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달이라 일컬어지는 4월, 봄날씨가 너무 화창하다 못해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할 정도로
나들이가고싶게 만드는 달이란 의미이라라!
봄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4월초 벚꽃이 한창인 경주에 본인이 그동안 미처 구경하지 못했던 숨은
역사유적코스를 둘레길로 만들어놓은 역사산책로가 있어서 경주로 바로 Go Go!
##경주둘레길 10코스
1)경주읍성길 : 법장사~서봉총~금관총~경주문회원~동경관~집경전지~향일문~성동시장~경주역
2)선덕여왕길 : 명활성~겹벚꽃산책길~진평왕릉~황복사지~선덕여왕릉
3)신라왕경길 : 신라대종~대릉원돌담길~첨성대~월성~동궁과 월지
4)보문호반길 : 경주동궁원(식물원/버드파크)~사랑공원~수상공연장~호반광장~물너울교~
경주세계자동차박물관~경주타워
5)파도소리길 : 읍천항~양남 주상절리전망대~주상절리~출렁다리~하서항
6)감포깍지길(1코스) : 전촌항~용굴~감포항~해국길~송대말등대
7)기림사 왕의길 : 모차골~수렛재~세수방~불령~용연폭포~기림사
8)토함산바람길 : 경주풍력발전소~토함산자연휴양림~불국사~석굴암
9)동남산가는길 :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경북산림환경연구원~통일전~서출지~남산동 동서삼층석탑
10)삼릉가는길 : 월정교~천관사지~오릉~나정~일성왕릉~포석정~지마왕릉~삼릉~경애왕릉
이번에 기행할 코스는 경주둘레길10코스인 "삼릉가는길"입니다^*^
경주는 다양한 역사유적들이 산재한 지역에 사방으로 여러갈래길이 나있어서 둘레길기행을 가시는 분들은
일단 카카오맵의 길찾기지도를 참고하시면 되고, 갈랫길이 나오면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헷갈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정표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표지판이고 다른 하나는 민가주택 담벼락에
벽화그림과 코스명칭이 그려져 있는 이정표입니다.
(이정표1:표지판)
(이정표2:담벼락 코스명칭)
(기행코스) 약8Km
월정교~천관사지~오릉~나정~일성왕릉~포석정~지마왕릉~삼릉~경애왕릉
1.월정교(月精橋)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19년(760) "궁궐남쪽 문천위에 월정교,춘양교 두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현장에 배모양의 교각만 전해지고 있었으나 오랜 고증을 통해 누교(樓橋)를 복원함.
발굴조사결과 월정교는 길이가 60.57m이며 교각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와 기와가 출토되어 교각위쪽이
누각과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확인되고 동쪽 약 700m상류에 센 물살에 견딜수 있도록 배모양의
교각뿐만 아니라 다리규모, 축조방법, 석재색깔, 재질까지도 유사한 춘양교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함.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얽힌 유교(楡橋)의 흔적도 월정교 19m하류에 보존되어 있고 월정교는
신라의 문화수준과 교량의 축조기술, 의장, 교통로 등 신라왕경을 연구하는데 중요자료가 되고 있음.
통일신라의 문화적 품격을 느낄수 있는, "남천위에 세워진 누각다리" 월정교는 주야로 단청누교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는데 2016년 형산강 팔경으로 선정되었고 월정교와 춘양교지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457호임.
1)월정교 전경
2)천관사지로 가는 산책로
2.천관사지(天官寺址)
도당산 서쪽기슭 논한가운데 있는 절터로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으로 절터에는 석재와 기와조각들이 흩어져있고 팔각의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있음.
고려중기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천관사에 관한 설화가 전하는데, 청년시절 김유신은 기생 천관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가,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는데 어느날 김유신의 말이 술에 취한
그를 천관의 집앞으로 데려가자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치니 이를 슬퍼한 천관이 목숨
을 끊었고 후에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짓고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었다고 함.
창건이후 절의 역사는 알수 없으나 "동경잡기"에 보면 고려중기 이공승이 천관사를 지나면서 지은 시가 전함.
2000년부터 여러차례 주변 발굴조사를 통하여 천관사 건물터, 탑터, 우물 등을 확인하였고 남아있는 탑의 몸돌
과 바닥돌 부재를 참고하여 4각형의 바닥돌위에 팔각형의 몸돌을 얹은 3층석탑 1기를 복원하였는데 이 탑은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연꽃모양으로 된 점이 독특함.
1)발굴된 석재들
2)석탑
석탑지는 8매의 지대석위에 갑석이 얹힌 상태로 탑의 하층기단이 완전하게 확인되며 갑석 상면에는 각형의
2단 탑신받침이 평면 팔각으로 각출되어 있는데, 받침의 형태로 보아 1층탑신은 팔각이고 탑의 전체형태는
4각기단에 8각탑이 올라가는 2형탑임을 알수 있으며 옥개석은 1매도 발견되지 않았고 상륜부의 보륜으로
추정되는 석물1매가 건물지1 북쪽의 후대 남북배수로에서 출토된 바 형태는 납작한 반구형을 띄며 귀꽃이
있고 배면에도 꽃잎이 조각되어 있음.
3)석등지
건물지1의 기단남쪽 3.9m거리에서 석등 하대석이 확인되었으며 남쪽6.5m지점에서 상대석이 엎어진 채 노출
되어 남북 중심축은 건물지1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약50Cm 벗어나 있고 하대석은 방형 지대석위에 원형의
목련이 앉은 상태로 우주석을 결구하기 위한 원형홈이 형성되어 있으며 상대석에도 원형홈이 있음.
하대석에 각출된 간주석받침은 평면형태가 원형이지만 상대석하부에 각출된 받침은 팔각의 형태를 띄며 대석의 크기와 연화문의 형태는 두점이 서로 비슷하지만 받침의 차이로 보아 같은 개체가 아닐수도 있고 연화대석은 한변 80Cm정도의 정방형이며 복련은 직경58Cm, 높이21Cm이고 상대석은 연화문이 두겹 겹쳐진 모양이며
직경52Cm, 높이20Cm임.
4)석조시설
천관사지에서 다소 낮은 지대인 서북 모서리에서 2기가 조사되었는데 남북 6.8m의 거리를 두고 2기가 나란히
동서방향으로 조성되었으며 남쪽에 위치한 것이 석조시설1, 북쪽에 위치한 것이 석조시설2로 명명됨.
석조시설1은 동서2.9m, 남북1m, 깊이60Cm크기의 좁은 장방형이며 20~40Cm크기의 냇돌과 깬돌을 이용해
축조하였고, 석조시설2sms 동서3m, 남북60Cm의 아주 좁은 장방형이며 20~40Cm크기의 냇돌과 깬돌을 이용해 축조하였음.
5)우물지
노출당시 30~40Cm크기의 냇돌과 산돌로 채워져 있었으며 크기는 내부직경90Cm, 깊이4.2m정도이고, 장축
2.6m, 단축2.1m의 타원형으로 굴광한 후 40~60Cm크기의 냇돌을 장방향으로 수평을 맞추어 기초를 한 다음
그 위에 10~20Cm크기의 냇돌을 평면원형, 단면수직으로 정연하게 쌓아 올렸음.
우물의 내부양상은 깊이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상부 약2m는 잡석과 부식토로 메워진 상태이며, 그아래 1m
정도는 잡석과 소량의 토기편, 어골문 평기와편 및 회갈색계통의 무문,선문 암기와편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아래에서는 회청색 및 회흑색계통의 암기와편과 소형 철도자 등이 출토되었으며 바닥의 흑색 점토층에서는
개의 머리뼈와 말,새 등의 동물뼈가 출토됨.
6)건물지1
정면3칸, 측면3칸의 적심건물지로 동서 도리칸은 3.55m, 남북 보칸은 3.3m로 거의 같은 간격을 이루며, 동서
남북 기단석열간 거리는 동서10.7m, 남북10.5m로 거의 장방형인데, 건물기단은 적심중앙에서 약 110Cm간격을 두고 20~30Cm크기 자연석의 윗면을 가지런하게 맞추어 쌓고 그위에 가공된 장대석을 얹은 가구식 기단의
형태를 취하며, 건물의 서편과 넘편에서 수막새5점, 암막새1점이 기단열하부 구지표층에서 충토되었으며 이외 복판연화문 수막새 등의 와전류와 병,접시,시루,등잔,벼루 등의 토제품이 출토되었음.
7)건물지2
건물지1의 북쪽 약 14m거리에 위치하는 적심건물지로 정면5칸, 측면3칸, 동서18m, 남북13m가 남아있음.
천관사지에서 조사된 건물지중 규모가 가장 큰데 남편 도리칸의 주칸거리는 등간격을 이루며 측면의 남북
주칸거리는 어칸5.7m, 양 협칸2.2m로 어칸이 2배이상 크며, 건물의 기단은 도리칸의 북서편에 최하단 기단
석열이 일부 남아있고 건물지 동면의 기단 중심부에는 10Cm크기의 냇돌을 조밀하게 쌓은 동서2m, 남북1.5m
크기의 방형적석이 위치함.
8)건물지3
건물지2의 북동쪽 약 14m거리에 위치하며 북쪽에는 선대의 건물지 4가 중복되었고 남서쪽 외곽에는 후대의
건물지5가 인접해 있으며, 동서4칸과 남북3칸이 남아있고 전체규모는 동서14.4m, 남북8.3m정도이며 적심은
내진주에 해당하는 부분이 유실된 곳이 있고 잔존하는 경우에도 1~2단만이 남아있으며 기단석열도 확인되지
않았고 지형 등으로 보아 동서 양방향으로 확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건물지의 북편에는 동서방향의 적심중심과 1.6m의 거리를 두고 동서배수로가 위치하는데 거리상으로 보아
배수로의 남편 석축이 건물지의 기단역할도 햇던 것으로 보임.
9)건물지6
사역의 서편경계인 남북축대와 남북담장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는 정면3칸, 측면2칸의 남북방향 서향건물지
로써, 동쪽 약 9m거리에 탑지가, 그 6.3m거리에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1이 일직선상에 위치하는데 건물의
주칸거리는 도리칸의 어칸이 3m, 양 협칸은 2.5m이고 측면은 2.1m의 등간격임.
적심은 직경90~100Cm크기의 원형으로 굴광한 후 20Cm정도크기의 산돌과 냇돌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고 도리칸의 적심에서 서편으로 약 60Cm거리에 건물의 기단으로 추정되는 남북 석축열이 2단정도 남아있고, 여기에 접한 서쪽에는 동서방향 장대석 3매가 일정거리를 두고 위치하는데 건물지6는 천관사지의 문지이며, 이
장대석은 건물지6를 진.출입하는 계단시설로 추정됨.
10)오릉가는 산책로
3.오릉(五陵) : 사적제172호
신라초기 박씨왕들의 무덤으로 시조인 박혁거세왕(BC57~AD4)과 그의 부인 알영왕후(BC69~AD4),제2대
남해왕(4~24), 제3대 유리왕(24~57), 제5대 파사왕(80~112)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네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내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함.
시조왕은 기원전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기원전32년에 금성에 궁궐을 지었고, 남해왕은
서기8년 탈해가 뛰어난 인물이란 말을 듣고 불러 사위로 삼고 서기10년 대보의 벼슬을 주고 나라의 일을
맡겼고, 유리왕9년(32)에 6촌을 6부로 고치고 이들에게 이,최,손,정,배,설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을 마련했고
파사왕은 가야와 백제에 대한 방어체제를 정비하면서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해 신라의 영토를 확장했음.
다섯 무덤가운데 서쪽무덤이 가장 큰데 직경이 약 33m, 높이가 약 7m이고 이무덤 동쪽에는 최근에 만든 상석,
표석과 진입부가 있고 진입부에는 1자형 제각이 있으며 남쪽 무덤은 봉분 2개가 이어져 있고 무덤의 외형으로
보아 가까운 대릉원일대의 고분처럼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있으며 능원안에는 박혁거세왕을 제향하는
숭덕전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고 동쪽에는 알영왕후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알영정이 있음.
1)오릉의 정문
2)숭덕전(崇德殿)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4호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조선 세종11년(1429)에 지었으나 임진왜란때 불탔고, 선조34년(1601)과 광해군10년(1618)에 다시 지었으며 숙종30년(1704)에 고쳐지었고 경종3년(1723)에 숭덕전
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영조11년(1735)에 고친 것이며 홍살문안쪽으로 영숭문과 숙경문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고 앞면3칸에 측면2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왼쪽에 상현재, 오른쪽에 동재가 있으며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뒤쪽에는 알영왕후의 탄생설화가 있는 알영정이 있음.
(숭덕전입구는 문이 잠겨져 있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고 입구 있는 숭성각 모습)
3)알영정(閼英井)과 탄강유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로 옛문헌에는 알영정이 경주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으며 우물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고 함.
알영은 자라면서 빼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추었는데 시조왕께서 소문을 듣고 왕비로 맞아 들였으며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이성(二聖)이라 불렀다고 함.
4)오릉의 전경
5)오릉앞쪽에 위치한 숭의문과 제각(祭閣)
4.나정(羅井) : 경북 경주시 탑동700-1(사적제245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처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날 진한6촌의 하나인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이 양산밑 나정 우물옆에 있는 숲사이를 바라보니 하늘로부터
이상한 빛이 드리웠고 그 빛속에 흰말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 그 알을 이상히 여겨 깨어보니 .......... 이에 6촌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하였던 까닭에 그를 높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나정은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소나무숲속에 시조유허비와 1.3n크기의 방형초석
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2002~2005년 4차레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타원형구조의 수혈유구, 구상유구, 목책열
등 일련의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나정에 대한 보다더 확실한 증거유물을 찾기 위하여 지금도 발굴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방문당시에도 사방으로 가림막이 세워져 있어서 내부구경은 할수 없었고 가림막에 그동안 발굴작업에 대한 경과와 상세설명이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었음)
1)나정의 전경
2)나정발굴터 모습
3)나정발굴경과 안내문(총10여개중 일부임)
4)일성왕릉으로 가는 산책로(요즘 한창인 벚꽃가로풍경)
5)일성왕릉 진입산책로(보광사란 절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음)
5.일성왕릉(逸聖王陵) : 사적제173호
신라제7대 일성왕(134~154)은 박씨이고 이름은 일성,왕호는 이사금으로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음.
일성왕은 재위기간에 정사당을 설치하여 대신들과 함께 중요한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경작지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음(능앞에는 1871년에 세운 표석이 있음)
1)일성왕릉의 전경
2)포석정가는 산책로
6.포석정(鮑石亭) : 사적제1호
신라왕실의 별궁으로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만 남아 있는데 길이는 약
22m이고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유상곡수연을 베풀어 신하들과 더불어 수로에 잔을 띄우며 시를 읊고 노님.
신라제49대 헌강왕이 남산의 신이 추는 춤을 따라 추면서 어무산신무라는 신라춤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장소
이며 신라제55대왕인 경애왕이 927년 후백제 견훤군대의 습격을 받아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함.
1999년엔 정비를 목적으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포석정의 실체를 확인할수 있는 중요한 유물인 "포석"명기와
가 출토된 바 있음.
1)포석정의 전경
2)포석정의 시작부분
7.지마왕릉(祗摩王陵) : 사적제221호
신라제6대왕(112~134)으로 파사왕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으며 지마왕의 재위기간에 신라는 백제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고 왜인들이 동쪽변경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으며 북쪽에서 말갈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음.
무덤은 포석정에서 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남산의 서쪽자락에 있고 왕릉중에는 작은 편에 속하는데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음.
1)지마왕릉의 전경
8.삼릉(三陵) : 사적제219호
신라제8대 아달라왕(154~184), 제53대 신덕왕(912~917), 제54대 경명왕(917~924)의 능이 모여있다고 하여
삼릉으로 불리며 모두 박씨왕들인데, 아달라왕은 도로를 개통하는 등의 내치에 힘썼고 173년에 왜와 사신을
교환하였고 신덕왕과 경명왕대의 신라는 경주를 다스리는데 그쳤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가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시기였음.
중앙에 있는 신덕왕릉은 1963년 도굴을 당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되었고 벽면은 병풍처럼 색이 칠해
져 있었고 서편의 경명왕릉은 경명왕이 세상을 뜨자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한 후 다른 곳으로 산골했다고 함.
1)삼릉옆에 위치한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진입로
2)선덕여왕촬영지 안내판
3)삼릉솔숲
경주남산 서쪽에 위치한 소나무숲으로 삼릉이 위치해 있으며 능주변으로 아름드리 도래솔(三陵枉松)이 군무
하듯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2016년 형산강팔경에 선정됨.
4)삼릉의 전경
9.경애왕릉(景哀王陵) : 사적제222호
신라제55대 경애왕(924~927)은 신덕왕의 둘째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으로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고 927년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연회를 베풀던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남산 해목령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함.
내부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것으로 추정함.
1)경애왕릉으로 가는 진입산책로
2)경애왕릉의 전경
|
첫댓글 역시경주