딸기차, 박하차, 홍차가 있어요.
박하차가 좋겠는데.
나는 낮은 책장 위에 놓인 시디플레이어를 켰다.
음악 들으실래요?
좋지.
어떤 거 틀까요?
뭐든. k씨가 듣고 싶은 것.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 그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블로그에 실렸던 마지막 기사가 초가을 밤사간동 한옥에서 열린 퓨전 음악회였던 것을 기억했다. 기사 다음에 올린 단상에서 그는 그 공연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평생에 걸쳐가본 어떤 음악회보다 좋았다고, 정확한 이유는 어째선지 잘 설명할 수 없다고 썼다. 나에게는 여남은 개의 국악 음반이 있지만 그중퓨전은 둘뿐이다. 해금과 피아노 앙상블을 찾아 시디플레이어에 넣었다.
물이 금방 끓을 거예요.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일어서서 창 옆 책장으로 걸어갔다.아까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듯, 내가 최근에 산 책들 중 하나를 호기심 어린 손길로 꺼내 목차를 펼쳤다. 쉰 목소리로 흐느끼는 것 같은 해금 가락이 막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부엌으로 갔다. 주전자에 물을 붓고 끓이는 동안 가장 좋은 머그잔 두 개를꺼내 티백을 넣었다. 그가 선물했던 분청사기 접시를 싱크대 위쪽선반에서 찾아내, 냉장고에 남아 있던 호두와 건포도를 모두 털어담았다. 불안한 마음에 돌아볼 때마다 여전히 방에서는 스탠드 불빛과 음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책장 앞에 서 있는 그의 헐렁한 청바지가 보였다.
*
물이 끓기 직전에 나는 생각했다.
그가 조금 변하지 않았나.
물론 많은 부분이 놀랄 만큼 그대로였다. 하지만 십칠 년 전 함께직장생활을 하던 때와는 분명히 달라져 있지 않나.
죽었기 때문일까,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비슷하게 침착한 저 표정을 그의 블로그에 올려진 몇 장의 사진에서도 봤다. 나이를 먹으며 성마르고 까다로워지는 사람과 온화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후자 쪽인 것 같았다. 감포 바닷가의 콘도로 떠났던 회사 수련회에서 얼굴에 맥주를 뒤집어쓴 채, 목을 타고 셔츠로 흘러내리는 술을닦으려 하지 않은 채 핏발 선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던 서른한 살의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그때 나는 입사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수습사원이었기 때문에 그 충혈된 눈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그의 얼굴에 맥주를 끼얹은 뒤 유리잔을 쥔 채 떨고 있는 여선배의 손을 이해하지 못했다. 좌중의 침묵을, 헛기침을, 콘도 지하의 컴컴한 술집 테이블에서 서둘러 빠져나가는 임원진의 구둣발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와 여선배가 어떤 연애에 얽힌 사이일지 모른다고 막연히 상상했다. 어쨌거나 막내사원인 내가 테이블을 정돈해야 했다. 카운터로 뛰어가 냅킨 한 다발과 물수건을 가져와서 그에게 건네며, 여전히 입술을 떨고 있는 여선배의 창백한 옆얼굴을 놀랍고도 꺼림칙한 마음으로 훔쳐보았다.
자신의 얼굴과 셔츠를 대강 문질러 닦은 뒤에도 그는 고개를 똑바로 세운 채 침묵했다. 사람들이 눈치껏 차례로 그 불편한 자리를 떠나는 동안, 문제의 여선배는 맹렬한 속력으로 술을 들이켜 곧 엉망으로 취해버렸다. 열두시가 가까워지자 그와 여선배, 그리고 나만 테이블에 남았다. 둘이서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을 거란 생각에 나도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디 가요? 우리 바람 쐬러 나갑시다.
조금도 취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같이 갑시다. k씨.
아니에요, 뒤로 물러서는 나에게 그는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같이 갑시다.
콘도에서 불과 이백여 미터 거리에 해변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앞으로 세 걸음쯤 떨어져 걸었다. 엉망으로 취한 줄 알았던 여선배는 비틀거리긴 했지만 부축받지 않아도 될 만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들은 진지하게 대화했으며 때로 언쟁했다. 바람과 파도소리에 묻혀 대화의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연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사적인 화제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검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자, 흰 모래펄틈으로 거칠게 솟아오른 젖은 바위들을 그들은 앞장서서 밟으며 나아갔다. 간혹 뒤돌아보며 내가 아직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그것은 완벽한 제삼자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세 살짜리 수습사원에게 던질 만한 눈길이 아니었다. 제발 이곳에 둘만 남겨놓지는 말아달라고, 이 시간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곤란과 괴로움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것 같은 이상하게 간절한 시선이었다. 얼얼하게 얼굴을 때리는 짠바람과, 거대한 바다가 쉬지 않고 검은 몸을 뒤척이는 것 같은 파도 소리 속에서, 나에게는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방에 돌아와보니 그가 홀연히 사라졌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 책상 앞에서 일해온 사람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뿔테안경을 벗어 한 손에 든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책상에 펼쳐둔 삼국유사 주석본이었다.
연말까지 희곡을 완성해야 해서요.
책상 모퉁이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절반쯤만 사실이었다. 국립극장에서 내년 이른 봄 삼국유사를 주제로 세 편의 연극을 올리는 기획을 했는데, 연출하는 친구가 그중 하나를 맡았다. 처음으로 함께 작업해보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어려웠지만, 실은 다른 종류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것도 다시 쓸 수 없을 거라는 막막함 끝에 대본을 맡은 것이었다. 하지만 두 주 전에 최종마감이 지나갔고, 친구는 서둘러 다른 작가를 알아보겠다며 완곡하게 실망을 숨기는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연말까지 희곡을 완성하겠다는 것은, 그저 이 해가 가기 전 무엇이든 끝내보겠다는 개인적이고 가망 없는 바람에 불과했다.
부엌에서 쓰는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책상 옆에 놓고 내 몫의 찻잔을 들었을 때에야 그는 책을 내려놓았다. 펼쳐진 페이지 가운데 지난여름 내가 연필로 그었던 밑줄들이 보였다. 그 뒤 페이지의 여백에는 이제 쓰게 될 대본 속 승려들의 이름을 적고 동그라미를 둘렀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열 살 무렵 문고판 삼국유사로 처음 접했을 때부터 그 이름들의 발음은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래서, 잘되어가고 있어요?
오래전 그가 정색을 하고 말을 높일 때마다 그랬듯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밭은기침이 다시 나오려는 것을,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셔 가라앉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언제나 그렇게 물었다. 기어이 원고를 펑크 내겠다는 필자를 설득하는 긴 통화를 막 끝마쳤을 때, 기행 꼭지의 출장 사진을 실수로 모두 날려버렸다는 사진작가의 사과전화에 애써 괜찮다고 답한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잘되어가고 있어요? 그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었다. 나무라는 것도, 약을 올리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호들갑스럽게 근심을 함께 나누고선 막상 현실적인 도움을 못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감정을 절제하는 편을 택하는 그의성격을, 그걸 알고 나서는 일부러 엄살을 섞어 대답했다. 아, 정말죽겠어요. 안도하듯 그도 선선히 응수하곤 했다. 저런, 그렇게 쉽게죽진 않아.
이제는 예전처럼 과장스런 쾌활함 뒤로 숨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문제가 좀 있어요..
그는 놀라지 않은 듯, 그러나 조금은 궁금한 듯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다.
흔한 문제예요. 연출자와 제가 가려던 방향이 원래 비슷했는데,제가 써갈수록 점점 달라졌어요.
그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계속하라는 뜻이다.
*
처음 생각은 광대극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엉터리 신라 옷을 입은 광대 넷이 무대 한쪽에 앉아 전통 악기를 연주하면서 극이 시작돼요. 광대들은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면서, 극이 진행되는 중에도태연하게 툭툭 끼어들어 말도 하고 노래도 해요.
극의 전반부는 가볍게 가요. 깊은 산속 각자의 암자에서 홀로 사는 두 스님이, 이따금 만나 서로 얼마나 열심히 수행하는지 경쟁하고, 내기도 하고, 팽팽한 농담을 주고받아요. 너는 물고기를 먹고 똥을 누었구나? 나는 물고기를 먹고 물고기를 누었다. 에그, 저기 헤엄쳐 가는 게 그놈인 게나? 제가 얼마나 캄캄한 데를 빠져나왔는지알려는가.
그러다 눈보라 치는 밤이 오면서 분위기가 바뀌어요. 길 잃은 여자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하는데, 노힐부득은 유혹이 두려워서거절해요. 하지만 달달박박은 여자를 암자 안으로 들여요. 다음 이야기는 아마 선배도 아실 거예요. 언 몸을 녹이도록 달달박박이 나무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워줬는데, 여자가 함께 목욕을 하자고 말해요. 마침내 그 밤이 지나가고, 아침 일찍 노힐부득이 달달박박의암자에 찾아가죠. 친구가 유혹에 넘어갔을 거라고 짐작하면서. 그런데 나무 욕조도, 그 안의 물도 모두 황금이 되어 있어요. 달달박박은 황금 부처가 되어 있고요. 여자가 관음보살이었던 거죠. 그 황금의 물에 노힐부득도 몸을 씻고는 함께 부처가 돼요.
연출자는 제가 그 이야기의 전체 뼈대를 지켜주길 바랐어요. 하지만 쓰면 쓸수록 제 마음이 그 결말과 멀어졌어요. 그 승려들이 황금 부처가 될 것 같지 않고, 길 잃은 여자가 관음보살일 것 같지 않았어요.
*
음악 때문에 나는 일어섰다. 해금 앙상블의 마지막 트랙이 시작되었는데, 갑작스런 축제처럼 여러 대의 관악기와 타악기가 들어와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볼륨을 반쯤 줄였다가, 눈짓으로 그의 동의를 구한 뒤 정지 버튼을 눌렀다. 선 채로 다른 시디들을 뒤적이며 그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재미없지요?
자문자답하며 나는 웃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이야기를 봄부터 매일 생각했어요.
방금 뱉은 것이 낯익은 문장이란 사실을 문득 깨닫고 나는 말을 멈췄다.
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난 날마다 생각해.
십칠 년 전 그의 얼굴에 맥주를 끼얹었던, 검은 바위들이 솟아오른 해변을 비틀거리며 앞서 걸었던 여선배를, 나는 한 달쯤 뒤 점심시간에 회사 뒤편 골목에서 마주쳤었다. 삼월 하순이었지만 초겨울같이 추웠고 바람에서 모래맛이 났다. 단독주택을 개조한 국숫집 담장 위로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피차 혼자여서 우리는 함께 식당에 들어갔다. 여럿이 식사를 함께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따로 대화를 나눈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유난히 안 나오는 국수와 전을 기다리는 동안 선배는 아직 경주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 지난 몇 달간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참 재미없는 이야기지, 그렇지? 마른 몸에 비해 마디가 굵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그녀는 웃으며 자문자답했다. 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난 날마다 생각해.
*
더 이상 나는 그에게 이 실패할 ㅡ 아니, 이미 실패한 - 대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창사기념일 기억나세요, 선배?
찾고 있던 시디를 플레이어에 넣으며 나는 물었다.
월미도에 같이 갔었잖아요.
이번에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할 것 같아 나는 긴장했다.중지 첫 마디에 펜대 자국이 두드러진 오른손을 뻗어 그가 찻잔을들고 있었다.
그랬지, 류경주씨하고,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또렷한 가야금 독주가 이윽고 스피커에서흘러나왔다.
우리가 탁구를 쳤지 않나?
그가 찻잔을 입술에 대고 기울일 때 나는 생각했다. 차가 식었을텐데. 그는 여태 차가 식기를 기다렸을까. 죽은 사람은 뜨거운 것을마시지 못하나,
k씨가 심판을 봤지.
불쑥 누군가가 문턱을 넘어 들어올 것 같아 나는 그의 어깨 너머어둠을 바라봤다. 아무도 없었다. 부엌도 현관도 텅 비어 있었다. 그와 나 둘뿐이었다.
*
그날 경주 언니는 짙은 남색 원피스에 하얀 면 재킷을, 나는 첫 월급으로 이월에 사뒀던 연두색 투피스를 입었다. 그는 회색 정장에 하늘색 타이를 매고 007 가방을 들었다. 오월 초순의 화창한 날이었다. 제대로 차려입은 우리가 평일 오후 월미도의 놀이공원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흘끔거렸다.
아마 바이킹부터 탔던 것 같다. 개구리라는 이름이 붙은 처음 보는 놀이기구도 탔다. 기둥 하나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플라스틱 좌석 여남은 개가 그 기둥에 체인으로 매달려 있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기둥이 회전하자 좌석들이 대각선으로 떠오르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회전이 차츰 빨라지는가 싶더니 좌석들이 예고 없이 개구리처럼 튀어 올랐다. 더 높이 튀어 올랐다 툭 떨어지고, 더 빨리 돌고, 나중에 예기치 않게 뒤쪽으로 돌며 튀어 올랐다가 지옥처럼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그 기구에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입장권은 그와 경주 언니가 번갈아 샀다. 방금 탄 놀이기구 때문에 어지럼이 가시지 않은 채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는 나에게 경주 언니는 말했다. k씨, 수습이잖아. 아직 햇병아리도 안 됐는데. 그녀는 쿡쿡 웃으며 놀렸다. 계란이는 가만있어.
창사기념일 행사가 끝난 것은 오후 한시 삼십분경이었다. 입사후 밝은 평일 오후에 퇴근하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좀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갑자기 생긴 시간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며 지하 행사장 정리를 마치고 경주 언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먼저 사무실에 들렀다 나온 그가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선배, 뭐 하세요. 오늘?
나보다 다섯 살 많으며 그와 입사동기인 그녀가 그에게 깍듯이물었다.
글쎄, 너무 일찍 끝나 뭘 할지 모르겠는데요.
그 역시 깍듯하게 대답했다. 감포에서의 일 이후 그들이 사적인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럼 월미도 갈까요? k씨하고 같이.
그는 놀란 듯했다. 나도 놀랐다. 월미도? 되묻는 그에게 경주 언니가 말했다.
거기 놀이공원 있잖아요. 회는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되고,
오후의 한산한 인천행 국철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지상구간으로 접어들 때까지, 그들은 여전히 학생처럼 깍듯한 말씨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가 입사하기 직전까지 그들은 5년 가까이 같은부서에서 잡지를 만들었으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공통화제들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윤 선배하고 요즘도 연락해요?
그가 물었을 때 경주 언니는 선선히 대답했다.
예, 한 달에 한두 번은 통화해요.
지금 뭘 하신답니까?
그때 그의 어조는 너무 정중해서 약간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있는데 잘되는 것 같지 않아요. 벌써 나이가 너무 많잖아요..
그제야 윤 선배가 누구인지 나는 알았다. 대학 졸업과 함께 회사에 들어와 십일 년 동안 근속했던 사람. 내가 입사하기 직전까지 그들과 함께 잡지를 만들고 일을 가르쳤던 선배.
지난 삼월 경주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입사한 첫 달에 느꼈던 사무실의 미묘한 분위기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 들큼한 것이 벽 뒤에서 썩어가는 것 같던, 사람들의 미소와 목소리와 속마음이 모두 다른 말을 하는 것 같던 이물감이, 단순히 처음 진입한 사회생활에서 누구나 느낄 법한 주관적인 인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6·25 때 월남한 보수적인 오너가 세운 직원 사십여 명 규모의 회사였다. 한때 정치판에 몸담은 적 있다는 그 오너는 단신에 강철 같은 카리스마의 소유자였고, 여자 직원은 결혼과 함께 퇴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귀중한 모성을 보호받아야 하므로 가정과 직장을 양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그 회사는 대학을 갓 졸업한 여성을 주로 채용했고, 그녀들이 이십대 후반에 결혼해 회사를 떠나게 되면 다시 미혼의 여성을 고용함으로써 인건비를 최소화했다. 창사 후 수십 년 동안 이 원칙이 지켜졌으므로, 직원들은 나이 든 남자 상사와 어린 여자 평사원으로 양분되었다. 현재 평직원 가운데 남자는 한 사람, 지금 월미도에 함께 가고 있는 그뿐이었다. 그는 스물일곱 살에 입사해 얼마 후 결혼했고 돌이 지난 딸이 있지만, 퇴사할 이유가 없으니 변함없이 회사에 몸담고 있었다. 끝까지 회사에 남아 책임을 맡을 사람이므로 상사들을 비롯한 모두가 그를 다르게 대했다.
그와 경주 언니의 선배였던 윤이란 이는 서른네 살에 갑자기 결혼하게 되었지만 회사를 그만두길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퇴직을 거부한 첫 사례였다. 그녀가 서면으로 노동법의 근거를제시했지만, 오너의 뜻은 완고했고 상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출근투쟁을 시작하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작은 조직에서 사람들은 그 싸움을 지지하는 이들과 방관하는이들,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로 나뉘었다. 매일매일의 냉대와 압박속에서 그녀는 한 달을 버텼다. 아무도 일감을 주지 않는 책상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었다. 내가 그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지원서를 낸 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젠 모르겠어,라고 경주 언니는 나에게 말했었다.
임 선배가 어떤 역할을 해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 누구보다 입장이 난처했을 테니까.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내 마음이었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사람들, 정말 열심히 싸워야 할 상대는 오너와 상사들인데, 이상하게 임 선배가 불편했어. 그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며 끝까지 회사에 남을 선배의 얼굴을, 복잡한 마음없이 바라볼 수 없었어. 출근투쟁이 시작되고 두 주 동안 평직원들대부분이 태업을 했어. 삼 주째엔 평직원 모두가 사표를 쓰자는 제안이 나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상사들은 그 즉시 모두 해고될 거라고 경고했어. 이 회사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많다고, 어쨌거나 유능한 상사들이 버티고 있으니 잡지가 결호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거라고, 우린 저녁마다 모여서 회의를 했고, 우리 중 누가 회의 내용을 상사들에게 알리는지 파악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밝혀낼수 없었어. 모두 불안해했어. 다수결로 파업도 일괄사표도 결렬됐어, 앞을 알 수 없게 복잡하고 불안한 하루하루라고 그때는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더 단순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과정이었어. 우린 개끗이 졌고, 출근투쟁을 하던 선배는 떠났고, 그 자리에 k씨가채용됐고, 회사에선 전면적으로 인사 배치를 새로 해서 각 부서 직원들을 모두 떼어놓있어, 이젠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모든과정을 임 선배가 몰고 간 것도 아니었는데, 나서지 않았을 뿐 늘 우리와 같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단지 모두와 똑같이 무력했던것뿐인데, 나 자신부터 그토록 철저하게 무력했는데, 어째서 그 미소 짓는 얼굴에 술을 뿌릴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믿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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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를 치자고 먼저 말한 사람은 그였다.
비비탄 장총으로 동물 인형들을 맞혀 떨어뜨리는 부스를 지나 놀이공원의 출구 쪽으로 걷는데, 빛바랜 흰 천막 아래 설치된 탁구대가 보였다. 그와 경주 언니는 무심하게 잠시 의논한 끝에, 다섯 세트를 해서 진 사람이 저녁으로 회를 사기로 했다. 나에게는 네트 옆에서서 심판을 보라고 했다. 치자고 한 사람이나 그러자고 한 사람이나 심드렁했던 그들의 태도는 경기가 시작되자 곧 진지해졌다. 둘의 실력이 거의 대등했다. 마지막 세트는 여러 차례 듀스가 되다가어렵게 결판이 났다. 누가 이겼는지는 어째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장과 원피스 차림으로 신중하게 서브를 넣고, 지나치다싶게열심히 쫓아가 공을 받아치던 그들의 모습만 또렷하다. 그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